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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1월 11일 주일
[(백) 주님 세례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으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례력으로는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을 내리시고, 당신의 아들로 선포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만민의 주님께서 전해 주신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로 다짐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는 성실하게 세상에 공정을 펴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셨다고 강조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온다(복음).
제1독서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4.6-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34-38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36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37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것도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라고 말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받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3,1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17)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도 듣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이마에 물을 맞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마에 바른 축성 성유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이며, 흰옷은 깨끗해졌다는 외적 표지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내게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을 주셨듯이 세례를 통해서 다시 영원한 생명을 향하게 하십니다.
우리 함께 그때의 마음, 세례 때의 첫 마음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그때 내가 하였던 기도와 청원과 다짐은 무엇이었는지요? 아마도 순수한 영혼의 신앙 고백이며 사랑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그때의 첫 마음을 떠올려 보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이철구 요셉 신부)
세례받지 않는 인생은 완결되지 않은 인생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날 세례성사 예식이 많이 간소화되었습니다. 세례성사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단계에 이르면 집전 사제는 예비자의 이마에 세례수를 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과거의 세례성사 예식은 좀 더 구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생생했고 더 실감났습니다. 본 성전 외에 세례당이 따로 건축되었는가 하면, 성당 한쪽에 세례대가 따로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세례 성사 예식 전 세례 대상자는 대중탕처럼 생긴 세례대 저쪽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세례 대상자는 입고 있는 세상의 옷을 벗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 세례대에 담긴 물에 온몸을 침수합니다. 그리고 반대쪽 계단을 통해 걸어 나옵니다.
입교자는 세상의 옷을 벗음을 통해 지금까지 걸치고 왔던 낡은 인간, 죄로 물든 인간,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을 세례대 저쪽 건너편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통과하듯이 세례수를 통과해 이쪽 즉 약속의 땅, 생명과 구원의 땅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이러한 건너옴의 예식을 통해 입교자는 새 인간, 영적 인간, 영원한 생명을 지닌 불멸의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성사, 생각할수록 은혜롭고 감지덕지한 은총의 성사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걸로 삶을 마감합니다. 정작 중요하고 진정한 태어남인 세례성사를 통한 새로남 없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태어남으로 초대받습니다. 그야말로 참 생명을 얻고 참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세례받지 않는 인생은 완결되지 않은 인생입니다. 이래서 이웃 전교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경축하는 우리에게 큰 의문부호가 하나 다가옵니다. 세례성사는 죄가 많은 우리 인간들,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 인간들에게나 필요한 성사입니다. 그런데 무죄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나약한 한 인간(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 세례 사건은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특별한 사건입니다. 인간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할 일인데 완전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구간 탄생으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세례 사건을 통해 또다시 자신을 극도로 낮추십니다. 보다 완벽히 인간 세상 안으로 육화하시려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 표현이 예수님 세례인 것입니다.
