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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설립자' 상허 유석창 박사, '한국 농업의 별' 선정
2015.08.17. 01:34
건국대 설립자인 상허(常虛) 유석창(劉錫昶) 박사가 농림축산식품부 주관 행사 ‘광복 70년 농림업 70년’에서 ‘한국 농업의 별’로 선정됐다. ‘한국 농업의 별’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농림축산업 발전에 기여해 선정된 인물이다. 농림부는 유석창 박사와 함께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 등 13인을 선정했다. 유석창 박사는 건국대학교 설립과 후학 양성으로 한국 농업과 농촌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축산대학을 집중 육성해 축산분야의 인재양성과 축산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와 함께 열린 ‘광복 70년, 농림업 70년’ 사진전은 ‘농림업 70년을 관통하는 과거-현재-미래’를 주제로 서울 양재동 aT센터 광장에서 우리나라 농업, 농촌의 변화와 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과 70년간 농업과 국가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전시하며 8월 7~16일 동안 진행됐다.
이처럼 유석창 박사는 우리나라의 농업 근대화에 힘쓰고 그와 함께 건국대학교와 민중병원(현재 건국대학교병원) 설립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자 농촌혁명가이며 사학설립자다. 학교에 다니며 듣는 상허 유석창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가? ‘상허기념도서관’, ’상허연구관’ 의 건물 이름이나 교양강의 ‘건학정신과 대학생활’로 약간 알고 있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학생은 유석창 박사를 건국대의 설립자이며 초대총장으로만 알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자식이며 광복 후 조국의 농촌, 농업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이번 선정을 기념해 유 박사의 일대기 <조용한 혁명을 위하여>(박기용. 나라기획)를 정리해 유 박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모교 건국대학교의 뿌리를 알고 애교심을 고취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상허 유석창 박사는 1900년 3월 17일에 출생해 1972년 1월 1일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72년간의 발자취를 갼락히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 아버지 유승균 선생, 어머니 홍숙경 여사와 13살의 유석창 (1912년)
호는 상허(常虛). 함경남도 단천 출생. 11세 때 독립투사인 아버지 승균(勝均)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장백현·간도성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21세 때 귀국하였으며 서울 경신학교를 거쳐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5월서울 종로2가에서 중앙실비진료원(후의 민중병원)을 개설하였으며, 1932년에는 『보건신문』을 창간하는 등 일제치하에서 어려운 민중들을 위한 시료와 보건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9년 조선보건협회 회장으로 활약하였으나, 민중병원장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회장도 그만두었다. 1945년 8월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인이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사설강습소인 건국의숙(建國義塾) 인가를 얻는 등 정치·학구 및 교육 등의 분야에서 건국 초기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건국의숙은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었으며, 뒤에 정규대학인 건국대학교로까지 발전시켜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저서로는 『한국농업의 미래상』·『조용한 혁명』 등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 유석창[劉錫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발췌
이 정도는 유석창 박사에 관심 있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유 박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건국대학교를 어떻게 설립하게 됐는지 알기 힘들다. 위인의 업적을 외울 때나 보는 글 같아 유 박사라는 인물에 대한 어떠한 이미지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유석창 박사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몇 에피소드를 풀어보고자 한다.
상허와 건국대학교
건국대학교는 처음부터 완성형으로 장안벌에 생긴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1945년 사설강습소 건국의숙을 시작으로 조선정치학관(46’)-조선정치대학관(48’)-조선정치대학(49’)-건국대학교(59’)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종합대학 건국대학교가 된 것이다. 이름이 다양했던 것처럼 다양한 이야기도 품고 있다.
독립운동가인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간 유 박사는 1917년 졸업 후 모교 관화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의 광복을 대비해 인재를 육성할 대학 건립을 계획했다. 낙원동에 있는 협성실업학교 교사에서 1945년, 유 박사의 나이 46세에 건국대학교는 시작됐다. 이 건물은 본래 서북학회 회관으로 지어놓았던 것으로 77년 해체되었으나 85년 장안벌에 복원, 현재 건국대학교 상허기념관 박물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부친이 독립운동하며 관화학교장으로 많은 학생을 계몽했던 것처럼 유 박사도 그 뒤를 따른 것이다. 최초 수강생은 30명 정도였으며 김규식, 조정환, 미군정청의 고위 간부들이 가르쳤다.
