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 Mary, called Magdalene, from whom seven demons had gone out,
말씀의 초대 ☆☆☆ 오늘의 묵상 ☆☆☆
복음에서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이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셨고, 부활하신 그분을 처음으로 목격했던 분이십니다. 어찌하여 그토록 예수님을 추종하며 사셨을까요?
☆☆☆
‘마리아 막달레나’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래아 호반의 휴양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일생일대의 변화를 체험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 가운데 언제나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했던 여인입니다.
(루가 8,1-3)
Joanna, the wife of Herod’s steward Chuza,
Susanna, and many others
who provided for them out of their resources.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로 반론을 제기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복음 선포와 신앙생활은 모두 헛되다는 것이다(제1독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에 대한 모습을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뽑으신 열두 제자와 주님께 은혜를 입은 여성들과 함께 온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다(복음).
주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뽑아 세우신 열두 제자와 함께 당신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십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여인들도 주님 일행에 동참하여 전 재산으로 시중을 드는 것입니다.
당시 여성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상승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성은 남성보다는 위치가 떨어지는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죄인 취급받던 여성이 주님 일행에게 시중을 듭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재산을 다 팔아서 말입니다. 이 여인들이 결국엔 주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됩니다. 주님께서 일구어 나가시는 공동체의 중요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오히려 남성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우리나라 박해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최초 여성 회장이었던 순교자 강완숙 골룸바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때 포기했던 삶이었는데, 그분께서 들어와 ‘빛과 향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때 좌절했던 인생이었는데, 그분을 만나 ‘삶의 기쁨’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인간은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평생의 은인’으로 모셨습니다. 그분 곁에 머무는 것을 ‘삶의 이유’로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복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지켜 가는 것은 축복입니다. 헌신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런 사랑을 예수님께 쏟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을 점점 승화시켜 주셨고,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사도’로 변신하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함을 용서하소서.
그 영혼만을 사랑하려 하나 가끔은 그를 안고 싶어 함을 용서하소서.
부질없이 깊숙이 묻어 버린 기억을 밤새워 도로 캐어 냄을 또한 용서하소서.
허다한 날 혼자 앓는 지병이 힘겨워 가끔은 그를 잊은 척함을 용서하소서.
아니 정말로 잊기 위해 가망 없는 노력을 더러는 함을 용서하소서.
그러나 나를 위해서는 한 발자국도 그의 곁에 갈 수 없고
그를 위해서는 백 리라도 뒤로 물러설 수 있음을
당신은 알고 있나이다.
‘이화은’의 시 ‘사람의 노래’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러기에 ‘일곱’이라는 숫자에 얽매일 이유는 없습니다. ‘강렬한 악의 세력’에 빠졌던 여인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아무튼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전혀 새로운 여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 뒤로는 일편단심 예수님만 섬기며 삽니다. 사랑받은 만큼 사랑을 되갚는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도 끝까지 지켜본 여인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악의 세력’에서 벗어났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에서 벗어나자 엄청난 변화를 체험합니다. 평생 감사하며 살 만큼 은혜로운 변화입니다.
우리에게는 ‘악한 기운’이 없는지요? 우리의 삶을 어둡게 하는 ‘악의 세력’을 느낀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내리신 주님의 은총을 우리도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의 일입니다. 이 휴대전화에서 쓰는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 하다가 이상해진 것입니다. 먹통이 되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습니다. 이 휴대전화에는 800명이 넘는 사람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저장되어 있으며, 2011년까지의 일정이 담겨 있었거든요. 고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고치는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휴대전화는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화도 많이 났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반나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정과 주소록을 잃어버려서 커다란 일이 생겨날 듯 불안했는데, 사실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데이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불편한 것일 뿐 내 삶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듯 손에서 놓지 않고 애지중지했던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을 간직하지 못하고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을 항상 내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야 행복의 길로 들어설 텐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을 오히려 더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해 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열두 제자, 그리고 여자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철저하게 따르는 여인들을 기억해봅니다. 이 분들은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셨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유혹이 없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주님만이 참된 구원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세상 것을 손에 꽉 움켜잡으려는 욕심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따른다고 이야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을 나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있었는지를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혹시 다른 것들을 다 가진 다음에야 주님을 모시겠다고, 그래서 정작 중요한 주님을 내 안에 모시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활동을 도운 여성들
