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게 되는 분, 조금이지만 스포일러 있습니다. 유념하세요.]
멍...
영화를 보고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텅 빈 머리속에 공명이 제 멋대로 울릴 수 있다니~!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채로 절뚝거리며 사냥꾼 르웬델의 망원경에 잡힌 개, 망원경 쪽을 쳐다보는 눈. 그 개를 보며 문득 배스커빌을 떠올렸다. 저주받은 개. 저주의 상징.
현금다발을 보고 눈이 뒤집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그것도 주인 없는, 있어도 뒤가 구릴 듯한 그런... 좌우를 한번 힐끔거리고는... 손을 뻗지 않을 재간이 있나.
불운의 시작. 파멸의 단초.
그 흔한 효과 음악도 없이 영화는 보안관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 숨은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실력이 안되고 자막과 화면으로만 이해해야 하는 진한 아쉬움.
틀어진 마약거래 장소에 널린 시체들, 돈가방을 얻은 한 남자, 그 뒤를 쫓는 청부 살인자, 그리고 보안관.
많은 오락 영화에서 익숙한, 우연히 돈가방을 얻게된 주인공이 고군분투 끝에 자신을 쫓는 살인청부업자/혹은 경찰을 따돌리고 무사히 행운을 만끽한다는 설정, 적어도 돈을 날렸을 경우엔 팔등신 미녀라도 얻게 된다는...
그러나 이 영화에서 돈가방은 행운이 아니고 100% 액귀신이다. 그 불행남(행운남이 아닌)은 한 시도 편히 쉴 틈이 없다. 인간의 추하고 어리석은 욕심은 그 모든 불행의 근원인 액귀신을 떼버리지도 못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안톤 쉬거만큼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킬러는 어느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다. 화면을 꽉 채우는 그의 존재감, 그 존재가 주는 공포와 전율...
사건과 사람을 쫓는 늙은 보안관.
제법 잔머리를 잘 굴리며 액션도 되는 르웬델도, 자신만만하고 뺀질뺀질한 또다른 청부업자 웰슨(맞나?)도, 거대한 자금을 굴리는 마약계의 거물도... 악마적 천재성을 지닌 어쩌면 단순한 어린아이 같은 쉬거 앞에선 무력 그 자체였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보안관이 그 킬러를 만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늙고 지친 보안관은 억세고 거대한, 그러면서도 천진난만한 킬러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르웬델이 죽은 호텔방을 찾는 보안관, 카메라는 폴리스 라인 저 편으로 나란히 마주한 두 개의 문을 비춘다. 구멍난 문고리, 그 너머 어둠 속에 숨죽인 킬러. 그리고 숨죽이는 관객.
문을 열고, 죽은 자가 남긴 핏자국을 넘어 그 안을 둘러보는 보안관... 긴장하는 관객, 공포의, 전율의 순간을 준비하는 관객...
침대에 걸터앉은 노보안관은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FBI요원들이 황급히 한 집을 향해 달려가고, 다음 순간 상원의원의 딸을 납치한 살인마 제임 검프의 집에 벨이 울리고, 당황한 검프는 옷을 차려입고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여는데... 문 밖은 요원들로 둘러싸여 있는게 아니다. 벨을 누른 사람은 한 명의 여자, 홀로 단서를 찾아 더듬어온 햇병아리 스탈링이다.
폴리스 라인 이 편에서 문을 바라보는 보안관과 그 너머 망가진 문 뒤의 어둠 속에서 숨죽인 킬러... 보안관은 문을 밀고 들어가지만, 그들은 그런 식으로 끝내 조우하지 못한다. 그들이 만나고, 그리고 상황이 종료될 거란 내 기대가 무너진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 예상하고 있었다.
3대째 보안관, 숱한 범죄와 폭력을 근거리에서 접했을 그. 그런 그를 이 사건은 끼워 주지 않는다. 참여시켜 주지 않는다. 그가 쫓는, 혹은 쫓았던 사건들은 노인들의 사건. 나름 정당한 이유가 있고 스타일이 있고 정의를 정의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정의감으로 쫓았던 사건.
