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南人)들의 정신적인 지주요, 정조 때 수원성 건설 책임자며 수년 동안 독상(獨相) 한 정승이 다른 정승의 업무를 겸함)으로 명성을 떨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종손을 그의 종숙모(從叔母)를 통해서 만날 수 있었다. 번암 7대 종손인 채수용(蔡洙用, 1932년생) 씨는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동의 아파트에 부인 고령 신씨와 살고 있다.
필자는 번암 종가 소식을 지난해 10월 11일 종가 소장 유물을 수원시에 기증한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보도된 내용은 ‘번암 채제공 선생의 6대 종손인 채호석(78, 서울 서초구 서초3동) 씨가 135점의 유물을 수원시에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다음날 수원시장 등 관계자와 유물을 기증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선보였다. 그러나 채호석 씨는 종손이 아니다. 이는 언론의 오보다. 채호석 씨는 7대 종손의 종숙(從叔, 5촌아저씨)이다.
채호석 씨의 부인 김양식(韓印문화연구원 원장, 1931년생) 씨를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종손의 종숙모인 김 씨는 번암 채제공 선생의 유물과 자료를 모으고 선생을 현양하는 데 일생동안 노력했다. 그간 수집한 참고 자료철이 몇 권에 이르고, 자비로 관련 사료를 모으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집 와서 번암 상공 댁임을 알고 ‘평생 이 어른을 현양하며 살아야겠다. 그것이 내 운명이다’ 생각했습니다.”
종가 소장 유물은 종손과 종부의 헌신적인 희생과 노력으로 유지, 보존된다. 형언키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세전(世傳) 유물에 대해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반가(班家)에서는 당연함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처연(悽然)함으로 이해한다. 기증 유물 목록을 보니 10여 장에 이르는 국왕 정조의 친필도 남아 있었다. 경매하면 편지 한 장만으로도 적지 않은 돈을 받을 수 있음에도 그러한 일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지켰고, 이제 이를 사회에 희사한 것이다.
번암 종가는 특히 손이 귀한 집이다. 7대를 이어오면서 세 번의 양자가 있었다면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다. 양자는 후사를 두지 못해 가문의 단절이 우려될 때 행해진다. 따라서 과정의 우여곡절로 인해 온전한 전통 계승이 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번암은 아들과 손자 양 대와 현손 대에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고, 현 종손의 조부에 이르러 3대동안 종자(宗子)로 대를 잇고 있다.
종손은 어려서부터 가난과 지병으로 정상적인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다. 7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말을 듣고 초년 고생에 대해 더 묻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가난은 세습되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산업화와 도시화의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세의(世誼)가 있던 강주진(姜周鎭, 전 국회도서관장, 1919년생) 박사가 종손에게 국회도서관 일자리를 마련해주어 20여 년간 근무했다. “고모댁이 있는 섬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강 박사께서 백방으로 번암 종손인 저를 찾아서 서울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이야기 많이 들었네, 그만 나하고 같이 근무하세’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건강 때문에 1년이나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 20여 년 동안 국회에서 근무했어요.
그런 고마운 분이 없어요. 제 은인입니다.” 성음이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강주진 박사의 은혜에 무한히 감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세의란 사승, 혼인, 동방, 같은 당류, 동향, 동경(동갑) 등으로 맺어져 상당기간 지속된 우호적인 관계로, 개인 또는 가문이나 집단간에 오래 이어져 형성된다. 이들은 은혜를 골수에 새겨 잊지 않았다. 세의는 번암의 스승 국포(菊圃) 강박(姜樸, 1690-1742)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번암의 종조부인 채팽윤의 시맥(詩脈)을 계승한 이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강 박사가 세의를 말했다면 필시 그는 국포 강박의 후손일 것이다.
종손에 있어서 종숙 내외는 든든한 후견자요 대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종손 역시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았다. 매사를 종가를 지킨다는 관점에서 사심 없이 일을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지공무사(至公無私)’. 매우 공적이어서 조금의 사사로움도 없다는 이 말이 번암 종가 종숙 내외의 처사에 핍근(逼近)하다고 생각한다.
종숙모 김양식 씨는 역주(譯註, 이종찬)된 <함인록(含忍錄)> 한 권을 내놓았다. 이 책은 부제로 채제공연행시(蔡濟恭燕行詩)라고 되어 있었다. 종숙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한 원로 시인으로 <겨울로 가는 나무> 등 일곱 권의 시집과 다수의 번역서, 수필집을 냈다.
