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흔적痕迹☆]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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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痕迹]
구재기 시집 / 대교현대시선 079 / 대교출판사(2014.05.31)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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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痕迹
구재기
댓돌 위에
삐뚤어지게 놓인
신발 한 짝
나머지
한 짝은, 저만큼
토방 밑에서 뒹군다
신발 한 켤레
가지런히 놓기도
쉽지 않다
구부러진 못
구재기
책꽂이의 책을 정리하다가
책과 책 사이에서
구부러진 못 하나를 보았다
귀와 뿌리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온 것일까
언젠가 그늘진
아파트 입구 계단에서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엄마를 가다린다던
아랫집 소녀의 모습 같았다
그렇구나, 기다림이란
저토록 온몸을
구부리게도 하는구나
한편으로 가여운 생각에
조심스럽게 못을 꺼내보아도
한 번 구부러진 못은
좀처럼 몸을 세우지 않았다
햇살 가까운 창가에 와서
구부러진 몸을 살펴보니
온몸이 검붉게 멍들어 있었다
구부러진 곳으로 거뭇거뭇
상처가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어떤 문문問問
구재기
요새도
시 쓰니?
너는 요새도
밥 먹니?
시인은
가난하다면서?
가난이 무엇인가
알고나 있니?
시 쓰면
돈은 되니?
돈 되면
너 같은 놈도 시를 쓰게?
탱자나무는 불에 탈 때 큰소리를 낸다
구재기
탱자나무가 불에 탄다
탱자나무가 잎 진 자리마다
몸에 가시를 달고
불을 당긴다
모든 생각들을 버리고
불꽃이 튈 때마다 큰소리를 낸다
소리로써 소리 없는 곳에 이르기 위한
최선의 몸부림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이미 탱자나무가 아니다
소리란 영원한 것이라서
불에 타면서 소리하고
소리하면서
어떠한 형상도 허물어 버린다
탱자나무가
푸른 몸을 허물고 있다
큰소리를 내며
소리 없이 소리 없는 곳에 이르도록
새빨간 불꽃을 온몸으로 삼키고 있다
탱자나무는 불에 탈 때
소리 없이 큰소리를 낸다
무
구재기
겉으로 시퍼렇게
독기를 물고 살아가는
그녀도 하얀 속살을 지녔다
흙속에 묻힌
허벅지는 차라리 눈부시다 소름처럼
무릎의 잔주름이 잔잔히 출렁인다
알종아리를 들춰내고 싶다
모기에 물린 듯
작은 자국까지
한껏 붉으레이 농염하다
확, 끼치는
저 고운 속살 끝에 푸른 사독肆毒*
두 눈이 절로 절여진다
*사독肆毒 : 독한 성미를 함부로 부림
질경이가 묻다
구재기
질기도록
수많은 뿌리로
몸 하나 지탱하며
살아가는 게 잘못인가요
‘차전초’라는
이름으로, 하얗게
자잘한 꽃송이 모두 모아
피워내고 있는데
제 갈 길을 간다는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나를
짓밟아대는 건가요
* 차전초車前草 : 질경이.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야생초로, 마차나 자동차가 다니는 길가에서도 잘 자란다 하여 ‘차전초’라고도 하며, 길섶에 자라는 질경이를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녀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생명력이 매우 강한 우리나라의 자생초.
