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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헌지(王獻之) 작 '십이월첩(十二月帖)'(보진재법첩 소수 寶晉齋法帖 所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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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와 그의 7자 헌지(344~386)는 진대를 대표하는
명서가이다. 서예사에서는 이 두 사람을 아울러
이왕(二王)이라 칭하며, 한편으로는 희지를 대왕(大王)
헌지를 소왕(小王)이라 지칭한다.
헌지의 자는 자경(子敬)이며, 중서령을 지내
왕대령(王大令)이라 부르기도 한다. 희지는 헌지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여 훗날 명서가가 될 것을 예언하고
비결서 「필세론」을 쥐어주며 친히 필법을 전수했다.
헌지가 아버지를 따라 현사들이 모인 난정의
유상곡수연에 참석했을 때의 나이가 불과 9세였으니,
그때 시를 짓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 전하는 필적으로는 십이월첩(十二月帖)
압두환첩(鴨頭丸帖) 중추첩(中秋帖)
입구일첩(卄九日帖) 지황탕첩(地黃湯帖) 등의
척독이 있으며, 소해(小楷)로서 낙신부(洛神賦) 13행이
있다. 일부는 탑모본으로 전하며, 순화각첩을 비롯한
여청재첩, 보진재법첩, 괘설당첩 등의 판각본에서
그의 필적을 확인할 수 있다.
헌지에게는 유독 아버지와 얽힌 일화가 많다. 「진서」 본전에는 7~8세 무렵부터 글씨를
배웠는데 희지가 몰래 뒤에서 붓을 잡아당겼으나 빠지지 않자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후에 크게 이름을 날릴 것이다'라고 예언한 것이 보인다. 이후로 지금까지도 집필법을
논할 때면 으레 이 일화를 들먹이며 붓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선후기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도 필법전수서를 집필하면서 이 일화를 거론했을 정도이니 그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날 희지가 다른 도시로 떠나면서 행차에 임박하여 벽에 글씨를 써 놓았는데, 헌지가
몰래 그것을 지우고 얼른 글씨를 써서 바꾸어 놓고 스스로 괜찮다고 여겼다. 그런데 희지가
돌아와 보고 탄식하며 "내가 갈 때 정말 많이 취했었구나!"라고 하자 헌지가 속으로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신의 실력을 아버지와 견주려 했으나 아직
역부족이었다는 일화이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구애됨이 없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녔던
헌지의 언행은 때로 오만하게 보였다. 당시의 명현 사안(謝安)이 헌지에게 아버지 글씨와
비교하면 어떠하냐고 묻자 당연히 자신이 낫다고 대답하였다. 사안이 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반박하자, 헌지는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사안은 헌지의 편지를 찢어 교정지로 사용하기도 하고, 희지가 보낸 편지에 다시 답장을
써서 보내는 등 헌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헌지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언행을
교정하고자 한 듯하다. 헌지가 아버지보다 낫다고 한 말은 윤리적 비난이 있지만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 했던 점에서 예술가의 기질이 엿보인다. 희지도 그러한 헌지를 마음 속으로
인정하였다.
아버지만한 아들 없다고 했던가. 일반적으로 "헌지는 희지만 못하다"는 서평이 정론이지만.
당대에 종요(鍾繇)·장지(張芝)와 더불어 사현(四賢)으로 지칭되는 것을 보면 헌지에게 있어
아버지 희지는 영원한 라이벌이자 동반자 관계였다. 특장인 행초서는 그의 분방한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십이월첩'은 북송대 서화가로서 높은 감식안 지닌 미불이
"이른바 일필서로서 天下子敬第一帖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희지와는 다른 헌지만의 기개가
느껴진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전북일보-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④왕헌지(王獻之)의 십이월첩(十二月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