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출판계에 상당히 핫한 책이 웰 다잉이라고 합니다.
한 출판사에서 웰 다잉을 다룬 영어 서적을 번역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었는데,
대충 훑어보니 별 내용은 없더라고요.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죽는 순간까지 순간에 충실하라.
그리고 명상을 하면 좋다
그러면서 명상수행법을 언급해놓았더라고요.
어디서 죽음을 대비하는 좋은 방법이 명상이라는 것은 알아가지고....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어요.
불교에 관한 재미있는 내용이라면 번역을 했겠지만,
불교 서적도 아니고,
또 요즘 나는 아무 생각없는 것을 즐기고 있던 터라 거절했어요.
나이가 들어가니 머리 굴리는 것도 싫어져요.
현대 사회는 노인 문제가 큰 이슈입니다.
옛날이야 사람들이 잘 죽었으니까 문제가 없었죠.
그런데 현대는 의학이 죽음을 통제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수명은 늘어나고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오면 의술이 조금 멀리 떨구어놓고,
또 가까이 오면 조금 더 멀리 떨구어놓습니다.
그래서 죽기도 힘들고 시간은 남아돌아요.
죽음을 기다리며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막상 죽음이 오면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또 어떤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까?
암에 걸려 지독한 고통에 몰려올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반신불수가 되어 똥오줌을 받아내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요양원에서 죽는 게 나을까?
집에서 죽는 게 나을까?
이래저래 웰 다잉에 관심이 많아지나 봅니다.
죽음에 관해 불교에서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죽을 때 부와 권력과 명예는 가져갈 수 없다. 다만 두 가지는 가져갈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업과 정신 세계이다."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겠죠?
수행으로 얻은 정신 세계와 남에게 배푼 선업 공덕은 가지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영매들이 저쪽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공부'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너 인간 세계에 있을때 공부 얼마 했어?"
여기서 공부는 지식이 아니고 정신 공부라는 것은 잘 아시겠죠?
이쪽 세계에서야 사악하던 정직하던, 인성이 좋던 나쁘던, 계율을 잘 지키던 개판으로 살던, 배풀고 살던 자기밖에 모르던, 관계없이 부와 권력과 명예 등으로 계급이 정해집니다.
그러나 저쪽 세계에서는 부와 명예와 권력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거기서는 선업 공덕을 얼마나 지었느냐?
정신 수행을 얼마나 했느냐?
이것으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또 죽음에 관해 불교에서 강조하는 말이 있어요.
"죽는 순간의 마음이 다음생의 삶의 수준을 결정한다."
성성적적하게 깨어있는 마음으로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가고,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혼미한 가운데 죽으면 안 좋은 곳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아비담마에서 여기를 자세히 설명해놓았는데요.
"죽음이 막바지에 이르면 금생의 마지막 마음(이것을 '죽음의 마음'이라고 함,)에 하나의 대상이 떠오른다. 그 대상은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 중 하나이다. 그 표상이 다음생의 최초의 마음인 '재생연결식'으로 이어진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요?
당신이 살인을 저질렀으면 살인하는 모습이나, 살인 도구나, 지옥의 불구덩이가 보인다면, 다음 행선지는 지옥이라는 뜻입니다.
스님에게 공양을 올렸는데 공양올렸던 모습이나, 공양올렸던 음식이나, 천상의 궁전이 보인다면 다음 행선지는 천상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을 열심히 수행했고, 죽는 순간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죽음을 통과한다면,
아직 도과를 얻지 못하고 열반의 맛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다음생을 좋은 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당신이 열심히 수행해서 삼매를 성취했고, 죽을 때 삼매에 들어 죽는다면, 다음 행선지는 범천(색계 천상)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에 관한 불교의 이야기 중에 가장 극적인 장면은 선어록에 기록되어 있는 중국 선사들의 열반 모습입니다.
수행을 통해 진리를 깨달은 위대한 선사들의 열반은 범상치 않는 특별함이 있죠.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아서 가고 서서간다!
누워서 가는 분은 없습니다.
누워서 가면 공부가 덜 된, 뭐 그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나 봐요.
누워서 가는 것은 정력(성적 에너지가 아니고 정신 에너지)이 부족하다, 뭐 그런 뜻인가 봐요.