△ 조선정치학관 제1회 졸업 기념(1948년)
이어 정규학관 ‘조선정치학관’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학관의 설립목적은 조선의 중견 남녀에게 정치 및 사회에 대한 학술을 주로 교수하며, 장래 조선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기에 족할 만한 동량의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초창기의 학관은 민족지도자들의 강연회 같은 특강이 특징이었다. 48년 조선정치대학관, 49년 조선정치대학을 거쳐 유 박사는 대학 터를 옮기기로 한다. 54년부터 대학 터를 찾아다닌 유 박사는 회기동과 이문동에 터를 잡을까 생각하였지만, 육종학자 우장춘의 조언을 받들어 포기했다. 농축계열의 대학을 세우는 부지로 적격인 장안벌을 찾아냈다. 알고 보니 장안벌부터 한강 변까지 펼쳐진 자양동은 청년 시절 기독청년동우회에서 활동하면서 사회학적 농민실태조사를 한 대상 지역이었다. 당시 ‘자마장’이라 불렸던 자양동은 구황실에서 필요로 하던 암말들을 키워내던 널찍한 벌판이었다. 유 박사는 한강 물을 도관으로 끌어와 가운데의 야산에 폭포를 만들고 진펄을 호수로 바꾸어 놓으며 북쪽의 언덕에 도서관을 세우리라는 계획을 세웠다. 1955년 모진동 매매를 시작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도움도 받으며 부지를 마련했다. 1959년 기존의 정치대학을 ‘건국대학교’로 승격시킨다. 이때 건국대학교라는 이름은 45년에 개설했던 사설강습소 건국의숙의 명칭을 되살린 것이다. 최초의 건국대학교는 문리과대학, 정치대학, 축산대학, 대학원 등으로 구성됐으며 1대 총장으로 유 박사가 부임했다. 입학시험은 대학 자체적으로 출시했으며 평균경쟁률 3.7대 1을 기록했다.
△ 조선학생기독청년연합회 회원들과 함께(첫째줄 왼쪽 첫 번째, 1921년 4월 3일)
첫째, 한국의 후진성은 비단 경제적인 면에서만 극복될 것이 아니라, 이 근본적인 백년지계로서는 문화 수준의 향상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교육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둘째, 이와 더불어 한국의 입지적 조건으로 보아, 전인구의 70%가 농민이므로 피폐된 농촌의 부활이 시급한 일인데, 이를 위하여서는 유능한 농촌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
셋째, 따라서 본 대학의 건학이념은 애국애족에 불타는 지도자의 육성에 있으며, 교명도 또한 그러한 이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 1959년 6월 3일 유 박사가 천명한 건학정신
그러던 중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의 임시특례법에 의해 유 박사는 총장식을 사퇴했고 명예총장직으로 재임했다. 그 후 학생들과 이사회의 요청으로 이사장으로 취임해 학교의 발전을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유 박사가 다니던 경신학교에서는 고학생과 지방학생을 위해 실비로 기숙사를 운영했다. 미국인 교장 군예빈(Edwin W. Koons)은 고학생들을 위해 수공부를 차리고 기술을 습득시키며 제작시킨 생산품에 공임을 지급했다. 이를 따라 유 박사는 후에 건국대에서 근로장학생제도를 운용했다. 생활관에 기거하며 농원경비, 우유 배달로 돈을 버는 제도였다. ‘성신의 장학금’도 운영했는데, 성조는 등록금+생활비+용돈, 신조는 등록금+생활비, 의조는 등록금을 지급했으며 장학금 수혜자의 수가 상당했다.
유 박사와 건국대학교병원(구 민중병원)
건국대학교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건국대학교병원이 있다. 병원 역시 건국대학교처럼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31')-사회영 중앙진료원(33')- 사회영 민중병원(34')- 사단법인 민중병원(49')-사단법인 건국대학교병원(05‘)가 그 과정이다. 건국대학교병원은 민중의 건강을 목표로 끊임없이 발전했다.
△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오른쪽 두 번째 건물,종로2가, 1932년 11월 ~ 1950년 6월)
만주 정착 시에 유 박사의 모친이 풍토병으로 고생했다. 그 사건으로 유 박사는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1919년 귀국했을 때 의사가 돼 겨레 사랑을 실천하기로 작정했다. 경신학교 졸업 후 스물다섯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며 졸업 후 단천으로 가 의사로 일했다. 이때까지는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흔한 행보였다. 유 박사는 그곳에서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1931년 서울에 온다. 이때 가난하여 병마에서 풀려나올 수 없는 민중을 위해 대규모의 실비진료기관을 설립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게 된다. 대의를 함께하기로 한 오하영(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가운데 한 사람)과 이대위를 만나 동지들을 모았다. 강연회에서 유 박사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실비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진료해드릴 것입니다. 나는 결코 불쌍한 환자들의 진료를 미끼로 하여 치부하거나 이름을 날리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오직 형제자매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사회의 공익기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며 민중을 위한 진료소 건립에 굳은 의지를 보였다. 마침내 1931년에 오늘의 건국대학교병원 전신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이 설립되었다. 진료비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14원 97전, 성냥 1통 1전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대수술 5~20원, 진료비 20전 이하, 시술료 약 20전으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었다.
△ 민중병원(성동구 화양동, 1961년)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은 33년 사회영 중앙진료원, 34년 사회영 민중병원으로 이어 개칭했다. 1949년까지도 병원은 종로 2가 13번지에 있었다. 6.25 사변 중 화재를 입었고 잠시 정치대 서울분교의 교사로 사용하다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장안벌로 학교터를 잡은 후에 1971년에 성동구 화양동 97번지에 위치하게 됐다. 2005년에 병원은 ‘사단법인 건국대학교병원’으로 개칭하며 서울캠퍼스 남단에 새 건물로 개원했다.