-최영균 신부-
일반적으로 성당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규모면이나, 열심히 활동하는 정도에
있어서 남성보다 여성들의 활약이 더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지금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라삐들은 여성을 제자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곁에는
늘 신심 깊고 열심한 여성들이 많이 존재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관습과 달리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여성들에게도 전달하셨고,
주요한 복음전파 사업의 협력자로 여성들이 활약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 상 예수님의 곁을 지키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와 상관없이
여성들은 늘 자신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복음은 돈, 명예, 권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분께 대한 믿음과 열정으로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의 여인들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의 의미 - 김동욱 부제- 흔히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기쁜 소식이고, 이 기쁜 소식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복음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진정 기쁜 소식으로 다가갈지 의문입니다. 지하철에서,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듣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우리한테마저도 별로 기쁘게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불쾌하고 짜증 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기는커녕 우리를 ‘못 살게’ 합니다. 내용은 그럴싸하지만 듣는 이를 살게 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해 누군가를 못 살게 군 적은 없는지 반성해 봅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 진심어린 충고로 실의에 빠진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안겨줄 수 있다면,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게 합니다. 죽어가는 이들한테는 생명을 주고, 고통 받는 이들한테는 해방을 줍니다.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상처로 드러난 그의 사랑
-김찬선신부-
제가 교만해서 그런지
언젠가 신문에서 어떤 선수에게 제 2의 김 연아라고 하는 것을 보고,
저는 그 선수가 기분 나빠 할 거라 생각을 했습니다.
혹 그 선수는 기쁘게 받아들이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제 2의 김 수환이라는 말을 저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저이지 제가 다른 누구의 아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 2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떨까요?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것도 말이 되지 않지요.
그럴 리도 없지만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도 부담스럽겠지만
만일 그렇게 저를 부른다면 더더욱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불립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오상의 축일 때문일까요?
아니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오상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상 때문만이라면 프란치스코의 뒤를 따른
오상의 비오 성인도 제 2의 그리스도라 불려야겠지요.
그러므로 프란치스코가 제 2의 그리스도라 불린 이유는
겉으로 드러난 상처 때문이 아니라
상처로 드러난 그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은 사랑이지요.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상처 받기를 마다하지 않고
받으면 더욱더 사랑하고 더욱더 닮아가는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 때문에 오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해를 받아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 아니 틀림없이
주님을 사랑하지만 닮고는 싶지 않고,
닮고 싶더라도 상처는 받고 싶지 않은 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가능성에 승부를 건다 -김찬선신부-
<독서> : 자신의 자기를 버림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고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코린토 교회 때나 지금이나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저는 묻습니다.
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습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까?
있는 것이 좋다면 있다고 믿으십시오.
비단 부활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모든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
같은 태도를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데
어떤 사람의 미래의 불가능성을 봅니다.
그런데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믿는 순간,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것으로 결정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불가능을 보는 것은 하느님을 보지 않고
인간들이 이룩하는 미래만을 볼 때 어쩔 수 없는 결과입니다.
제가 북한 일을 할 때 취하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아니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전망을 내 놓았지만
아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불가능을 믿기보다
하느님의 뜻하심과 능력을 믿고
저는 가능함에 희망을 두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면 가능하고
안 되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아니 계시면 부활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한 부활은 있습니다.
존재를 있게 하신 하느님께서
존재를 없게 하기 위해
존재를 있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유한성의 이 세상은 양단(兩端)이 있습니다.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흑이 있으면 백이 있고
성이 있으면 속이 있고
있는 것이 있으면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유한성의 이 세상에서는
삶이 있고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세계에는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부활이 있습니다.
없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의 부활일지 그것을 모를 뿐이겠지요.
-경규봉 신부-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영원히 살기 위하여 온갖 보약을 먹기도 하고, 운동을 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영원히 산 사람은 없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란 말처럼 태어난 것은 모두가 죽게 되어 있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인생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러한 인생은 허무하지 않은가!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사람이 지닌 꿈과 희망은 결코 이룰 수 없단 말인가!
