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사
1998 - 5대 재벌 구조조정 합의문 발표
우리나라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지 1년여 만인 1998년 오늘!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정-재계 6차 간담회가 열려 5대 그룹 구조조정 추진 합의문이 발표됐다.
이 합의에 따라 5대 그룹은 2000년까지 주력업종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해 계열사 수를 절반 수준인 130개
안팎으로 줄이고 비주력 계열사나 사업부문 매각을 통해 20조원 규모의 자구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재벌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상호채무보증을 해소하는데 중점을 뒀고 정부와 재계는 2000년 3월까지
계열사간의 상호채무보증을 완전 해소한다는데 합의했다.
재벌구조조정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인 1998년 1월 김 대통령과 5대그룹 대표가
5대원칙에 합의했고 6월에 금융감독위원회 주도로 313개의 부실기업을 1차 퇴출대상으로 판정하면서 구체화됐다.
10월에는 7개 업종의 빅딜 합의문이 마련됐다.
1984 - 여성산악인 김영자, 안나푸르나봉(해발 8,091m) 정복
[어제의 오늘]1984년 김영자씨 안나푸르나 등정
ㆍ유서 쓰고 비장한 각오로 재도전
히말라야 칸첸중가 허위 등정 의혹에 휩싸인 오은선씨. 그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칸첸중가 정상에 섰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며 의혹을 부인했다. 칸첸중가 논란은 양심에 대한 왈가왈부이지 등반 실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아니다.
의혹의 진위와 관계없이 오씨가 국내 최정상급 여성 산악인이라는 점은 부동의 사실이다.
오씨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히말라야 14좌 가운데 13개 봉우리를 등정한 세계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는 유효하다.
그가 밟지 못한 14좌의 마지막 봉우리는 안나푸르나다. 그는 지난 10월 안나푸르나에 도전했지만 강풍과 혹한을 만나
정상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안나푸르나는 해발 8091m. 세계에서 아홉번째로 높다. 이 고봉을 등정한 한국 최초의 여성은 김영자씨다.
1984년 12월7일, 날이 밝자 김씨와 4명의 셰르파는 안나푸르나를 향해 마지막 캠프를 떠났다. 캠프에서 정상까지 거리는 300여m. 10시간의 사투 끝에 일행은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다. 여성으로 한국 최초였다. 또한 겨울철 세계 최초의 안나푸르나 등정이라는 신기록도 작성했다. 히말라야 고봉을 겨울철에 등반한다는 것은 웬만한 산사람도 꺼리는 일이다.
심한 제트기류와 영하 30도를 밑도는 추위는 인간의 도전을 쉽게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은 하산 도중에 찾아왔다. 악천후가 일행을 덮친 것이다. 제트기류는 순식간에 셰르파 2명을 집어삼켰다.
김씨는 83년 가을 안나푸르나에 처음 도전했다 실패한 아픔이 있었다. 동료 1명과 셰르파 2명을 잃고, 눈물을 삼키며
되돌아와야 했다. 그는 죽은 동료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안나푸르나를 정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안나푸르나 재도전은 그래서 사뭇 비장했다. 김씨는 출국 전 가까운 산악인들에게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펴보라”며
유서를 건넸다고 한다.김씨의 경우도 ‘등정 시비’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 등반팀이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셰르파가 실종되면서 카메라도 함께 사라져 증거 부실을 트집잡았던 모양이다.
서영찬기자 경향신문 2009-12-06 17:33:5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2061733515&code=
1961 - 박정희 의장 첫 기자회견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국을 이끌어 오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1년 오늘!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결과에 대해 기자회견을 한다.
박정희 의장은 이케다 일본총리와 우호적인 한일관계 유지와 경제협력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에서는 케네디 미대통령을 방문해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와 안보문제를 협의했다고 밝혔다.
2003 - 이을용이 경기 도중 중국 선수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때리다. (속칭 을용타)
을룡타(乙龍打)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 도중 이을용 선수가 상대 선수를 가격하여 퇴장당한 사건, 혹은 그 당시 사진을 패러디한 그림이다.
사건개요
제 1회 동아시아 축구 대회는 일본에서 열렸고 4개국(대한민국, 일본, 중국, 홍콩)이 참가했다. 풀리그 2차전 경기는 2003년 12월 7일 사이타마 경기장에서 열린 중국과의 경기였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은 움베르토 코엘류, 중국은 아리에 한이었다. 공한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중국과 공한증을 이어가려는 대한민국의 상반된 입장이 경기를 가열시켰고, 전반전에도 이미 안정환과 리웨이펑 사이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전반 종료 직전 왼쪽 코너에서 얻은 코너킥 기회에서 이을용이 올린 볼을 유상철이 머리로 받아 넣어 대한민국이 1-0으로 앞서게 되었다.