일감호로 다시 태어난 함경남도의 양촌못
유 박사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단천 돌산리의 양촌못은 건국대의 인공호수 일감호(一鑑湖)의 모형이다. 교정 건설 당시 땅뙈기 한가운데 널찍한 진펄이 새로운 양촌못의 자리였다. 물을 끌어오기 위해 도관을 매설하고, 유 박사의 묘소가 위치한 언덕에 폭포를 만들어 호수에 한강 물을 댔다. 서북향으로 한반도 지형과 엇비슷한 모양으로 파냈다. 지리상으로 평양 부근에 섬을 만들어 ‘와우도’(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의미)라 이름 짓고, 전라남북도 경계선 부근에 구름다리를 놓아 ‘홍예교’라 이름 짓고, 원산만에 해당하는 곳에 배수로를 내었다. 남해안부근에 놓은 등가 ‘청심대’는 덕수궁, 창경궁, 명문고가 몇 군데에서 모형을 구한 것이다. 홍예교의 이름 ‘홍예’는 ‘암무지개’라는 뜻으로 구례산에 걸렸던 그 무지개와 어린이 유석창 박사를 연상시킨다. 유 박사 별세 후에 홍예교를 선화교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변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동의를 받아내 생긴 일감호는 오늘날 건국대를 상징하는 명물로 성장하였으며 주변 주민의 산책코스, 다양한 생태계를 경험의 장으로 꼽히게 되었다. 수업을 듣기 위해 청심대 부근을 지날 때면 오리의 울음소리가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 건국인으로서 누리는 행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 건국대학교 장안동 캠퍼스(1958년)
농촌혁명운동의 선구자
유 박사는 어린시절 교장인 부친 유승균(후에 유승우로 개명)으로부터 민족의 역사와 농업근대화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이것은 유 박사의 농촌혁명운동 시발점이었다. 유 박사는 경의전에 진학 후 1927년 기독청년동우회에 가입했다. 유 박사는 그곳에서 산전개간운동에 참여하고, 자마장 지역의 농촌상태를 연구하고, 수원 등지에서 농민에게 새 영농기술을 가르치거나 의료봉사도 시행했다. 이때의 경험과 지식은 농촌혁명사상의 기틀이 되었다.
건국대학교 설립 시 유 박사는 축산진흥이 농촌부흥의 지름길이며 농촌부흥이 국가건설의 밑바탕이라고 통찰했다. 당시 조국은 전통적 생산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농업형태를 갖고 있었고 이를 혁신하는 방략은 축산진흥을 목표로 한 대학교육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히 건국대 축산대학생(현재의 동물생명과학대학)은 특별기준에 따라 선발돼 생활비, 학비, 유학비 등 다방면으로 지원받았다. 유 박사는 축대 1기생의 졸업 전에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특별히 신경 썼다.
노년기 후반 총장직에서 물러난 유 박사는 영면 때까지 농업혁명에 투신했다. 유 박사의 농촌혁명사상은 부친 유일우의 수리기술진흥책, 기독청년동우회의 산전개간운동, 4개 농축계열대학의 설립과 2개 농촌운동단체의 발족으로 잉태되고 발전해 왔다. 근년에 와서야 대학에 보편화된 ‘농촌활동’(농활)의 조상격인 학생운동도 건대에서 앞장선 것이다. 1957년 농촌연구반을 조직하고 매년 여름방학에 농촌을 찾아가 연설하거나 농번기에 품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이었다.
건국대 축산대 설립 말고도 유 박사는 중앙종묘주식회사의 사장 박갑수의 전국농업기술자대회를 공동개최 후, 추진체로서 전국농업기술자협회를 설립했다. 또한, 이 협회의 기관지 농업기술회보를 창간했다.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대회가 도하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등 많은 주목을 받았다.
△ 제5회 전국농업기술자대회 후 광화문 시가행진(1964년 11월 4일)
유 박사는 농업 분야에 한하여 자신의 견해를 두 책에 저술했다. 이 책들은 학위논문을 제외하고 필생의 작품이다. 65년 5월 17일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제2차 상임이사회의 격려사, 같은 해 12월 12일 제6차 전국농업기술자대회의 대회사에서 피력한 농촌혁명과 ‘농민자본주의’의 경제이념을 그동안 모아두었던 기록과 함께 엮어 저서로 발간한 것이다. 1967년 11월 1일 68세에 이론서 ‘한국농업의 미래상- 서기 2000년대를 바라보며-’ 같은 해 12월 1일 지침서 ‘조용한 혁명-선도농가를 위하여-’를 출간했다. 두 저서는 ‘3대혁명’과 ‘삼위일체적 농업발단 5단계’를 골자로 하여 저술됐으며 ‘새마을운동’의 골자가 됐다.
△ 상허 유석창 박사의 영결식(1972년)
출처
박기용. (1987). 조용한 혁명을 위하여. 서울. : 나라기획
건국대학교 박물관. (n.d.). 상허기념전시실. http://www.konkuk.ac.kr/Administration/Museum
네이버 지식백과. (n.d.). 유석창 :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9349&cid=46638&categoryId=46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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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박사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분이신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