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언제나 매정하신 분이셨습니다. 제 위의 오빠에게 대하시는 것을 보면 저는 눈물이 핑 돌만큼 어머니의 정에 굶주렸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준 적 없었던 어머니의 밑에서 저는 우울한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무렵부터는 조그마한 쪽방을 얻어서 자취를 하게 되었습니다. 불편하고 고생은 되었지만 왠지 어머니의 매선운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있어서 마음이 편했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루는 저의 자취방으로 어머니가 찾아오셨는데 그 손에는 김 모락모락 나는 찰밥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어머니가..왜 나에게 찰밥을 쪄 오셨을까? 그건 당연 어머니의 기둥인 오빠에게 줄 것이 아닌가? 하며 말입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이 웬수 같은 것이 니 오빠의 기를 막아서는 것이야. 딸년 공부잘하면 뭐하냐? 이 것아!" 하시며 제가 받아온 성적표를 갈갈이 찢어 버리시던 분이셨습니다. "기집애가 배워서 어따 쓴다냐? 그저 집에서 밥끓여 먹고 살림이나 하면 제격이지.."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난생 첨으로 저를 찾아오신 것도 생소했지만 그 손에 찰밥이 들려져있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 날 찰밥을 두 공기나 먹었습니다. 얼마나 맛이 좋던지...어머니 한번 보고... 한숟갈을 뜨고... 또 어머니를 한 번 보고 두 숟갈을 뜨고.. 그리고 어머니는 얼마되지 않아서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요. 단 한번의 따뜻한 말씀도 해 주시지 않았던 어머니였기에.. 얼른 얼른 돈 벌어서 니 오라버니 뒷 바라지 해 주거라...! 하시며 노트 한권 살 돈도 제대로 주지 않으시던 어머니였기에.. 또 제가 취직해서 오빠를 도와주기만을 바라시던 어머니였으니... 어찌 보면 어머니의 무서운 암말기 선고에 눈물 한방울 안나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짝 말라버린 어머니를 바라보자니.. 그저 그냥 그 무서운 어머니의 모습이라도 좋으니.. 살아만 계셔주셨으면 싶었습니다. "너 얼른 시집가라... 사귀는 사람 있으면 얼른 데려와 봐라.."하시는데.. 저는 정신을 퍼뜩 차렸습니다. 사귀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였습니다. 그저 저는 돈을 벌어야 만 하는 줄 알구선 열심히 일과 집을 오가면서 버젓한 일자리 없는 오빠에게 돈을 대주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왠일인지 바빴습니다. 어머니를 위하여 뭔가를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녔던 교회의 오빠를 찾았습니다. 예전부터 저에게 너무도 잘해줬던 오빠에게 임종을 얼마 남겨두지 않는 엄마의 이야기를 하고 애인은 아니지만 그냥 애인처럼 해 달라고 말입니다. 오빠는 피식 웃으면서 마치 애인처럼 정말 오랫동안 사귀었던 사람처럼 제 어깨에 손을 얹어 놓고 자연스럽게 대해줬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바라보시며 정말 오랫만에 저를 보고 다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인자 느그 오빠로부터 자유로와져라... 결혼 하거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정말 얼마되지 않아서 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심정을 뭐라고 표현 할 수있을까요 오빠는 계속 저에게 애인처럼 대해줬습니다. 아주 오랫돋안 사귄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오빠는 이제 저의 남편이 되었고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웃음이 떠오르면 저는 얼른 고개를 들어서 남편을 바라봅니다. 어머니의 그 웃음은 언제나 남편과 함께 떠 올랐고 그럴 때 마다 저는 이제 저에게 남겨진 행복을 놓치 않으려고 힘기울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였고 그 댓가로 저는 이만큼 행복한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많이 슬펐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지간히 힘든 일이 다가와도 별로 힘들지가 않습니다. 주위의 사람들로 인하여 상처를 받아도 저는 이겨낼 힘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저를 단련시켜주신 덕택인가 봅니다. 오늘도 저는 남편에게 줄 저녁을 맛있게 준비하렵니다. 남편이 있어서 어머니를 서서히 잊을 수있을 것 같습니다. .. .. 이글은 KBS라디오 김연주 노주현입니다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