이제 번암 종가에서는 그간 올곧은 정신 하나로 간직해온 힘겹고 무거운 짐을 수원시 화성박물관에 내려놓았다. 차후 종숙 내외를 중심으로 번암 선생을 기념하는 모임을 결성해, 보다 체계적으로 현양 사업을 펼 예정이라 한다. 2005년 문화재청에서 개혁정신과 혁신리더십의 스승으로 꼽은 조선 시대 학자 7인(정도전, 이이, 류성룡, 김육, 최명길, 채제공, 정약용)에 번암이 들어 있다. 번암 선생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봄직하다.
체제공 연행시집 함인록(청나라의 오만함 詩로 응징)
번암 채제공의 연행시집이다. 번암 채제공은 정조2년(1778년, 59세) 왕복 132일 일정으로 청나라에 사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다녀오면서 노정에 따라 236수의 한시를 지었다. 이 책 이름은 원한을 삼키고 분통을 참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처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사행은 56년간의 벼슬살이 중 가장 굴욕감을 느낀 때이기도 하다. 진주사는 청 왕실에 알린 정조 즉위에 대한 외교 문서가 격식에 맞지 않아 그에 따른 해명 차원에서 만들어진 사행. 병자호란이라는 민족적 굴욕을 가슴에 품고 있던 차에 이러한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 이를 원만히 풀 적임자로 번암이 뽑힌 것이다. 번암은 굴욕을 참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렇지만 줄곧 그 불편한 마음을 토로할 곳이 없자 당초 자신만이 볼 목적에서 기행시를 지었다. 놀라운 점은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정도를 넘어섰다는 데 있다. 실승사(實勝寺)라는 제목의 시가 대표적이다.
사월 정향꽃 가지 가득 피었어도
나그넨 말없이 비석만 훑어본다.
우리는 안다네, 바다 위 저 둥근달도
이내 그 모습 이지러진다는 것을.
실승사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원찰(願刹)로, 친필로 쓴 ‘해월상휘(海月常輝)’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 시가 단순히 그 현판 구절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랑캐로서 한족의 문화를 말살했고, 조선을 침범해 굴욕을 안겼으며, 외교적으로도 이웃나라를 업신여기는 청나라의 오만함을 사행 길에서 한 편의 시로 응징한 것이다.
‘기고만장한 건륭황제, 당신도 머지않아 기우는 달 신세가 될 것이요’라는 그의 시 내용과는 달리 건륭황제는 이후 17년을 더 황위(재위 60년)에 있었다. 당시 사행 길에는 서장관으로 명문장가 심염조(沈念祖, 1734-1783)가, 종사관으로는 북학파 대가 박제가(朴齊家)가 수행해 유명한 북학의(北學議)라는 책을 남기기도 했다. 심염조는 그 휘하에 청장관 이덕무를 대동했다. 이덕무는 연암 박지원의 절친한 벗으로, 연암은 그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여 한음 이덕형이나 문곡 김수항 정도의 성취가 있을 것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채제공 1720년(숙종46)-1799년(정조23)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시호는 문숙(文肅)영·정조 때 탕평책 실행의 주역…
수원 화성 축조 총지휘 조선의 개혁다운 개혁이라고 하면 탕평책(蕩平策)을 떠올릴 수 있다. 영조가 처음 시작한 탕평책은 정조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미완의 개혁으로 끝났다. 영조가 탕평비(蕩平碑)를 세워 그 확산에 힘썼고 정조는 자신의 거처를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까지 지어 결의를 다졌다. 탕평책의 핵심은 인재의 공평한 등용에 있었고, 덕분에 재야에 있던 소론과 남인 선비들이 다수 발탁되었다. 정점에 번암 채제공이 있었다. 그렇기에 번암의 부침은 탕평책의 성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번암 자신도 학통으로 보면 미수 허목에 닿는 청남(淸南)의 후예이지만 이를 뛰어넘어 대통합을 이루려는 소명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포용과 공정함으로 매사를 처리하고자 했다. 그는 ‘서회(書懷)’라는 시에서 “내 몸은 서남노소국을 벗었고(身脫西南老少局)/내 이름은 이예호병 반열을 뛰어넘었네(! 名超吏禮戶兵班)”라 노래했다. 이 시구는 ‘서인, 남인, 노론, 소론이라는 당파적 굴레를 벗어버리려 했고, 조정에서는 이부, 예부 호부, 병부니 하는 구획마저 뛰어넘고자 했네’라는 의미다. 짧은 시구이지만 탕평책 전도사로서의 드넓은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탕평책 실시는 그러나 결국 기득권 세력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자리가 사라지는 손실을 의미했다. 거개가 노론 세력이었는데, 반감의 대상에 소론과 남인이 있었고,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번암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번암은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공격이 얼마나 집요했는지는 국왕인 정조가 번암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간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해도/결코 나는 의심하지 않았네”라는 표현으로 짐작할 수 있다. 노론 세력은 정조와 번암의 개혁에 쉼 없이 제동을 걸었고, 만물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었던 번암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침내 총공세를 폈다.
