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 가무잡잡하고 앳되고 명랑한 아가씨, 만약 1999년이라면 당장 TV 매스미디어의 위력으로 슈퍼스타가 될 그런 독특한 성적 매력의 개성파 신인 여배우였다. 지금의 최진실을 보면 마치 1965년의 그녀처럼 흡사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공개 모집에 응모해 당당하게 데뷔한 신세대형의 신데렐라다. 살고 있는 집이 청진동이어서 청진동 아가씨인 그에겐 소문도 무성했다. 요샛말로 날라리였다느니, 사귀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라느니, 알로 까졌다느니., 몽땅 듣기 거북한 얘기들뿐이었다. 내가 너무 순진해서였을까? 촬영 현장에서 보는 주연은 어리기만 했는데. 오히려 주변의 음담패설만 일삼는 구렁이, 너구리 스탭들이 그녀의 순진한 여백을 더럽히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나는 남이 눈치채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늘 촬영 현장에서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고 시선을 잠시도 그녀에게서 떼어놓지 못했다. 촬영 전날이면 그녀를 의식하여 멋을 부리는 데 거의 시간을 다 보냈고, 촬영 현장에서는 그녀가 나타나기를 숨죽이며 기다렸다. 이렇게 그녀에 대한 열정이 커지면서 나도 은근히 걱정이 됐다. 이러다 잘못돼 가는 것은 아닐는지.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조수 시절 이야기를 자주 떠올려 스스로를 자제했다. 구로사와 감독이 아직 무명의 조수 시절, 어떤 미혼의 여배우를 사모했는데 어느 날 그 여배우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하게도 그 여배우의 어머니에게 모욕적인 폭언을 듣는 봉변으로 끝나고 다시는 그 여배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 가득 찬 연정도 이렇게 찬물을 한바탕 뒤집어써야만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속절없는 감정이 아닌지 스스로 곱씹어도 보고 되새김도 하는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북한산 깊은 산골에 들어가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침 뒤늦게 도착한 주연이 분장중이었고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고 싶은 나는 그녀의 의상을 준비하여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주연이 혼잣말로 무심코 내뱉은 말이 내 귀에 들렸다. "갑자기 왜 찐 달걀이 먹고 싶지."
나는 슬그머니 들고 있던 의상을 그 자리에 내려놓고 물러 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기쁨 가득히 산아래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산아래 마을에서 그곳 정상까지 올라오려면 적어도 삼사십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뛰면서 나는 그녀를 위해 직접 무언가 할 수 있게 돼 너무나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처음 촬영 현장에 있었던 날도 이렇게 여배우를 위해서 뛴 기억이 났다. 영화 (무쇠탈)의 로케이션에서였다. 그 무거운 소도구와 의상의 대나무 고리짝들 짐을 실은 트럭에서 촬영 현장까지 겨우 옮겨 놓은 뒤끝이었다. 여배우 김혜정씨가 갑자기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어머 어떡하면 좋아. 내 하이힐을 산아래에다 그냥 놔두고 왔네."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온 김혜정씨가 산을 오르기 위해 소도구인 짚신으로 갈아 신으면서 깜박 잊고 구두를 어느 바위 뒤에다 두고 그냥 올라온 모양이다. 물론 그 일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내가 스탭 중에서 제일 만만한 막내였으니까. 그때 나는 산아래로 뛰어내려가면서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그 호젓한 산 속에 이르러 큰소리로 외쳤다. "딴따라 인생 이장호! 이렇게 시작한다!" 땀투성이가 돼 산아래에 도착한 나는 겨우 김혜정씨의 구두를 찾아 양손에 나누어 들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기분이 묘했다. 영광스럽기도 하고 수치감도 들고 또 연상의 여배우의 예쁜 발이 담겼던 구두에 성적인 자극도 느끼면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그런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은 또다른 여배우에게도 가졌었는데 역시 영화 (무쇠탈) 촬영 현장이었다. 현장에 막 도착하여 배우들이 분장 끝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요의를 느낀 나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마침 큰절이 있는 경내의 공중변소로 갔다. 조용한 소나무밭 안이었다. 볼일을 끝내고 막 화장실을 나올 때 여배우 최지희씨와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다. 얼결에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지나치는데 "잠깐만요" 하고 최지희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뜻밖에 피우던 담배를 나에게 주었다. "이것 좀 들고 있어요." 나는 어리둥절해서 담배를 받아든 채 그녀가 화장실 안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담배 필터에는 그녀의 빨간 립스틱이 짙게 묻어 있었다. 그걸 무심코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녀의 소변보는 소리가 옹녀처럼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 처음에서 끝까지 꼬박 듣게 됐다. 이윽고 다시 그녀가 화장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에게 담배를 돌려주었더니 그녀는 냉정한 얼굴로 차갑게 내뱉었다. "버려요."
어이없어 하는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최지희씨는 분장하는 사람들 쪽으로 가버렸다. 나는 왜 화장실 앞에서 하필이면 그녀의 눈에 띄어 여배우가 피우던 담배를 들고 기다렸어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훗날 그 이야기를 최지희씨에게 들려주었더니 물론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어서 농담으로 듣기만 했다. "아마 그때 이 감독이 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죠."
위로의 말이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찝찝하다. 그러나 영화 (청산별곡)에서 찐 달걀을 구하려고 산아래 마을로 달려가는 나는 마치 돈키호테 기사처럼 애인에 대한 충성으로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다. 주연을 위해서라면 전쟁터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날 나는 주머니 돈을 다 털어 달걀 24개를 삶아 정성껏 바구니에 담아 여배우 주연 앞에 갖다 바쳤다. 무려 한시간이 넘은 왕복 길이었다. 아! 지금 생각해도 행복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