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하정해(愛河情海) 변주곡[1]
온 국민의 사랑을 받다가 타계한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칠십년 걸렸다."는 말을 했다. 난 이 말을 늦게 접하고서 지금껏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탄을 하곤 한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물리적 거리가 잘해야 30센티나 될까말까 한데 그 거리를 옮기는데 70년이나 걸렸다니,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을 반추하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심은 저마다 색깔이 다채로워서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친부모와 양부모의 틈바구니에서 50년간 곤혹스런 삶을 버텨온 나는 사랑과 효심에 대한 기준과 개념이 숱한 굴곡을 거치면서 애정이 하해(河海)처럼 흐르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얄궂은 변주곡을 여러 번 산생(産生)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친부모와 양부모 네 분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었다는 점을 미리 못박고 글을 시작하고 싶다.
유아기에 친모의 젖을 다 먹지 못한 채 큰집에 입양된 나는 무대포 스타일의 백모가 천상여자 타입인 생모와 평생동안 불화를 겪으면서 그 중간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온전한 정서를 제대로 함양하지 못한 채 모순덩어리 유년기를 보냈다. 백모는 조카인 나를 데려다 키우는 동안에도 젊고 반반한 여자들을 골라서 백부와 동침하도록 대주다시피 하였는데, 이는 백부의 친자식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불임의 원인이 백부에게 있음을 은연중에 집안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데모하듯 표현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이젠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돌아가신 상황이고, 난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려서 큰집에 입양됨으로써 경제적으로 극한 궁핍은 가까스로 면하면서 성장하였다. 나를 제외한 친형제 6남매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쯤 되던 때에 갑자기 서울로 이사하게 되면서 경제적인 궁핍에 몰려 '봉천동 달동네' 사람들이 겪은 애환을 빠짐없이 겪으며 살다가 늦게야 입에 풀칠은 하는 생활이 가능해졌고, 내가 전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상경하여 서울에 사는 30여년 동안에 친부모 형제들과 교류하면서 주고받은 애증이 뒤범벅 되어갔다.
육십을 바라보던 4-5년 전에 귀향하여 옛집을 손질하여 살아내는 중인데, 집안 구석구석에 내가 성장기때 겪은 추억의 편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때론 곤혹스럽기도 하고, 다시 외로움에 치를 떨던 시절을 회상하며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한때 도회지인 전주에 젊은 여자를 몰래 숨겨둔 백부가 주말에 그 여자에게 가려고 준비하자, 백모는 나에게 참기름 한 병과 고춧가루 한 봉지를 쥐어주고 백부를 따라가게 하면서 '그 여자가 사는 곳의 약도'를 그려오라고 백부 몰래 신신당부 하였다. 그러나 논두렁에서 메뚜기와 개구리나 잡아먹고 놀던 나에게 처음 가 본 도회지의 골목길은 너무 구조가 복잡하였다. 결국 난 그 여자네 안방의 가구 배치도를 대강 그려왔다가 백모에게 된통 혼이 났다. 사실은 백부의 그 여자에게 내 또래의 계집애가 있었는데, 아마 예전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애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 애랑 둘이 노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약도를 그려 와야 된다는 사명을 잊었고 하룻밤 잔 뒤 집에 돌아올 무렵에야 백모의 당부를 기억해내고는 안방의 가구 배치도를 어설프게 그려왔다가 호된 야단을 맞은 것이다.
내 삶의 '얼개'가 비틀어진 이유가 뚜렷하지 않지만, 유년기에 친부모 형제들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서 그들이 무작정 보고싶은 그리움에 눈물을 훔치다가 잠이 들곤 하면서 어린 나의 정신세계에 기스가 난 듯하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되던 시절에 서울로 이사가버린 친부모 형제들은 그 이후로 늘 나에게 잿빛 그리움을 떠안겼고, 양부모의 눈치를 봐가면서 친부모 형제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은 혈육간의 애정이 하해(河海)처럼 흐르는 강물이었다.
지금도 내가 걸핏하면 럭비공 스타일의 처세술로 좌충우돌 하면서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형제 중에 친부의 유전자를 가장 고스란히 닮았으나 감정을 원만하게 조절하는 훈련을 쌓지 못하여 빚어내는 촌극(寸劇)같은 사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내야만 했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침잠의 시간을 보낸 적이 숱하게 많지만 한번 넘어질 때마다 까진 무릎에 진한 갈색의 굳은 살이 세월의 훈장처럼 박혀있어서 여간한 통증은 이제 감각조차 없는 상태가 되었고, 줄곧 서울에서 살았더라면 거리귀신이 되었을 수도 있을 만큼 갈팡질팡 비틀거리다가 '귀향'이라는 거사를 해냄으로써 그동안 내 마음에 생긴 생채기들을 치유하고 고향의 전원을 사랑한 도연명처럼 '귀거래사'를 읊조릴 수 있게 되었다.