일관되게 자신을 낮추시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택하신 지극히 겸손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그분께서 평생토록 일관되게 지니셨던 겸손의 덕을 우리도 청해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용기 있게 고개 숙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내가 양육하고 있는 자녀들 앞에, 내가 동반하고 있는 학생들 앞에, 내가 사목하고 있는 양들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인간의 죄와 희망이 함께 울리는 거대한 삶의 무대입니다. 그 안에서 세상의 조롱을 받던 콰지모도는 흉한 겉모습과는 달리 누구보다 순결한 마음을 지닌 이로 그려집니다. 영화에서 콰지모도를 연기한 앤서니 퀸 역시 멕시코 이민자 출신으로, 가난과 차별 속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콰지모도의 고독과 내면의 깊이를 누구보다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에스메랄다를 성당의 성역 안으로 품어 안으며 지키던 장면은, 약한 이를 감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그대로 비추는 듯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외모와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깊이를 보신다는 진리가 콰지모도와 앤서니 퀸의 삶을 통해 다시 드러납니다. 어릴 때 옆집에 살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할머니는 고양이를 키우면서 살았습니다. 할머니의 등은 꼽추처럼 굽었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무서웠는데, 할머니는 무척 자상하였습니다. 가끔 먹을 것도 주셨습니다. 할머니의 집 문에는 영화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극장에서는 할머니에게 초대권을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가끔 영화 초대권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초대권으로 만화영화도 보았고, 성웅 이순신 같은 영화도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등이 굽은 것은 삶의 파도와 고난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주교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주교님은 ‘꼽추 아버지’의 사연을 전해 주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딸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남편의 집안은 부유했고, 품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의 집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등이 굽은 꼽추였습니다. 딸은 결혼식에 꼽추인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빠는 동생을 크게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요즘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결혼식에는 큰아버지와 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프지도 않은 허리를 핑계로 하나밖에 없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딸은 임신했습니다. 임신하니 입덧이 심했고, 어머니가 해 주던 음식이 생각났습니다. 어느날 남편과 함께 슈퍼엘 가는데, 손에 가방을 든 아버지가 슈퍼로 들어갔습니다. 딸은 아버지를 모르는 척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슈퍼 사장이 전화했습니다. 어떤 분이 물건을 전해 달라고 했다는 전화였습니다. 딸이 슈퍼에 가니 주인이 가방을 전해 주었습니다. 가방에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청국장과 겉절이가 있었습니다. 가방에는 아버지가 쓴 메모가 있었습니다.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마가 청국장과 겉절이를 만들었단다. 감기 조심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 딸은 아버지가 부끄러워서 결혼식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임신한 딸을 위해서, 입덧이 심한 딸을 위해서 먹을 걸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인이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설령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절대 잊지 않겠다.” 하느님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이야기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멀리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먼저 찾았던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심을 기억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가브리엘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본명(本名)을 줍니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도 있지만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이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르신들이 ‘본명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면 저는 ‘가브리엘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름이 예뻐서, 부르기 좋아서, 생일에 가까운 축일이 있어서 세례명을 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이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과 성녀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청하며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례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을 한번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미약하더라도 쉼 없이 들려오는
하느님의 감미로운 부르심에
마음을 여는 정갈한 다가섬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를 온전히 살아 숨 쉬게 하시는
성령의 따스한 이끄심에
나를 맡기는 자연스러운 끌림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희미할지라도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관계에
나를 묶는 거룩한 속박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나를 버려야 하는 아픔 속에서도
벗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고결한 희생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탐욕과 죄로 나락에 떨어진 나를 살리시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듯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신음하는 하느님께
벗이 되어드리는 따뜻한 동행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나를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나를 살리는
아름다운 순환입니다
일생의 단 한 번 하지만
생의 마지막 날 하느님 품에 안길 때까지
지금여기에서
새롭게 기억되어지고
새롭게 살아져야 할
생명과 사랑 가득한 성사
바로 세례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테오도시오 (Theodosius)
신분 : 수도원장
활동연도 : 423-529년
같은이름 : 테오도시우스 떼오도시오 떼오도시우스
성 테오도시우스(또는 테오도시오)는 30세쯤 되었을 때 집을 떠나 팔레스티나(Palestina)에 정착하여 베들레헴과 가까운 곳에 작은 공동체를 세웠다.
이 공동체는 급속도로 번창하였고, 이곳의 수도자들은 국적과 언어가 다양하였으며, 주로 병자와 노인 그리고 정신 이상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동향사람인 성 사바(Sabas, 12월 5일)를 팔레스티나의 모든 은수자와 회수도자들의 수장으로 앉힌 후 자신은 그전처럼 이 작은 공동체에서 수도자들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105세경에 운명하였다.
성 테오도시오는 423년 카파도치아의 어떤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양친의 교육을 받고 경건하게 자라났다.