마태오복음(19,16이하)을 보면 예수님 시대에도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제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냐고 질문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9)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말씀하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이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자신을 버림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셨다. 심지어 당신의 뜻이나 생각, 욕구까지도 버리시고 오직 성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림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요한 3,36)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버리는 것이 곧 주님을 믿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사도 바울로 시대에 고린토 교회의 교우들 가운데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곧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믿지 않는 것을 뜻하며, 이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믿음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사도 바울로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자신과 사도들 전체의 체험을 통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이를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임을 가르친다. 나아가 그들이 이를 믿지 못하는 까닭이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즉,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을 희망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며,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듣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육신을 가지고 영원히 살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라고 가르치신 것은 곧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시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심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우리도 자신을 버리자. 자신의 뜻, 생각, 욕심, 그 모든 것을 미련없이 버리자.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께 나를 송두리째 맡기자. 그러면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부인들`의 삶 - 김정미 수녀- 안식년 때 영어권 지역에 사는 교민들을 만났다. 이분들도 대개 여성들이었다. 처음에 한 분을 소개받아 만났다가 연줄이 되어 거의 1주일 동안 매일 저녁 소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민 온 계기는 자녀 교육 때문이었고, 부부 모두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민 초기 아이들이 잘 적응하는 것에 힘을 얻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아이만 바라보고….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교회 내에서도 여성인권주의자들이 남녀평등을 들어, 다른 종교들처럼 여성 사제가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사도들을 남자들로만 뽑았던 것은 당시 사회구조가 남성 위주이고 여성이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시대가 변화하였고 남성 위주의 교회도 현대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사실 수녀님들과 미사를 함께하고 있지만 연세 많으신 수녀님들이 저같이 젊은 사제에게 사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굽실굽실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원로 신부님들이 되어계실 것인데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사제가 되지 못하고 같은 봉헌생활을 하면서도 수녀님으로 평생 사셔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교회 내의 여성사제직이 불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 사도들을 남성으로만 뽑으셨다는 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죽임을 당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와 천상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와의 혼인잔치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그 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사제들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이는 내 몸이니... 이는 내 피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대신합니다. 또 고해성사 때도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의 죄를 용서합니다.”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하느님만이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이들은 남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여자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남성은 마치 밭에 씨를 뿌리는 것처럼 자신의 것을 주는 역할을 하고 여성은 밭처럼 받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여성으로 태어나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남성의 역할을 하실 분이시고 교회의 신랑이 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가 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령님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는 아들은 남자인 아버지 앞에서 여성의 역할을 하며 성령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교회에 당신의 전부인 성령님을 보내시며 한 몸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에서도 우리의 ‘성’ (性)은 그대로 남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남성만이 사제가 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성차별을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하지만 한 몸을 이루시는 것처럼,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이 차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은 태초에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아담이 참으로 남자가 된 때는 자신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 앞에서였습니다. ‘나’라는 말이 ‘너’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또 하느님 아버지가 당신 아들이 계시지 않는다면 아버지라 불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땅이 하늘과 함께여야하는 것처럼, 남자도 여자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남자가 씨를 뿌린다고는 하지만 결국 밭이 없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둘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는 누가 먼저 창조되었느냐를 떠나서 서로 결합되어 한 몸이 되어야 완전해진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 혹은 여자의 우월주위를 넘어서서 서로 결합하지 않으면 미완성된 인간으로 남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마음으로나 물질로 도왔던 여인들이 나옵니다. 왜 여자들을 사도로 뽑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이 하느님께서 남녀차별을 해서일까요? 회사에서 누구는 영업부, 누구는 인사부, 누구는 품질관리부 등으로 사람들을 배치한다고 해서 그것이 차별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각자가 더 잘하는 분야가 있기에 그것을 서로 충실히 함으로써 회사 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함입니다. 모두가 다 한 가지 일만 하기를 원한다면 회사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각자의 모습을 존중하지 않고 같은 일만 시키는 것이 차별하는 것일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을 위해 밥을 하고 빨래를 해 주었다고 해서 그들보다 여성들이 낮은 수준의 일을 하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미국의 대통령이고 그 대통령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부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비록 남편의 내조만 해주었다고 해서 남편보다 못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남편의 영광을 함께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녀를 출산했을 때 그 기쁨을 남편, 혹은 아내만 갖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은 자녀를 출산하기 위해 각기 다른 역할을 했지만 결국 자녀를 보면서 함께 기뻐하는 것처럼 누가 더 큰 역할을 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자녀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인간을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셔서 서로 사랑 안에서 도우며 하나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누가 더 높으냐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모님이 미사나 고해성사를 평생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늘나라에서 성모님보다 더 크신 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모님은 성사를 집전했던 모든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남편은 ‘내가 돈벌어오는 기계야?’ 또 아내는 ‘내가 뭐 이 집 가정부야?’라는 식으로 자신의 해야 하는 역할에 불만을 지닐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할 때 둘은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고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사도들을 따라다니며 도왔던 여인들 중,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사도들에게보다 먼저 보이셨던 것처럼 주님의 눈에 고귀한일도 허드렛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남자와 여자는 존재하는 방식의 차이니 서로의 역할을 넘보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참으로 남자가 되고 여자는 참으로 여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더 합당한 일입니다. 얼마 전에 뛰어난 성적을 보였던 한 여자 육상선수의 몸속에 남성의 고환이 들어있는 것이 발견되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몸은 여성이지만 남성 호르몬이 나왔던 것입니다. 여성인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남자와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불쌍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밖에도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일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삶은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당황스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다 써버린 뒤에 후회할 때가 아닐까요?
