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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일 高昌一 (1893 ~ 미상)】 "국민의회 대표로 파리강화회의 파견 "
893년 4월 6일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경원면(慶源面) 성내동(城內洞)에서 태어났다.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러시아 이름은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고가이(Nikolai Kirilovich Kogai)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동양학원(훗날 극동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병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 장교(將校)로 종군하였다고 한다. 1918년 6월 13~23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에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대회에서 구성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의 3인 검사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대회 후 체코군의 봉기와 일·미·영·불 등 연합군이 무력 개입하고 시베리아와 러시아 원동 지역 각지에 백위파 정권이 들어서자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상설위원회(한족상설의회) 체제로 운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개최로 1918년 말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도 자금 모집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가 대두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민회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의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논의가 집중되었다. 당초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러시아 한인 사회의 지도자급 인물인 이동휘(李東輝)·최재형(崔在亨)·문창범(文昌範)이 검토되었다.
1919년 1월 27일 개최된 상설위원회(문창범·최재형·한명세·김안드레이 이바노비치·김야곱 안드레예비치·엄주필)에서 윤해(尹海)와 함께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선정되었다. 이들의 파견 비용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문창범 등이 맹렬한 모금 활동을 펼치고 김치보(金致甫)·이형욱(李亨郁)·오성문(吳成文)·김종철(金鍾喆)·김신일(金信一) 여사 등 독지가들의 기부하여 마련되었다.
제2회 특별전로 한족 대표회의 회의록 [판형2] |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선정된 두 사람은 2월 5일 ‘한인총대표’라는 러시아어와 불어로 된 증명서를 소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였다. 3·1운동 후 전로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된 후에는 대한국민의회 대표로 활동하였다.
당시 시베리아 내전으로 러시아 적·백군이 전투하고 있는 전선을 통과하지 못하여 북빙양(北氷洋)을 지나 아르한겔스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1개월 만에 국민의회로 선급(繕給) 여권이 연합국으로 인준되어, 노르웨이와 영국을 거쳐 9월 26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파리강화회의가 종결되고 3개월이 지난 후였다. 이들은 국민의회로부터 “평화회의, 국제연맹, 소수민족회의에 참여하되 각처로(부터) 온 국민대표와 합동 동작하란” 내훈(內訓)을 받아 왔기 때문에, 파리위원부와 합동세무(合同勢務)할 것을 선언하였다. 파리위원부는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각처에 전보하였다. 두 사람은 대통령에게 선서(宣誓) 전보를 발송하고, 임시정부와 국민의회가 속히 합동할 것을 희망한다는 취지의 전보를 수차례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로 발송하였다. 그리고 가지고 온 자금 총 8,500프랑을 파리위원부에 넘겨주었다. 당시 파리위원부는 4만여 프랑의 계좌 잔고가 있어 총 5만 프랑이 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와 국민의회는 ‘승인개조분쟁’으로 통합에 실패하였다.
윤해 고창일의 파리행을 주의하라는 일제측의 문서(1919.3.5) [판형2] |
1920년 1월 4일 국제평화촉진회가 주관하고 재불(在佛) 중국사회단체연합회가 후원한 환영회에 윤해와 함께 참석하였다. 1920년 1월 21일 파리를 출발하여 선편으로 인도양을 거쳐 3월 중순 무렵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윤해는 1개월을 더 머무른 후에 뒤따라 상하이로 갔다. 대한국민의회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사절단은 후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압력을 받은 원동공화국 수반 크라스노쇼코프(Krasnoshchkov)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1920년 5월경 러시아로 들어가 이르쿠츠크 등지에서 고려공산당 관련 활동을 하다가 1921년 봄 러시아 시베리아를 거쳐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되어 있던 한형권(韓馨權)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1921년 중반 고려공산당의 상해파 인사들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에 의해서 탄압받고 체포당하는 상황에서 국민의회 계열 인물로서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 측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한인사회당의 이동휘가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하였던 한형권이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거리를 두고 국민의회-이르쿠츠크파 연합 세력으로 넘어가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된다.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집행위원회(또는 소비에트정부 외무인민위원부)로부터 군사와 정치 분야의 정보 임무를 위임받았는데, 대소 외교에서 나름대로 신임을 얻게 되었음을 뜻한다.
