시칠리아 기행 15 – 메시나 해협, 울돌목, 그리고 로렐라이 언덕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노래 유혹을 이겨내고 건넌 메시나에서
15일(수) 우리는 섬의 북단 중간쯤에 있는 체팔루(Cefalu)에 갔습니다. 여기 성당에서도 몽레알레 성당에서 본 자비로운 예수의 상과 비슷한 예수님을 친견했습니다. 골목에는 화랑도 많아 몇 군데 둘러보니 ‘수태고지 마리아’가 담긴 화집도 보이군요. 사지는 않았습니다. 체팔루 언덕에서 본 지중해는 거리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군요. 수평선에서는 진한 남빛인데 해변으로 오면서 연한 푸른색으로 바뀌는군요. 해가 넘어가면서는 점점 진한 남빛으로, 그리곤 어둠과 함께 바다가 온통 검은색으로 변해 갑니다. 잠간 묵념에 잠겼습니다.
로마인들의 빨래터로 안내하군요. 빨래터라면 우리의 시골 널찍한 자연석 바위가 있는 개천과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집안에서 돌을 다듬어 칸을 만들어 여럿이 모여 빨래하게 만들었군요. 체팔루 강물을 끌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면서 상대방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한 공동 빨래터입니다. 상당히 근대적입니다.(사진 1, 로마시대 빨래터) 아낙네들이 늘어앉아 수다를 떨면서 시간보내기도 좋은 장소군요. 물이 흐르는 걸 보니 한 가지가 연상됩니다. 로마의 수세식 화장실입니다. 최근 한 신문에서 1400년 전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는 기사와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길이는 겨우 9m 정도이고 팔수록 악취가 풍겼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 위에서 일을 본 게 씻겨 내려가도록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물을 흘려보내서 씻어 내렸다는 겁니다. 로마시대 수세실 화장실은 냇물이 흐르는 길가에 사람들이 엉덩이를 길 쪽으로 보고 일을 본 다음 수세미를 막대에 묶어 뒤처리를 하는 것이라 합니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엉덩이는 보이지만 얼굴은 보이게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현명한 방식이죠?
오늘 포에니 해전이 일어난 밀라에와 메시나 해협으로 가는 날이군요. 밀라에는 오늘날 Millazo입니다. 두 마을이 상당이 가깝군요. 밀라에가 해협에 가까운 전략적 요지였다는 말일 겁니다. 메시나와 밀라조라는 표지판이 보이기에 비속에서 사진 한 장 남겼습니다.(사진 2) 체팔루에서 동쪽 바다를 보면서 로마인들이 이 바다 전투에서 이기고 시칠리아를 차지하면서 ‘큰 바다(Great Sea)’였던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Mare Nostrum)’이라 불렀다던가요? 물론 밀라에 해전 이후 해전이 몇 번 더 있었지만 결국 제해권은 로마가 차지했지요. 그런데 ‘우리의 바다’라는 말은 그리스인들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대영제국 당시 영국이 대서양을 ‘우리의 바다’로 부르지 않고 지금 미국이 태평양을 ‘우리의 바다’라고 부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영국은 영국섬 위를 북해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영국섬의 북쪽이 아니라 놀웨이 쪽인 유럽대륙의 북쪽 바다라는 말입니다. 일본이 동해를 ‘일본해’라고 한 것은 ‘우리의 바다’로 부른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역사/국제정치학자들은 2차 대전 이후 태평양과 인도양이 ‘미국의 호수’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희망봉에서 미주 해안까지 미국의 해군에 도전할 세력이 없다는 말인데 어디까지나 상징적이며 정치적 표현입니다.