사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빨리 갔으면 했습니다. 그래야 어른이 되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 당시의 시간은 너무나도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흐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지금보다 더 젊고 어렸을 때의 제 모습을 오히려 그리워합니다. 이러한 제 자신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후회함도 간직하게 됩니다.
사실 지나간 시간은 세상의 돈을 다 주어도 사지 못합니다. 바로 1분 전의 일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장례미사 강론 때에 말한 적이 있었는데,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시는 분의 말씀을 이곳에 적어 봅니다.
“사람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세 마디가 있습니다. 그 말은 ‘그때 좀 참을 걸, 그때 좀 베풀 걸, 그때 좀 재미있게 살 걸’입니다. 임종하는 순간에 ‘사업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좀 더 많은 시간을 쏟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걸, 돈 좀 더 많이 버는 건데.’라면서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아닌,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바로 지금의 자리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의 것을 쓰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주님의 것을 먼저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당황해하지도 또 후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이 대부분 대학 진학을 하면서 집을 떠났다. 집도 있고, 큰 돈 모은 것은 없어도 주로 자영업을 하면서 먹고사는 데 불편은 없었다. 시간이 나면 부부끼리 한국 연속극, 한국 방송물을 갖다 보고, 모국어를 쓰고, 한국 음식을 먹는다. 외국에 살고 있지만 부모들은 그곳 지역사회와 사람들과의 만남에 익숙하지 못해 여전히 현지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분리된 생활을 하고 있다. 주로 언어,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다. 새삼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것’에 엄두가 나지 않으며, 못한다고 하기도 ‘거시기’ 하다고 한다. 그러고는 특히 여성들이 우울해지기 시작하고, ‘뭘 했나? 왜 사는 건가?’ 싶다고 했다.
사실 이민 생활만 빼면, 한국에 사는 40?50대 여성들이 중년기에 겪는 자연스러운 삶의 어려움이지만 ‘오랜 이민 생활’에서 쌓인 어려움을 덜어낼 수도 없는 일이다. 같은 한국말로 이 분들과 일정기간 함께 지내며 내 힘을 보태고 싶은 ‘간절한’ 연민이, 내 마음을 그곳에 붙들어 매 놓고 돌아왔다. 그분들 안에 숨겨진 내적인 힘을 찾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왕에 이민을 갔다면 그 나라의 현지 지역 공동체로 들어가 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이방인으로 고립되고 외롭지 않을까 싶어서다.
또 다른 교민 여성들의 생활을 다른 분에게 들었다. 이분은 동남아 국가의 교민으로 남편의 사업 때문에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다. 동남아 교민들은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나라의 경우 가족이 모두 와서 함께 사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한국 기업체에서 일하며 가족을 데려오는 경우 남편들은 회사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국제학교에 다니고, 부인들은 특별히 매인 곳이 없다고 한다.
인건비가 싸고, 안전 위험이 있어 교민들은 안전하고 좋은 주거지역에 모여 살며 집안일은 현지인들에게 맡기고 있단다. 자연히 부인들 할 일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부인들끼리 모임이 잦고, 모여도 특별한 목표가 없으니 주로 골프 치고, 맛나고 좋은 음식점 찾아다니고, 화투 치고, 말도 나고 마음도 상하고…. 나이도 배운 것도 고향도 다르지만 하릴없이 여자들끼리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사는 것이 뭐 이런가?’ 해서 피정 하러 오신 분이었다.
피정을 마친 그 자매는 자신의 인생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교민들의 삶, 특히 ‘부인들’의 삶을 바꾸어 나갔다. 부인들의 사교모임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정기적으로 모여 기도하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무언가를 만들고, 손으로 작업하며 만드는 동안 각자의 걸어온 삶에 대한 나눔을 하고, 만든 것들을 소외 계층과 나누고, 봉사활동을 나가면서 ‘또 하나의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여인들’을 조직하고 꾸려가고 있다.