동전 던지기의 결과가 목숨을 좌지우지하고, 인적 드문 길에서 친절을 베풀다가 영문도 모르고 비명횡사하는... 그 세계에 노인들이 낄 자리는 없다.
보안관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 영화는 보안관의 꿈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오랜 세월 함께 했을, 은퇴한 남편이 부엌일을 도와주겠다고 하자 진심으로 거부하는... 그 아내에게 보안관은 자신이 꾼 꿈이야기를 한다.
지독히도 현실적이면서 한없이 몽환적인 영화.
이 모든 이야기가 보안관의 꿈 속 이야기는 아닐까? 보안관과 킬러가 끝내 마주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 묘한 착각을 준다.
장자의 꿈처럼,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절세의 무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인 사고를 당해 어린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팔을 동여매고 황급히 떠나는 쉬거의 뒷모습은 현실일까 환상일까. 보안관의 상상 속에서, 꿈 속에서, 현실을 달렸던 쉬거는 또다른 현실로 떠난 것은 아닌지, 그곳에서 노인들을 출연시키지 않는 또다른 장소를, 시간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잘 기억나지 않는 하나의 꿈은 끼어들 수 없는 현실이었고, 불밝히고 기다리는 아버지를 만난 다른 꿈이 노인이 갈 수 있는 노인의 나라는 아니었는지...
이 포스터가 주는 메시지도 영화처럼 멍하다. 포스터 안에 노인은 없다. 액귀신을 들고 뛰는 르웬델과 그 뒤를 꽉 채운 석상같이 괴기스런 표정의 쉬거... 온 세상을 감싼 그 공포에서 르웬델이 도망칠 곳은 끝내 없었다.
영화를 본 이후의 감상은 하비에르 바르뎀이 왜 조연이야? 주연 아냐? 이런 감정이었다. 그의 존재는 그만큼 거대하고 그의 악은 온 영화를 짓누른다.
그의 존재와 맞서기는 커녕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하는 늙은 보안관은 그러나,
그의 나라가 없기에 그의 존재도 없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무존재가 존재리니...
그 나라는 또한 그의 나레이션과 꿈 속에서 존재하는 나라이기도 하리니...
설 곳 없는, 참여할 수 없는 무존재를 연기한 토미 리 존스, 그가 주인공인 것이다.
이런 ㅎㄷㄷ한 영화를 만들어낸 코엔 형제, 그들에게 마음 속으로의 박수를 보낸다. 관객으로서 고맙다.
시골에서는 이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거의 없다. 오스카를 탄 이후 서울에도 그나마 상영관이 늘었다는데,,, 일부러는 아니지만 서울 간 김에 본 건 백 번 잘 한 일이다. 다른 일이 없었더라도 이 영화 관람 하나만으로도 의미있는 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나는 노인이다. 여기에 표현된 나라에선 살 수 없는, 나는... 노인.
* 돈가방을 발견하면 신고하도록 합시다. 인 마이 포켓은 금물, 어떤 재앙이 뒤따를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
첫댓글 점유 이탈물 횡령죄 라는 형법상의 조항이...... 하지만 영화에서의 눈먼 돈가방이 눈앞에 있다면 과연....나?.....아마 들고 가서 경찰서 뒷마당 담벼락 어디쯤에 묻었을 거라능....ㅋㅋㅋ
왜 하필 경찰서 뒷마당이야? 물수님 은근히 까칠한 거 이럴 때 드러난다는... ㅋㅋㅋ
얼마전에 거리에서 현금 3만원을 주운 적이 있습니다. 일말의 망설임과 거리낌도 없이 쓱싹해버렸는데 그런 경험으로 볼때 돈다발 .... 문제가 있군요 ㅡㅡ;; 눈먼 돈가방 낚일 가능성 100% ㅠㅠ
돈가방에 들어있는 돈이 아니었으므로... 무효~!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