“채제공은 글을 쓰는 데는 소차(疏箚)에 뛰어났고, 일을 만나서는 권모술수를 좋아했다. 외모는 거칠게 보였으나 속마음이 실상은 비밀스럽고 기만적이었다. 늘 연석(筵席, 경연 석상)에 나아가서는 웃으며 말했다. 누구를 찬양하고 헐뜯거나 찬양하는 데 있어서 교묘하고 상(上)의 뜻을 엿본 뒤 물러나서는 상의 총권(寵眷)?빙자하여 은밀하게 자기의 사적인 일을 성취시키곤 하였다. (중략) 서학(西學, 천주교)에 연연해 흐리멍텅한 태도로 은근히 사당(邪黨)을 비호하다가 끝내 하늘에 넘치는 큰 변이 있게 만든 사람이다”라 했다.
이례적인 것은 이러한 평 뒤에 국왕의 전교(傳敎)가 실려 있는데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는 내용이 왕조실록에 보인다. 국왕은 번암은 대신(大臣)이라고 한 뒤 남은 알지 못하고 나만이 아는 ‘오계(奧契)’가 있다고 했다.
‘오(奧)’라는 글자는 ‘속’이라는 뜻으로 ‘속마음’을 말한다. 번암은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를 가르쳤고, 정조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세손의 사부(師傅)로서 깊은 교감이 있었던 관계다. 이러한 표현은 번암이 도승지로서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의 폐위를 막은 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 후일 영조는 정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요 나의 충신이다”라고 소개했다.
정조와 번암은 부자유친(父子有親)에서 보이는 ‘친(親)’을 느끼는 사이였다고 생각한다. 국왕이 번암의 장례일에 지어 바친 글을 읽어보면 언외(言外)에 넘치는 친함을 느낄 수 있다. 그 글이 오석(烏石)에 새겨져 단청을 한 비각 속에 남아 지금도 길손에게 증거하고 있다.
조정에 노성한 신하 없으니
나라의 일 이제 어찌할 것인가.
친히 기리는 글 지으니 오백여 마디
평소의 일 두루 서술하니
나의 글에 부끄러움 없네.
아들 홍원에게 이르노니
선친을 더럽히지 말지어다.
마지막 구절인데, 번암의 그 훌륭했던 얼을 상주에게 어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수년간 나홀로 정승지낸 獨相
번암 하면 독상(獨相)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연보에 보면 3년 독상을 했다고 되어 있고 왕조실록에는 5년 독상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독상’은 왜 생겼을까? 이는 삼공(三公)과 같은 중임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고 여긴 때문이다. 하여튼 그는 상당 기간 동안 혼자 정승을 지내며 국정을 살폈음이 분명하다. 역대로 독상을 지낸 이를 살펴보니 세종 때 방촌 황희, 선조 때 소재 노수신, 현종 때 퇴우당 김수흥 정도가 있을 정도로 드물다.
조선시대에는 세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대해 최고의 존경을 표했고, 그들도 영예로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성씨에는 정승이 몇 분이다’라는 것으로 가문의 위상을 말했다. 실제로 영남 남인들의 본거지인 경상북도에서 조선 시대에 정승을 지낸 이를 손꼽아보면 소재 노수신,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낙파 류후조 등에 불과해 그 적은 수에 놀란다. 각 왕조마다 무수한 정승이 명멸해 갔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도 정승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번암은 영의정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여러 해 동안 동료 정승 임명 없이 단독으로 업무를 수행했다는 점이 놀랍다. 더구나 당시는 국왕이 망국적인 당파를 혁파하겠다고 탕평책을 펼쳐 정파 간의 이해가 첨예했을 때였다. 번암은 국왕의 탕평책을 받들어 노론과 남인을 넘나들며 조정하고 화해하며 그 운신의 폭을 넓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영남의 양심적인 사류 발굴과 그들의 숙원이었던 명예회복에 힘썼다.
