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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손 창 섭
눈 덮인 망막한 벌판 위에는 또 하루의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대륙의 일모(日暮)란 황혼이 지극히 짧았다. 대지에 비꼈던 석 양이 가시기가 바쁘게 그대로 어둠이 내려 깔리고 마는 것 같았다.
‘장자워프’ 부락은 지금 마악 황혼에 싸이는 순간이었다. 어둠은 인제 단박황혼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다. 집집에서는 급히 방등¹에 불들을 밝혔다. 부락 동쪽에 치우쳐 있는 아편 밀매상인 한국인 집에도 불이 켜졌다. 희미한 등불 밑에서는 꺼칠한 중독자들이 가로세로 지렁이처럼 길게 누워서 아편에 취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 네댓 칸 상거²에 있는 조그만 토막집 창문에도 뿌여니 불이 비쳤다. 그 안에는 언제나처럼 세 명의 인간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푸른 호복³을 단정하게 입은, 해사한 청년 동오(東五: 뚱우), 귓불에 은고리를 단 귀인성⁴ 있게 생긴 소녀 춘화(春華), 한복인지 호복인지 분별할 수 없는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는 한국 소년 승두(承斗)였다. 그들은 거의 날마다 퇴락한 이 토막집에 모여 지냈다. 그들은 마치 침묵과 대결이라도 하듯 늘 입을 봉한 채 있었다. 그 침묵 속에 잠긴 공기는 왜 그런지 산소 부족을 느끼게 하였다. 그들과 함께 십 분 이상을 태연히 앉아 배기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대개의 사람은 질식할 듯이 가슴이 답답해서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 집의 가장이요 춘화(春華)의 부친인 노왕(老王: 王영감)조차 들어왔다 나갈 때면 으레 “왕바딴 차우”⁵ 하고, 누구에게 없이 투덜거릴 정도였다. 그들은 하루 종일 가도 말이라곤 별로 없었다. 물론 벙어리인 춘화(春華)는 말을 못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동오(東五)는 어째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아니하는 것일까. 소학교 교원을 지낸 그는, 아침만 먹고 나면 정해놓고 춘화(春華)네 집으로 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벽에 기대거나 누워서, 진종일 잡지와 신문을 뒤적거렸다. 지루해지면, 연거푸 담배를 피웠다. 하얀 아편 가루를 찍어서 빨기도 했다. 그러다 완전히 어두워서야 집에 돌아가는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러한 동오(東五)를 승두(承斗)는 께름칙하게 여겼다. 더구나 유난히 번득거리는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이쪽을 쏘아볼 적마다 승두(承斗)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동오(東五)의 눈은 남달리 번득거렸다. 그 눈으로 사람을 노려보는 버릇이 있었다. 동오(東五)는 날마다 춘화(春華)네 집을 찾아오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승두(承斗) 보고는,
“여기 말구는 갈 데가 없으니까.”
했다. 어른들이 물어보면,
“춘화(春華)에게 정이 들어서.”
라고 했다. 그 두 가지가 다 거짓말 같기도 하고 참말 같기도 해서 승두(承斗)는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장자워프’ 부락에 속하지만, 동오(東五)는 뚝 떨어져 있는 아랫동네 사람이었다. 장자워프에서는 굴지에 드는 유복한 집안의 독자(獨子)였다. 그러한 동오(東五)가 날마다 여기에 와서, 춘화(春華)나 자기와 더불어 날을 보내는 데는 어쩔 수 없는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았다. 가끔 영어잡지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읽기 때문에 더욱 경의가 갔다. 승두(承斗)는 차츰 동오(東五) 에게 친근감을 품게 되었다. 승두(承斗)는 그런 속을 알리기 위해서 한 번은 자기의 비밀을 털어 보였던 것이다.
“진짜 울 아버진 죽었어요.”
동오(東五)는 그 번득거리는 눈으로 승두(承斗)를 보았다.
“울 아버진 고향에서 오래 앓다가 죽었어요.”
“그럼 지금 아버지는 계부(繼父)로구나.”
“죽은 아버지 친구예요. 본시 우리 집에 자주 왔어요. 아버지가 죽구 나서, 어머니는 이내 돈벌이 하러 만주루 온 거예요. 내가 와 보니까, 그 아버지 친구가, 어머니랑 한집에서 살구 있어요.”
서투른 중국말이라 승두(承斗)는 몹시 떠듬거렸다. 동오(東五)는 한참이나 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궐련 개비 끝에 아편 가루를 붙여서는 빨곤 하였다.
“죽은 뒤엔 할 수 없는 거야, 산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해두.”
“아버지는 그 친구가 오는 걸 무척 싫어했어요. 자네가 날 죽일려나, 제발 오지 말아주게, 그렇게 화를 냈어요. 그러구 어머니가 외출을 할 적마다 몰래 날 따라 보냈어요.” :
“그래서 몰래 미행을 했단 말이지?”
“그러다 들켜서 어머니한테 지독하게 맞았어요. 동네 사람들은 그 친구 땜에 울 아버지가 지레 죽었다고 해요. 그렇지만 울 아버진 정말 병으루 죽었을 거예요. 누가 죽인 건 아닐 거예요. 진(陳)선생 그렇겠죠?”
마치 열에 뜬 사람처럼 승두(承斗)는 충혈된 눈으로 동오(東五)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자기의 심령을 안정시킬 수 있는 단 한 마디의 명확한 답변을 갈망하는 태도였다.
“니 하이 꺼우챵디 하이즈(너두 괴로운 놈이구나) !”
동오(東五)는 탄식하듯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동오(東五)와 나누어보기는 그때 한 번뿐이었다. 잠시 뒤 동오(東五)는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바람을 쏘이고 오자고 승두(承斗)와 춘화(春華)를 재촉하였다. 그날 세 사람은 여러 시간 눈 깔린 별판을 헤매었다. 동오(東五)는 양쪽에 승두(承斗)와 춘화(春華)를 꼭 끼고 걸었다. 그는 자주 하늘을 쳐다보며,
“메이파즈(할 수 있나) !”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그 한 마디는 이상하게도 승두(承斗)의 가슴속 깊이 아프게 스며들었다.
