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영화를 관람하고 맘이 착잡하다.
1979년 12월 13일. 오전
전 장병을 연병장에 집합시킨 수경사 30단장 장세동 대령 왈 "국난에 처한 국가를 구해낸 애국충정의 장병여러분을 후대가 기억할 것이니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국난극복의 현장에 있었음을 자랑하라"
지금도 그 말이 뇌리에 생생하다.
12.12 그날 밤. 장태완 수경사령관님이 일찍 결단하고 방공포단에 발사 명령을 내렸으면 우리 모두 영문도 모른 채 같은 부대의 포탄에 맞아 개죽음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아무 일 없었음에 안도하였던 일도 기억에서 새롭다.
<그렇게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는 영화 마지막 장면의 자막에서 눈시울을 적셨다.
그날 밤이 누군가의 탐욕적 야만에 맞선 누군가에겐 정의를 위해 그토록 처절하고 치열한 밤이었는데 그저 무탈함을 다행으로 여겼던 그때 우리들의 무지가 마냥 부끄럽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 사건 10.26은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30단 수송부 배차계로 근무하며 앰브란스를 궁정동 청와대로 급파하며 겪었고, 그 후 긴장된 상황에서 12.12 이 날을 맞았다.
아침부터 왠 별들이 부대에 3,40개가 뜨고, 영문도 모른 채 개인화기 실탄 90발을 지급 받고(다들 북한의 침공으로 짐작), 초긴장 상태로 대기하며 저녁에 평소와 달리 장세동 단장의 직접 지시로 목적지도 모른채 병력수송용 차량(2 1/2t) 전체를 배차하였고, 늦은 밤에 운행을 마치고 돌아온 운전병에게 참모총장 공관에 전투 병력을 싣고 다녀왔는데, 도착하니 이미 해병대와 공관 경비병간 전투가 종료되어 조금 대기하다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그 상황의 의미를 전혀 몰랐다.
수경사 부대원으로 복무함에 더하여 30단 근무는 청와대 특정지역을 경호 경비한다는 큰 자긍심이 있었던 우리 모두였는데, 결과적으로 반란군의 소굴에서 근무한 것이 되었으니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의 아이러니한 역사적 팩트가 황당할 따름이다.
명예로운 군 복무의 자긍심을 빼앗아간 역사의 죄인, 패륜 역적××들, 이 나쁜놈들아~
우리의 젊은 명예를 돌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