후반전 14분경, 이을용이 동료의 패스를 받아서 공을 돌렸는데도 중국팀의 리이가 이을용의 오른쪽 발목을 뒤에서 걷어찼다. 이전에도 발목부상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가까스로 부상이 완쾌되고 있던 이을용은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리이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리이가 뒤통수를 감싸쥐고 그라운드에 쓰러지자, 흥분한 중국팀이 몰려왔고 이에 맞서 한국팀도 몰려들어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양팀 선수사이의 실랑이가 어느정도 가라앉자, 주심은 리이에게 경고를 주고 이을용은 퇴장시켰다.
한편 가격당한 리이의 경우, 이을용이 심하게 때린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때렸는데도 헐리우드 액션으로 의심을 받을 만큼 오랫동안 그라운드에 누워 있었다. 결국 나중에는 들것에 실려나와 의료진에 의해서 치료를 받고 다시 그라운드에 들어갔다.
우세한 경기를 펼치던 대한민국은 이을용의 퇴장으로 수적 열세에 놓이게 되었으나, 결국 한골차 리드를 지켜서 경기에서 승리했고 대 중국 무패의 기록을 이어갔다.
1978 - 사상 최초로 남빙양에 어로 출항
우리 나라의 남극진출
1978년 남빙양 크릴 시험조업을 기점으로 시발된 우리 나라의 남극에 대한 관심은 1985년 한국해양소년단연맹의
남극관측탐험대 파견 이후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1986년 11월 세계 33번째로 남극조약에 가입하였습니다.
마침내 1988년 2월 남극 킹조지섬에 첫 상주 연구기지인 세종기지를 준공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 우리 나라는 실질적인 연구결과를 국제사회에 제시함으로서 1989년 10월 배타적 심의결정권을 갖는 남극조약협의당사국(ATCP)으로 선임되는 쾌거를 이룩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1990년 7월에는 남극연구과학위원회(SCAR)의 정회원국 자격을 획득하여, 남극 과학연구 및 자원문제 등에 대한 국제적인 발언권을 인정받는 동시에 명실상부한 남극 진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극지연구소-주요인프라 2002-11-17
http://www.kopri.re.kr/infra/kingsejong/kingsejong_karp_memberBoard
/userBbs/bbsView.do?bbs_cd_n=26&bbs_seq_n=124
1931 - 한국 가톨릭 성직자, 추기경 정진석(鄭鎭奭) 출생
정진석 [鄭鎭奭, 1931.12.7~ ]
한국 천주교 성직자, 추기경.
한국인으로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에 이어 두 번째로 2006년 3월 25일 추기경이 된 가톨릭 성직자이다.
세례명은 니콜라오이다. 1931년 12월 7일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水標洞)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1950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재학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인간이 만든 문명의 이기가 생명을 파괴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거쳐, 로마 우르바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회법 석사 학위를 받은 후, 2000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성신고등학교 교사·부교장, 서울대교구 대주교 비서·상서국장을 지냈다.
1970년 청주교구장이 된 뒤, 같은 해 10월 최연소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후 (재)청주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이사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법위원장·총무·부의장·의장을 지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이 되면서 평양교구 교구장 서리를 겸임하는 한편, 서울대교구 유지재단 이사장,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이사장, (재)평화방송 이사, 한국외방선교회 총재 등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가톨릭 발전을 이끌었다.
일찍부터 추기경 재목으로 주목을 받다가, 2006년 3월 25일 한국인으로는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두 번째로 추기경이 되었다. 사회복지시설인 꽃동네(충북 음성)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북한 교회 재건에도 주도적 열할을 하였다.
교황청에서도 손꼽히는
교회법 분야의 대가로,《교회법 해설》(전15권)을 비롯해《장미꽃다발》(1961),《말씀의 식탁에서》(1986),《간추린 교회법 해설》(1993),《우주을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2003) 등 30여편 발간
1974 - 키프로스의 망명 대통령 마카리오스 3세(Makarios III) 귀국
그리스계와 터키계의 갈등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진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
1974년 오늘!
10만명의 그리스계 키프로스 국민들이 마카리오스 대통령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
다섯달전 터키군이 터키계 키프로스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북부를 점령하자 마카리오스 대통령은 영국으로 탈출했다.