손님들은 식전부터 찾아들기 시작했다.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대문짝을 흔드는 때도 많았다. 그들은 대개 폐인이 다 된 중독자였다. 눈곱이 끼고 누루퉁하니 들뜬 얼글에 콧물을 질질 흘리며 풀이 죽어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 축일수록 현금을 가지고 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수수나 콩 같은 곡물을 자루에 넣어서 메고 왔다. 구두, 옷, 폐물 등속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하얀 가루를 받아
드는 손이 떨렸다. 그들은 즉석에서 종지에 물을 따라 약을 풀었다. 그런 사람들은 한 그램 정도로는 효력이 없었다. 두 그램, 혹은 세 그램을 한꺼번에 풀어서 주사기에 빨아들였다. 그러면 대개 승두(承斗)의 모친이 주사침을 그들의 팔뚝에다 찔러주는 것이다. 그들의 팔은, 주사침을 꽂을 자리조차 없을 만큼 피부가 끔찍하게 멍울져 있었다. 두 그램짜리를 연거푸 두 대나 맞는 사람도 있었다. 그제야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다. 우선 게슴츠레하던 눈부터 광채가 돌기 시작한다. 그쯤 되면 그들은 별안간 다변하여진다. 모로 누워서 담배를 피우며 흥에 겨워 지껄여대는 것이다. 그들은 간혹 승두(承斗)에게 농을 걸어오기도 했다. 대개 승두(承斗)의 그게 얼마나 큰가 보자고 하는 따위였다. 제법 사내 구실을 할 만하면 처녀를 소개해주겠다는 식의 농담이었다. 그러나 승두(承斗)는 쉽사리 그들과 친해질 수가 없었다. 우선 구역질이 나도록 추잡한 생각이 들었다. 걸핏하면 괴춤이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서 이를 잡아냈다. 몸뚱이 전체에서는 썩은 기름 냄새 같은 고약한 냄새를 끊임없이 풍겼다. 더구나 한 대야의 세숫물을 여럿이 돌려 가며 쓰는 것을 보았을 때 승두(承斗)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승두(承斗)네 가족이 하고 난 세숫물을 중독자들은 버리지 못하게 말렸다. 그렇게 깨끗한 물을 왜 버리느냐는 것이다. 그 물이 아주 새까매지도록 으레 그들은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낯을 씻었다. 지금도 승두(承斗)는 자기가 하고 난 세숫물을 여러 사람이 차례로 사용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승두(承斗)의 정신은 딴 데 가 있었다. 그는 어젯밤 꿈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향에서 부친이 숨을 거둔 뒤의 장면이었다. 승두(承斗)가 밖에서 돌아와 보니, 부친은 눈을 뒤솟고⁶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어쩔 줄을 몰라 승두(承斗)는 덜덜 떨고만 서 있었다. 그러자 부친은 갑자기 입을 실룩거리며 말을 했다. 창규(昌奎: 계부)가 자기를 죽이고 달아났으니, 얼른 쫓아가 원수를 갚아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정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승두(承斗)는 정신이 펄쩍 들었다. 부엌에 가서 식도를 찾아들고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싸돌아 다녀도 창규(昌査)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기진맥진해서 돌아오는 길에 이리로 향해 오는 상여와 승두(承斗)는 부닥쳤다. 두 사람이 메고 오는 상여 뒤에는 상제 하나 없었다. 어서 가서 우리 아버지도 장사를 치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악 상여를 지나치려는 판
에, 그 속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원수를 갚아다고, 원수를 갚아다고!”
깜짝 놀라 보니, 그 상여 위에는 부친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두꾼은 다른 사람 아닌 모친과 창규(昌奎)였다. 승두(承斗)는 고함을 지르며 식도를 꼬나 잡고 창규(昌奎)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창규(昌奎)는 무난히 식도를 빼앗아 가지고 도리어 승두(承斗)의 목에다 겨누는 것이었다. 승두(承斗)는 악을 쓰며 요동을 하다가, 모친이 흔들어 깨워서 눈을 떴던 것이다. 여기에 온 이래, 이 비슷한 꿈을 승두(承斗)는 여러 차례 꾸었다. 아침상을 대하고 앉아서도 승두(承斗)는 입맛이 없었다. 안색도 좋지 않았다. 모친은 걱정되는 듯이 승두(承斗)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꿈을 그렇게 자주 꾸니? 소릴 지르구 야단 하면서.”
승두(承斗)는 잠시 주저했다. 옆자리에서 분주히 수저를 놀리고 있는 계부의 눈을 쳐다보았다. 언제까지나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승두(承斗)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죽은 꿈을 꾸었어요.”
계부를 향해 승두(承斗)는 아직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 보지 않았다. 그러기에 여기서 아버지라고 하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모친이나 계부는 대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친과 계부는 일시에 낯빛이 달라졌다.
“우리 아버지는 나보구 꼭 원수를 갚아달라구 했어요.”
동시에 음흉한 승두(承斗)의 눈이 계부를 쏘아보았다. 불시에 입맛을 잃은 계부는 숟갈을 놓고 말았다. 개구리처럼 툭 불거진 눈이 승두(承斗)의 낯을 향하고 거칠게 뒤룩거렸다. 증오와 공포가 잠뽁⁷한 눈이었다. 승두(承斗)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계부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솟아올랐다. 그리 되면 부친을 죽인 것은 영락없이 계부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아버지의 원수를 자기는 갚을 길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승두(承斗)가 상머리에서 물러앉았을 때는, 지저분하게 눈물에 젖은 모친의 얼굴이 연신 비죽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 에미 가슴패기에 칼을 꽂아라. 요것아, 내 가슴을 칼루 우벼 내란 말이다!”
모친은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문댔다. 승두(承斗)는 또 한 번 흘깃 계부를 곁눈질해 보고 말없이 일어서 나왔다. 자기는 마침내 모친에게서도 영 사랑을 받을 수 없이 되었다고 각오했다. 눈 덮인 벌판은 아침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승두(承斗)는 두 팔을 벌리며, 대륙의 아침 공기를 가득히 들이마셨다.