캐롤라인은 버스를 해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세우고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라 하네요. 가랑비가 내리니 캐롤라인은 ‘피아노’를 연발합니다. 음악에서는 ‘피아노’가 ‘부드럽게’가 아닌가요? 그런데 노인들을 상대로는 ‘천천히’로 들렸습니다. 길이 미끄러우니 천천히 내려오고 천천히 화장실을 다녀오라는 말이죠. 버스 안에서부터 비속의 메시나 해협을 열심히 찍었는데 역시 이곳에 내려 주변을 보면서 찍은 사진들이 좋습니다. 해협의 좁은 곳은 3km정도라는데 남쪽에서 북쪽 이탈리아 본토를 보니 손에 잡힐 듯 하군요.(사진 3, 메시나 해협)
메시나 지역도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720년에 식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건 그리스인들이 당시 해상 요지를 모두 장악했다는 말입니다.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 후 세계의 주요 수로를 장악하여 해상제국을 건설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캘로라인은 빙하시대에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대륙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빙하기가 끝나면서 이탈리아 반도 끝 장화의 부리모양인 칼라브리아 지역과 3-4마일 떨어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한반도와 중국동부, 대만은 빙하기에 육지로 연결되었고 그래서 초기 한반도 이주민은 이 육교를 이용해서 왔다는 것, 그리고 한민족의 초기 문화유산이 황해바다 밑에 묻혀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칠리아는 빙하가 녹으면서 본토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60만 년 전 격렬한 화산활동으로 약 6km 정로 분리되었다는 게 정설입니다. 그 뒤 빙하기에 반되와 연결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토와의 거리가 가장 짧은 곳, 다른 표현으로는 해협 폭이 가장 좁은 곳은 3.1km, 메시나 시가 있는 곳은 5.1km라고 하네요. 지각활동을 지금도 계속되어 아프리카 대륙이 지중해 밑에서 북으로 치고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반도가 원래는 아래로 축 처져 있었으나 점점 오른쪽으로 휘어져 언젠가는 아드리아 해가 없어지고 이탈리아 반도가 보스니아, 알바니아 등과 붙을는지 모릅니다.
메세나 해협이 3 내지 6km라 물살이 세다고 합니다. 충무공이 명량대첩을 이룬 울돌목은 폭이 얼마나 될까요? 보통 1.5km이고 가장 좁은 곳은 300m라고 합니다. 진도 본섬의 면적이 420㎢이니 시칠리아가 60배 정도 큽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해나 남해는 수만 년 아니 수십만 년을 두고 형성된 리아시스식 침강해안인데 비해 메시나 해협은 화산활동으로 단번에 생겼을 겁니다. 울돌목, 명량(鳴梁)이란 바다가 우는 소리를 내며 조류가 급하게 흐른다는 말입니다. 메시나 해협도 이에 못지않은 듯합니다. 특히 해협의 북쪽은 빠른 유속으로 회오리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루에 4번 조류의 방향이 바뀐다는 명량과는 달리 조류의 변화는 없는 것 같군요. 하기야 폭이 3-6km인 바다에 조류의 흐름이 바뀐다면 큰 일이 나겠지요. 이 정도 폭이라면 조류의 흐름은 바다 밑 깊숙한 곳에서나 감지되고 표면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기 마련입니다. (사진 4, 5, 울돌목의 거센 물결과 오늘날 진도대교, 전국을 샅샅이 누비는 여행 작가 문창재 형의 사진입니다. 감사!)
메시나 해협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오디세우스’와 스킬라-차리브디스(Scylla and Charybdis) 혹은 사이렌 이야기일 겁니다. 명량해전이 일어난 신안군 일대 수로에서는 수많은 무역선에 침몰하여 도자기 등 많은 유물들을 묻혔지요. 이들 해협이 당시의 항해술로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꼭 지나야 할 길목이라면 이같은 사고를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왜 일본군이 진도 밖을 돌아 북진하여 서울로 가지 않고 울돌목이란 험한 해협을 통과하려 했을까요? 당시 항해술로서는 진도 섬 외곽을 돌아가는 길은 더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이 충무공이 지키고 있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 견내량을 꼭 지나가려 한 것도 거제도 바깥 바다를 두려워해서입니다.