번암 집안은 명문이다. 번암 자신은 채씨를 ‘나라의 저명한 성씨(國之著姓)’라 규정했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효도와 공손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중심에 종고조(從高祖)인 채유후(蔡裕後, 1599-1660)가 있다. 채유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들어갔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인조와 수정선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특히 영조는 채유후의 문집(湖洲集)에 글을 적고 당시 승지로 있던 현손(玄孫)인 번암에게 글씨로 쓰도록 명했을 정도였다.
채유후의 손자 대에 수찬을 지낸 오시재(五視齋) 채명윤(蔡明胤, 종조)과 대사간을 지낸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 종조)도 유명하다. 조부인 채성윤(蔡成胤)은 한성부윤을 지냈고 부친인 채응일(蔡膺一)은 진사시에 1등을 한 뒤 단성과 비안 고을 수령을 지냈다. 35세 때에 충남 청양에서 번암을 낳았다.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구재리로 선생을 추모하는 사당이 남아 있다. 번암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았다. 따라서 다산에게 번암은 사장(査丈)이 된다.
막힘없는 문장으로도 명성
번암 상공의 문집을 보면 ‘역시 채번암’이라는 생각이 든다. 막힘 없는 문장과 정채한 문채로 많은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번암이 지은 서문이나 행장, 신도비명 한 편으로 그간의 억울함을 풀기도 하고 문중의 위상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래서 앞다투어 글을 봉청했다. 필자의 17대조 문집 서문 역시 그러한 대접을 받고 있다. 입향조 문집에는 특유의 돈암 상공 필체가 그대로 남았다. ‘돈암집서(遯菴集序)’라는 제목으로 실린 서문을 다시 읽으면서 번져오는 가슴의 감동을 억누를 길 없었다.
입향조는 단종을 지지해 성균관에서 나와 고향도 버린 채 산간 오지였던 충절의 고장 경북 순흥(順興) 땅으로 찾아들었다. 입향조 자신은 물론 숙종 대까지 숨죽이며 살았기에 유고를 잘 챙기지 못했다. 겨우 직접 지은 시 한수와 후대에 충절을 기린 글을 수습해 '일고(逸稿)'로 엮어 비로소 서문을 청했다. 가문의 성취로 보면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나 충의의 정신만은 뒤지지 않는 터였다. 서문을 청한 10대손은 그러한 보잘 것 없는 문집을 내놓기에 면구했던 모양이다.
그러한 기운을 간파한 번암은 웃으면서, “그대는 채미가(採薇歌)를 아십니까? 그 노래는 모두 44글자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빛은 태양과 달처럼 하늘에서 아름답게 빛나지 않습니까? 채미가가 짧다는 사람을 듣지 못했습니다”라 하면서 입향조의 시 두 수를 백이숙제가 불렀던 채미가(고사리노래)에 견주었다. 이는 최고의 찬사요 격려였다. 번암의 글 구성 수법과 의리를 드러내는 법식이 대체로 이러했다.
번암의 이러한 태도는 매사에 선(善)을 다하라는 다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번암의 당호는 ‘매선당(每善堂)’이었다. 다행히 다산 정약용이 쓴 매선당의 기문이 남아 있어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다산이 문과에 급제한 뒤 번암 상공 댁을 찾았고, 그곳에서 매선당이라는 현판을 보았다. 유래를 묻자 번암은 “이것은 내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뜻일세. 선고께서 임종하실 때 내 손을 잡고 ‘너는 매사에 선(善)을 다하라’라 말씀하시고 돌아가셨네”라 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비로소 번암의 적선(積善)이 유래가 있는 말임을 알았다. 다산은 기문에서 중용 구절을 인용해 매사에 완벽한 선을 굳건히 지켜 실천할 것을 주문했다.
