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94년 12월 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뉴월드 호텔[1] 앞에서 일어난 조직폭력배 간의 보복살인 사건으로, 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조직폭력배들의 세력이 위축되었다.
2. 전개
본 사건의 배경은 1991년 서울 팔레스호텔에서 박진수가 이끄는 목포파의 조직원들이 영산파[2]의 조직원인 최창호를 살해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영산파 측에서는 우호 조직인 그랜드파 두목의 차량을 빌리는 등 보복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했다.
12월 4일, 영산파는 박진수 두목을 주 표적으로 계획을 진행하기로 했는데, 때마침 그가 소속된 목포파는 조직원의 결혼식 때문에 뉴월드 호텔에 모인 상태여서 회칼과 몽둥이를 휴대하고 호텔 밖에 잠복했다.
그 뒤 하객으로 참석했던 목포파 조직원 박신이 조직원 몇 명과 함께 호텔을 나오는 순간, 박신을 박진수로 오인한 영산파 조직원들이 일행을 습격해 박신과 다른 목포파 조직원 유재수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김훈석과 신원미상의 조직원 1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신원미상의 조직원은 자신의 신변 노출을 꺼려 응급실에서 몰래 빠져 나갔다고 한다.
3. 수사
경찰은 이 사건을 지휘한 영산파 두목인 이하영과 범행에 이용된 포텐샤 차량을 제공한 그랜드파 두목 김 모씨를 지명수배했다. 10일 후 사건에 가담한 조직원 3명이 검거 되었고, 이후 다른 3명의 조직원이 자수를 했다. 또한 조직원들을 숨겨준 윤정섭씨 역시 범인 은닉죄로 구속되었다. 다음날 이하영이 검거되고 다른 관련자들 일부가 검거되면서 일단락됐다.
이후 다른 영산파 조직원인 이성식과 조진표마저 구속되면서 관련자 전원이 검거되었다.
4. 판결
1995년 2월 27일 열린 1심 재판이 열렸다. 두목 이하영과 행동대장 안영구는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지만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주요 행동대원인 김광과 이상기 역시 무기징역을, 나머지 행동대원인 박광은, 서재문, 김태영에게는 징역 10년~22년6월을 선고했다. 1년후인 1996년 2월 23일에 이성식과 조진표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조직원들은 교도소 내에서 추가적인 형을 선고받지 않았을 경우 검거된 날짜를 산입해서 2005년부터 2017년에 전원 출소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5. 여파
이 사건으로 조직폭력배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것도 대낮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회칼과 몽둥이를 들고 떼로 몰려가서 살인쇼를 했으니 전국적으로 충공깽을 선사했으며 정부 및 사법당국에서도 조직범죄에 대해 강경한 태세를 취했다. 또한 이 시기 폭력배가 구의원을 해먹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여론이 더욱 악화되어 조직폭력배들은 설 곳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후 간헐적으로 폭력조직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제단속 등으로 큰 타격을 입어 재기불능의 상태에 몰렸고,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거대조직의 형태를 취한 조직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유명무실화 되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사업모델을 바꿔 근근히 세를 유지하는 조직이 있긴 해도 과거에 비해 세가 약해진 건 사실이다.
6. 대중매체
경찰청 사람들에서 이 사건을 두 번 다뤘는데, 하나는 1994년 12월 14일에 방영된 해당 사건 용의자 공개수배였고[3], 나머지 하나는 1996년 3월 5일자 에피소드인 '피의 보복'으로 해당 사건을 직접 다룬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