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의 봄날 1 (범어사)
흥신소 ‘배달 심부름센터’ 부산 지부장 고문도의 책사인 삼봉 주덕팔이 ‘배달’의 회장 최하수의 숨겨진 딸인 최세희를 데리고 ‘드론’ 조종 교육을 시작한 지 2주일 조금 넘었다.
삼봉은 최하수 회장이 문도와 삼봉을 불러 딸 세희를 소개한 날, 그 자리에서 첫눈에 필이 꽂혀버렸다.
이제 갓 스무 살로 발랄한 성격의 세희는 부산 P 여자대학 항공 운항과 2학년이다.
얼굴이 아주 예쁘고 몸매도 날씬해서,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을 때는, 너무나 매력적인 그녀에게 누구라도 한 번쯤 말을 섞어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다.
그런데, 아무 말 없이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우수에 가득 찬 눈으로 빤히 바라볼 때는, 묘하게도 성숙한 여인의 체취가 느껴지는 고혹적인 모습에, 스물네 살인 삼봉의 심장은 박동수가 빨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늘은 실전 예행연습으로 작품 촬영을 할 거죠?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요?”
여느 때처럼 세희의 집 근처 양정역 앞 골목길에 아반떼를 세워놓고 기다리던 삼봉이 잔뜩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삼봉은 원래 지부장 고문도의 투싼 승용차로 함께 출퇴근하고 ‘배달’의 다른 직원들 용으로는 트라제가 네 대 배정되어 있는데, 세희의 드론 조종 연습을 위해 최하수 회장이 특별히 별도의 흰색 아반떼를 한 대 사줬다.
그동안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만나 낙동강 하구에 있는 을숙도 갈대밭에 가서 드론 조종 연습을 했다.
을숙도는 원래 키를 넘는 갈대가 무성해서 드론 조종연습장으로는 적합하지 않은데, 지금은 갈대가 전부 불에 타서 사라지고 휑한 벌판처럼 되어있다.
금년 2월에 세희의 아버지 최하수가 수하인 한충석을 시켜서 칠성파의 경쟁 조직인 하단파의 관할구역 을숙도 갈대밭을 불 질러버린 것이다.
하단파는 원래 칠성파 우호조직이었는데, 칠성파와 쌍벽을 이루는 신20세기파에 붙어서 변절한 조직이다.
그래서 하단파가 을숙도 방화가 칠성파 우호조직인 사상파의 소행으로 오해하고 도전해왔을 때, 사상파가 결투를 하는지 타협을 하는지 지켜보고, 사상파 두목 신상사의 칠성파에 대한 충성심을 재확인하고자 했다.
다행히 사상파가 하단파의 도전을 받아들여 낙동강 강변에서 40여 명이 집단결투를 벌였는데, 결과는 사상파 우군으로 지원을 나간 ‘배달’ 패거리의 고문도가 맹활약하여 대승을 거두고 하단파까지 접수한 쾌거를 이루었다.
6월 초순인 지금은 불탄 갈대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이 무성하게 자라서 마치 드넓은 보리밭을 연상케 한다.
관광객도 오지 않는 들판이라 드론을 띄워 올려서 마음대로 조종 연습하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인 장소가 되었다.
처음에 세희는 수도 없이 드론을 바닥에 곤두박질시켰지만, 무릎까지 오는 푹신한 갈대의 줄기와 잎사귀들이 완전 쿠션 역할을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드론 조종 연습 자체는 두어 시간 정도만 하면 되는데, 삼봉은 양정역에 와서 세희를 태우고 을숙도까지 갔다가 연습 끝나면 다시 양정까지 데려다준다. 그러고 나서 다시 숙소가 있는 김해까지 가야 하니까 하루가 꼬박 걸린다.
그래도 요 2주일 동안이 삼봉에게는 피곤하기는커녕 태어나서 최고로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세희의 얼굴만 쳐다봐도 황홀한데 왜 아니 그러겠는가?
“네. 오늘은 범어사에 가서 사찰 경내를 촬영했으면 해요.”
세희가 오늘 촬영 실습할 장소를 알려줬다.
“아, 범어사요? 그게 어디에 있지요?”
들어는 봤지만, 수원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는 삼봉은 범어사의 위치도 잘 모른다.
“금정구에 있어요. 여기서 북쪽으로 곧장 가는데, 한 시간도 안 걸릴 거에요.”
부산에서 나고 자란 세희라 웬만한 데는 가보지는 않았어도 위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요? 지금 아홉 시니까, 열 시에 도착해서 두 시간쯤 촬영하면 열두 시. 딱 점심시간 되겠는데, 오늘은 도시락 안 사가도 되겠네요?”
을숙도에 연습하러 갈 때는 시간이 어중간해서 매번 도시락을 사서 갔었다.