번암은 수원화성 축조와 사도세자의 능(顯隆園) 건설의 총책임자였다. 당시 번암은 70세의 노구로 좌의정 자리에 이른 원로 대신이었다. 그만큼 성 건설은 중요한 일이었다. 수원화성은 2년 6개월 만에 완성되었는데, 번암을 비롯한 다산 등이 참여한 성 축조에는 거중기 등 과학 기술이 동원되었다. 1796년 9월에 완성된 수원화성은 종묘, 창덕궁 등과 함께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798년 정계에서 은퇴한 번암은 80세를 일기로 1799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왕명으로 문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오늘날의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에 장사지냈다. 사후 즉시 왕명으로 문집 간행이 추진되었고 천주교를 비호했다는 노론 벽파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추탈당했다.
평소 양심적인 세력으로 지지해주었던 남인 선비들에 의해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순조24년(1824)에 서애 류성룡의 8대손인 학서(鶴棲) 류태좌(柳台佐, 하회 본가 후손들은 ‘태’자를 너라는 의미의 ‘이’자로 읽는다) 등의 주도로 안동에서 번암집이 간행되었다.
시공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세의(世誼)를 확인하는 셈이다. 목판은 이후 안동시 서후면 소재 봉정사에 보관되었며, 다시 안동 김씨 소산종중에 의해 점유되었다가 근자에 번암 문중이 인수해 안동시 소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했다. 유물 대부분이 수원시에 기증된 것에 비해 목판은 안동에 남아 200년 전의 세의를 매개하고 있다.
시절 인연을 기다릴 줄 알았던 현인, 채제공
목화(木花)와 화부화(花復花) 정조 임금은 과거 시험을 치룰 때 매번 흔하지 않은 책에서 아무도 모르는 과제(科題)를 내어 시험을 보였다. 한번은 ‘화부화(花復花)’라는 제목으로 문제를 내고 싶었으나 오직 채제공만은 알고 있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 후 채제공(蔡濟恭)이 죽자 정조는 다시 이 제목으로 문제를 내기로 하였다. 영남에 사는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다가 용인에서 날이 저물었다. 하룻밤 자고 갈 집을 찾다가 한 노인이 살고 있는 집에 묵게 되었다. 그 날 밤 노인이 말하기를, ꡒ금번 과제는 ‘화부화(花復花)’일 것이니 그대는 그 것을 제목으로 과거시험 준비를 하시오.ꡓ 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뜻을 모르자 선비는 어떤 책에 나오는 글이며, 또한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화부화(花復花)는 목화라고 알려 주었다. 왜냐하면 목화는 꽃이 피는 것은 물론이오, 꽃이 지어 솜이 되어도 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여 과제를 보니 바로 ‘화부화(花復花)’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다른 선비들은 모두 그 뜻을 몰라 붓방아만 찧었으나, 그 선비만은 당당히 제일 먼저 답안을 제출하였다. 정조가 시험 답안을 살피던 중 자기가 의도한 대로 답안을 낸 자가 있어 급히 불러 묻기를,“자네는 누구이며 어느 누가 그 뜻과 제목을 가르쳐 주었느냐?” 하자, 선비는 오는 도중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임금이 다시 그 노인의 용모와 사는 곳을 물으니 용모는 채제공이요, 사는 곳은 그의 무덤이었다. 임금이 감탄을 하며 말하기를, “채제공은 죽어서도 재주를 부리는구나.” 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반대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본관이 평강(平康)이며,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이다.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의 아들로 홍주에서 출생하였고, 1743년 문과 정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751년 일반 백성의 선산을 탈취하였다 하여 삼척으로 1년간 유배를 가기도 하였고, 1753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균역법의 실시되는 과정 상의 폐단과 변방 수비를 굳건히 할 것을 진언하였다. 도승지로 있으면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의 폐위가 거론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후일 영조는 정조에게“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요, 너의 충신이다.” 라고 하였다. 다행히 모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난 상태에서 1762년 사도세자의 죽음이 있었기에 번암은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훗날 정조가 등극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를 처벌할 때, 번암은 형조 판서 겸 의금부사로 옥사를 다스렸다. 1771년 호조 판서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 왔고, 그 후 평안도 관찰사․예조 판서를 지냈다.