무심코 살아가던 삶에서 어떤 물음이 생기는 것은 큰 은혜다. ‘전진’만 하던 삶에서 뭔가 좀 불편하지만 관성에 의해 계속 나아가다가 어느 날은 급제동을 걸 수밖에 없는 날이 오는데, 그전에 스스로 물음을 갖고 멈출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기회’이며, 회심과 치유의 때가 된다. 한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서면 그 주변이 변한다.
모든 이와 함께 하신 예수님의 자유 -상지종신부- 여자들이 온전한 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시절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죄인, 창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내면의 치유자가 되어주신 예수님께 있어서 여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반적인 사회의 풍조를 거슬러 이렇게 어울릴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가히 혁명적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과 함께 함은 예수님의 자유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각 사람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회적 통념이라는 편견을 떨쳐냄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부가된 여러가지 상황과 조건에 앞서 그 사람 자체를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조건을 두고 사람을 만납니다.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며, 함께 사는 세상보다 끼리끼리의 동류 집단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는 참으로 요원하게 느껴집니다. 온갖 구별과 차별이 난무하는 사회 풍토를 거스르기 보다 거기에 편승하고, 그뿐만 아니라 자신만이 지닌 기준과 조건을 덧붙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를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유 자체이신 예수님의 삶을 동경하기에, 이를 배우고 자신의 삶 안에서 예수님의 삶을 체현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 원의를 막연한 공상이 아니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잣대에서 해방되어 내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내 자신을 찾음은 내가 온전한 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바로 이를 통해 다른 이들 각자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새벽을 열며
역사 속에서 우리들은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들과 다른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들은 우리와 달리 눈이 3개라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손이 하나 더 있어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긴 인물들의 외적인 모습을 보면 우리와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매끼 식사를 했을테고 저처럼 매일 화장실을 다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훌륭한 그들과의 차이점을 보이는 것일까요?
외부가 아니라 내부이지요. 아마 이들은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역사 속에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시간 활용을 잘 했는지 몇 명의 예를 들어보지요.
니체는 식사시간 전 10분을 이용해서, 열두 권에 이르는 역사학자 제임스 프라우드의 ‘영국사’를 모두 읽었다고 합니다. 19세기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커피가 데워지기 전 10분을 활용해서 단테의 ‘신곡’을 모두 번역했다고 하네요. 존 스튜어트 밀은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 무척 바빴지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수많은 저작을 완성했습니다. 갈릴레이는 외과 의사였지만, 남다른 부지런함과 집중력으로 시간을 내어 연구함으로써 커다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들처럼 각종 핑계 속에 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은 시간이지만 이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계속해서 개발한 사람들이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 곁에 많은 여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의 성차별은 지금과 비교할 바가 못 되지요. 여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사회였으니 말 다했죠. 그래서 당시의 유명한 스승의 제자들은 언제나 남자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여성 제자들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열 두 제자를 부를 때처럼 여성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께 의지하려 하였고,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당신의 제자로써 삼았던 것이었지요.