눈부시다
구재기
아기 손가락만큼 한
문구멍으로 들어온 햇살이
눈부시다
아침에야 이르러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간밤의 어둠 속 먼지
보이고 싶지 않은 걸
모두 보이고 있다는 게
너무 눈부시다
덫
구재기
산짐승은
항상 다니는
길로만 다닌단다
그걸 알고는
사람들은
제 갈 길 위에
눈감은 덫을 놓는다
돌부처
구재기
팔다리는 물론
귀, 입, 턱까지 문드러진
돌부처 하나
길가에 홀로 서 있다·
그러나
안쓰러워하지 말라
돌부처는 지금
본래 제 모습으로
하나씩 몸을 버리며
독경 중이시다
빗방울 손금
구재기
빗방울에는
둥근 손금이 있다
금방 지워져 버리는
빗방울은
제 손금으로
흐름을 만든다
그 흐름으로
내를 이루고
강을 일구어
마침내
빗방울 손금은
너른 바다, 큰 파도가 된다
봄, 새벽
구재기
궁상맞게도
새벽에 일어나
펼쳐보는
묵은 시집 몇
이미 가고 없는
이 세상의 시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새로 머리를 감고
모자를 털며 나온다
아침, 과수원길에서
구재기
아침 과수원 길 걷다 보면
붉은 과일들이 눈물이게 한다
미처 챙겨 주지 못한 사이
드센 비바람 속에서도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구나
문득 걸음을 멈춰
자세히 마주해 과일들을 보면
봄여름을 지나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있다
몸부림한 흔적이 역력하다
상처란 모르는 척
지워버릴 수 없는 것,
지우려 매만질수록
더 큰 상처로
살아나는 것 아니겠는가
*알음알이처럼 수도 없이
과수원에 들락거리면서도
봄여름을 지우면서
무엇을 바라보며 기다렸던가
눈부신, 저 찬란한 과일들
아침 과수원 길에
제 몸을 핥고 간
깊은 상처들을 자꾸만
감추려는 몸짓으로, 햇살에
드러나는 가을과일들을 본다
*알음알이: 서로 가까이 아는 사람
오늘의 날씨는 흐림
구재기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물낯에
작은 돌멩이 하나 붙어 있다
앙다문 입에 단단히 물려 있다
매운바람에도 끄떡없다
봄부터 출렁이던 저수지가
가을 내내 푸르르던 저수지가
저리도 철저하게 앙 다물고
좀처럼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때 누구에게나
장벽 없는 물결이었다면
상처처럼 원한처럼
작은 거라도 가슴에 맺히는 것
그 흔한 하늘의 햇살도 보이지 않는 것
봄으로 흘러가는
이 겨울, 끊임없이
눈발을 불러들이는 저수지
오늘의 날씨는 흐림
또 다른 작은 돌멩이 하나
물낯에 집어던지자
쩡- 쩡- 쩡-
저수지는 앙다문 입을
좀처럼 풀려하지 않는다
무창포에서
구재기
지나간 날들을
스스로 잊을 지라도
발길은 오래도록 살아 남는다
희고 깨끗한 모래 위에서
천천히 발돋움하며
쪽빛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물결에 묻힌 슬픔은
어느 사이, 사랑처럼
바닷길로 화안히 열리고 있다
아, 구원의 바다,
그 운명의 빛깔로
늙은 나무 아래에서
구재기
늙은 나무 그늘에 앉아
수없이 벗겨져 나뒹구는
나무의 껍질을 본다
겨울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세월로 흐르고 나면
몸과 함께 몸의 보호막 같은 것도
저리 허물처럼 벗겨내고 마는구나
일체의 생각들이 질겁하며
내 몸에서 빠져 나왔다
사랑이란 불꽃 속에 달구어댄
숱한 몸부림, 그리고 그 몸부림을
곧추세우는 불면한 그리움
마른 풀에서 바람과 함께
활활 타 오르는 불길처럼
출렁이며 휩쓸리며 예까지 왔다
늙은 나무의 젊은 가지에서
문득 꽃 한 송이 통째로 떨어졌다
갓 건져 올린 물고기의 비늘 같은 것
아, 늙은 나무는 제 허물을 벗겨내도
꽃송이에서는 벗겨낼 것 하나 없구나
구김 없이 구르는 햇살 속으로
꽃송이는 눈부시도록 향기로웠다
요기尿氣의 짜릿한 쾌감처럼
꽃송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젊음이란 격정을 떠올렸다
젊음이란 모든 생각들이
늙은 나무 밑
끓어오르는 자리에 옹크린 바위 같은 것
그러나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늙은 나무는
제 몸의 허물을 쉬지 않고 벗겨내고