그래서 열반에 들 때 뭔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죽는 순간에 특별함을 보여주느냐 마냐로 그 사람 일생의 정신 공부를 판별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죠.
괴짜로 소문난 등운봉 선사는 열반에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물었데요.
"남들은 앉아서 가고 서서갔는데, 혹시 물구나무서서 간 사람이 있었던가?"
제자들이 없다고 하니까 의기양양해하면서,
"그럼 나는 물구나무서서 가겠다."라고 선언하고
실재로 그렇게 물구나무 서서 갔다고 하는군요.
가장 드라마틱한 모습을 보인 분은 단연코 단하천연 선사입니다.
그분은 토방 마루에 앉아서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자, 나는 이제 가야겠다! 신발을 신겨라!"
제자들이 신발을 신겨주자 마당에 내려서서 몇 걸음 걷더니 진짜로 pass away했다는군요.
캬! 얼마나 멋집니까?
이것이 진정 생사를 초탈한 대자유인의 모습이 아니겠어요?
진리를 깨달은 성인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이것에 매료되어 한동안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을 했었습니다.
미얀마의 순룬 사야도도 이적을 보였는데요.
그분은 열반에 드실 때 유체를 화장하지 말고 놔두면 이적을 보일 것이라고,
그래서 제자들이 습한 동굴 법당에 모셨는데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부패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문제일 아난다 존자님도 열반에 들 때 갠지스 강 양쪽 나라에서 서로 자기 나라에서 열반에들기를 권하자, 갠지스 강 한 가운데 공중에서 스스로 화광삼매에 들어 자신의 몸을 화장하고 유골이 양쪽 나라로 나누어 떨어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런 풍조로 한국의 큰 스님들이 열반인지 죽음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게 갈 때 되도록이면 앉아서 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상좌들이 조작인지 아니면 큰 스님의 실제 정신 세계인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붓다는 좌탈입망을 하지 않고 세로로 누워서 열반에 드셨어요.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세로로 누워 팔배개를 한 자세로 말입니다.
(붓다는 생전에도 세로로 누워 팔배개를 하고 하루 2시간 주무셨습니다.
그 자세가 잠이 들어도 깨어있음을 유지하는 자세라고 합니다.
붓다는 등을 바닥에 대고 정자세로 누워자는 것을 아귀들의 잠이라고 훈계하셨죠.)
이렇게 죽는 순간에 활발자재한 모습을 보여주면 좋은데
대부분 사람들은 죽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습니다.
대체로 암에 걸려 고통스러워하거나
치매에 걸려 앞뒤 분간을 못하거나
반신불수로 똥오줌 수발을 받아가며 구질구질하게 수명을 연장하거나
혼수상태에서 헤매다가 가게 됩니다.
그냥 팍 죽어버린다던가
잠자듯이 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다가 갈지 알 수 없어서 두려운 겁니다.
(아니 잠자듯이 가는 것은 문제가 있는가?
성성하게 깨어서 가야하는데 잠자듯이 간다는 것은 혼미한 상태이니 좋지는 않겠네요.
팍 죽어버리는 것도 문제가 있는가?
죽음을 충분히 준비하고 의미를 생각하면서 가야하는데
갑작스러운 죽음은 미처 대비를 못하고 가는 것이므로 역시 좋지 않겠네요.)
내가 50세 때 이렇게 생각했어요.
"참 많이 살았다. 이제 한 10년만 더 살고 죽어야겠다."
또 명상 중에 마음이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는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아! 이제 여한이 없다. 이제 가도 되겠다."
그런데 60이 되었는데도 점점 더 성성해지니 이제 살짝 고민이 듭니다.
"그러다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사는 게 아냐?"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더라구요.
"총알이 날아다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날까?
혹시 눈 먼 총알에 맞으면 바로 갈 수 있는데."
(농담입니다. 너무 진지한 사람한테 농담하면 화를 내더라고요.)
병에 걸려 고통스러울 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이것이 죽음이 가까이 온 사람에게 문제가 되겠군요.
"죽음이 오면 당당하게 맞이하리라!"
이런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막상 암에 걸리면 조금이라도 오래 살려고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하더라고요.