1777년 벽파(僻派)인 홍상범(洪相範)이 호위 군관(扈衛軍官)과 공모하여 정조를 시해(弑害)하려다 발각된 사건이 일어나는 등 왕의 신변이 위태하자, 창경궁 수궁 대장(守宮大將)으로 수차에 걸쳐 벽파 음모를 적발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으며, 또한 1780년 홍국영(洪國榮)의 세도 정권이 무너진 후 정치․경제․문화․사회에 걸쳐 왕을 충실하게 보필하였다. 1781년 규장각 제학(提學)으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고, 1788년에는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790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신서파(信西派)의 영수로 공서파(攻西派)에 맞서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하였으며, 이듬해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공격을 받아 파직되었다. 여러번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으나 정조의 특별한 신임으로 1793년 영의정에 오르는 등 10여 년간 재상으로서 왕을 보필하였고, 당파에 온건히 대처하여 천주교 박해가 확대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후에 문숙(文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찾기 어려운 번암의 유택
번암의 묘는 용인대학교(구 유도대학) 부근이 아닌 용인읍 역북리에 있다. 용인읍 사거리에서 개천을 따라 올라 가면 용인중학교가 있고, 그 근처 ‘한우리 아파트’ 뒷산 중턱에 있다. 많은 답사객이 번암의 묘를 찾아 나서지만 토박이가 드물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묘에 오르는 산 초입에 비각이 있는데, 이 비각은 ‘채제공 선생 뇌문비’를 모신 각(閣)이다. 정면 1간, 측면 1간의 단아한 각안에 안치된 뇌문비(誄文碑)는 정조대왕이 번암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생전의 공적을 친히 짓고 쓴 뇌문을 새겨 세운 비석이다. 뇌문비의 두전(頭篆)에 새긴 ‘御製誄文’이라는 글자는 3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고, 임금의 친필 어제이기 때문에 찬(撰)하고 쓴 사람이 없다. 많은 재상들의 묘를 가 보았으나 임금이 직접 공적을 기리어 쓴 뇌문은 보지 못하였다. 이는 사람이 가까이 지내다 보면 장점보다는 못된 면을 보기 쉽고, 좋은 말 보다는 단점을 이야기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무튼 번암은 죽어서도 성은(聖恩)을 입었으니 명재상의 소리를 들음이 마땅하고, 후손들도 그 선인의 유지를 잘 받들어 묘를 잘 가꾸어 놓아 모든 면이 탐방객을 흐뭇하게 한다.
비각에서 산쪽 숲을 돌면 윗쪽 구릉 위에 묘가 있으며, 숲에는 묘 조성 당시 심었을 법한 전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다. 근래에 조성한 돌계단을 오르면 잘 정돈된 묘 한기가 있는데, 이 묘가 번암의 묘이다. 묘 오른쪽 비문(碑文)에는, ‘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檢校奎章閣提學 贈文肅公 樊巖蔡先生濟恭之墓’라 쓰여 있고, 양쪽에는 망주석과 석양(石羊)을,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묘에는 잔디가 곱게 자랐고, 왼쪽에는 늙은 소나무 세 그루가 있는데, 오랜 세월 동안 갖은 풍상에 시달렸는지 구불구불 자랐다. 석물에는 드문드문 이끼 자국이 넓게 퍼져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 번암은 소년 시절 가난하여 절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부귀한 집 자제들이 모두 그를 업신여겼다. 세모(歲暮)에 집에 와 벗들과 시를 지었는데, 가을 바람 부는 늙은 잣나무에 매는 새끼를 낳고 (秋風古柏鷹生子) 눈 내리고 달 비치는 산에는 호랑이가 정기를 키운다. (雪月空山虎養精)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 뜻을 알지 못하여 말이 없는데, 한 재상이 그 시를 보고 자식에게 이르기를, “매는 가을에 새끼를 낳지 않는다. 그러므로 새끼를 낳는다는 말은 용모가 너희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고, 후련은 자신을 가르키는 것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 라 하였다.