북부 키프로스는 공화국을 선포해 분리를 선포했고 결국 마카리오스는 그리스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남부의 지도자로 남게됐다.
1964 - 박정희 대통령 서독 방문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12월 7일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서독 쾰른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전세기가 없어 서독에서 보내준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60명의 일반승객과 함께 타고 일곱 곳이나 경유하며 서독에 도착하는 데 28시간이나 걸렸다. 말이 국빈방문이지 숙소는 10평에 불과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행을 결심한 것은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외자로 수출산업을 육성하려 했지만 달러를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미국조차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에 차관을 줄 수 없다고 했고 일본과는 국교수립도 안된 상태였다. 외자도입은 ‘매국(賣國)’으로 비판받던 시절이었다. 한국이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준 대가였는지 서독은 4000만달러 차관을 제공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이때 구상된다. 박 대통령은 독일이 자랑하는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직접 주행해보고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실감한 것이다.
2004 -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하우스 대규모 개보수공사 마치고 재개관
1778년 8월 3일 살리에리(Salieri)의 “재인식된 유럽(Europa Riconosciuta)"을 통해 개장하게 된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은 그 동안 빈첸죠 벨리니(Vincenzo Bellini)의 “노르마(Norma)”, 쥬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오텔로(Otello)”와 “팔스타프(Falstaf)”, 아밀카레 폰키엘리(Amilcare Ponchieri)의 “지오콘다(Gioconda)”,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의 “메티스토펠레(Metistofele)”,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의 “투란도트(Turandot)”가 초연되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이던 1943년에는 폭격에 무대만이 남고 파괴가 되었다가 1945에서 46년에 걸쳐 재건립이 되어 1946년 5월 11일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지휘하는 콘서트로 재개장을 했다. 2001년에서 2003년에 걸친 대규모 재건축 공사를 통해 기술적인 무대 등을 가미하면서 2004년 12월 7일에 200여 년전에 라 스칼라
극장이 처음으로 개장했을 때 올렸던 살리에리의 “재인식된 유럽”으로 재개장 한 것이다.
건축-ARCHITETTURA 2005/04/19 13:53 http://studioaiac.com/blog/archiseon/tag/3D
1975 - 미국의 소설가, 극작가 와일더(Wilder, Thornton) 사망
와일더 [Wilder, Thornton (Niven), 1897.4.17~1975.12.7]
미국의 소설가, 극작가.
위스콘신 매디슨 출생. 소년시절을 홍콩 등지에서 보내고, 후에 예일대학을 졸업한 다음 고등학교와 시카고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소설 ·희곡을 썼다. 격조 있는 문체와 신선한 형식,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는 명상적인 작풍,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인생을 긍정하는 태도에 의하여 미국 문학계의 특이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소설에는 사고사(事故死)한 인물의 과거를 추구하여 신의 섭리인가 우발적인 사고인가를 구명하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The Bridge of San Luis Rey》(1927), 서간문과 일기문으로 카이사르 등 로마인의 사생활을 전하는 《3월 15일 The Ides of March》(1948),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를 둘러싼 인간성의 미묘함을 그린 《제8일》(1967) 등이 있다.
희곡에서도 무대의 시간 ·공간의 틀을 깬 비사실(非寫實) 형식을 구사하여 인류의 유구한 주제와 정면 대결, 1막극집 《긴 크리스마스의 정찬(正餐) The Long Christmas Dinner》(1931)을 비롯하여, 연애와 결혼 그리고 죽음이라는 가정생활의 평범한 사건을 파헤친 《우리 마을 Our Town》(1938), 빙하 ·홍수 ·전쟁의 재해를 헤쳐온 인류의 의의를 호소하는 우의극(寓意劇) 《위기일발 The Skin of Our Teeth》(1942), 뮤지컬 《헬로, 돌리》의 원작이 된 인생을 구가하는 희극 《중매인》(1954) 등의 걸작이 있다.
1972 - 미국 우주선 아폴로 17호(Apollo 17) 발사
1972년 오늘!
아폴로 우주선 가운데 마지막 우주선인 아폴로 17호가 달탐사를 위해 발사된다.
해리슨 슈미트를 비롯해 세명의 우주인을 태운 아폴로 17호는 우주선 발사 역사상 처음으로 야간에 발사됐다.
세 명의 조종사는 75시간동안 달탐사 작업을 성공리에 마치고 12월 19일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YTN
아폴로 17호(Apollo 17)는 미국항공우주국에서 계획한 아폴로 계획의 11번째 유인 우주선이다. 2009년 현재 마지막으로 달에 착륙한 유인 우주선이다.