이미 각질처럼 굳어버린 바위는
진저리를 쳐대며
온몸으로 꽃송이를 받아
끌어안았다
물이 되어
구재기
바람 분명 없는데
꽃잎에 앉은 이슬 한 방울
떨어진다 이슬도 물이라서
세상의 무수한 낙하처럼
아래로 떨어진다
순간, 싸늘한 바람 한 줌
지나간다, 아아,
바람 일기 전
한 방울 눈물도 물이라서,
솔잎 사이사이, 혹은
무화과 너른 잎새에 가득 고여
짐승 같은 형상으로 몸부림하는 게 아닐까
단잠을 잃어버린 채로
꺼져가는 혼을 불어넣다 보면
이별이란 가진 것
모두 놓아버리고
아낌없이 나누어 가지는 것
이슬이 이슬대로
햇살과 바람을 불러
거대한 율법처럼
끊임없이 잦아지면서
한 방울로 낙하하는
눈물이 될 줄이야
그런 눈물일 줄이야
등꽃 아래에서
구재기
달빛 별빛도 사라져
꽃술 하나 보이지 않아도
온 누리 가득 향기가 흐른다
한낮의 꽃그늘도 지워지고
작은 바람으로 출렁이며
낮추고, 또 낮추어 온 정갈한 충만
어둠을 틈타
조심스럽게 차고 넘친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사랑이란, 이렇게
어둠 속에서 고운 향기로 속삭이는
격렬한 몸짓,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진하디 진한
거침없는 몸부림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벌떼 윙윙거리던
한낮의 축연도 마저 사라진 자리
향기 속에는
화려한 아픔이 숨어 있는 것
또 얼마나 많은 장식을 준비해야 하는가
온몸을 틀고 비틀며
소중한 갈등에 뒤채이다 보면
상처는 어느덧 되살아나고
슬픔 이는 어둠속에
향기는 자꾸만 흔들어 댄다
해질녘
구재기
아이들이 놀다간
골목 안 좁은 빈 터
어둠이 몰려오는 시각 위에
유리구슬 하나 떨어져 있다
투명한 속에 무지개가 선명하다
어둠과의 한 판 승부
잠깐 사이 골목이 환해졌다
술을 마시며
구재기
아내는 이제까지
속 끓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냄비 뚜껑이 들썩거릴 때마다
푹푹 고아지는 속앓이들이
피지직피지직 분노를 토해내며
흰 거품을 물고 늘어질 때에도
4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는
속 끓이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기사, 그렇다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속 끓인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 제가齊家를 자랑도 할 겸
팔불출이 되어 아내를 자랑하고 있는데
마지못해 술잔을 부딪쳐주던 친구 녀석이
수신修身과는 전혀 무용無用하다는 듯
들썩들썩 배앓이를 토해내고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젖혔다
치국治國을 넘어 평천하平天下하다가
안주감으로 오른 생태찌개를
피식피식 웃으며
잘근잘근 씹어댔다
내 눈물이 잠든 어머니를 울리다
구재기
홀로 윗목에 밀려 잠들었던
막내둥이 어린 나
새벽을 찢는 울음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다
다섯 누이들이
반듯이 누운 어머니를 마구 흔들며
온몸으로 울어댔다
잠시 영문을 모르다가
두 눈을 크게 뜨던 나는
누이들 사이에 끼어들어
누운 어머니의 얼굴을 끌어안고
누이들보다 크게 소리 내어 울어댔다
그렇게 울다보니
굵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내 생애 가장 크게 흘린
눈물, 그런데 하필이면
누운 어머니의 두 눈 속으로 떨어질 줄이야
내 눈의 눈물로
항상 젖어있던 어머니의 두 눈
지금까지도 나를 바라보시며
꽃을 받으려면 손을 내밀어야지
모든 무게를 짊어진 나에게
아무리 어둠 짙은 구름이라도
빈 하늘에는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못 한단다
어머니는 자꾸만
눈물을 크게 흘리셨다
아내의 속눈썹
구재기
바람은 자신의 길을
말하지 않는다. 바람은 결코
가는 길의 방향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오직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가고픈 길을 갈 뿐이다.