번암은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되도록 관대하였다. 특히 천주교를 믿는 자에 대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는 요구를 당론이라 배척하고, 정조의 뜻을 받아들여 척사(斥邪)를 내세우면서도 교화 우선 원칙을 적용하여 큰 옥사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없었던 것은, 진실로 그 시대에 맞는 재상은 어떠한 재상이어야 하는 가를 분명히 알고 계셨던 분이다. 현대에 이르러 영조와 정조 때를 조선의 태평성대로 치부하는 것은 번암같은 명재상이 보필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훌륭한 임금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필하는 재상의 덕(德)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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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製女四書序(어제여사서서) 蔡 濟恭
夫乾坤之德 陰陽之道 大矣哉 대저 건곤의 덕과 음양의 도가 큰지라
盖乾稱父 坤稱母 天人卽一理也 대개 건은 아비라 일컫고 곤은 어미라 일컫나니 하늘과 사람이 곧 한가지 이치라
是以陰陽 調而萬物化 夫婦和而家道成 이로써 음양이 조화하여야 만물이 화하고 부부가 조화하여야 가도가 이루나니
故其國之治不治亦係乎其家之齊不齊 그러므로 그 나라의 다스림과 다스리지 못함이 또한 그 집의 다스림과 다스리지 못함에 이어지도다
易曰 有夫婦然後有父子 有父子然後有君臣 주역에 이르기를 부부가 있은 연후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연후에 군신이 있다 하고,
夫子又曰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공자 또 가라사대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한다 하시고,
詩三百篇 其本卽二南 周文之聖 始乎太任之胎敎 시 300편에 그 근본은 곧 이남이며, 주문의 성자됨은 태임의 태교에서 비롯하고
鄒孟之賢 由於慈母之幼敎 周宣之興 本乎姜后 추맹의 현자됨은 자모의 어려서 가르침에 말미암으며, 주선의 흥함은 강후에 근원하고,
楚莊之治 基於樊姬 前則斑斑 可不重歟 초장의 다스림은 번희에 기초한다. 이전의 법칙이 뚜렷하니 가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랴.
噫 世道日下 學敎漸弛 上自王公 下至匹庶 슬프도다 세상의 도리는 날로 내려가고, 배우고 가르침은 점점 풀어져, 위로는 왕공에서 아래로는 필부,서인에 이르기까지
日誦先王之敎 日習先王之道 而猶不能實下踐歷 其況閨閤婦人 閭巷愚民 날로 선왕의 가르침을 외우며, 날로 선왕의 도를 익히되, 오히려 능히 실천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규합의 부인과 여항의 우민이야.
是故 皇明仁孝文皇后 作內訓二十章 我朝昭惠王后 이런 까닭에 황명인효문황후가 내훈 20장을 지으시고 우리 왕조 소혜왕후가
亦述內訓七篇而垂敎 此正前聖後聖 其旨一也 또한 내훈 7편을 지으셔 가르침을 드리우시니 이는 正히 전성과 후성이 그 취지가 한가지라
予於昔年 偶得唐本一書 其名曰女四書 一則 文皇后內訓 一則漢班昭女誡 내 석년에 우연히 당본 한권을 얻으니 그 이름이 여사서라, 하나는 문황후의 내훈이요, 하나는 한반소의 여계요,
一則唐宋若昭女論語 一則明王節婦女範 其訓語纖悉詳備 하나는 당송약소의 여논어요, 하나는 명왕절부의 여범이라. 그 훈어가 상세하고 완전하게 갖추어 있어
有助女敎 其諺譯而與內訓並行 則於礪末世正風俗 豈不有益也哉 여자를 가르침에 도움이 있으니, 그 언역하여 내훈으로 더불어 아울러 행하면 말세를 가다듬으며 풍속을 바르게 하므로, 어찌 유익함이 있지 아니하리오.
爰命館閣之臣 諺譯以進 繼令芸閣 刊印廣布 이에 관각(홍문관,예문관,규장각)의 신을 명하여 언역하여 이로써 올리게 하고 이어 운각(교서관)으로 하여금 간인하여 광포하게 하나니
而奉讀首卷序文 不覺興感 謹以數行文字 略敍其末 받들어 수권의 서문을 읽을새 흥감함을 깨닫지 못하여 삼가 두어 줄 문자로써 그 끝에 대략 서술한다.
咨其刊此書 猶若未刊之前 其讀此書 猶若未讀之前 是豈予眷眷廣布之意哉 이 글을 간인하여도 오히려 간인치 못한 전과 같으며 이 글을 읽음에도 오히려 읽지 아니한 전과 같으면 이 어찌 나의 권권(가엽게 여겨 늘 돌보아주는 모양)하여 광포하는 뜻이리오
其各勉旃 毋少忽焉 각각 힘써 조금도 소홀치 말지어다.
歲丙辰仲秋題 병진년 중추에 題하노라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