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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춘추 시대
춘추 시대(중국어: 春秋時期, 병음: Chūnqiū Shíqi: 기원전 770~403)는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
사이의 시기를 말하며, 주나라의 동천 이후 진나라의 중국 통일까지의 시기를 부르는 춘추 전국 시대의 전반기에 해당
된다.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에서 이 이름이 유래했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와의 경계는 춘추 시대에 열국의 강국 진(晋)이 조·위·한의 3국으로 분열되어 동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받은 기원전 403년까지로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진의 집정하에 있던 지백(知伯)을 멸망시키고 사실상 3국의 분립이 성공한 기원전 453년으로 올려 잡는 설도 있다.[1]
중국의 고대 춘추 시대 제후 간 회맹(會盟)의 맹주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제(齊) 환공, 진(晉) 문공, 초(楚) 장왕, 오(吳) 합려, 월(越) 구천이 있다.
한편 진 목공, 송 양공, 오왕 부차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개요
주나라가 낙읍(洛邑)에 동천(東遷)하고 나서 진(秦)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제후가 대립 항쟁한 시대로, 그 전반기를
춘추 시대라 한다.
이 시기에 주나라가 본가인 봉건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의 동천 후 강국은 근처의 소국을 병합하여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해 갔다.
서주(西周)말에 800 가까이 되던 국가는 춘추 시대 중기에는 수십 국으로 감소되었다.
춘추 시대 초기에 진이나 초(楚)는 근처의 도시국가를 정복하면 부하에게 그 토지를 영지로 주지 않고 현이라 이름붙여
국왕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질서가 파탄된 가운데서 희미하게 주의 종주권으로서의 명목만을 지킨 것은 패자(覇者)의 힘이다.
패자는 회맹(會盟)[2]을 주최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막고, 주 왕실을 존중하고 숭배하여 소위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목
으로 중원을 통제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丘)의 회(기원전 651년),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천토(踐土)의 회(기원전 632년)가
그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초는 중원에 진출하여 진을 격파하고(기원전 597년) 패업을 이룩했지만, 패자의 성격도 달라져서 주나라
왕실은 아주 무시되었다.
초의 장(莊)왕은 주실의 왕위의 상징인 ‘큰솥의 무게를 묻는다’(이는 장왕이 주나라 천자 자리를 노리려는 의도의 표시
였다고 한다)라고 한 말은 그 한 예이다.
춘추 시대는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의 과도기였다.
또 춘추 중기에는 철제농구가 출현하여 심경제초(深耕除草)가 용이하게 되고 생산력은 증대해 갔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전국 시대에 내려와야 되지만 씨족적인 질서를 분해하고 계급 분화를 촉진했다.
토지 소유는 공동체적 집단 경작으로부터 개별적 경영으로 이행하고, 세제도 영주 직영지라는 노동 지대(地代)의 형태로
부터 자작농의 현물지대 수납으로 변화해 갔다.
이와 같은 변화는 춘추 시대, 전국 시대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관된 역사적 시점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춘추 시대 말기의 정세
춘추 시대의 말기가 되자 북의 진, 남의 초가 그 권세를 잃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중의 하나로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남쪽에 오(吳)와 월(越)의 두 나라가 갑작스럽게 발흥하게 된다.
이 두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으나, 춘추 시대의 후반이 되면 우선 오가 역사에 등장한다.
북의 진(晋)은 초(楚)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서 오의 군사적인 근대화를 원조했다.
그로 인하여 오는 초의 도읍을 함락시킬 정도가 되었고 초는 오의 남쪽에 있는 월과 동맹을 맺어 오를 공략하게 했다.
그 결과, 오와 월 사이에서는 사투가 되풀이되었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불리고 있는 유명한 고사(故事)가 된다.
그 결과, 오왕 부차(夫差)는 패하여 자살하고, 오는 멸망한다.
승리를 한 월왕 구천(句踐)은 세력을 북방으로 진출시켜 산둥(山東)이나 허난성(河南省) 남동부의 여러 나라를 그 산하
(傘下)에 거두어들이고, 한때 도읍을 낭야(琅邪)에 옮기기도 했다.
또한 오 역시 왕 부차가 노(魯)와 제(齊)를 무찌르고, 기원전 482년에는 황지(黃池)에 제후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진(晋)과 회맹(會盟)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이 두 나라의 땅은 일찍이 기원전 4000년경에 수도경작(水稻耕作)의 신석기(新石器)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은(殷)으로부터 서주시대에 걸쳐서는 거의 이렇다 할 문화도 없이 잊혀져버린 지역이었다.
춘추(春秋)의 후반이 되어 갑작스럽게 이 두 나라가 출현하여, 한때는 진이나 초를 능가하는 형세를 나타내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오의 영역을 병합한 월도 역시 얼마 안 가서 쇠망해버렸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북의 진의 내부에는 나라가 분열될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범(范), 중행(中行), 지(知), 조(趙), 위(魏), 한(韓) 등, 6귀족의 발호(跋扈) 때문이다.
