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연발의 방아쇠
오랜만에 집사람과 함께 하는 서울 나들이다. 중부시장이 주목적지이지만 강동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 먼저 광화문 역에 내려 교보 문고에 들러 애들이 볼 만한 책을 찾았는데 너무나 어린이 도서의 범위가 방대하여 짧은 시간 안에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대여섯 사람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옆에 서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학생이 보여 늑대의 생태라든지 늑대가 등장하는 동화책이 있냐고 도움을 청하자 컴퓨터 검색을 해 보더니 직접 찾아오겠다며 서가로 간 사이 둘이서 잠깐 뭔가 더 얘기를 했는데 목소리가 좀 컸던 모양이었다. 집사람 옆에 앉아서 책을 보던 여자가
“좀 조용히 해 주세요!”
등을 돌리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집사람을 힐끗 보면서 한마디 하고는 책을 다시 들여다보았는데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앙칼지고 고압적이고 신경질적이었다. 옆에 서 있던 내가 보니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체구는 작은 편인데 두꺼운 영어 원서가 독서대 위에 펼쳐져 있었고 한 권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아내가 사과한 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몇 마디 더 했는데 그 여자가 의자를 확 밀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책을 들고 자리를 떴는데 걸음걸이가 하나하나가 폭발적이어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의자 소리와 발소리가 아주 컸다.
시시비비를 가린다면 문제의 발단은 우리에게 있고 더 할 말이 없으니 잘 삭여야 할 경험이었다. 하지만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고 멍한 기분이 들었다. 좀 있다가 그 친절한 학생이 네다섯 권의 책을 들고 왔다. 그 중에 늑대가 등장하는 동화책 한 권을 고르고 또 다른 구역에 가서 수학에 대한 흥미를 기를 수 있다는 책 두 권을 샀다.
다시 광화문 역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 4가에 도착하여 중부시장을 가로질러 오장동 함흥냉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시장에 어귀에 들어서니 수수부꾸미를 지져 팔고 있었다. 점심을 금방 먹었는데도 맛있어 보여 서서 보고 있으려니까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달인'이라는 말이 들렸다. 보니 가게 한쪽에 2003년인가 달인으로 방송에 출연했다는 광고가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하나씩 사서 종이컵에 넣어 준 것을 잘라 먹으며 단골집을 향했다. 30여 년 전 동네 모임이 있었을 때 옆집 할머니가 만들어 준 수수부꾸미를 맛있게 먹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사 먹을 때마다 번번이 그 맛을 다시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일단 기름 범벅이 아니었고 너무 달지 않은 것이 팥소도 구수하고 뒷맛이 쌉쌀한 것이 수수의 풍미가 나 옛날 맛에 가까웠다. 물론 사 먹은 것이어서 이웃집 할머니의 푸근한 정까지는 기대할 수 없었지만 부꾸미가 훨씬 크고 모양도 미끈했다.
딸네 보낼 뱅어포 다섯 묶음과 멸치 한 상자 그리고 책 세 권을 사 들고는 천호동에 가서 버스로 갈아타려고 일단 5호선 상일동행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한참 지나서 갑자기 주위가 훤해져서 보니 5호선을 탄다는 것이 2호선을 잘못 타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표지판을 보고 탔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 지금도 영문을 모르겠다. 나중에 시내 나가게 되면 확인을 해 봐야겠다- 어쨌든 일단 강변 역에서 내렸는데 그때서야 퍼뜩, 내릴 것이 아니라 늘 하던 대로 잠실 역까지 가서 8번 지하철로 환승한 후 천호동에 가서 112-5를 갈아타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생각이 나 다시 타려고 했더니 순간 문이 닫히며 기차는 떠나고 말았다. 다시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2번 전철은 그래도 배차 시간이 길지 않아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는 계속 볼멘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또 일이 잘못되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잠실에 내린다는 것이 다음 정거장인 잠실나루의 '나루'는 잘라 버리고 ‘잠실’에 집중하는 바람에 잠실나루에서 또 내리는 실수를 범했다. 그전에는 역 이름이 ‘성내 역’이었던 것 같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바뀌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다보니 착각을 한 것이리라. 하지만 강변 역에서 잠실이 먼 거리인데 왜 그렇게 거리 감각까지 무뎌졌을까. 잠실을 바로 다음 정거장으로 생각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된다. 또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수가 거기서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 정거장인 잠실에 내려 8번으로 환승하려 가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가다가 집사람이 얘기해서 바로잡을 수 있었다. 늘 반대쪽에서 내려 갈아탔기 때문에 내 발이 그 방향으로 저절로 움직인 게다. 자기감정을 감추는 성격이 아닌 집사람인지라 입 다물고 가만히 있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어지는 실수로 지체된 시간이 거의 4,50분은 될 것이다. 을지로 4가에서 5호선을 탔으면 곧장 천호동으로 갈 수 있었는데 처음에 을지로 4가에서 2호선을 잘못 탔고 강변 역에서 내리지 않고 잠실로 가도 되는데 내렸고 다시 2호선을 타고 다음다음 정거장인데 다음 정거장에 내려 다시 타야 했고 잠실에 내려 환승하는 정거장으로 가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갔으니 도대체 몇 번의 실수를 한 것인가. 지름길은 놔두고 멀리 빙 돌았으니…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을지로 4가에서 2번을 잘못 탔을 때 반대 방향으로 타지 않은 것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만일에 방향까지 틀렸으면 아마 당산철교 건널 때 잘못 탄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 아닌가. 그랬다면 아마 1시간 반 이상 늦었을 것이다.
왜 이런 실수가 이었졌을까. 을지로 4가에서 2호선을 잘못 탄 것이 처음이었을까. 그게 아니다. 책 사러 교보문고에 갔으면 책을 읽는, 그 정숙한 분위기를 타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탈 생각은 안 하고 그 옆에서 아무런 의식이 없이 이야기한 것이 첫 실수였던 것이다. 우리가 범한 실례가 실수 연발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과격한 반응이 내 마음의 평정을 잃게 하는 바람에 집에 이르는 도정道程에서 연이은 실수를 한 것이리라.
첫댓글 수수부끄미
나도 참 좋아합니다
교보문고는 내 휴식처 었는데
어느날 김밥을 사 먹으며 옆 아이가 이뻐 젓갈로 하나 집어 주었다가 그 어미에게 얼마나 무안을 당했었는지?
시방도 잊혀지지 않는 아픈기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