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보통의 사자성어는 중국이나 한국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사자성어는 17세기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각자 각, 스스로 자, 꾀할 도, 살 생.
"각자가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해야한다"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임진왜란과 장유재란으로 조선의 전 국토가 황폐화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해졌지만 조선의 임금은 백성들을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전무했다.
이런 중에 백성들의 입에서 회자되었던 말이 바로 "각자도생"이라고 한다.
자기 살 길은 자기 스스로가 챙겨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학자들은 이 용어가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런 관점으로 인해 이 사자성어는 여태껏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긴 했지만, 긍정적인 측면 또한 간과할수는 없다.
"각자도생"이라는 사자성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견인해야하고 견인할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도움 없이도 각자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견인할수 있다는 의미이다.
쉬운 말로 "묻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묻어간다"를 국어사전에서 "딸려간다"라고 해석한다.
함께 따라가거나 딸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노력하지 않거나 힘들이지 않고 누군가의 힘에 들러붙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사실을 다룰려고 한다.
이 주제를 신앙생활에 국한해서 다룬다.
신앙생활은 묻어가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각자가 자기 자신의 살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극단적이고 단편적인 예를 들까요?
천국을 생각해보자. 천국은 묻어가는 곳이 아니다.
천국은 남편이 믿음 좋은 아내에게 묻어가거나, 자녀가 믿음 좋은 부모에게 묻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천국은 각자도생이다.
예배도 그렇다.
오늘 본문에 가인과 아벨이 예배드리는 장면을 소개한다.
가인과 아벨은 한 가족이고 형제였다(1-2) 가인이 형이고 아벨이 동생이었다.
아벨을 가인의 아우라고 소개한다(2)
아벨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아벨은 어디에 가나 가인의 동생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장남과 차남 사이에는 염연한 서열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가인이 아벨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들 두 형제가 한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쉽게 설명하자면 두 형제가 같은 교회에서 같은 시각에 같은 예배를 드린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예물은 달랐다. 각자의 예물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3-4)
우리도 그렇다. 부부가, 부모 자식이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예물은 다를수 있다.
이렇게 예물도 각자도생이었다.
그리고 예배의 결과도 각자도생이었다.
아벨의 예배는 성공작이었다.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4)
반면에 가인의 예배는 실패작이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5)
우리의 예배의 성공여부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자기만족이 예배 성공여부의 기준이나 척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예배는 실패작이다.
하나님이 수용하시는 예배는 성공작이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사람과 그가 바치는 예물을 각각 받으신다.
사람과 예물이 동시에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려야 한다.
저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이런 예배가 되길 축복한다.
본문은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된 원인이나 이유를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저 암시할 뿐이다.
그래서 저도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한날 한시에 두 사람이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예배만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예배도 각자도생이다.
예배는 묻어가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딸려가는 것도 아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딸려나오신 분이 계신가?
가족이나 친구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아니면 좋은 일하나 하는 셈 치고 나가 주려고 교회에 오신 분이 있는가?
만에 하나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딸려 나오신 분이다. 묻어오신 분이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의 예배에 묻어갈 수 없었다.
이렇게 예배는 각자도생이다.
이제는 몇 가지 본문을 찾아서 이 논지를 증명해보겠다.
먼저, 사도행전 2장1-4절을 찾아 읽어보자.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 승천하셨다.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부탁하셨다.
그래서 120여명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기다렸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다.
본문은 120명의 제자가 성령을 받는 장면을 소개한다.
2-3절을 보라.
바람 소리를 동반한 어떤 힘이 120명이 모여 있는 장소에 가득 찼다.
묵직한 큰 덩어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이 꽉차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2) "가득했다"
그리고 그 힘이 갈라졌다고 한다(3)
큰 덩어리가 나누어지고 쪼개졌다.
제가 어릴 적에는 마른 오징어가 꽤 비싼 간식이었다.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다.
가족이 모여 둘러 앉아 마른오징어를 먹는 시간이다.