이들은 ‘나는 여자니까 못해’라는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제자 되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떤 차별도 없이 우리들 모두를 당신의 아들, 딸로 받아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처럼, 너가 남자라서, 너가 여자라서, 너무 어려서, 돈이 없어서, 장애인이라서, “넌 안돼”라고 우리를 내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대신 여기에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진실된 제자가 될 수 있고, 이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못하겠다고 핑계를 대지 맙시다.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신부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
-최혜영 수녀-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 곁에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유난히도 세간의 이목을 받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막달레나)로 출신지가 갈릴래아 지방의 수도 티베리아스 북쪽의 막달라 마을이었나 봅니다. 성경에 따르면,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신 여자로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보았고 어느 누구보다 먼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달레나에 대해서는 온갖 호기심이 발동하는지 그동안도 숱하게 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의 관심이 되어 예수님의 애인으로 그려졌고, 최근에는 소설 <다빈치 코드>가 인기를 모으면서 예수님과 막달레나의 결혼설이 들먹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가지셨기에 성적 존재로서 성적 욕망을 경험했으리라는 가정은 가능하겠지만 인간이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야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히려 남자들의 욕망을 멋대로 막달레나라는 인물 안에 투사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치유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해치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김덕진-
여권신장 시대’·‘페미니즘 시대’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듣는다. 물론 동남 아시아나 중동지역 여성들이 받는 정도의 핍박을 대한민국 여성들이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도 탄생했고, 얼마 전까지 제1야당의 대표도 여성이었다. 여성 CEO나 여성 대법관 등 흔히 말하는 성공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사례를 기준으로 이 땅의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직도 기업에서 정리해고 대상 1순위는 아이가 있는 기혼 여성이고, 여성은 집안일이나 하고 아이나 키우면서 남성들이 하는 일에는 관심을 꺼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남성들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호주제가 폐지되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갓집에서 상주 노릇은 나이가 어려도 아들이 하는 것이고,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하는 것이 미풍양속처럼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사회다. 여전히 이 땅의 절반인 여성들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희생과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두루 다니셨는데 마귀에 시달리던 여인들이 자기 재산을 털어 시중을 들며 예수님 일행과 동행했다는, 너무나 평범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는 “시중을 들었다”는 구절이 상당히 불편하게 들려왔다. 이는 마치 여성들이 모두가 남성인 예수님 일행을 시중 드는 것을 당연시하는 문구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양성평등의식’이 현저하게 낮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소수자이고, 차별받는 사람들이던 여성들을 일행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심지어 일곱 마귀가 들었다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와도 제자처럼 동행하셨고, 당신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하셨다. 2000년 전 예수님은 그렇게 소수자들,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하신 분이셨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처럼 우리 주변의 소수자들과 동행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 이회진신부-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선교 여행에 12 제자들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여행의 동반자로 함께 초대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공동체의 구성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이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선교 여행에 제자들과 여인들의 동반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들에게는 기쁨이자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당신 곁에 둘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삶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듯,
당신 사랑의 세계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에,
우리가 당신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의 좋지 않은 습관 중 하나는 일을 혼자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하는 것이 더 빠르고 맘에도 들뿐만 아니라 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을 다른 이에게 맡겨 두었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맘에 들게 고치며 시간을 더 많이 허비해야 하는 것이 싫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치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노심초사하는 것이 싫어서
가능하면 일을 혼자서 처리합니다.
그런데 혼자 일을 하면 할수록 일은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은 다른 사람들을 보면 짜증과 미움은 마음속에 쌓여만 갑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제게 “독불장군”이니,
“혼자 다 지고 가느니”하며 불만스러워합니다.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은 제자들과 여인들의 도움마저 받아들이시는데,
예수님처럼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저는 제 마음 하나 편하자고
동료들을 멀리하고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자신도 무엇인가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을 체험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그러한 체험은 예수님께 다시 감사와 자기 삶의 희망을 돌리게 되는 한편,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사랑의 나눔과 희망의 가치를 전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행위는 함께 사는 형제들 하나하나를 고립시키고 구별 짓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는 일을 위해 필요할지 모르나
그것은 일을 위해서지 공동체를 위해서도 사람을 위해서도
소중한 존재가 스스로 되지 못하고 맙니다.
다른 형제들도 역시 자신의 무력함 혹은 무료함 안에서 자기 존중감이 결여되는
우(愚)를 범하게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그와 함께 일을 나누고 삶을 나눈다는 것에
비록 여러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들의 소중함과 삶의 기쁨에 대한 체험은
우리의 삶에 큰 기쁨이 되고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줌으로써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서도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협력을 기꺼이 받아주시며
당신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기에, 우리가 당신의 희망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이 던지는 이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희망 자체이며,
또한 당신의 구원 사업을 함께할 귀한 존재들임을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받아주시고 함께 하시기에,
우리 자신이 예수님 당신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임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오늘 나의 형제들과 가족들과 함께 일과 시간과 삶을 나눈다는 것은
그들과 나 자신에게 우리가 진정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복음적 삶의 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많은 이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의 아집과 독선을 꾸짖어주소서. 당신이 저에게 희망이요 기쁨이듯, 제가 형제들에게 희망이요 기쁨일수 있도록 당신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군밤 한알
- 예진광 신부-
김천에는 직지사가 유명합니다.
4월 어느 화창한 날. 벚꽃이 한창 필 무렵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직지사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지사 벚꽃이 예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직지사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걸어가니까 왼편에 군밤 리어카가 서 있었습니다.
그냥 그 앞을 무심코 지나가고 있는데
그 군밤 사장님이 아무 말씀 없이 지나가고 있는 저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습니다.