메시나 해협도 비슷한 조건일 겁니다. 좁은 해협의 입구는 바람이 세찰 것이고 소용돌이가 일어나겠지요. 특히 호메로스나 그 이전 신화시대에 거리를 단축할 수 있는 메시나 해협을 두고 시칠리아를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요. 오디세우스도 신들에게 밉보여 방황하다가 그리스 반도 서쪽에 있는 고향 이타카로 가기 위해서는 메시나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좁은 해협을 지나면 굉음 같은 파도소리가 들리고 소용돌이에 배가 침몰되죠. 울음소리를 내는 게 해협의 입구 동굴에 산다는 6개의 머리를 가진 스킬라라는 거대한 괴물이고 엄청난 소용돌이는 차리브디스라는 바다괴물입니다. 오늘날 메세나 해협의 북쪽 칼라브리아 해안에는 스킬라라는 이름을 가진 바위가 있습니다. 스킬라는 요상스러운 머리로 지나가는 배 선원들을 낚아 채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소용돌이 차리브디스는 해협에서 스킬라의 반대편에 살며 배를 통째로 삼킨답니다. 사이렌은 스킬라와 차리브디스 사이에 있는 섬에 사는데 새의 몸과 여인의 얼굴을 하여 아름다운 노래와 현이 7개인 악기 라이어(lyre)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물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사이렌이 사는 ‘꽃이 만발한 섬’의 초원에는 가엾은 선원들의 시신들이 층을 이루면서 쌓여있었다고 <오디세우스>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독일에는 라인강 언덕에 비슷한 바위가 있지요. 로렐라이(Die Loreley) 전설이 얽힌 곳입니다. 고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하이네(Heinlich Heine)의 시가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 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
구름 걷힌 하늘아래 고요한 라인강
저녁 빛이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저편언덕 바위 위에 어여쁜 그 아씨
황금빛이 빛나는 옷 보기에도 황홀해
고운 머리 빗으면서 부르는 그 노래
마음 끄는 이상한 힘 노래에 흐른다.
오가는 뱃사공이 정신을 잃고서
그 색시만 바라보다 바위에 부딪쳐서
배와 함께 뱃사공은 서러운 혼이 되었네
아 이상하게도 마음 끌리는 로렐라이 노래
하이네의 시는 제법 길지만 멜로디에 맞추어 약간 손질한 겁니다. 나치시대 하이네는 멘델세존 등과 함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시가 박해를 받았지만 이상하게도 일본에서는 살아남은 듯 해방 후 우리들이 즐겨 부른 노래 중 하나가 되었지요. 하이네의 시도 아릿다운 로렐라이가 라인강 절벽의 바위위에 앉아 황금색 머리를 빗으면서 노래를 부르면 지나가던 배들이 노래와 이 여인의 아름다음에 빠져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라아스>는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주인공이고 오디세우스는 앞장서서 칼을 휘두르는 전사라기보다는 트로이 전쟁을 기획하고 토로이 목마를 만드는 등 책사로서 돋보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귀국길에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지중해를 떠돌게 되죠. 이게 <오디세우스> 이야기입니다. 메세나 해협을 지날 때 소용돌이에 빠져 배를 잃고 모두 죽기 보다는 스킬라 곁을 지나 선원 6명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죠. 그리곤 사이렌 섬을 지날 때 부하들은 전부 귀를 밀랍으로 막아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게 하고 자신은 돛에 스스로 몸을 묶어 사이렌의 유혹을 뿌리치고 무사히 귀환합니다. 오디세우스가 왜 자신은 귀를 막지 않고 사이렌의 노래를 들었을까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이 부분에서서 나는 이상한 매력을 느낍니다. 인간이 신기한 것을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받으며 물리치지 못하죠. 이로 인해 심적 갈등을 겪지만 결국 이 난관을 헤쳐나갑니다. 오디세우스를 통해 뛰어난 인간의 지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오디세우스>의 중간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습니다.
메세나 마을에는 내렸으나 해변으로 가지 못해 실제로 차리브디스의 소용돌이 소리나 사이렌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날씨가 흐리고 물결이 높으니 이들의 ‘노래’나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겠는데.... 그런데 뭐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왜 한국에서는 명량의 물결이 ‘운다’, 새가 ‘운다’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메시나에서 사이렌이 ‘노래한다’, 물결이 ‘노래한다’고 하는가요? 사이렌은 자신의 노래로 성난 파도조차 가라앉힌다고 까지 했는데. 비극성으로 향한 우리의 문화적 쏠림현상인가요? (2019.7.4.)
사진 1, 체팔루에 있는 로마시대 빨래터. 개울가 넓적한 바위에서 빨래하던 우리의 할머니들에 비해 상당히 근대적입니다.
사진 2, 밀라조와 메시나의 표지판
사진 3, 메시나 시를 배경으로 본 메시나 해협
사진 4, 5, 울돌목의 거센 파도와 오늘날의 진도대교(사진, 문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