그리고 그는 경건하고 성실하기 때문에 어리지만 특별히 뽑혀 미사 때 성서를 낭독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의 일이다. 그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 1)
하신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나서 성령의 비추심을 받고, 그것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구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성지 팔레스티나로 순례의 길을 떠나 구세주의 생활과 수난을 연상케하는 모든 지방을 순례(歷訪)하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시도록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던 중 의외에도 예루살렘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옛날 탑속에 론지노라는 신심 깊은 은수자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테오도시오는 그리스교적 완덕의 지도를 받으려고 그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어느 부유한 부인이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길가에 한 성당을 세우고 테오도시오를 주임 신부로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론지노에게 간청했다. 테오도시오는 고요한 곳에 숨어서 하느님과 같이 지내는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은사의 권고도 있고 해서 순명하는 뜻으로 그 직무에 취임하게 되었다.
후에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그의 소문이 널리 곳곳에 퍼졌다. 사람들은 영적 문제에 대해서 그의 의견을 들으려고 무리를 지어 모여 들었다. 그러나 그는 허망한 명예욕으로 자기 마음이 더러워질까 염려해 즉시 번화한 도로변에 있는 성당을 떠나 인기척 없는 산에 올라가 그곳에서 30년간이나 명예와 세속을 끊고 오로지 고행과 기도로 그날 그날을 지냈다.
그는 그동안 빵 같은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었다. 그가 거처하는 동굴 부근에 있는 이름도 모를 풀이나 채소만이 그의 일상 음식물이었다. 그는 또 기도나 묵상을 좋아한 나머지 수면시간도 몸에 해가 되지 않을 범위 내에서 극도로 줄였다. 그로 인하여 생긴 시간은 모두 사랑하는 하느님과 친밀히 교제함으로써 보냈다.
그러나 그렇게 고요하고 정막한 곳인데도 청년들이 많이 모여왔다. 그들은 테오도시오가 기거하는 근방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며 그의 모범과 지도하에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 제자들에게 몸으로만 세속을 떠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떠나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는 새로이 그곳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그들 자신의 무덤을 파게 했다.
이는 그와 같이 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이 허망하게 없어진다는 것을 그들의 눈에 똑독히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는 큰 수도원을 세웠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거룩히 같이 지내며 기도와 덕행으로써 서로 도우며 합심해 덕을 닦으면서 천국의 길을 걸어가기 위함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형제들을 위해 제정한 규칙은 죽을 때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 뿐이었다.
스승이 몸소 겸손으로 좋은 표양을 주셨기 때문에 형제들 사이는 언제든지 원만했고 서로 남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갸륵하고도 상쾌한 우정이 엿보였다.
하루는 형제들이 서로 의견의 불일치로 싸우고 있었는데, 테오도시오는 그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그들이 사랑이 끊어지지 않기를 빌었고, 두 사람이 화목할 때까지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던 중에 성 테오도시오도 사랑하는 고독 안에서만 그저 평안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에는 천주성만 있을 뿐 인성은 없다고 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황제는 백방으로 유인하여 테오도시오를 이단의 편으로 끌려고 했다. 그 이유는 성인이 사제들의 사이에서나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에게 많은 돈을 보내어 세상의 재물로 유혹해 진리를 버리게 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성인은 그 돈을 남김없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또한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지금에 와서 변절 (變節)한다는 것보다 도리어 참된 신앙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을 더 원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교회에 있어서 이단의 설이 전해 내려온다면 차라리 성당을 일절 다 태워 없애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 그는 고요한 수도원을 떠나 밖으로 나와서 동분서주하며 거룩한 신앙의 열정이 폭발하는대로 열렬한 말로써 성스러운 신앙에 머무르라고 모든 사람에게 외쳤다. 자기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도 총 동원해 이 중대한 사명에 노력하도록 했으나 그것이 황제의 비위를 거슬려 성인은 국외로 추방당하는 비통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오래지 아니하여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인은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후 그는 오랫동안 병고로 신음하다 105세의 고령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랐으나, 그 후 그의 전구로 인해 많은 기적이 나타난 것을 보면 얼마나 이 하느님의 일꾼이 주님의 뜻대로 살아 왔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단성론 單性論 Monophysitism
