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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삶의 열매16-마태복음 6장 33절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요소를 의,식,주로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어디에서 살까를 늘 고민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으십니까? 가난한 사람들만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들 역시 그런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런 고민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1-32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시니까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실 때 그 기도는 여러분 자신을 위한 기도와 가정과 교회와 사업장과 회사와 이 지역과 나라와 온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기도를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계에 있고 하나님의 임재는 온 세계 모든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하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임하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 개인의 삶도, 가정도, 교회도, 사업장도, 회사도, 여러분의 동네도, 그리고 나라와 온 세계도 존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와 평화와 기쁨을 이 모든 곳에서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것을 강하게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이 아녀도 자기들의 힘으로 충분히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로운 나라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깊이 연구하고 발표한 학자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이론 속에는 공산주의 이론도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지도층의 사람들을 몰아내고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살면 의로운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론이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공산화가 일어난 나라마다 엄청난 숙청의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순식간에 온 세계의 약 삼분의 일을 잠식했습니다. 얼마간 그들은 강력한 힘을 얻고 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그런 공산주의가 시작부터 스스로 잘못된 사상임을 인정하는데 걸린 시간이 약 70년입니다. 마치 브갓네살이 일으켰던 강력한 나라가 70년밖에 못간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없다고 하거나 잘못된 신관을 가진 종교전쟁도 역시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힘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종교전쟁이 무서운 것은 신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이라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흘려도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이런 종교 전쟁이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악에 대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이 그들을 토해 낸 것이며 하나님은 그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신 것입니다. 종교도 이 세상 정치도 문화도 역시 세상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나라로 만들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거부했던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사탄의 발아래 통치를 받고 있고, 죄 아래 사로잡혀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정복하려고 시도합니다.
사람들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자유롭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새로운 자기를 향해 도전해 오는 권력에 대한 도전자들에 늘 긴장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합니다. 마치 사울이 언제 자신이 왕좌에서 쫓겨날지 불안해 하면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닌 것처럼 자기들의 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자기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이 어떻게 정의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나 자기 당이 정권을 잡고 있어야 평화와 안정과 정의가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려면서 반대세력의 힘을 극소화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최대한 상대방이 약해야 국민들로 부터 지지를 확보하고 자기들의 영향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도 역시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끝없이 갈등하고 대립하고 싸우며 충돌합니다. 그러니 어디에 안정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 어느 나라가 영원한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며 지배를 한 적이 있습니까? 결국 모두가 한 때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삶도 영원하지 않으며 여러분들이 악착같이 벌어 모으신 것도 역시 한 때입니다. 잠시는 그것으로 인해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그것을 누리려고 할 때는 이미 너무 늙어버립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칠 때 그 백성들이 참으로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먹이려고 먹을 것을 잔뜩 싸가지고 왔던 큰 부자였던 바르실래가 이제 다윗의 군사들이 승리하고 다시 다윗성으로 돌아갈 때 다윗이 자신을 우대하며 “함께 궁궐로 가자”고 하자 바르실래가 한 말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사무엘하 19장 33절에서는 다윗왕이 바르실래에게 함께 가자고 말합니다. 자신이 남은 평생을 공궤하겠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그 말을 들은 바르실래가 뭐라고 합니까? 34-35절입니다.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무슨 말입니까? 늙으면 부자나 가난한 자나 존귀한 자나 비천한 자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남은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젊은 사람이나 중년의 사람이나 노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내용이며 또한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평생을 모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자랑스러움으로 여깁니다. 오늘날은 그런 부모를 제대로 공경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재산은 원하지만 재산을 물려주는 부모를 모시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냉담해졌습니다. 자신의 일생의 염원인 자녀의 행복이 자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탐욕의 노예로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권리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모들이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여기저기서 깨지고 부숴지고 파괴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교회에 내려오는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는 모든 성도가 집사 직분 이상의 직분을 받게 되면 그 직분자들은 생명보험을 하나씩 듭니다. 여러분 생명보험을 들어놓으셨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별로 생명보험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험제도가 발달한 미국의 경우 생명보험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들어놓는데 미국의 교회의 경우 직분자들은 자기들이 죽으면 그 보험료를 교회가 타게 만든다고 합니다. 보험의 수혜자가 교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하면 자기가 죽어도 교회는 계속해서 그것을 가지고 선교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침례교회가 한국 땅에 정착할 때 펜윅선교사는 목회자나 선교사의 직분을 받고 한국으로 온 것이 아니라 평신도 신분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는 아무의 후원도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선교하고자 농업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래서 함경도 땅에 사과 나무를 심은 과수원을 만들어 성도들과 함께 공동재배와 공동판매를 하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도들은 십일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자기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번돈을 가지고 새로운 곳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갔습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사역을 하던 펜윅 선교사는 잠시 카나다로 갔다가 미국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자신에게 선교사로써의 소명을 일깨워주는 설교말씀을 전했던 목사님을 만난 펜윅선교사는 침례교 신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때 다른 선교사님들과 함께 왔는데 그때 후원을 했던 선교회가 엘라싱선교회였습니다.
이 선교회는 한 사람이 일평생 모은 돈을 선교하는 일에 사용해달라고 하면서 자기의 딸 이름으로 헌금을 함으로 인해 생긴 선교회입니다. 그가 선교한 이 헌금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선교사들을 파송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의 중요성과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자기 평생에 모은 돈을 하나님 나라를 활짝 여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팬윅도 엘라싱의 아버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소중함을 안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면서 이는 내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한 나의 뜻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그런데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렇게 살면 여러분들이 망하는 것 아닐까 하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여러분들에게 그런 염려를 주어서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합니다. 염려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하는 것을 막는 악입니다. 한 번 염려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선한 손을 펼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34절에서 예수님은 염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염려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은 창고에 가득 쌓아놓고 통장에 잔뜩 넣어놓고도 염려합니다. 그래서 조금더, 조금만 더하면서 통장을 하나하나 계속해서 늘려갑니다. 돈을 넣고 또 넣습니다. 그러나 넣을 때는 좋고 흐뭇하고 안심이 되는 것같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거의 사용하지 못합니다.
시편 49편 6-8절은 이런 땅의 것으로 기쁨을 삼으면서 염려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리고 이어서 9-10절에 말씀하십니다.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땅의 것에 전전긍긍하면서 그것들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해도 결국 자기의 손을 떠나 누구가에게로 재물은 떠납니다. 그런데 정작 돈을 모은 자신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아깝고 돈을 허비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영원히 살수도 없고 결국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게 되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마귀가 준 탐욕과 욕망과 하나님 없이 세상의 향락과 쾌락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와 세상은 영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 사이의 영적인 충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부부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부분에서는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신자와 같이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필연적으로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정에는 천국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어려움이 임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보면 세상과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먼저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을 보면 육체와 성령의 전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영혼이 자유한 사람은 염려와 걱정과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진리를 만났던 삭개오가 자기 평생 모았던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예수님께 약속합니다. “주님 나는 이제 제가 모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다면 사배나 값겠나이다” 예수님이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니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섬김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위치와, 예수님의 증인으로써의 자기 위치를 찾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애착이 있고 이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이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세우기 위해 여러분들이 해야할 한가지, 하나님의 발 앞에 두어야 할 한가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르겠거든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의 눈을 여셔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무엇을 통해 일하려고 하시는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심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 그리고 제석교회가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