오십 리나 떨어진 정거장까지 마중 나온 모친과 만났을 때, 승두(承斗)는 안색이 달라지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친의 등에는 뜻밖에도 어린애가 업히어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 좋은 만주로 돈벌이 간다고 떠났던 모친이 재혼을 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가끔 받아본 편지에도 그냥 사업이 신통치 않다는 것뿐, 그런 기미는 털끝만큼도 비치지 않았다. 역전 음식점에 들어가 점심을 같이 하는 동안, 혼자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노라고 하고 모친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승두(承斗)는 입맛을 잃었다. 모친이 아무리 권해도 ‘포즈’⁸를 두세 개 먹었을 뿐 그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오십 리나 되는 시골 길을 마차로 오는 도중에서도, 모친은 몇 번이나 눈시울을 닦았지만, 상대가 창규(昌奎)라는 것은 딱히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모친의 남편이란 대체 어떤 인물일까? 중국 사람일까? 조선 사람일까? 그런 생각을 막연히 되풀이하면서도 승두(承斗)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마차에서 내려 모친이 안내하는 집 문 앞에 섰을 때, 승두(承斗)의 눈앞에 나타난 사내는 바로 창규(昌奎)였던 것이다. 승두(承斗)는 자기의 눈을 의심 했다. 다음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즉 놀라운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다섯 살짜리 승두(承斗)는 비로소 상상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엿본 것 같았다. 병석에 있던 부친이 창규(昌査)가 오는 것을 몹시 꺼릴 뿐 아니라, 외출하는 모친을 미행시킨 이유를 승두(承斗)는 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승두(承斗) 자신 창규(昌奎)를 얼마나 원수처럼 미워했던가. 지금 와서 뜻밖에도 창규(昌奎)를 다시 눈앞에 대하고 보니, 죽은 부친이 불쌍한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승두(承斗)를 맞이한 창규(昌奎)는, 풀이 죽은 승두(承斗)를 위로하느라고, 그래도 몇 마디 반갑다는 뜻을 말했다. 그날 저녁에 불을 끄고 나서야, 창규(昌奎)는 변명하듯 여러 가지 말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여기서는 모두들 친부자(父子)로 알고 있으니, 누가 묻거들랑, 박승두(朴承斗)라고 대답하라고 이르기도 했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내 성이 차(車)가지 어째서 박(朴)가냐고, 승두(承斗)는 몇 번이나 항의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던 것이다. 이삼 일이 지나도 승두(承斗)는 도무지 부드러운 태도로 모친이나 계부와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는 좀 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방에 있을 때도 대개는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음흉한 빛이 어린 시선으로 계부를 홈쳐보곤 하였다. 계부나 모친 편에서도 무시로 승두(承斗)의 눈치를 살폈다. 계부는 더욱 그랬다. 도무지 순진한 데가 없이 비틀어진 태도로 병어리처럼 눈만 히뜩거리는 승두(承斗)가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승두(承斗)가 전연 속을 주지 않으니 계부로서도 정이 갈 리 없었다. 더구나 원한 같은 것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괘씸하기도 했다. 대체 저놈이 어쩌자는 심속인가 싶어서 저절로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면 똑같이 당황해서 외면을 하는 것이다. 승두(承斗)가 여기 도착한 다음날이었나 보다. 하편을 사러 온 이웃 사람이, 승두(承斗)를 향해 총명하게 생겼다고 하며 이름을 물었다. 승두(承斗)는 대답하기 전에 얼른 계부의 얼굴부터 쳐다보았다. 계부는 애원하듯 하는 표정으로 승두(承斗)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승두(承斗)는 조소에 가까운 미소조차 띠며,
“성은 차(車)가요, 이름은 승두(承斗)입니다.”
했다. 일부러 똑똑하고 정확한 중국 발음이었다. (여기 오는 도중에, 승두〔承斗〕는 안동〔安東〕에 있는 고모사촌 형에게 들러서 한 달 가까이 묵으며, 중국말을 배웠다. 그래서 쉬운 말은 일쑤 통했던 것이다.) 승두(承斗)는 통쾌한 표정으로 계부를 다시 보았다. 어느 편이냐 하면 인부 감독처럼 좀 감때사납게⁹ 생긴 계부의 얼굴은 대뜸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심한 노기에 얼굴뿐 아니라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계부는 좌중의 시선을 피하여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느 날 밤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 야식을 하며 계부는 타협조로 나왔다. 승두(承斗)의 실부(實父)가 죽은 뒤에 몇 달이 안 되어 모친을 데리고 훌쩍 만주로 들어와 버린 것은 자기의 경솔한 짓이었지만, 이왕지사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앞으로는 친부자간처럼 지내자는 것이었다. 모친도 눈물에 어룽진 얼굴로 모든 것은 자기의 탓이었다고 하며, 어서 속을 풀고 계부의 말대로 부드럽고 상냥한 아들이 되어 달라고 졸랐다. 승두(承斗)는 외면한 채 말이 없었다. 불빛을 받고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은 한결 더 창백하고 싸늘해가는 것만 같았다. 승두(承斗)에게는 그 말이 하나도 곧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처럼 하늘같이 믿었던 모친마저 나를 속이지 않았더냐. 이제 와서 누구를 믿으랴 싶었다. 도시 어른들의 뱃속이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부나 모친이 무슨 소릴 해도 경계심만이 더 굳어질 뿐이었다. 그날 밤 승두(承斗)는 종시 입을 열지 않은 채 자리에 들고 말았던 것이다. 불을 끄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자, 왜 그런지 승두(承斗)는 별안간 외로워졌다. 광막한 벌판에 자기만이 혼자 버려져 있는 것 같았다. 인제는 세상에 누구 하나 진정으로 자기를 위해줄 사람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예 승두(承斗)는 이불 속에서 소리내 울었다.
“어디 두고 보자, 두고 보자.”
그렇게 중얼대며 그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불을 켜고 모친이 일어나서 여러 말로 승두(承斗)를 달래 보았다.
“네가 저엉 그럴 래문 차라리 난 죽어버리구 말 테다.”
그와 같은 말을 되뇌며 모친도 덩달아 울었다. 이튿날 아침 승두(承斗)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러한 승두(承斗)의 얼굴을 계부는 불안한 눈으로 슬금슬금 훔쳐보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계부와 승두(承斗) 사이의 싸늘한 장벽이 더 두터워갈 뿐이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똑같이 어쩔 수 없는 증오와 공포와 경계의 빛이 있었다. 그러한 감정이 표면적으로 좀더 노골화된 것은 바로 어젯밤부터였다. 몇 시쯤 되었을까? 하여튼 자정이 훨씬 지나서였다. 현관문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기척이 났다. 먼저 눈치 챈 것은 모친이었다. 저게 무슨 소리냐고 계부를 살그니 흔들어 깨웠다. 그때는 이미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계부는 정신이 펄쩍 들어 뛰어 일어났다. 대규모의 마적떼의 횡행은 차츰 흔적을 감출 무렵이었으나, 그 대신 분산적으로 개인 집을 터는 일은 가끔 있었다. 그래서 평시 문단속만은 단단히 하느라고 했지만, 현관문이 당해내지 못했으면 방문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계부는 발치에서 굵직한 몽둥이를 집어 들고 방문 옆에 버티고 섰다. 어떤 놈이고 들어서기만 하면 사정없이 후려갈길 판이다. 문밖에서는 잠시 조용했다. 그러더니 살그니 방문을 밀어보았다. 좀더 힘을 주어 지그시 밀었다. 도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더 강한 힘으로 문짝에 압력을 가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빗장이 우쩍 꺾이며 문이 열렸다. 계부는 정신없이 문을 향하고 몽둥이를 내둘렀다.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한참 동안 죽어라 하고 문짝을 뚜들겼다. 밖에서,
“장괘, 장괘.”¹⁰
하고 낯익은 소리가 났다. 일꾼으로 있는 노왕(老王) 이었다. 식구들은 인제야 살았나 보다 싶었다. 모친이 얼른 불을 켰다. 놀란 표정으로 노왕(老王)이 들어섰다. 계부는 흥분한 어조로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였다. 그러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몽둥이를 든 채 뒤를 돌아보았다. 상반신만 일으키고 앉아 있던 승두(承斗)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승두(承斗)는,
“악.”
