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9절을 보면 이 비유의 주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입니다. 그리고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1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하지 않았습니다”의 기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12절로서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나는 이것까지 했습니다”의 기도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주제에서 밝힌 것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속한 대표적인 것으로 바리새인과 그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것까지 했습니다”라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이면서, 세리와의 비교를 통해 상대방을 깔보는, 멸시입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13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헬라어 “힐라스코마이”로서, 성경에서 여기하고 히브리서 2:17절 단 두 군데에만 쓰이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2:17절을 보면 “속량하다”로 이 단어를 번역하였습니다. “힐라스코마이”명사형이 “힐라스모스”로서, 요한일서 2:2, 요한일서 4:10절을 보면 같이 “화목제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어대로 직역하면 “저는 죄인입니다. 속량해 주세요.”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달리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남과 비교하는 가운데 깔보거나 멸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을 속량하여 주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세리입니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과연 무엇이 의로운 것입니까? 본문은 두 명의 대조를 통하여 의로움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남을 멸시하지 않는 기도를 하는 것과 자신이 죄인인 것과 속량 받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특별히 예수님은 긍휼의 목자로 소개됩니다(마태복음 9:35~36, 14:14, 20:34, 마가복음 1:41, 6:34, 8:2, 9:22, 누가복음 7:13). 마태복음 9:36절을 보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긍휼히 여기셨다”라는 말은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로서 명사 “스플랑크논”에서 나왔습니다. “스플랑크논”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내부 장기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애가 타는 아픔” 혹은 “애가 끊어지는 아픔”으로서 마치 내 창자가 파열되는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헬라어 명사 “스플랑크논”은 구약성경 히브리어의 “라하밈”과도 연결됩니다. 이는 어머니의 자궁을 가리키는 말 “레헴”에서 나온 것으로서 모성애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자식의 아픔이 곧 어머니의 아픔으로 그대로 느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출애굽기 34: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 하나님을 향한 간구는 하나님의 긍휼에 기초합니다. 나의 의나 자랑에 있지 않습니다. 타인을 향한 바램과 자세도 긍휼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엔도슈사꼬의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엔도슈사꼬는 일본 소설가입니다. 몇 안 되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바오르라는 세례명을 가진 크리스천입니다. 기독교의 사고를 하고, 많은 소설을 썼습니다.
내용을 보면 예수회의 신부로 신학적 재능이 뛰어나고 인자한 성품으로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았던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 선교지에서 고문에 못 이겨서 배교를 했다는 보고가 교황청에 들어옵니다. 이에 페레이라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제자 가르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들이 직접 스승의 배교를 확인하겠다고 일본 선교를 자청하여 가게 됩니다.
그들은 일본에 잠입하게 되고, 그들을 인도할 현지 일본인 키치지로를 만납니다. 처음에 안내를 받아 간 곳에서는 환영을 받아서, 스승이 이런 곳에서 배교를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의심하기도 했지만, 곧 쫓기는 신세가 된 그들은 일본 막부에 의해서 처형당하는 신자들을 보게 되었고, 이를 참지 못한 가르페 신부는 그것을 막기 위해 나섰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기적과 승리를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끝내 로드리고 신부는 키치지로의 밀고로 체포되고 맙니다. 그런데 체포된 그곳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그렇게도 존경하고 신뢰했던, 그래서 절대로 배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었던 스승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스승은 로드리고 신부에게 자신과 같이 배교하기를 원합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스승의 배교 요청을 거절하며 경멸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배교의 요청을 거부한 로드리고 신부는 그런 요청 대신에 옆에서 들리는 코 고는 소리를 없애 달라고 말합니다. 그때 스승은 그것은 코 고는 소리가 아니라 신자들이 고문받아 죽어가는 신음이라고 말합니다. 막부가 바닷가에 세워진 십자가에 신자들을 달아놓고 밀물이 들어오면 물에 잠기게 하면서 파도가 칠 때마다 물에 잠겼다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오는, 그래서 끝내는 익사해서 죽게 되는 잔인한 고문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말하면서, 그 신자들은 이미 배교를 했지만, 배교를 하지 않은 로드리고 신부 당신 때문에 한 명 한 명씩 그렇게 비참하게 고문을 받아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때 로드리고 신부는 심각한 고뇌에 빠집니다. “내가 신앙을 지키면 누군가는 비참하고 잔인하게 죽어간다?”그런 고민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야 하는지, 그런데 신앙을 지키면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죽어 나갈 텐데, 그대로 놔두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배교를 해서라도 자기 때문에 희생하고 죽어가는 그 신자들을 구해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토록 자신이 사랑했던 페레이라 신부도 같은 이유로 배교했음을 알게 되고, 마침내 그 또한 소설 후미에 예수님의 성화를 밟기로 합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동판에 새겨진 예수님의 성화를 밝습니다. 발에 큰 통증이 찾아오고 그의 마음도 아파집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렇게 침묵하였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밝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밝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