갈대 풀밭에 세희와 오붓하게 앉아서 도시락 까먹는 재미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으니, 삼봉은 하루하루가 즐거운 소풍날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그러죠. 절 밑에 산채 비빔밥집도 있을 거예요.”
“그럼 타세요. 내비게이션치고 바로 출발하면 되죠?”
삼봉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늘씬한 세희의 청바지 차림 각선미를 훔쳐본다.
“네, 그래요. 오늘도 수고 많이 해주세요, 삼봉 싸부님! 호호.”
세희가 제법 농담도 하는 걸 보니 오늘 기분이 상당히 업 된 모양이다.
드론 조종 연습을 다 마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러 가는 거니까 그럴 만도 하겠다.
“예~ 잘 알겠습니다, 제자님. 하하.”
조수석 차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으며 삼봉도 환한 얼굴로 싱글벙글 기분 좋아 웃었다.
‘싸부’라니! 세희한테서 오늘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누가 보면 괜찮아 보이는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가 어디 좋은 데 즐거운 데이트라도 가는 줄 알겠다.
운전 중에는 세희가 삼봉에게 운전에만 집중하라며 이어폰을 끼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바람에 잡다한 얘기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삼봉은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가락으로 핸들을 토닥거리고 장단을 맞추면서 흥겹게 달린다.
평일이라 그런지 범어사까지 40여 분도 안 걸려서 도착했다.
사찰휴게소가 있는 범어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드론과 조종기만 꺼내어 나란히 걸어서 올라갔다.
절 바로 앞에 있는 ‘성보박물관’ 주차장에 세워도 되는데, 세희가 경치를 감상하면서 걸어가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함께 걷는 시간이 많아져 삼봉의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부산 금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 년 고찰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산의 꼭대기에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는, 금빛을 띤 우물이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물고기가 그 물 안에서 놀았다고 한다.
이에 산의 이름을 ‘금빛 우물’이라는 뜻의 금정산(金井山)으로 짓고 그곳에 사찰을 세워 ‘하늘에서 내려온 물고기’라는 뜻의 범어사(梵魚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범어사는 창건 이후 임진왜란과 화재 등으로 소실되기도 했지만 몇 차례의 개수 및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로 꼽힌다.
절은 백 년 노송들에 둘러싸여 있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오랜 역사와 함께 수많은 고승을 배출하였고, 삼층 석탑, 대웅전, 조계문 등 많은 문화재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는 만해 한용운이 범어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쓸 태극기를 범어사 암자에서 만들기도 했다.
범어사로 오르는 편편한 아스팔트 도로 왼쪽에는 깊은 계곡물이 바위틈 사이로 흘러내리고 오른쪽으로는 비스듬한 야산이 이어지는데, 천년 고찰의 입구답게 하늘을 찌르는 소나무가 그 자태를 뽐내며 늘어서 있다.
소나무 아래는 각종 관목이 초여름 신록의 푸르른 잎사귀를 햇빛에 반짝이며 풋풋한 산 내음을 풍기면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어머~ 풀 냄새가 너무 싱그러워요!”
앞장선 세희가 양팔을 활짝 펼치고 턱을 치켜든 채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발레리나처럼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예. 경치도 너무 멋있는데요!”
드론과 조종기를 들고 뒤따르는 삼봉의 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따로 없다.
‘아, 당장 달려가서 껴안고 함께 돌았으면 좋겠네!’
그러나 이건 나 잡아 봐라도 아니니까 그럴 수는 없고, 스물네 살 젊은 총각 삼봉의 가슴만 초여름 햇볕에 뜨겁게 달아오른다.
“시내에서 지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자연 속으로 들어와 보니까 공기가 너무 맑은 게 느껴지는데요. 그죠?”
세희가 환한 얼굴에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게요. 아주 상큼합니다. 하하.”
삼봉이 장단을 맞추며 괜히 입을 벌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코를 씰룩거려 본다.
“싸부는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있나요?”
“살아보지는 않았는데, 어릴 때 엄마 따라가서 시골 외할머니댁에 며칠 묵다 온 적은 있어요.”
“그래요? 어디에 있는 시골인데요?”
“수원에서 서해안 쪽으로 한 시간쯤 나가면 제부도라는 섬이 있어요. 거기가 엄마 고향입니다.”
“어머, 제부도요? 이름이 참 예쁘네요. 무슨 뜻인가요?”
“글쎄요… 뜻은 잘 모르겠는데, 모세의 기적이 하루에 두 번이나 일어나는 섬입니다.”
“어머나~!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섬이라고요? 진짜 바다가 갈라지나요?”