하고, 비명을 지른 것이다. 동시에 뒷걸음쳐 방구석에 몸을 처박고 와들와들 떨었다. 눈에 핏대가 선 계부의 사나운 얼굴을 불빛에 보는 순간, 그 손의 몽둥이가 당장 자기의 머리통을 내리갈길 것만 같이 승두(承斗)는 느낀 것이다. 계부는 얼빠진 사람처럼 그러한 승두(承斗)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노왕(老王) 은 본디 노름판에서만 굴러먹은 사내였다. 지난날에는 꽤 판치는 건달이었다. 그는 온전한 살림이라고 꾸려본 예가 없었다. 구름처럼 떠돌아 다녔다. 어디 가나 아는 사람이 있었고, 하루 이틀쯤은 아무데서든 신세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디 가도 진심에서 반겨주는 사람은 쉽지 않았고 믿고 의지할 데란 더욱 없었다. 그래도 젊었을 땐 좋았다. 노름판에서 노름판으로만 사철 쫓아다니면 족히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오십 줄에 들어선 요즈음은 좀 달랐다. 워낙이 노름판의 인기자란 주먹의 힘이 절반은 버티어주는 것인데,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그게 안 되었다. 차츰 큰 판에서는 밀리어 나와 쇠쇠한¹¹ 좀패¹²에나 섞이어 다니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자연 생기는 게 적었다. 아편값도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밥은 한두 때 거를망정 아편만은 잠시나마 끊을 수 없는 노왕(老王)이었다. 반나절만 약 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대뜸 콧물 눈물로 얼굴이 귀중중해지고,¹³ 어깨가 우그러들었다. 이상히 눈에는 흰자만이 두드러지고, 전신이 그림자처럼 훌렁훌렁 했다. 그런 때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침을 맞아야 했다.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은 물론, 심지어는 하나밖에 없는 딸 춘화(春華)의 저고리까지라도 벗겨서 맡기든 팔든 해가지고 약을 맞아야 했다. 그러한 노왕(老王)도 평시에는 춘화(春華)를 꽤 아끼는 편이었다. 역시 아버지다운 애정으로 벙어리 딸을 애처롭게 여기었다. 춘화(春華)는, 노왕(老王) 이 노름판의 인기자로 한창 어깨가 으쓱 했을 때, 어떤 여인과의 사이에 생긴 사생아였다. 그 여자는 아이를 낳은 지 반년 만에 종적을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그처럼 어려서부터 어미를 모르고 자라난 춘화(春華)였다. 일정한 거처조차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친을 따라다니며 잡초처럼 천대 속에 성장한 춘화(春華)였다. 그러나 딸이 차차 나이 들수록 노왕(老王)은 자꾸만 가슴에 걸렸다. 열네댓 살 되자 제법 처녀티가 흐르기 시작했다. 말은 못 해도 얼굴만은 어미를 닮아 밴밴한¹⁴ 편이었다. 가뜩이나 난봉패 속이고 보니, 차츰 놈팡이들의 시선이 춘화(春華)의 가슴이며 엉덩짝을 노리게쯤 되었다. 심술궂은 놈은 얼마를 낼 테니 춘화(春華)를 하룻밤만 빌리자고 노골적으로 흥정하려 들기도 했다. 우선 이 가엾은 딸을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안정된 생활을 가져야겠다고 노왕(老王)은 잠꼬대처럼 중얼거려온 것 이다. 그러나 지금의 노왕(老王)에게, 안정된 생활이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일정한 거처를 갖지 못한 그들 부녀의 심신은 갈수록 고달프기만 했다. 열여섯 살이 잡히면서부터, 춘화(春華)는 몰라보게 그 얼굴이며 몸매가 활짝 피었다. 아무러한 노왕(老王)으로서도 이러한 딸을 건달패 속으로 끌고 다니며 같이 궁굴¹⁵ 수는 없었다. 마침내 아편 밀매상인 창규(昌奎)네 일꾼으로 주저앉을 결심이 노왕(老王)에게 생긴 것은 이런 때문이었다. 헛간으로 쓰던, 퇴락한 토막집이나마, 우선 부녀가 거처할 수 있는 집을 준다니 다행이었다. 그밖에 식사 일체와 하루 오 그램씩의 아편을 보수로 받았다. 그래도 내 집이랍시고, 딸이 안심하고 들어앉을 수 있는 거처가 생긴 것만도, 노왕(老王)은 만족이었다.