어머님이 마른 오징어 몸통을 잡고는 갈래갈래 찢는다.
몸통 하나가 수십개의 가닥으로 찢긴다.
그리고는 다섯 식구에게 정확이 배분이 된다.
마가의 다락방에서도 그랬다.
성령이라는 불리는 덩어리가 갈래 갈래 갈라졌다. 120개로 갈라졌을 것이다.
그리고는 개인 개인에게 임했다.
3절을 보라.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 "각 사람 위에 내렸다"
영어성경 "each of them" "각자에게"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성령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에게 임했다.
이 날 120명 전체가 성령을 받았다.
따로 따로 받았다.
교회에서 절기 때 성만찬을 행한다. 모두가 다 성만찬에 참여했지만 각자가 따로 떡과 포도즙을 받는다.
사도행전 본문은 이들 각자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령임재도 각자도생이다.
묻어갈 수 없다.
이번에는 마태 24:40-41절을 찾아 읽어보자.
이 본문은 많은 난제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단순하게 해석을 한다면 재림의 때를 소개한다(33, 36)
초대교인들은 급박한 재림을 소망했다. 임박한 종말론이 대세였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곧 종말이 온다고 생각했다. 마태도 바울도
두 사람이 같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때 재림이 일어났다. 그런데 한 사람만 구원을 받았다.
한 장소에 임했지만 한 사람만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구원도 각자도생이다.
이렇게 성경은 예배도 성령도 구원도 각자도생이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메시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주님과 일대일로 교제하기 위함이다.
이런 개념이 없으면, 예배 드리는 목적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예배는 옛날 구약교회의 제사와 같아서, 각각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아벨이 아벨의 제단으로, 가인이 가인의 제단으로 예배를 드렸다.
각각 예배드렸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갔다.
하나님은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
그처럼, 하나님은 교회에 오는 모든 성도들의 예배를 각각 받기도 하시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깊은 영성으로 주님을 만났다면, 그것이 열납이다.
형식적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간다면 주님과 교제가 없으니 ‘교회 예배’를 참석한 것이지, 주님과 교제한 것은 아니다.
예배는 주님과 일대일 교제이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교제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다.
여기에서 개인의 영성이 결정된다.
영성은 하나님과 자신의 일대일 관계에서 형성된다.
영성은 절대적으로 개인적이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묻어가지 않는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다.
옛날 중국 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주인공이 어릴 때 부모가 원수에 손에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후 주인공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입산수도한다.
수년이 흘렀다.
주인공이 무술의 달인이 되어 하산한다.
하산하는 날 동네 술집에서 동네 깡패들과 시비가 붙는다.
주인공 혼자서 수십 명의 동네 양아치들을 물리친다.
양아치는 쪽수로 싸우지만 주인공은 실력으로 싸운다.
학교 다닐때를 생각해보라. 일잔들은 몰려다닌다. 양아치도 몰려다닌다. 이들에게 쪽수가 무기이다.
이들은 서로 묻어간다.
하지만 성도는 다르다. 성도의 실력은 개인 영성이다.
이 영성은 각자도생이다.
하나님은 우리 예배를 각각 받으신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아벨의 예배를 각각 받으시고 평가하셨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같은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묻어가는 것을 용납지 않으신다.
우리는 각자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가족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내 자신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증언해주지 않는다.
나하고 친한 사람이 승진했다는 사실은 기쁘지만 내 자신이 승진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축구팀이 경기에서 이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만, 우리 개인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덩실덩실 춤만 출 일이 아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자신의 살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결정이 된다.
유명한 목사님의 이름값이, 유명한 교회라는 브랜드가
반대로 이름 없는 목사님의 이름값이, 무명의 교회 브랜드가 여러분의 신앙의 깊이를 결정짓지 못한다.
개인의 신앙은 각자가 하나님을 만날 때 시작되고 완성된다.
신앙은 각자도생이다.
묻어갈 생각 아에 하지 마라. 가족이나 이웃의 덕 볼 생각하지 마라.
자신을 주관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