이게 뭘까 하고 손을 펴보니 군밤하나였습니다.
‘야! 이거 의외의 수확인데’하며 몇 걸음 걸어가서 입안에 톡 털어 넣었습니다.
어! 근데 밤이 맛이 있네요.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
갑자기 한참 가고 있던 길을 되돌아서 그 군밤 리어카로 가서 밤을 한봉지 사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군밤이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미 먹어 보고, 맛있다고 느껴지니 밤을 살 때 결코 비싸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장사는 이렇게 해야되!’라고 생각하며 군밤을 하나씩 까먹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군밤 한 알!’
‘가던 길을 돌아서게 했던 그 군밤 한 알’
사제는 그 군밤 한 알을 쥐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제가 줄 수 있는 군밤 한 알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 말씀을 살아가는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마디 말보다 하느님 말씀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사람.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사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하느님 복음의 깊은 맛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미 그 맛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낫게 된 여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열정적으로 돕습니다.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을 맛본 그녀들은
이제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군밤 하나를 쥐어주는 사람처럼 하느님 말씀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맛보여주는 사람이 지금 우리 세상에는 많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한명 한명이 세상 사람들에게 군밤하나를 쥐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의 헌신적인 도움
-이기양 신부-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의 직업이 목수이셨고, 삼십 세가 되어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는 직업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만을 전하시기에도 바쁘셨지요. 그렇다면 이렇다할 일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고 사셨을까요? 더군다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열두 명의 제자들은 항상 스승을 따라 다녔고 그들 외에도 수십 명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할 때도 많았습니다. 수십 명이 먹고 자고 입고 쓰는 공동체 생활에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은 뻔한 일이지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재원을 감당할 수 있으셨을까요? 그 답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 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8,1-3)
많은 여인들, 특히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의 여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은총을 입은 이 여인들은 드러내놓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말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에 헌신하실 수가 있었고 또 여인들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바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힘썼던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지켰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서도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돕지 않았다면 그 은총이 지속될 수도 없었을 터이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일을 행하시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여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운신의 폭은 무척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도움은 베드로 사도나 바오로 사도,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 마찬가지였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빈손으로 보내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9-10)
실제로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잡음이 없지 않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이 싫어서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해결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번의 전도 여행과 여러 교회를 돌보기 위해서는 역시 신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도움은 지금도 계속이 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는 쌓아놓은 재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것만을 취하도록 정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도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물심양면으로 돕는 사람들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를 위해 오지에 나가는 성직자나 수도자는 뜻있는 신자들의 도움이 없이는 참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당 신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때 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자를 찾아 연결해주는 것입니다. 신부에게 돈이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신부들 주변에는 늘 고마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정말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선뜻 도움을 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에게 세례를 받았거나 어렵고 힘이 들 때 위로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런 은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처지가 또 신부들의 처지입니다. 신자들은 많은데 정작 아프고 힘이 들어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아무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부는 하느님 안에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꾸리지 않지요. 신부에게 있어서 가족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신자들입니다. 신부나 수녀들은 하느님 안에서 신자들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어렵고 힘이 들 때 누가 도울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 신자들이 돕겠습니까? 불교 신자들이 돕겠습니까? 우리 신자들이 위하고 도와야지요.
그런데 가끔 이렇게 말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신부님께 너무 잘 해 드리면 세속화되셔서 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정도 판단력이 없이 세상을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제는 없지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 세상적인 작은 일로 본질을 흐리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자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게 기도하며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도움을 준다고 하여 ??우리 신부님, 내 신부님?‘하며 지나치게 속된 방법으로 자기만을 위한 관계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지요. 신자들의 올바른 뒷받침은 기도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어주는 힘이 됩니다.
우리 한국 초대교회 많은 신자들의 성직자에 대한 존경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부님?‘하면 ??하느님?‘보듯이 했었지요. 이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존경이 크면 성직자에 대한 존경도 큽니다. 신심이 없으면 같이 갈 수가 없지요. 사람은 자기가 지닌 신심만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성직자를 하느님 보듯이 대하고, 또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모습, 이것이 한국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가장 복음적인 모습이지요.