춘화(春華)는 늘 방구석에서만 살았다. 사람들과 만나기를 싫어했다. 세상 사람들은 온통 자기를 멸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금도 경멸감 없이 대해주는 동오(東五)와 승두(承斗)가 춘화(春華)는 고마웠다. 동오(東五)는 이 장자워프 부락에서는 상류에 속하는 집안의 학식 있는 청년이요, 승두(承斗)는 부친이 섬기는 주인집 도련님이라는 데서도 자랑스러웠다.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얼리기를 꺼려, 거의 날마다 자기를 찾아와 같이 지내주는 것 이 춘화(春華)는 대견했다. 그런 점에서는 노왕(老王)도 은근히 만족하고 있었다. 동오(東五)는 매일같이 춘화(春華)를 찾아오는 이유로, 누구 앞에서나 주저 없이 춘화(春華)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내세웠다. 몇 사람의 입에서 노왕(老王)도 그런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즈음 그는 엉뚱한 기대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동오(東五)가 춘화(春華)를 소실로 맞아주었으면 하는 희망이다. 어떤 점으로 보나, 자기네 처지로서는 감히 생심¹⁶도 낼 수 없는 일등 자국¹⁷이었다. 그런 것을 도리어 저쪽에서 접근해오지 않느냐. 오늘도 노왕(老王)은 동오(東五)와 승두(承斗)가 보는 앞에서 딸과 마주 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는 흡족한 태도로 담배를 붙여 물고 한동안 씨부렁댔다. 물론 아무도 대꾸해주지 않았다. 노왕(老王)은 마침내 어둠처럼 내리누르는 침묵에 짜증을 내고 나가버렸다. 동오(東五)는 컁¹⁸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잡지를 읽고 있었다. 고층 건물의 사진이 많이 나오는 얄따란 책자였다. 춘화(春華)는 먹고 난 그릇들을 부셔서 바구니에 챙겨 담고, 승두(承斗)를 보며 웃었다. 이어 한 손으로 항문을 슬쩍 닦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무엇을 쫓아버리는 손짓을 했다. 뒤를 보러 가는데 따라 나와 개돼지를 쫓아달라는 뜻이었다. 승두(承斗)도 웃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춘화(春華)를 따라 나갔다. 집 뒤란으로 돌아가 나무를 가려놓은 옆에 자리를 잡고 춘화(春華)는 허리춤을 끌렀다. 어느새 눈치를 채고 노루만 한 개가 두세 마리 쫓아왔다. 승두(承斗)는 “우― 우―” 하고 막대를 내두르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개들은 멀찍이 눈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이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어찌된 판인지 이 고장에는 어느 집에고 변소란 것이 없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집 뒤란으로 돌아가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대소변을 보는 것이다. 엉덩이를 내놓고 쪼그리고 앉았을 때, 사람이 나타나도 별로 점직¹⁹해하지도 않았다. 그런 때는 사람보다도 도리어 개나 돼지의 습격을 막기 위해,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 지방의 개는 모두 놀랍게 컸다. 그런 놈들이 여러 마리가 모여들어서 서로 으르렁대며 덤벼드는 바람에 안심하고 용변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돼지에 비기면 개는 좀 나은 편이다. 막대로 쫓으면 개란 놈은 용변이 끝나기까지 멀찍이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돼지는 훨씬 미욱했다.²⁰ 이 지방에서는 돼지를 놓아 기르기 때문에, 먹을 것을 찾아 집 주변을 배회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떼를 지어 밀려다녔다. 그러다가 용변하는 사람을 발견하기만 하면, 개처럼 좀 체면을 차리는 게 아니라, 마구 달려드는 판이다. 이놈들은 막대로 후려갈기면,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도 죽자구나 하고 그냥 대드는 것이다. 조금만 부주의했다가는 그 우둔한 주등이에 엉덩짝을 퉁기어 나동그라지기가 일쑤다. 그러기에 춘화(春華)는 뒤보러 혼자 나가기를 겁냈다. 대개 승두(承斗)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승두(承斗)는 즐겨서 그 소임을 맡아주었다. 춘화(春華)가 안심하고 바지 괴춤을 풀어헤칠 때는 승두(承斗)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는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다. 춘화(春華)는 누구보다도 자기를 그
만큼 신뢰하고 있는 것이라고 승두(承斗)는 생각했다. 제일 가깝고 다정한 사이라는 자신이 섰다. 자기가 좀더 커서, 춘화(春華)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하면, 두말없이 응해주리라는 생각이 승두(承斗)를 흥분시켜 주는 것이다. 거짓말처럼 흰 춘화(春華)의 엉덩짝을 곁눈으로 훔쳐보며,
“벙어리만 아니라면·…‥”
하고. 승두(承斗)는 가슴이 아파지곤 하는 것이었다.
우편국이 있는 S부락까지 승두(承斗)는 가끔 심부름을 갔다. 그가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거든다고 하면, 그것은 간혹 두 살배기 동생 만수(萬壽)를 업어주는 일과 S부락에 가서, 소포로 부쳐온 아편 뭉치를 찾아오는 일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우편국에 다녀오는 일은 자진해 맡았다. 어디를 둘러보나 지평선만이 아득히 가라앉은, 눈 쌓인 들판을 걸어가노라면 이상스레 가슴이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장자워프에서 S부락까지는 근 이십 리나 되었다. 장난삼아 슬근슬근 다녀오면 네 시간 이상은 걸렸다. 며칠 전 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승두(承斗)는 방한모를 푹 눌러쓰고 S부락을 향해 집을 나섰다. 날씨는 잔뜩 찌푸려서 금방이라도 눈이 휘날릴 것 같았다. 어간²¹에 있는 두 군데의 조그만 동네를 지나, 목적지인 우편국에 당도했을 때는 그예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했다. 소포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돌아서 나오려는 승두(承斗)를 향해, 국원이 잠시 기다려 보라고 했다. 역에 나간 우편 마차가 좀 있으면 돌아오리라는 것이다. 승두(承斗)는 기다리기로 했다. 눈은 차츰 더 심하게 내려 쌓였다. 나중에는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눈바람이 설레는 창밖을 내다보며. 승두(承斗)는 몇 시간이나 기다렸을까? 소포 꾸러미를 받아들고 우편국을 나섰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승두(承斗)는 약간 초조한 기분으로 세차게 불어치는 눈보라를 혜치고 바삐 걸었다. 첫번째 동네를 지날 즈음에는 새 눈이 내려 덮여서 길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승두(承斗)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거의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눈과 바람만이 휩쓰는 벌판을 기를 쓰고 돌진했다. 그럭 저럭 두번째 동네까지도 무사히 지나쳤다. 인제는 오 리 남짓한 길이었다. 얼마를 더 간신히 더듬어서 전진하고 나니, 도무지 길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목표될 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뽀얀 눈보라만이 안막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새로 쌓인 눈은 발목을 덮고도 남았다. 게다가 차차 어두워오는 것 같았다. 승두(承斗)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까 지나친 두번째 동네로 되돌아가서 안내자를 부탁할까도 생각해보았다. 막상 거기까지 돌아가는 것도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설사 무사히 동네까지 찾아 들어가 안내자를 세운다 쳐도 그것은 더 위험한 짓이었다. 소포는 상당한 액수에 해당하는 양(量)이었다. 노왕(老王)까지도 믿을 수가 없어서 계부가 직접 찾으러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승두(承斗)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안내자가 어떤 음흉한 생각을 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날씨조차 험악한 판에, 길을 안내하는 척하고 도리어 딴 방향으로 끌고 가서 승두(承斗) 하나쯤 감쪽같이 처치해버리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죽든 살든 인제는 집을 향해 걷는 길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승두(承斗)는 결심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냥 짐작으로 방향만을 정하고는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며 걷는 것이었다.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등골에는 땀이 내배어 선득선득 했다. 기를 쓰고 얼마를 더 걸어갔을 때였다. 어렴픗이 저쪽에 사람이 보였다. 이리로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데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한편으론 반가웠다. 반면에 은근히 겁도 났다. 혹시 모친의 지시로 마중 나오는 노왕(老王)이나 아닐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갑자기 저쪽에서 고함을 질렀다. 승두(承斗)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노왕(老王)이 아니라 계부였다. 그래도 순간은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
“네 에 ―”
하고 길게 화답했다. 차차로 승두(承斗)는 실망을 느꼈다. 서로 얼굴을 알아보리만큼 접근하자 그 실망은 완전히 불안으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계부가 그 굵직한 몽둥이를 들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며칠 전 도둑이 들었을 때 문짝을 내리갈기던 몽둥이였다. 모친이 몹시 걱정을 한다는 말을 건네고, 계부는 소포 뭉텅이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승두(承斗)를 앞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그제는 눈도 멎고 바람도 훨씬 약해져 있었다. 승두(承斗)는 앞장서 걸으면서 자꾸만 뒤가 낌낌해 견딜 수 없었다. 계부 손의 몽둥이가 금시 자기의 머리통을 내려칠 것 같은 불안이 전류처럼 흘러가곤 했다. 승두(承斗)는 조금 가다가는 뒤를 돌아보고 돌아보고 하였다. 그 눈에는 공포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때마다 계부 또한 극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승두(承斗)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몇 번 만에 마침내 승두(承斗)는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서고야 말았다.