진의 공족(公族)이 아닌 범, 중행 등의 귀족은 멀리 떨어진 곳의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자유로이 주위의 토지를
손에 넣어 자기의 세력을 증대시켜 오히려 진의 공족 출신 귀족을 누르고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다.
더구나 진나라에는 행정 조직 등도 거의 없어서, 이들 6대 귀족에 의하여 정치가 행해지게 된다.
진후(晋侯)의 지위는 오히려 실제적인 힘이 없어, 직접 지배하는 지역은 6귀족 중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문공(文公) 이래 북부 제후(諸侯)의 중심이면서도 국내적으로는 분열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6귀족은 진후를 정치로부터 배제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세력을 다투어,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 등 2가(家)가
다른 4가에 의해 멸망하고, 그 영지는 분할되었다.
또한 기원전 453년에는 한, 위, 조 등 3씨가 가장 강대해진 지씨(知氏)를 공략하여 사실상 진을 3등분하여 독립하였다.
이와 같이 귀족이 제후를 억누르고 그 나라의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현상은 노(魯)나 제(齊)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춘추 시대 후반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국제적인 외교도 기원전 546년의 송(宋)의 화평회의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모두 귀족들의 손에 의해서 행해
졌다.
한·위·조 등 3씨는 기원전 403년에 주왕(周王)에 의해 제후로서 인정받게 되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453년 이래 독립국으
로서 행동하고 있다.
춘추 시대를 통하여 유력한 대국으로서 제후를 통제해 온 진이 사실상 멸망한 이 해를 고비로 하여 그 전을 춘추 시대,
그 후를 전국 시대라고 부른다.
주석
1.↑ 춘추의 기록 기간은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를 의미하고 있으나, 역사적 의미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구별하는 것으로 하극상(下剋上)의 경향을 들 수 있는데, 전국 시대에 들어가면 하극상의
경향이 많아 예의 질서가 붕괴되고 여러 나라의 상쟁(相爭)이 격화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유교적 견지에서 얘기한 것
이며, 역사적으로는 주대 봉건제로부터 진의 중국 통일에 이르는 과도기로서, 양자를 통일적으로 고찰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2.↑ 會盟 제후 혹은 그 사신이 유력자를 중심으로 서로 만나서 맹약하는 것.
회(會)라 함은 때와 장소를 미리 정하여 모이는 회합이며, 맹(盟)이라 함은 소의 왼쪽 귀를 잘라서 그 피로 조약서를 쓰고
회합한 제후가 피를 마시는 의식을 말한다.
이 회맹의 맹주를 패자(覇者)라고 한다.
회맹의 성격은 초기에는 패자가 주 왕실에 위임이 되어, 국제 친선·가족 도덕 등 중원 사회의 질서 유지에 목적이 있었
지만, 차차 강자를 중심으로 하는 공수(攻守)동맹으로 변화해 갔다.
환공(桓公, ? ~ 기원전 643년, 재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은 춘추시대의 제나라의 제16대 군주다.
성은 강(姜), 휘는 소백(小白), 시호는 환공(桓公). 춘추 시대의 패자이다.
포숙아의 활약에 의해 공자 규와의 공위계승 분쟁에서 승리해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관중을 재상으로 삼고 제나라를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실권을 잃어버린 중국 동주 왕실을 대신해 회맹을 거행했다.
즉위전 상황
아버지는 희공(僖公), 형은 양공(襄公)이다. 양공은 비정상인 성격으로, 친누이동생 문강과 내연의 관계에 있어, 문강이
노나라의 환공(桓公)에게 시집갔지만, 장공을 낳은 후도 관계가 계속 되고 있었다.
화난 노의 환공이 문강을 꾸짖으면, 문강은 양공에 밀고해, 양공은 일족 공자 팽생(公子彭生)이라고 하는 남자에게 명령
하고 환공을 죽이게 했다.
노나라에 소문이 돌자, 팽생을 죽여 변명을 하였다.
그 이외에서도, 양공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차례차례로 죽였기 때문에 제나라는 혼란했다.
소백은 거(莒)에, 형 공자 규는 노나라에 망명했다.
양공은 그 후, 사촌형제인 공손 무지에게 암살되었다.
양공이 죽은 후에, 공손 무지가 제공에 즉위 했다고 칭하고 국정을 관리하지만, 공손 무지도 또 곧바로 암살되었다.
공손 무지 사후, 소백과 같이 노에 망명한, 노의 후원자를 얻고 있던 형 공자 규와의 사이에 후계자 싸움이 생겼다.
이 때, 공자 규의 심복인 관중이 소백을 매복해 암살하려고 하고 있었다.
관중은 활을 쏘아 맞혔다. 화살은 소백 배에 맞아, 소백은 쓰어졌다. 관중은 기뻐하고, 공자 규에게 소백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경쟁 상대가 사라진 공자 규는 노의 군사를 뒤로 천천히 제나라에 들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소백이 벌써 제나라에 들어와 제나라 공이 되어 있었다.
공자 규는 기다리고 있던 소백에 공격을 받고 노나라 에 도망쳤다.
실은 관중의 화살은 배에 명중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허리띠의 쇠고리에 꽃쳤다.