한형권의 비서로 자임하면서 1921년 5월 한형권과 함께 소비에트 정부에 1920년 한국 혁명 운동 지원금 200만 루블(미화 금 100만 달러, 멕시코달러 200만 달러) 가운데 이미 지급한 40만 루블을 제외한 나머지 160만 루블 지원을 요청하였다. 4개월 후인 9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20만 달러를 수령하였다. 이 자금은 1920년 가을 한인사회당 대표 박진순(朴鎭淳)과 한형권이 소비에트 정부 외무인민위원부에 맡겨 놓았던 것이다.
1921년 11월 말 윤해, 한형권과 함께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수령한 자금 가운데 일부(3만 루블)를 국민대표회의 개최 비용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1922년 8월 강석훈(姜錫勳) 등 10인이 맹호단(猛虎團)을 조직하자 한형권·윤해·남형우 등과 함께 이를 옹호하였다. 맹호단의 활동 목표는 국민대표회의를 조속히 개최하려는 데 있었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 입장을 취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 6월에 작성한 『국외에 있는 용의조선인명부(容疑朝鮮人名簿)』에 ‘고창일(高昌一)이라는 인물이 1933년 8월 초순 당시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위원회의 조직부장(중국공산당인 듯)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동명이인으로 추정한다.
광복 후인 1945년 9월 7일 자로 발표된, 박헌영·여운형 등 좌파 세력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항하여 648명의 우파 인사가 충칭 임시정부 지원을 선서하고자 발기한 ‘국민대회 준비회’에 서명하였다. 이후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회(南朝鮮過渡立法議會) 의원을 역임하고, 초대 외무부 차관(1948), 외무부장관서리(1949)로 활약하면서 한국의 UN 가입 신청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893년 4월 6일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경원면(慶源面) 성내동(城內洞)에서 태어났다.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러시아 이름은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고가이(Nikolai Kirilovich Kogai)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동양학원(훗날 극동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병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 장교(將校)로 종군하였다고 한다. 1918년 6월 13~23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에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대회에서 구성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의 3인 검사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대회 후 체코군의 봉기와 일·미·영·불 등 연합군이 무력 개입하고 시베리아와 러시아 원동 지역 각지에 백위파 정권이 들어서자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상설위원회(한족상설의회) 체제로 운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개최로 1918년 말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도 자금 모집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가 대두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민회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의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논의가 집중되었다. 당초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러시아 한인 사회의 지도자급 인물인 이동휘(李東輝)·최재형(崔在亨)·문창범(文昌範)이 검토되었다.
1919년 1월 27일 개최된 상설위원회(문창범·최재형·한명세·김안드레이 이바노비치·김야곱 안드레예비치·엄주필)에서 윤해(尹海)와 함께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선정되었다. 이들의 파견 비용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문창범 등이 맹렬한 모금 활동을 펼치고 김치보(金致甫)·이형욱(李亨郁)·오성문(吳成文)·김종철(金鍾喆)·김신일(金信一) 여사 등 독지가들의 기부하여 마련되었다.
제2회 특별전로 한족 대표회의 회의록 [판형2] |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선정된 두 사람은 2월 5일 ‘한인총대표’라는 러시아어와 불어로 된 증명서를 소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였다. 3·1운동 후 전로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된 후에는 대한국민의회 대표로 활동하였다.
