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청정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Suddhaṭṭhakasutta](*1)
『숫따니빠따』, 제4품 ‘여덟 게송’ 중의 4. 청정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1.[세존] “‘질병이 없는 궁극적인 청정을 나는 본다. 사람들은 청정은 본 것에 따라 오는 것이다’고 이해해서 그것을 최상으로 알고 ‘나는 청정을 보는 자이다’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궁극적인 지혜라고 믿는다.
2. 사람이 본 것에 따라 청정해질 수 있다면, 또한 지식으로 괴로움을 버릴 수 있다면,
집착의 대상이 있는 자라도(*2) 달리(*3) 청정해진다. 보인 것이 그가 말한 대로 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3. 거룩한 님(아라한)은 본 것이나, 들은 것이나, 계행이나 맹세나 인식한 것(*4) 가운데, 청정함이 있다든가 다른 것으로부터 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공덕과 죄악에 대해 더럽혀지지 않고, 얻은 것을 버리고(*5)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짓지 않는다.
4. 동요(*6) 하는 자들은 옛 것을 버리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만, 집착을(*7) 뛰어 넘을 수 없다. 그들은 원숭이가 가지를 놓았다가 붙들어버리듯, 놓았다가도 꽉 붙잡는다.
5. 감각적 지각에 묶여 사람은 스스로 발원하여 높고 낮은 곳으로 간다. 그러나 광대한 지혜를 갖춘 님은 지혜로서 진리를 이해하여 높고 낮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
6. 그는 보거나 듣거나 인식한 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 일체의 것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렇게 보아서 열린 마음(*8)으로 행동하는데, 어찌 이 세상에서 그를 판단할 수(*9) 있겠는가.
7. 그들은 허구를 만들지 않고, 선호하지도 않으며, 궁극적인 청정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결박되어 있는 집착의 굴레를 놓아버리고, 세상에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바라는 바가 없다.
8. 거룩한 님은 경계들을 뛰어넘어, 알고 또한 보아서, 집착하는 일이 없다. 욕망에도 탐착(*10)하지 않고, 욕망을 떠났다는 것에도(*11) 탐착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최상이라 집착할 만한 것은 없다.”
-청정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이 끝났다-
주해(*1) 이것에 대한 한역 경전은 의족경(義足經)의 마갈범지경(摩竭梵志經)이다. 이 경은 과거불인 깟사빠 부처님 시대에 베나레스에 한 부호가 살았는데, 그의 친구인 사냥꾼에게 값비싼 전단향 나무를 선물했다. 그 사냥꾼은 그 부호인 친구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깟사빠 부처님의 탑묘를 예배하고는 가지고 온 전단나무로 탑묘의 황금의 연와 위에 동발모양의 원륜(圓輪)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태어날 때에는 이와 같은 광선이 가슴에서 빛나지이다.’라고 서원했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짠다바(月光)라는 하늘 아들로 지내다가 세존께서 출현하여 사왓티에 계실 때에 라자가하의 바라문 부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배꼽 주위로부터 달 조각 모양의 빛을 반사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가 성장하자 바라문들은 그를 마차에 앉히고 돌아다니며, 그를 친견하는 자는 ‘누구라도 명성과 재산과 하늘나라를 얻는다.’고 주장했다. 전 인도가 동요하고 바라문들은 백금, 천금을 가지고 와서 그를 친견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면서 사왓티에 도착했는데 그러자 짠다바는 마치 샛강이 대해에 들어온 것 같이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저녁 무렵 많은 사람들이 화환과 향 등을 가지고 제따와나로 가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에게 묻자 ‘부처님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도 세존께서 설법하는 장소에 참석하자 짠다바의 가슴의 광채가 사라졌다. 짠다바는 부처님의 위광에 의해서 자신의 광채가 사라진 것을 깨닫고는 ‘수행자 고따마야말로 비할 데 없는 공덕을 쌓은 분으로 신들과 인간의 스승입니다.’라고 고백하고는 그 자리에서 출가했다. 그래서 다섯 피부(머리카락, 몸털, 손발톱, 이빨, 피부)에 대한 명상 수행을 통해서 아라한이 되었다. 그러나 비구들 사이에 그에 대하여 ‘짠다바를 보는 자는 누구라도 눈이라는 감관을 통해 형색을 보는 것인데, 명성이나 재산이나 천국을 얻는 것인가, 혹은 청정을 얻는 것인가?’라는 논의가 벌어졌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
이 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 철학적인 교리를 안다고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 교리들은 자신의 교리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한 스승에서 다른 스승에게로 옮겨 다니며, 결코 조용하며 사려 깊어지는 일이 없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현자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것도 최상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주해(*2) ‘탐욕이 있고, 성냄이 있고, 어리석음이 있고, 자만이 있고, 갈애가 있고, 견해가 있고, 번뇌가 있고, 집착이 있는 것’을 뜻한다.
주해(*3) ‘거룩한 길과는 다른 청정하지 못한 길을 통해서 ’라는 뜻이다.
주해(*4) 시각이나 청각 이외의 다른 감관에 의해 인식된 것을 말한다.
주해(*5) 공덕에 대한 유위적인 조작 등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해(*6) 갈애를 말한다.
주해(*7)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견해, 번뇌, 악행으로 이루어진’ 일곱 가지의 염착(染着)을 말한다.
주해(*8) ‘갈애에 의해 은폐된 것을 열고’라는 뜻이다.
주해(*9) ‘갈애에 의한 분별이나 견해에 의한 분별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주해(*10)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에 탐착하는 것’을 말한다.
주해(*11) 욕망을 떠났다는 것은 ‘미세한 물질적인 세계와 비물질적인 세계에 탐착하는 것’을 말한다.
출처:
https://cafe.daum.net/vipassanacenter/42rb/1078
전재성 역주, 『쿳다까니까야(小部阿含) 숫타니파타』, 한국 빠알리 성전협회, 2004, 402쪽-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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