정보
아폴로 17호는 1972년 12월 7일 협정 세계시 05:33:00 에 미국 케네디 우주 센터 LC 39A 발사 패드에서 발사되었다. 사령선은 아메리카, 달 착륙선은 챌린저라는 호출 부호로 불렸다. 달 착륙선은 1972년 12월 11일 협정 세계시 02:23:35 에 달에 착륙하였다. 아폴로 17호는 1972년 12월 19일 협정 세계시 19:24:59 에 귀환하였다.
미션의 하이라이트
달 표면에 발자국을 찍은 인류 마지막 2명은, 최초의 지질학자 출신의 우주비행사이기도 한 해리슨 슈미트였다. 에반스가 사령선으로 달을 주회하는 동안, 슈미트와 서넌은 3회의 달표면 보행 동안에 110.52 kg 의 암석을 채집했다. 2명은, 월면차를 타고 타우루스-리트로우 계곡을 34 km 이동해, 오렌지색의 흙을 발견했다. 또 달표면에 ALSEP에 격납된 실험 기기를 설치했다. 이 미션은 아폴로 계획 중 마지막 임무였다.
월면 활동
이 임무의 착륙 지점은 맑음의 바다의 남서쪽에 있는 타우르스 산지(Montes Taurus)였다. 여기는 3개의 높고 험한 암괴의 사이에 있는 땅으로서, 타우루스-리트로우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임무 전에 촬영된 사진에 의하면, 산기슭에 따라서 큰 자갈이 있어, 그것들은 암상의 표본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일대는 또, 산사태나 몇 개의 충돌 크레이터 및 화산의 분화 자취라고 생각되는 곳이 있었다.
이 J미션으로, 2명은 월면차를 이용해 3회(각각 7.2시간, 7.6시간, 7.3시간)의 달표면 탐색을 실시했다. 이 미션에 의해서 달표면으로부터 채집된 표본은 110.52 kg 에 달한다.
현재, 사령선은 NASA의 존슨 우주 센터(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전시되고 있다. 달 착륙선은 1972년 12월 15일 1시 50분 (미국 동부 시간), 달표면의 북위 19도 96분·동경 30도 50분 지점에 충돌했다.
이 미션으로, 우주비행사들은 「푸른 구슬」 로 알려진 지구의 사진을 촬영했다.
1987 - 고르바초프, 1973년이래 소련 지도자로선 첫 미국 공식방문
1987년 오늘, 고르바초프 옛 소련의 공산당서기장이 미국을 방문해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소 정상회담을 가졌다.
고르바초프의 이번 미국 방문은 INF, 즉 중거리핵전력 폐기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것이다.
이튿날인 1987년 12월 8일 고르바초프 당시 서기장과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중거리핵전력 폐기협정에 서명했다.
두나라 정상은 기념으로 협정에 서명했던 펜을 서로 교환했다.
이 협정의 주요내용은 사정거리가 3백에서 3천4백마일에 해당하는 미국과 소련의 핵미사일을 3년안에 폐기하는 의정 협정
1965 - 로마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 그리스정교회 총주교와 911년만에 화해
바티칸 공의회
그 직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속 이끌어 1965년 10월 28일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NOSTRA AETATE)을 발표하여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천명하고 같은 해 12월 8일 절찬리에 폐회하였다.
더불어 바오로 6세는 재위 초기부터 개신교와 성공회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 결성을 통해서 시작한 교회일치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형제임을 강조하여 동방 정교회의 총대주교들과 만나는 한편,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아서 M. 램지의 방문도 받았다. 1964년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등 세계 각국을 방문하였다. 대한민국의 순교자 24위를 추가로 복자에 추대하고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1970 - 빌리 브란트(Brandt, Willy) 서독 총리, 폴란드에 사죄
잔뜩 흐린 하늘에 날씨도 쌀쌀했던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의 한 유태인 위령탑 앞에서 애도를 표하다가 갑자기 차가운 대리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과거 나치독일에 상처받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독일 총리으로는 2차 대전 후 25년 만에 처음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는 국교정상화 조약에 서명한 뒤 바르샤바의 한 유태인 위령탑을 찾은 길이었다. 브란트의 이처럼 파격적인 사죄는 동방정책과 함께 훗날 독일 통일의 밑거름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독일인들의 당시 반응은 냉담했다. 국민의 41%는 “적절했다”고 했고 48%는 “심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침공 이후 2차대전으로 폴란드는 600만명의 국민과 40%의 국부(國富)를 잃었다.
폴란드를 방문한 서독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