당시 시베리아 내전으로 러시아 적·백군이 전투하고 있는 전선을 통과하지 못하여 북빙양(北氷洋)을 지나 아르한겔스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1개월 만에 국민의회로 선급(繕給) 여권이 연합국으로 인준되어, 노르웨이와 영국을 거쳐 9월 26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파리강화회의가 종결되고 3개월이 지난 후였다. 이들은 국민의회로부터 “평화회의, 국제연맹, 소수민족회의에 참여하되 각처로(부터) 온 국민대표와 합동 동작하란” 내훈(內訓)을 받아 왔기 때문에, 파리위원부와 합동세무(合同勢務)할 것을 선언하였다. 파리위원부는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각처에 전보하였다. 두 사람은 대통령에게 선서(宣誓) 전보를 발송하고, 임시정부와 국민의회가 속히 합동할 것을 희망한다는 취지의 전보를 수차례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로 발송하였다. 그리고 가지고 온 자금 총 8,500프랑을 파리위원부에 넘겨주었다. 당시 파리위원부는 4만여 프랑의 계좌 잔고가 있어 총 5만 프랑이 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와 국민의회는 ‘승인개조분쟁’으로 통합에 실패하였다.
윤해 고창일의 파리행을 주의하라는 일제측의 문서(1919.3.5) [판형2] |
1920년 1월 4일 국제평화촉진회가 주관하고 재불(在佛) 중국사회단체연합회가 후원한 환영회에 윤해와 함께 참석하였다. 1920년 1월 21일 파리를 출발하여 선편으로 인도양을 거쳐 3월 중순 무렵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윤해는 1개월을 더 머무른 후에 뒤따라 상하이로 갔다. 대한국민의회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사절단은 후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압력을 받은 원동공화국 수반 크라스노쇼코프(Krasnoshchkov)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1920년 5월경 러시아로 들어가 이르쿠츠크 등지에서 고려공산당 관련 활동을 하다가 1921년 봄 러시아 시베리아를 거쳐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되어 있던 한형권(韓馨權)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1921년 중반 고려공산당의 상해파 인사들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에 의해서 탄압받고 체포당하는 상황에서 국민의회 계열 인물로서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 측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한인사회당의 이동휘가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하였던 한형권이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거리를 두고 국민의회-이르쿠츠크파 연합 세력으로 넘어가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된다.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집행위원회(또는 소비에트정부 외무인민위원부)로부터 군사와 정치 분야의 정보 임무를 위임받았는데, 대소 외교에서 나름대로 신임을 얻게 되었음을 뜻한다.
한형권의 비서로 자임하면서 1921년 5월 한형권과 함께 소비에트 정부에 1920년 한국 혁명 운동 지원금 200만 루블(미화 금 100만 달러, 멕시코달러 200만 달러) 가운데 이미 지급한 40만 루블을 제외한 나머지 160만 루블 지원을 요청하였다. 4개월 후인 9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20만 달러를 수령하였다. 이 자금은 1920년 가을 한인사회당 대표 박진순(朴鎭淳)과 한형권이 소비에트 정부 외무인민위원부에 맡겨 놓았던 것이다.
1921년 11월 말 윤해, 한형권과 함께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수령한 자금 가운데 일부(3만 루블)를 국민대표회의 개최 비용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1922년 8월 강석훈(姜錫勳) 등 10인이 맹호단(猛虎團)을 조직하자 한형권·윤해·남형우 등과 함께 이를 옹호하였다. 맹호단의 활동 목표는 국민대표회의를 조속히 개최하려는 데 있었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 입장을 취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 6월에 작성한 『국외에 있는 용의조선인명부(容疑朝鮮人名簿)』에 ‘고창일(高昌一)이라는 인물이 1933년 8월 초순 당시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위원회의 조직부장(중국공산당인 듯)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동명이인으로 추정한다.
광복 후인 1945년 9월 7일 자로 발표된, 박헌영·여운형 등 좌파 세력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항하여 648명의 우파 인사가 충칭 임시정부 지원을 선서하고자 발기한 ‘국민대회 준비회’에 서명하였다. 이후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회(南朝鮮過渡立法議會) 의원을 역임하고, 초대 외무부 차관(1948), 외무부장관서리(1949)로 활약하면서 한국의 UN 가입 신청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