“그럼요! 차가 다니는 포장길 둑이 2킬로미터쯤 있는데, 밀물 때는 물속에 잠겨서 차가 못 다닙니다. 썰물이 되면 6시간 동안만 다닐 수 있어요.”
“어머나! 진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섬이네요? 섬이 큰가요?”
“예. 섬 둘레가 5킬로가 넘을걸요? 아주 넓은 개펄도 있고, 섬 입구 반대편에 조개껍질이 좀 섞여 있긴 하지만 해수욕장도 있어요. 그 옆에 매들의 보금자리인 매바위가 있는데, 그 주변에 조개구이, 대하구이 가게가 죽 늘어서 있습니다. 아주 싼 값에 배불리 먹고 올 수 있어요. 하하.”
삼봉이 세희한테 자기 어머니 고향 자랑하느라고 신바람이 났다.
산속의 절간 앞에서 안 어울리게 바닷가 섬 얘기라니?
“어머, 그 제부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지는데요? 호호.”
“아, 내일이라도 시간 되면 말씀만 하세요! 제가 당장 모시고 가서 구경 시켜 드리겠습니다. 하하.”
삼봉에게 이렇게 혼미할 정도로 즐거웠던 순간이 언제 또 있었던가 싶다.
삼봉의 생애에 최고로 행복한 봄날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제부도의 하루 두 번 열리는 바닷길은 그 시각이 날마다 조금씩 달라서 물때를 잘 맞춰 들어가야지, 안 그랬다가는 섬에서 자고 나오기에 십상이다.
작은 섬 제부도에 모텔이 예상외로 많이 있다.
삼봉이 대학 다닐 때 일부러 물 때 모른 척하고 여자친구랑 함께 갔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설마, 순진남이라 아니겠지?
제부도는 예부터 육지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섬이라는 뜻에서 ‘저비섬’ 또는 ‘접비섬’으로 불렸으나, 조선조 중엽 이후 육지와 제부도를 연결하는 갯벌 고랑을 어린아이는 업고, 노인은 부축해서 건넌다는 의미에서 ‘제약부경(濟弱扶傾)’이라는 말이 구전으로 전해졌다. 이 제약부경의 ‘제’자와 ‘부’자를 따서 ‘제부리(濟扶里)’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 계곡이 오른쪽으로 옮겨간 지점에서 차도를 벗어나 왼쪽 오래된 보행 길로 접어들었다.
백 년쯤 전에만 해도 아마 저 차로는 없었을 것이고 모두 이 길을 따라 걸어서 절에까지 올라갔을 것 같다.
속세에 사는 몸이 부처님을 뵙고 간곡한 소원이라도 빌려면 적어도 십 리 길은 걸어서 와야 되지 않을까?
그 길을 따라 250미터쯤 걸어가자, 다섯 개의 돌계단 위에 두 아름은 됨직한 크고 길쭉한 돌기둥 네 개가 서 있고, 그 위에 다시 나무로 기둥을 올려 지어진 웅장한 모습의, 한자로 ‘조계문(曹溪門)’이라고 쓴 작은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 나타났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특히 기둥의 가운데 부분 지름이 아래나 위쪽보다 커서, 중간이 볼록하게 보이는 ‘배흘림기둥’으로 지었다.
일주문(一柱門)은 속계와 선계의 경계를 의미하고 그 안으로 들어갈 때는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되새기라는 뜻이 있다.
또한 일주문은 기둥이 일렬로 배열된 위에 지붕이 있고 문짝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큰 편액에 OO산 ㅁㅁ사 라고 써서 건다.
“어머나, 저 큰 기와지붕을 기둥 네 개가 받히고 있네요? 너무 웅장하고 멋있는데요!”
우뚝 선 조계문의 커다란 기와지붕은 지붕의 양쪽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수직의 삼각형으로 된 ‘맞배지붕’으로, 안정감과 단아한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네요. 저게 일주문이라는 거지요. 보통은 기둥이 두 개만 있는데, 여기는 네 개나 있네요.”
“아, 네. 맞아요, 일주문! 삼봉 싸부는 그런 것도 다 아시네요? 호호.”
“수원에도 절은 많이 있습니다. 용주사라고 혹시 들어보셨어요?”
“수원에 있는 용주사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유명한 절인가요?”
“예. 정조대왕이 자기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절입니다. 용주사 바로 앞에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이 있어요.”
“아, 맞다.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대왕이지요? 가만, 혜경궁 홍씨는 누구죠?”
“예,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고, 정조대왕의 어머니입니다.”
“아, 그렇군요. 싸부는 역사도 빠삭하시네요?”
세희가 삼봉을 다시 봐야 되겠다는 듯 의외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뭘요. 그 정도는 기본이지요. 저기, 용주사에는 일주문이 없거든요. 왜 그런지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