애하정해(愛河情海) 변주곡[2]
백모는 자기가 젊고 이뿐 여자를 직접 골라 백부와 동침하게 해주면서도 백부가 자기 몰래 만나는 여자에 대해서는 냉정하리만치 쌀쌀맞게 대하였다. 당시엔 동네에 방물장수라 불리는 젊은 여자들이 바늘이나 빗 따위를 담은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고 비교적 동네가 크다보니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 중에 키가 크고 얼굴이 반반한 여자가 보이면 중간에 사람을 놓아 그 여자를 우리집 뒷방에 재워주는 척하면서 백부와 동침하게 한 것이다.
당시 공무원이던 백부는 한때 직장 근처인 신평에서 밥집을 하는 연상녀와 정분이 나서 툭하면 집에 돌아오지 않고 밥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백모는 밤새 속을 끓이다가 새벽녘에 나를 깨웠는데, 머리가 아플 때마다 이마에 헝겊 띠를 둘러맨 백모는 한겨울 신작로에 눈이 수북이 쌓인 날에도 나더러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걸어 신평 밥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돈을 타서 동태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곤 하였다.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알려진 산길을 6키로나 걸어서 밥집에 가는 동안에 난 공포심에 간이 콩알만하게 얼어붙은 적이 숱하였다. 1시간 가량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아버지’를 부르면 백부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방에서 나와 내 손에 몇 푼 쥐어주었고, 난 그 돈으로 동태 2마리를 사서 다시 산길을 걸어 돌아와 무와 동태를 섞고 고춧가루를 풀고 간을 맞춰 얼큰한 국을 끓여서 상에 차려 백모에게 드렸다. 백모는 그 국을 한 사발 드신 후에야 자리에서 가까스로 일어나곤 하였다. 그 밥집 여자에게도 나랑 동갑인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랑 밥집에서 마주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배시시 웃기만 했던 걸로 기억한다.
만약 양부모의 친자식이 태어났더라면 내 신세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기 십상이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터지지 않았고, 외로움에 시달리며 자라던 나는 백모의 친구들이 밤에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가려 할 때면 치맛자락을 잡고선 더 놀다 가시라고 애원을 하곤 했다. 그 무렵 혼자 골방에서 잠이 들면 늘 꾸는 꿈이 형형색색의 옥구슬로 만들어진 탈것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일순간 땅바닥에 추락하면서 어지럼증을 느끼며 잠이 깨곤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입양되기 전에 기어 다닐 무렵에 할머니가 우는 나를 달래려고 박카스 병에 담긴 [기계독 약]을 잘못 먹인 일이 있었다. 기계독이란 당시 이발소에서 바리깡으로 머리를 빡빡 밀다보면 제대로 소독하지 않은 바리깡 탓에 머리에 곶감 크기의 둥그런 상처가 생기기 일쑤였고 그걸 기계독으로 불렀다. 극약을 먹은 내가 눈알을 뒤집고 경련을 일으키자 놀란 할머니가 사람을 시켜 논에 나가있던 친부를 불러오게 하여 가파른 재를 두개나 넘어 관촌 읍내 의원에 가서 목구멍에 굵은 호스를 집어넣어 위세척을 한 뒤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한다.
얼마 후 큰집에 입양된 뒤에도 기어 다니던 내가 어처구니 없게 동네 이장이 마루 위에 두고 간 호박잎 위의 쥐약을 잘못 집어먹어 또 한번 생사를 넘나들게 되었는데, 당시 백모는 나를 의원에 데려갈 생각조차 안하고 동치미 국물을 퍼서 먹인 뒤 내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단다. 당시 서너 집 건너에 살던 친부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나를 업고 다시 가파른 재를 넘어 읍내 의원에 가서 다시 위세척을 해서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극약을 두 번 오용한 까닭에 난 어린시절부터 청신경에 이상이 생겨 새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그 장애가 결국 한평생 따라다니면서 자꾸 심해진 탓에 인생의 결정적인 기회를 앞두고도 번번이 체념하고 포기하게 되었다.
첫댓글 네 좋아요 근런데 이원고는 분량이 많습니다. 두개로 나누어서 제목을 붙여주시면 더좋겟지요
원고지 13장 정도로 항상 나누어서 이렇게 붙여놓는 것보다 나누어서 두편으로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이 15장 정도 되는 분량이네요
흑백앨범 1
흑백앨범 2 이런식으로
네..잘 알았습니다^^
삶의 애환질곡의 세월을 사셨네요.잘읽었습니다.
남다르게 자라면서 겪은 일들이 거름이 되어 결국 저는 행운아로 변신했습니다^^
그런 삶을 사신분들이 글을쓰면 글맛이 난답니다.
저에겐 과찬입니다만, 정진하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사노라면 잊을 날도 있으리다.
허나 고초의 세월이 선생님을 만드셨을 생각을 해 봅니다.
건필 하소서!
감사합니다^^지금도 광야에 선 채로 스스로 담금질을 하는 중입니다. 안일함은 저에게 독약처럼 위험하다고 믿는 까닭에 부단히 성찰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