“앞서 가시라구요, 난 뒤로 따라갈래요.”
계부도 멈칫 섰다. 그 얼굴이 약간 경련을 일으키며 비틀어졌다.
“넌 어디까지나 날 의심할 작정이냐?”
분노와 공포에 찬 두 시선이 한참 동안 서로 얽혀 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물론 계부가 앞장을 서고 승두(承斗)는 몇 걸음 떨어져 뒤를 따랐다. 그러자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별안간 계부가 홱 돌아섰다.
“네가 저엉 그럴 테문 나두 더는 못 참겠다!”
몽둥이를 든 계부의 손이 알아보게 떨렸다. 승두(承斗)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뒷걸음질 쳤다. 좀 뒤에 승두(承斗)는 계부보다 대여섯 칸이나 처져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두워서야 집에 돌아왔다. 계부와 승두(承斗)는 똑같이 피로해 있었다. 한결같이 입을 다문 채 무슨 말을 물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저녁들도 먹는 둥 마는 둥 자리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밤새껏 엎치락뒤치락 하며 계부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승두(承斗)는 노 앓는 소리를 했다. 그 뒤부터는 두 사람의 차디찬 눈에 증오와 공포 외에, 어떤 불길한 예감까지 더하기 시작했다.
요즈음 와서 승두(承斗)는 잠마저 춘화(春華)네 집에서 자는 일이 많았다. 물론 계부네 집이 싫어서였다. 한편 노왕(老王)이 집을 비우는 밤이 많았기 때문에 혼자 자는 춘화(春華)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 노왕(老王)은 다시 노름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어떻게서든 한밑천 장만해야겠다는 심속에서였다. 노왕(老王)은 벌써부터 고용주에 대해서 대우 개선을 요구해왔다. 먹고 자는 것은 걱정 없지만, 용돈도 있어야 하고 옷도 더러 해 입어야 하니, 매달 얼마씩이라도 현금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규(昌奎)는 좀체 응해주지 않았다. 결코 박한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식구 먹여주고, 집을 주고, 그밖에 매일 오 그램씩이나 아편을 주지 않느냐? 결국 현금 대신 아편을 주는 것이니 아편을 그만두고 돈으로 달라면 그건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왕(老王)에게는 아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하루 오 그램도 모자라서 그는 가끔 아는 집에 찾아가 콩이나 수숫대를 얻어다가 약으로 바꾸곤 했다. 손님들에게 졸라서 조금씩 떼 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기회 있는 대로 꾸준히 주인에게 청들이기를 노왕(老王)은 잊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가내였다. 그만한 조건이면 얼마든지 올 사람이 있으니, 싫거든 그만두라는 태도였다. 그러므로 노왕(老王)은 주인에게 은근히 불평을 품어왔던 것이다. 그러한 노왕(老王)은 얼마 전부터 동오(東五)에게도 감정이 좋지 못했다. 내심으로 동오(東五)에게 걸어오던 기대가 그만 헛되이 끊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딸만 없으면 괄시를 받아가며 한국인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 노왕(老王)은, 마침내 동오(東五)에게 딸의 얘기를 비쳐보았던 것이다. 동오(東五)가 춘화(春華)를 귀여워해준다는 말은 여러 사람에게 들어 자기도 알고 있노라 하고, 이제 설만 쇠면 춘화(春華) 나이 열일곱이니, 소문만 퍼뜨릴 게 아니라, 얼른 소실로 맞아달라는 청이었다. 그 말을 들은 동오(東五)는 뒤적이던 잡지에서 낮을 돌리고, 그 번득거리는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노왕(老王)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가만히 머리를 내저었다.
“그건 노왕(老王)의 오해요!”