잘라내고 이어붙이고 항암주사 맞고 방사선 쐬고 발버둥치더라고요.
그렇게 발버둥치다가 결국 암이 재발하고 고통은 더 심해지고
이제 마약이라도 맞지 않으면 고통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는 거죠.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을까?
생명에 대한 애착을 그렇게 놓기가 싫은 것일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좋다고요?
거 참!
존재에 대한 욕망이 성욕보다도 더 뿌리깊은 가장 원초적 욕망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내가 아는 한 비구니 스님은 아버지가 병원 침대에 누워 혼미한 상태로 죽을둥말둥 하면서 계속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고 아버지 귀에 대고 그랬데요.
"아버지, 이제 그만 가세요. 뭐가 미련이 있다고 그렇게 안 가고 버티세요. 이제 집착을 놓을 때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바로 죽더랍니다.
집착으로 죽으면 가는 길이 괴롭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찾아오기전에 미리 수행을 통해 고통에 무심해지는 경지에 이른다면 가능할까요?
오, 그게 대단한 경지인데,
상카루펙카냐나(현상에 대한 평온의 지혜)인데,
위빠사나 수행의 막바지에 이른 경지인데,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아니면 사마타를 닦아서 삼매를 성취하면 어떨까요?
그래서 고통이 찾아오면 삼매 속으로 도피하는 거죠.
삼매의 특징이 희열과 행복인데, 희열과 행복 속에 들어가 있으면 고통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깊은 삼매라야 되겠죠?
붓다께서 바이샬리에 머무실 때 끔찍한 등통이 일어났어요.
이것은 과거생의 업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붓다께서 과거생에 레슬러였는데 상대 선수의 허리를 뿌러뜨렸다고 하더군요.
그때 붓다는 과삼매에 들어 그 지독한 고통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과삼매는 아라한과의 삼매를 말하죠.
열반을 대상으로 마음을 기울인 상태, 쉽게 말하면 열반에 들어있는 거죠.
그런데 범부에게 과삼매는 말도 안되는 것이고 사마타 삼매에 들어가야 하는데,
사마타 삼매조차도 번뇌가 거의 소멸되어 고요와 평온이 있는 근접삼매가 먼저 일어나야 하고,
그 근접삼매라는 것도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생각이 정지된 상태로 최소 한 시간이 넘어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본삼매라고 하는데,
그러면 삼매도 쉽지 않겠죠?
마지막 방법이 하나 더 있어요.
고통에 대한 인내를 키우는 겁니다.
인욕 바라밀을 완성하는 거죠.
어떤 고통도 참고 견뎌내는 수행을 하는 거죠.
담배피우고 싶어도 참고
술마시고 싶어도 참고
티브이 보고 싶어도 참고
영화보고 싶어도 참고
아침 점심, 하루에 두끼 먹으며 오후불식 계율을 지키며 배고픔을 참고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내는 수행을 하는 겁니다.
이게 매우 현실적인 것 같은데 어때요?
미얀마에 가면 그런 수행센터가 있어요.
앉아있거나 서있거나 한 자세를 움직이지 않고 10시간 이상 버티는 겁니다.
10시간 동안 발을 바닥에서 떼지 않고 서있으면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일어나는데요.
그 엄청난 고통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데 어떻게든 견뎌내는 겁니다.
인욕의 끝을 보는 겁니다.
한 번 그렇게 인욕의 끝을 보면 어떤 고통도 별 게 아닌 것이 된다고 하더군요.
해인사 스님이 거기서 14시간을 서있었는데 발바닥에 화상을 입어 발바닥껍질이 훨라당 벗겨져서 왔더라고요.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가부좌를 하고 정진할 때 시간이 지나면 무릎이 아프고 고통이 밀려옵니다.
이때 고통을 정확히 직시하면 고통이 느껴지지 않죠.
하지만 이것은 사마타입니다.
고통을 억압시켜 놓은 상태입니다.
위빠사나는 고통이 일어나도록 놔두고 그것에 반응하는 마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것도 무상한 것이다.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거기에 고통을 경험하는 '나'라는 것은 없다.
단지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단지 생각이 아니고 실재로 그런 것을 경험한다면 깨달음이 멀지 않습니다.