그러나 아내는 바람의 길을 안다
가는 길에 푸나무가 있으면
푸르른 잎과 우듬지로
바람을 말해준다
혹은 하늘의 구름으로
바람의 길을 모두 보여준다
아내여, 바람처럼
살아가려는 나의 길을
미리미리 속속 알아차리고는
찡긋 흔들어대는
내 아내의 속눈썹이여
티
구재기
창밖으로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
실로 몇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었고
한창 대화가 무르익어 가는데
땅투기 돈투기로 배부른
녀석 하나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쩌면 그리 선생 티가 나느냐고
경멸의 눈초리로 말한다
내 또한 문득, 경멸로
선생은 선생 티가 나야지
내가 너 같은 투기꾼으로 선생을 한다면
네 새끼까지 다 너 닮을 것이라는 말에
녀석은 조개처럼, 재빠르게
혓바닥을 안으로 쏘옥 집어넣고
입을 꼬옥 다물어버린다
그날 계산대에서 녀석은 카드를 긁었다
저녁 늦게 귀가한 나에게
아내는 벗어던진 Y셔츠에 코를 대며
삼겹살을 먹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순간 내 깊은 뱃속에서
경멸처럼 삼겹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티 : 어떤 기색이나 태도. 버릇
분명한 음모
구재기
어둠이
세상을 덮어버리는 것은
밤으로 가는
길 위에서 시작된다
서서히 깨어나는 어둠
그 어둠 속에서
세상에 대한 음모를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둠을 틈 타
따스한 체온을 나누고 싶은 것도
실은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던
분명한 음모이다
거실의 스윗치를 내리자
창밖에서
일제히 일어서는 어둠
누가 어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완벽한 경지에 오른 궁수가
활과 화살을 버리듯
완벽한 어둠에 오른 어둠은
스스로 어둠을 버린다
그러나 어둠은
어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변형시킨다
더듬거리는 발자국 속에서
매일로 되풀이되는 어둠은
종착지를 향하여
아무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어둠은 어둠 속에서
삶을 음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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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시가 살아가는
흔적痕迹이 될 수 있다면
시는 분명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내 시 앞에서 그것이 내 부끄러움이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 시는 그렇게 쓰여지고
또 쓰기도 한다
그냥 시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쓰여진 시를 모으니
45년여 지기지심知己知心의
시인 김명수金明洙가
시집으로 또, 또, 엮어 준단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빚을 하나, 더
내 흔적 위에 얹혀 놓는다
2014. 초봄
산애재蒜艾齋에서, 구재기丘在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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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댓돌 위에
삐뚤어지게 놓인
신발 한 짝
나머지
한 짝은, 저만큼
토방 밑에서 뒹군다
신발 한 켤레
가지런히 놓기도
쉽지 않다
흔적痕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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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재기丘在期 시인∥
∙ 1950년 충남 서천 출생
∙ 공주사대부고, 공주교대, 한남대 국어교육과, 충남대 교육대학원(국어교육과) 졸
∙ 1978년 [현대시학]으로 전봉건 선생님의 추천 등단.
∙ 시집『편안한 흔들림』『추가 서면 시계도 선다』와 시선집『구름은 무게를 버리며 간다』등 14권이 있음
∙ 충남도문화상, 시예술상본상, 충남시협본상, 한남문인상, 홍성예술인상, 정훈문학상 등 수상, 그리고 모범공무원상(제 0035061호. 국무총리), 황조근정훈장(제 18233호) 등 수훈.
∙ 41년 11개월의 초?중?고 교직 생활 끝에 2010년 명퇴직하여 현재 고향인 충남 서천의 [산애재蒜艾齋]에서 야생화를 가꾸면서 Daum-Cafe [산애재蒜艾齋]를 운영하고 있음
∙ 주소 : (우, 350-752) 충남 홍성군 홍성읍 문화로 72번길 92. 주공그린빌 102동 702호
∙ [산애재蒜艾齋] 주소 : (우, 325-911) 충남 서천군 시초면 시초로 187.
∙ H.P : 010-5458-0642
∙ E-mail : koo6699@hanmail.net
∙ Cafe : http://cafe.daum.net/koo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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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시집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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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집 [흔적痕迹](대교현대시선 079 / 대교출판사. 2014.05.31)
최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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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3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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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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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松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