자기가 분명히 춘화(春華)를 사랑하지만, 아내를 삼기 위한 사랑하고는 전연 다르다는 뜻을 동오(東五)는 설명했다. 즉 이성애가 아니라, 다만 가련한 한 생명에 대한 인간애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동오(東五)는 처음으로 빙긋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던 것이다. 노왕(老王)은 그 의미를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춘화(春華)가 벙어리인데다가, 문벌도 돈도 없는 자기의 딸이라서, 정은 있으면서도 거절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동오(東五)에게 좀체 말을 걸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이 겹쳐서 노왕(老王)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잡아야 되겠다는 결론에 다시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가 그로 하여금 도로 노름판에 몰아넣은 것이다. 오늘도 노왕(老王)은 저녁을 먹기가 바쁘게 방구석에서 춘화(春華)가 아껴 둔 가죽신을 끄집어냈다. 그것을 눈 앞에 치켜들고 이렇게저렇게 살펴보다가, 벌써 볼이 비틀어지고 바닥이 닳고 해서 고물이 되었다 하고, 오늘밤 돈을 따면 신품을 사다줄 테니, 이것일랑 자기에게 맡기라는 시늉을 했다. 남아 있는 춘화(春華)의 물건이라곤 그것뿐이었다. 명절 때나 입는 대단치 않은 옷 한 벌 있던 것도, 벌써 노름 밑천으로 날아가 버리고만 것이다. 춘화(春華)의 귓불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은고리도 노왕(老王) 이 노리는 지 오랬지만, 춘화(春華)는 그것만은 절대로 떼 주지 않았다. 슬픈 눈으로 부친의 얼굴을 쳐다보며, 춘화(春華)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모든 것을 단념한 눈이었다. 노왕(老王)은 몇 번 더 뭐라고 손짓을 해 보이고 나서, 가죽신을 든 채 도망치듯 밖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거의 날마다 한방에서 이마를 마주대고 지내면서도, 승두(承斗)는 도무지 동오(東五)의 정체를 정확히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막연히 경의와 친밀감을 느껴올 뿐이었다. 늘 말없이 잡지를 보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아편을 태우다가, 간혹 승두(承斗)와 춘화(春華)를 양 옆에 꼭 끼고 바람을 쏘이러 나가곤 하는 동오(東五)가, 왜 그런지 승두(承斗)에게는 믿을 수 있고 정이 느껴질 뿐이었다. 낯선 이 광막한 들판에서 그래도 체온이 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동오(東五)와 춘화(春華)만일 것 같았다. 물론 동오(東五)에 관한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런 소문을 종합해 추려보면 대략 이러했다. 소학교 교원인 동오(東五)에게는 상해나 미국에 있는 선배며 친구들에게서 자주 편지가 왔다. 그는 그때마다 아이들에게 미국 얘기를 들려주었다. 말끝마다 중국인을 무기력하고 둔감한 민족이라고 통매²²했다. 지나간 여름 방학 때 동오(東五)는 봉천까지 다녀온다고 집을 떠났다. 그러나 개학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연한²³ 들판에 수수 가을일도 끝날 무렵 해서야 동오(東五)는 바짝 말라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거기 대해서는 동네 사람들의 의견이 구구했다. 봉천서 반일(反日) 동지들과 만나가지고, 미국으로 탈주할 계획 밑에 상해에 있는 선배를 찾아가다가, 일본 관헌에 붙들려 죽게 고생하고 돌아왔으리라는 소문이 그중 유력 했다. 집안에서는 동오(東五)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봉천까지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세력이 차차로 뿌리깊게 파고들어 옴에 따라, 젊은 동오(東五)는 앞날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초조와 불안 속에, 도무지 이대로 배겨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해외에 있는 선배들에게서 무시로 자극을 받아온 동오(東五)는, 부모와 처자까지도 버리고 여기를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는 도리가 아니라고 하는 축이 많았지만, 그만큼 똑똑하고 학식 있는 청년이 이런 촌구석에서 썩기
는 아깝다고 동정하는 패도 있었다. 이러한 소문들을, 어린 승두(承斗)로서는 어떤 깊은 의미와 결부시켜 천착해볼 능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막연하나마, 동오(東五)가 몹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며칠 전 두번째 찾아온 그 부인과 말다툼하는 동오(東五)를 보았을 때, 어쩔 수 없는 그들의 관계가 승두(承斗) 보기에도 답답하기만 했던 것이다. 동오(東五)의 부인은, 얼굴이며 옷차림새가 아무래도 보통 농사꾼하고는 달랐다. 그 부인이 문안에 들어섰을 때 승두(承斗)는 첫눈에 동오(東五)의 부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동오(東五)가 그렇듯이, 이 부인에게도 역시 어딘가 귀공녀다운 면모가 엿보였던 것이다. 부인이 나타나도 동오(東五)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궐련에 아편 가루를 찍어 빨며 여전히 말이 없었다. 부인은 춘화(春華)와 승두(承斗) 쪽을 보고, 부드러운 소리로
“뚜이 부치 (실례합니다) .”
했다. 그러고는 캉 위에 걸터앉아서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춘화(春華)와 승두(承斗)를 자주 보았다. 춘화(春華)를 더 자세히 뜯어보았다.
“어른들께서 가보라구 하시기 에 왔습니다.”
“……”
동오(東五)는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태연히 앉아서 아편만을 피우는 것이다.
“몹시들 걱정하십니다.”
방 안은 다시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수심기 있는 부인의 얼굴은 동오(東五)보다 대여섯 위로 보였다. 아편 가루를 마지막까지 깨끗이 찍어 빨고 난 동오(東五)는 그대로 슬며시 누워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날마다 나와만 계시문 소문두 사납구 어른들이 노상 걱정이시니 되 겠습니까?”
“메이파츠!”
동오(柬五)는 비로소 조그만 소리로 한마디 했다. 부인은 슬픈 눈으로 남편을 굽어보았다. 잠시 그러고 앉아 있다가 부인은 말없이 돌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찾아왔을 때는 제법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 뒤로는, 동오(東五)가 잠까지도 여기서 자는 일이 잦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 안에 척 들어서는 부인의 눈이 지난번보다 날카롭게 번득거렸다. 부인은 꼿꼿이 버티고 선 채, 동오(東五)와 춘화(春華)를 번갈아 노려보듯 했다.
“집 안 꼴이 무에 돼도 당신은 좋단 말입니까?”
동오(東五)는 누워서 잡지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요즘 와서는 밤에두 돌아오지 않으니, 대체 어쩌자는 심속이세요? 늙은 부모님두 몰라보구, 처자두 잊은 듯 밤낮 이런 데 와서 아편이나 피우며 늘어붙었으면, 그래 세상이 바루 된단 말예요?”
동오(東五)는 낯을 찡그리며 일어나 앉았다.
“여보, 예까지 쫓아와서 나를 괴롭히지 말아주우. 나의 자유를 구속하지 말란 말요.”
호소하듯 하는 눈과 음성이었다.
“당신은 왜, 자꾸 당신만을 내세우세요? 그래 부모님이나, 처자나, 집안 꼴은, 아무렇게 되어도 좋단 말씀이에요? 가문의 위신이나 체면두 좀 생각해야 될 게 아닙니까. 더구나 당신은 독자예요. 이러단 집 안이 망하겠어요!”
“차라리 망합시다. 집안두 망하구, 나라두 망하구, 온통 깨끗이 망해버리구 말잔 말요. 그래 부친이나 당신 오빠는, 집안 망하는 게 겁이 나서 친일 요인들과 결탁하려는 거요? 기껏 그게 집안을 건지는 길이란 말요? 모두가 뻔한 노릇이니, 차라리 깨끗이 망해버리구 말잔 말요.”
“자포자기? 여보, 철저히 망해버리는 데는 뜨뜻미지근한 자포자기란 말이 있을 수 없소.”