좋은 공동체, 복음적인 공동체는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헌신적으로 하느님께 헌신하고 신자들은 존경과 믿음으로 성직자를 따르며 뒷받침하는 것이 가장 복음적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루살렘의 많은 여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뒷받침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많은 신자들의 뒷받침을 통해 발전이 이어져 나가고 있지요. 그런 면에 있어서 신자들이 성직자, 수도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격려하고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바람직한 것입니다.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사제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로써 뒷받침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힘이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신자들은 사목자 수도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존경하며 믿고 따르면서 뒷받침하고, 성직자들은 헌신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인들의 많은 도움을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었듯이 우리 신자들도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봉헌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공동체의 중심과 비전
-이수철신부-
가톨릭은 물론 베네딕도 수도회의 영성은 공동체 영성입니다.
어찌 보면 수도생활 자체가 공동생활이요,
공동생활 자체가 힘든 수행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절로 공동체가 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중심과 비전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모두가 바라보는
하나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공통의 비전인 하느님의 나라가 있어야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의 일행을 돕는 여자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하느님의 나라의 비전을 바라보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너무나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하느님의 나라의 비전을 공동으로 지닐 때
비로소 가능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공동의 중심과 비전이 있어야 자기 초월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의 중심이나 비전이 희미할 때,
계속 이기적 자기에 걸려 넘어져 공동체의 일치는 요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와
공동체의 비전인 하느님 나라를 확인하라고
매일의 공동미사와 일곱 번의 공동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공동체의 중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바오로의 고백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희망도 헛됩니다.
공동체도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기에,
우리는 다음 바오로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의 비전이 되는 무아의 삶,
자기 초월의 삶들이 모여 비로소 가능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끊임없이 성숙, 성장해 가야하는 살아있는 공동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매일의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와
공동체의 비전인 하느님의 나라를 확인하고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아름다운 꽃
-강영구신부-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도 따라다녔는데 그들 중에는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그대에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일곱 마귀와 함께 살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전통적으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창녀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말 그녀가 창녀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가9,62)
과거에 발목 잡히고 과거 때문에 회한(悔恨)에 빠져 엎어진 사람은 하늘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지나간 날들의 상처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들풀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는 새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입니다.
당신이 지금의 당신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예수님께 귀의(歸依)한다면
당신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꽃이 될 수 있습니다.
자매 신자들께 감사
-박상대 신부 -
예수께서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선교활동의 일상(日常)에 관하여 짧지만 종합적인 내용을 들려주면서, 활동에 함께 다니던 동반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오늘 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열두 제자와 십수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여인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의 이름이 거명 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시달리다 치유된 여인이며, 요안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 쿠자의 아내였다.
이 여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에까지 동행한 사람들이다.(루가 23,49) 참으로 진정한 동행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예수님의 동반자들이 어디 이들뿐이었겠는가?
예수께서는 선교활동의 시작부터 많은 동행자를 얻으셨다. 예수께서 직접 제자로 불러 곁에 둔 사람들도 있었지만, 친지와 고향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심금(心琴)을 울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자치유와 구마기적에 마음을 뺏겨 그저 신이 나서 따라다녔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감사의 마음으로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감찰반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열두 제자를 선별하셨던 내용이나(루가 6,13), 일흔 두 제자들을 뽑아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둘씩 짝지어 보내신 내용(루가 10,1)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동반자는 적어도 100명은 훨씬 넘어 2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 마태 8,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집도 절도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와 그 복음에 관하여 편력(遍歷)설교를 하셨고,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다. 편력설교자에게 고정된 주거지란 있을 수 없다. 발 닿는 그 곳이 그 날 묵을 곳인 것이며, 거저 그 때 주어지는 음식이 그 날의 양식이다. 이는 예수님의 동반자 모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식이다.
특별히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가복음이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죄인들, 여인들 등,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주제로 보도하는 고유의 특수사료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가복음은 특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예언자 안나, 나인의 과부, 마르타와 마리아, 어떤 부인의 성모칭송, 곱사등이 부인, 잃은 은전과 부인, 재판관과 과부의 청,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길을 동행하는 부인들 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의 비교적 낮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감안할 때, 예수님의 관심이 여인들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인들 또한 예수님의 관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어디를 가든 신학교만 빼고 항상 자매님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활동하며, 하느님 사업의 중심에 서있다.
이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제공하는 2003년 교세통계자료, 전체 신자수 4,481,490명중에서 자매들이 2,614,773명, 형제들이 1,866,717명인 것만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도 같은 통계일 것이 뻔하다. 따라서 교회는 대부분 여인들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 형제 신자분들이 마냥 놀고만 계신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