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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매년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올해도 한 장 남은 달력을 쳐다보니 습관처럼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특별히 나를 회한(悔恨)에 잠기게 하는 것은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 나의 삶입니다. 왜 그리 숨 가쁘게 달려왔는지 무엇이 나를 채찍질하여 되돌아볼 여유도 없이 달음질쳐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구태여 변명 아닌 변명을 하라면 산업화와 도시화 시대 베이비-부머(baby boomer) 기수(旗手)로 태어나 사회에 대한 헌신과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면 변명이 될까요? 급히 먹고 바쁘게 달려오다 보니 음식 맛도 잊고 배만 채웠고 중(僧)도보고 소(俗)도 볼 여유조차 없이 오직 앞만 바라보고 뒤처지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줄 알며 달려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이 백마가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내다보는 것처럼(인생여백구과극·人生如白駒過隙) 잠깐인데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인생을 채찍질을 하면서 재촉하였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렇게 정신없이 인생2막을 지내다보니 진정한 여유를 누려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경쟁과 속도위주의 가치관에 매몰되어 진정한 여유의 의미를 알 수도 없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빨리빨리’ 에 길들여진 성장 위주의 숙명적 삶을 내던지고 이제 남은 인생3막은 진정한 여유를 깨우치며 느리게 가려합니다. 어차피 시간은 빨리 가든 느리게 가든 미래로 향하여 가는 것은 똑같습니다. 빨리 간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때마침 시대사조(時代思潮)가 과거 우리들이 효율과 성장만 중시하다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니 슬로우 푸드(Slow food)니 슬로우 시티(SIow City)니 하며 ‘느림의 미학(美學)’을 추구하고 있어 우리는 함께하는 삶을 영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느리게 가는 삶이 남은 삶의 여정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선택임을 알아야겠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잘 설명하는 우리속담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과 사자성어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수지에 소와 말이 빠지면 말이 먼저 헤엄쳐 나오고 느린 소는 뒤에 헤엄쳐 나와 다 같이 살지만 물살이 강한 강물에 빠지면 말은 헤엄쳐 나오지 못하여 죽고 소만 살아나온다는 것입니다. 말은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신감에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다 힘이 빠져 죽고 소는 물살을 등지고 떠내려가다 강가의 얕은 모래밭에 발이 닿아 산다는 것입니다. 또한 굼벵이가 느린 이유는 구멍(굼)하나 만들면 그곳이 평생지낼 집이고 방이며 곳간인데 빨리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주변의 모든 이들이 앞만 보고 빨리 달려왔다 하여 다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처럼 늦게 크게 성공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조급하게 달려갈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미처 우리는 몰랐던 것입니다.
수년전 낯설게 들려오던 슬로우 푸드(Slow food)와 슬로우 시티(SIow City)란 말이 이제 실감나게 들려옵니다. 젊은 시절 쫓기듯 살아오면서 빠르게 기름에 튀기거나 볶아서 조리하는 패스트푸드(Fast Food)가 이제는 비만, 당뇨, 심장병 등 성인병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대표적 패스트푸드인 샌드위치(햄버거)라는 음식은 영국의 샌드위치 백작이 도박에 빠져 식사시간을 아끼기 위하여 만든 음식으로 백작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냥 배만 채우는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적 장수지역으로 알려진 일본의 오키나와는 미군 주둔이후 패스트푸드점이 늘어나 최근에는 평균수명이 하위권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간장, 고추장, 된장과 같이 오랜 시간 숙성시키고 그리고 달이고 삶고 조리고 우려내어 만든 건강한 슬로우 푸드(Slow food)가 생명력을 키우는 건강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슬로우 시티(SIow City)운동은 슬로푸드(Slow food)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패스트푸드(Fast Food)의 대명사인 맥도날드사가 이탈리아 스페인 광장에 햄버그매장을 열자 이에 대항하여 지역 전통 음식을 지키기 위하여 일어난 슬로푸드(Slow food)운동에 연이여 도시의 삶 전체에 ‘느림의 미학(美學)’을 도입하자하여 일어난 운동이 슬로우 시티(SIow City)운동입니다. 우리나라는 2007년 전남 완도군(청산도)이 아시아 최초로 슬로우 시티로 지정된 이후 현재까지 전국 17개 지자체가 슬로우 시티운동 본부에 가입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슬로시티운동의 창시자인 이탈리아 파울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는 “빨리빨리 살 것을 강요하는 현대생활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와 같다”고 하여 지역 내 자판기, 패스트푸드, 버스 등 ‘느림의 미학(美學)’을 해치는 생활환경을 개선하여 유기농 식재료에 의한 전통음식과 도보 또는 자전거로 이동하는 등 슬로우 시티운동을 전개하여 지역주민들의 진정한 건강과 삶을 회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자연 친화적 유기농 식재료, 둘레길, 전통음식 등이 각광을 받는 이유가 곧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삶인 슬로우 라이프(Slow Life)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냄새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멀리했던 청국장과 된장이 보약보다 소중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우쳤고 자동차를 집에 두고 웬만한 거리를 걸어서 다니다 보니 노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유산소 운동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패스트푸드를 멀리하고 걸어서 다닌다고 게으르다거나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느리게 가다보면 보이지 않았던 중(僧)과 소(俗)도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세상 이야기도 들리며 잃어버린 기억도 되살아나고 마음의 여유 까지도 생깁니다. 인생 3막을 살아가는 노년기에는 더더욱 빨리빨리 가야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인생은 소풍길입니다. 소풍가는 길은 뛰어가는 길이 아니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흘러가는 뭉게구름도 보고 들녘에서 들려오는 농부의 소리와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꽃노래 단풍노래 부르며 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