어느새 방 안은 어슴푸레해 오고 있었다. 말소리가 끊어지자, 별안간 기다리고 있던 어둠이 내려덮치는 것 같았다.
“어서 돌아가우. 나는 인제는 누구에게두 간섭을 받구 싶지 않소. 모든 것은 시간이 결론을 지어줄 것입니다.”
동오(東五)는 도로 누워버리고 말았다. 부인도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원망스럽게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방 안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말았다. 이윽고 부인은 옷자락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림자처럼 나가버리고 말았다. 춘화(春華)와 승두(承斗)는 불을 켤 생각도 않고, 어디까지나 그대로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승두(承斗)는 역시 죽은 부친의 꿈을 가끔 꾸었다. 눈을 뒤솟고 죽어 누워 있던 부친은, 승두(承斗)만 보면 입을 실룩거리며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승두(承斗)는 이를 갈며 계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번번이 힘을 못 당해서, 도리어 계부 손에 거의 죽게 되었다가는 소리를 지르고 깨곤 하는 것이었다. 승두(承斗)는 낮에도 그러한 흰상에 치를 떨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고 승두(承斗)는 마음을 도사려 먹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불길한 환영과 예감은 짓궂게 승두(承斗)를 더욱 괴롭혔다. 영락없이 그는 어떤 무서운 일을 저지르든가, 당하게 되리라는 강박관념 에 사로잡혀 있었다. 춘화(春華)네 집에서 셋이 같이 자게 되는 어느 날 밤에, 승두(承斗)는 괴로운 심리를 동오(東五) 앞에 털어보였다.
“아무래두 난 계부 손에 죽을 것만 같아요.”
동오(東五)는 얼마 동안 잠잠하고 있다가,
“승두(承斗), 여길 떠나버리지, 응!”
하고, 승두(承斗)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동오(東五)의 그 음성이나 태도가 이상히 감상적으로 느껴져서 승두(承斗)는 가슴이 설랬다. 정말 여기를 어서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여기서 떠나게 해주세요. 어디 딴 지방에 취직자릴 하나 구해주세요. 무슨 심부름이라두 하겠어요.”
승두(承斗)는 동오(東五)에게 매달리듯 했다. 동오(東五)는 봉천에 있는 친지들에게 부탁해 보겠노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만에,
“우리 상해로 갈까!”
동오(東五)는 속삭이듯 했다. 호젓한 음성이었다. 어디든 동오(東五)와 같이만 간다면 승두(承斗)는 더욱 만족이라고 했다. 하여튼 자기를 여기서 속히 떠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면서도 승두(承斗)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춘화(春華)를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었다. 춘화(春華)를 남겨놓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걱정이 다 필요 없이 되고 만 것이다. 마침내 뜻하지 아니한 사건이 돌발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밤중이었다. 승두(承斗)는 역시 춘화(春華)네 집에서 자고 있었다. 잠결에 어렴풋이 그는 사람의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이 방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서너 사람이 숨을 죽여 가며 지껄이는 소리였다. 그중의 하나는 노왕(老王)의 음성 이었다. 속삭이는 말의 내용은 심상치가 않았다. 춘화(春華)를 깨워서 미리 준비 시키느냐, 그렇지 않으면 일을 끝내고 와서 데리고 달아나느냐 하는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 문제를 가지고 그들은 잠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다가 춘화(春華)를 깨우게 되면, 자연 승두(承斗)도 눈을 뜰 테니, 위험한 짓이라고 한 사람이 그랬다. 결국 나중에 와서 춘화(春華)를 데리고 가기로 결정을 본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그들은 발소리를 죽여 가며 나가버렸다. 승두(承斗)는 불시에 눈이 또록또록해졌다. 그러자 머리에 핑 하고 오는 어떤 직감이 있었다. 그들은 작당하여 우리 집을 터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예감은 과연 틀림없이 맞았다. 승두(承斗)네 집 쪽에서는 문짝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몽둥이로 무엇을 마구 갈기는 소리, 고함 소리, 절망적인 비명, 그러고는 또 몇 번 툭탁거리더니, 도로 조용해졌다. 승두(承斗)는 머리가 화끈 달아오르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제발 모친과 동생만은 무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그의 머릿속에 죽어 넘어진 계부의 모양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승두(承斗)는 그만 치를 떨고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갑자기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 왔다. 누가 방 안에 뛰어 들어왔다. 노왕(老王)의 떨리는 음성이 꼭 한 마디 났다. 분주히 춘화(春華)를 잡아 일으켜서 끌고 나가는 모양이었다. 승두(承斗)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정신없이 누워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깥이 희끄무레해질 무렵, 주위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와서 승두(承斗)를 잡아 일으켰다. 승두(承斗)는 그 사람에게 끌려 자기 집으로 가보았다. 여러 사람이 현관 앞에 모여 서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상하게 승두(承斗)는 냉정해진 기분으로 사람들이 비켜주는 사이로 방 안에 들어가 보았다. 피비린내가 홱 풍겼다. 계부와 모친은 처참한 꼴로 쓰러져 있었다. 젖먹이 만수(萬壽)만이 한구석에서 여태 세상모르고 쌕쌕 자고 있었다. 승두(承斗)는 불시에 자기의 전신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문기둥에 몸을 기댔다.
장자워프 부락의 한국인 아편 밀매상 부처가 피살당한 뒤에도, 거기서 네댓 칸 상거에 있는 토막집에는, 여전히 동오(東五)와 춘화(春華)와 승두(承斗)가 날마다 모여 지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어린 식구 하나가 더 늘은 것뿐이었다. 그것은 물론 승두(承斗)의 동생 만수(萬壽)였다. 춘화(春華)는 사건 발생 직후, 부친에게 끌려 일시 자취를 감추었다가, 그날 저녁 어슬막해서²⁴ 되돌아왔던 것이다. 말을 못 하는 춘화(春華)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승두(承斗)와 동오(東五)에게 매달려 섧게 울었을 뿐이었다. 헛간 같은 토막집에서는 그 뒤에도 달포 이상이나 그들 네 사람이 모여 살았다. 날마다 어둠처럼 지루한 침묵이 방 안에 고여 있는 것도 전과 다름이 없었다. 간혹 어린애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해토²⁵를 앞둔 어느 날, 각양각색의 그들 네 식구는, 마침내 장자워프 부락에서 종적을 감추어버리고만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떠나가는 그들의 모양을 직접 본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와 비슷한 한 패가 오십 리나 떨어져 있는 정거장에서, 기차 타는 것을 보았다는 풍문이, 장자워프 부락까지 흘러온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끝-
2016년 5월 16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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