육화(肉化)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본성(本性)만을 가지고 계신다고, 다시 말해 그분의 인성(人性)이 그분의 신성(神性)에 의해 완전히 흡수 통합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단적 오류.(현대 가톨릭 수첩에서)
그리스도단성론
라틴어 monophysitismus 영어 monophysitism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하나의 성(性), 즉 인간이 된 신성(神性)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단설. 이 설에 따르면 예수의 인성(人性)은 ‘바다로 떨어지는 꿀방울이 바다에서 녹아 버리듯’ 신성에 의해 완전히 흡수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폐기되고, 인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간적 실재는 허상(虛像)으로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은 우리의 인간성과는 다른 모습을 취하는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스도의 중재적 활동과 구속(救贖)은 허공에 뜬 논의로 되고 만다. 이 설의 주창자는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한 수도원의 원장인 에우티케스(Eutyches)이며 알렉산드리아가 총대주교인 디오스쿠루스(Dioscurus)가 지지하였다. 단성론은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그 후에도 단성설은 동방 교회에서 계속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삼장 논쟁', '성화상파괴 논쟁' 등의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성 토마스 (Thomas)
신분 : 신부
활동지역 : 코리(Cori)
활동연도 : 1655-1729년
이탈리아 벨레트리(Velletri)의 코리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는 매우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지만 자비심 많은 어느 사제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를 도와서 여러 가지 일을 도왔고 또 로만 캄파니아(Roman Campania)에서 양치는 일에 오랫동안 종사해야만 하였다.
그는 양치는 동안에 친구들과 잡담하는 대신 혼자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을 관조하며 묵상하였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기도와 관상하는 습관이 붙었다.
양친을 잃은 뒤 성 토마스는 22세의 나이로 코리에 있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6년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수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항상 한적한 곳을 찾아 그곳에서 관상생활에 몰두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그는 허락을 받고 수비아코(Subiaco)와 인접한 치비텔라(Civitella)로 갔다.
그가 한 번은 성당에서 성체를 영하던 중에 탈혼에 빠져들었는데 성합을 손에 든 채로 천장까지 떠올라 잠시 있다가 밑으로 내려와서 형제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준 적이 있었다.
또 그는 식탁에 놓인 빵을 모두 걸인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에 그 공동체의 회원들이 식탁에서 빵을 모두 치우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만일 마음이 기도하지 않으면, 혀는 헛수고만 할 뿐이다."
그는 1990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된 후 1999년 11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그는 코리의 톰마소(Tommaso da Cori)로도 불린다.
성 살비오 (Salvi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아미앵(Amiens)
활동연도 : +625년
같은이름 : 살비우스 쌀비오 쌀비우스 소브
온갖 기적으로 유명한 성 살비우스(또는 살비오)는 아도(Ado)를 계승하여 아미앵의 주교좌에 착좌하였고, 그의 교구는 테오도리쿠스 2세 치하에서 크게 번영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처음에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의 몽트뢰유(Montreuil)에서 공경을 받다가, 나중에는 그곳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또다시 아미앵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성 살비오가 순교자로 기록되었지만, 볼란도 신부는 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고 한다.
그는 소브(Sauve)로도 불린다.
성 히지노 (Hyginus)
활동년도 : +142년경
신분 : 교황
지역 :
같은 이름 : 히기노, 히기누스, 히지누스
성 히기누스(또는 히지노)에 대해서는 그리스 출신으로 교황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아마도 교황 성 텔레스포루스(Telesphorus, 1월 5일)를 계승하여 138-142년까지 재위한 듯 보인다. 그는 재위 기간에 영지주의자인 발렌티누스(Valentinus)와 케르도(Cerdo)와 논쟁을 벌여 정통신앙을 고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사제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세례 때 대부모를 세우는 관례를 도입하였다고 한다. 또한 순교자로 존경받고 있지만, 순교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