그런 육체적 고통 말고 죽음은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럽습니다.
왜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울까요?
집착 때문이죠.
생존에 대한 집착, 삶에 대한 집착, 재산과 가족에 대한 집착, 집착들....
놔두고 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집착 속에 죽으면 가족 주변을 맴도는 조상신(아귀)이 되지 않을까요?
다른 세계, 즉 지옥, 축생, 인간, 천상의 세계는 그 세계의 음식으로 살아가는데,
아귀 세계 만큼은 인간이 공덕을 지어서 회향해주지 않으면 쫄쫄 굶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공덕을 지었으면 항상 조상들에게 회향을 해주어야 한다고 하는군요.
회향을 어떻게 하냐고요?
그냥 합장하고 그날 자기가 배푼 선행공덕을 조상에게 회향한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말해도 되고요.
제사 음식을 차려주거나 천도제를 지내면 되지 않냐고요?
그게 유교의 풍습이고 초기경전에서는 공덕을 지어 회향해야 아귀 조상신 앞에 음식이 나타난다고 되어 있어요.
어느 것이 맞을까요?
난 붓다의 말씀에 믿음이 갑니다.
아귀의 세계가 진짜 있는지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집착을 여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역시 수행을 해야겠죠?
수행을 하면 마음의 짐이나 집착을 많이 내려놓지 않겠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나는데로 적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그래서 워쨌다는 것이냐?
이야기의 진행 방향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짐작하셨죠?
결국 뭡니까?
수행을 하라!
이런 이야기가 아니겠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쓸데없는데 시간을 보내지 말고
어차피 남아도는 시간 명상이나 하라.
이것을 내생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해라.(사람들은 투자를 좋아하니까.)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두렵지도 않냐?
수행을 하라!
뭐, 이런 뻔한 결론 아니겠어요?
"죽는 순간에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죽음을 통과하라!"
죽는 순간에 정신이 혼미해지면 알아차리면서 죽음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전에 숙달되어 있지 않으면요.
근데 이거 알아요?
호흡만을 관찰하면 사마타요.
호흡과 동시에 마음을 관찰하면 위빠사나라는 것을.
-우아! 너무 길다. 근데 하나의 주제인데 자를 수도 없고. 에라이 그냥 올리자!
-나도 웰 다잉에 관한 책이나 한 권 저술해볼까?
-에잉, 머리쓰는 게 싫은데.
오을은 오전에 바쁜 일이 있어서 점심을 오후 2시에 먹었다.그런데 이 시간은 참 더운 시간 이기도 하고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이 유혹을 했다. 그러나 앉아서 좌선을 했다.생각 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호흡을 챙기며 명상을 하는데 이데로 죽어도 ... ㅎㅏ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뜨고. 그런데 스님께서 Well Dying 말씀을 올려 주셔서 ...어제도 이웃 친구와 죽음에 ㄷㅐ해 이야기를 했는데, 향상 순간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호흡을 챙기는 (사띠)마음을 놓지 안을려고 노력 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_()_
dieing 이 아니라 dying 입니다.
감사합니다.
써놓고도 왜 이상하다 했어요.
스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오을은 오전에 바쁜 일이 있어서 점심을 오후 2시에 먹었다.그런데 이 시간은 참 더운 시간 이기도 하고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이 유혹을 했다. 그러나 앉아서 좌선을 했다.생각 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호흡을 챙기며 명상을 하는데 이데로 죽어도 ... ㅎㅏ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뜨고. 그런데 스님께서 Well Dying 말씀을 올려 주셔서 ...어제도 이웃 친구와 죽음에 ㄷㅐ해 이야기를 했는데, 향상 순간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호흡을 챙기는 (사띠)마음을 놓지 안을려고 노력 합니다.
훌륭합니다. 수행이야말로 다음생을 위한 최상의 대비책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무념스님에
웰 다잉
기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두사두사두
제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고승들의 죽음이었습니다. 스스로 옷벗을 날을 정해두고 그때가 오면 목욕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조용히 입적합니다. 이 분들이 어떤 준비를 했기에 이렇듯 멋지게 죽을 수 있을까. 이모저모로 그걸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