관중의 활약
제나라 공의 자리에 오른 소백 환공은 관중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실에 화를 내어 관중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환공의 심복이며,관포지교라는 말의 뿌리가 될 만큼 관중의 좋은 친구이기도 한 포숙아의 설득으로 환공은
관중을 살려주었으며 재상으로 임명했다.
환공의 생각은 현명했다.
재상이 된 관중은 개혁을 추진해, 국력, 군사력, 문화 향상에 성공했다.
벌써 주왕실은 쇠퇴하고 있어, 제후 사이의 대립을 억제하는 일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관중의 개혁을 받아 들인 제의 환공은 주변 국가에 그 명성이 전해져, 주변 제후는 주나라 대신해 제후 사이의 문제를
환공에게 묻게 되었다.
장강 유역의 현재의 호북성을 중심으로 한 지대를 지반으로 해 남방에서 세력을 늘려, 주왕실이나 제후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있던 초나라를 환공은 제후를 인솔하고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651년 환공은 회맹을 거행해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환공은 자만심이 생겨 봉선의 의식을 실시하려고 했다.
봉선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라서, 봉선을 하는 것은 주나라를 무시하고 자신이 천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관중은 환공의 무리한 생각을 필사적으로 충고해 멈추게 했다.
관중의 사후
기원전 645년, 재상인 관중이 죽으면서, 국정을 돌아보지 않게 되어 방탕하게 되었다.
관중이 죽을 때에 등용을 하지마라고 한 간신들도 등용해, 국정은 흐트러졌다.
환공이 병이 들자, 공자들의 후계자 싸움에서 숨을 거두어, 67일간 그 사체는 방치된 채로 있어, 그의 관이 구더기가
솟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나라는 이후에도 가끔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패권은 진(晋)나라, 초나라로 옮겨졌다.
후계 미결
환공에겐 적자는 없고, 다만 사랑하는 여인이 많아, 서자로 장위희의 아들 무궤, 소위희의 아들 원(혜공), 정희의 아들
소(효공), 갈영의 아들 반(소공), 밀희의 아들 상인(의공), 송화자의 아들 옹이 있었다.
환공은 관중과 함께 소를 세자로 세웠으나, 두 위희와 한 편인 옹무와 수초의 힘으로 무궤를 세우는 것을 허락했으며,
관중 사후 다섯 공자들이 전부 자신들을 세울 것을 구했다.
환공 사후, 역아와 수초가 여러 관리들을 살해하고 무궤를 군위에 앉혔으며, 소는 송나라로 도망했다.
이후 다섯 공자 간의 군위 분쟁을 통해, 제나라는 패권국의 지위를 잃었으며, 군위 다툼을 한 여섯 공자 중 다섯 공자나
제후위에 올랐다.
진 문공(晉文公,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28년, 재위 :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은 진나라의 제24대 군주이다.
성은 희(姬), 휘는 중이(重耳), 시호는 문공(文公). 진 헌공의 아들이다.
헌공의 뒤를 잇지 못한 채 진나라를 떠나 19년간 전국을 유랑하였다. 유랑하는 동안 그의 인덕과 능력이 눈에 띄어 많은
명성을 얻었으며, 결국 타국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636년 자리에 올라 죽을 때까지 집권하였으며, 각종 개혁정책과 군사활동으로 인해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생애
진나라의 공자 - 중이의 가계는 원래는 진나라(晉) 방계 왕족이였지만, 무공(武公) 때 직계 왕족을 멸하고 스스로
진나라 공이 되었다.
중이는 무공의 아들 헌공(獻公)과 적족의 여인 호희(狐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헌공의 아들 중에 중이 외에, 태자였던
형, 신생(申生, 중이와는 이복형), 남동생인 이오(夷吾, 후의 혜공, 중이의 친동생)등이 있었다.
젊은 무렵보다 인재를 좋아하여, 17때에 조쇠(趙衰),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주(魏犨)를 부하로 삼았다.
이들은 후에 중이의 패업을 크게 돕게 된다. 또 몸집이 커, 아버지가 태자였을 무렵부터 이미 성인의 체격을 하고 있었다.
신생, 중이, 이오도 명성 높았지만, 헌공의 총희인 여희(驪姬)는 자신의 아들 해제를 후계자로 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중이는 변방으로 보내져 수도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욱 여희는 함정을 파서 아버지 독살 미수가 오명을 씌워 신생을 자살시켰다. 중이에 대해서도 환관을 파견하고 자살을
강요했다. 중이는 이것을 옳지 못다고 하여 도망을 도모하였고, 어머니의 출신지인 적(狄)으로 망명에 성공하였다.
이오도 측근과 함께 국외에 망명했다.
적에 망명했을 때, 중이는 이미 43세였다. 망명 기간 때, 적의 자매 중 언니(누나)를 중이에게 시집보내고, 여동생을
조쇠에게 시집을 보냈다.
적으로의 망명 5년째 헌공이 사망하였다. 여희 등에 의해서 해제와 그 동생 도자가 진나라 공에 지어지지만, 그 직후에
이극(里克)등의 쿠데타에 의해 여희 일파들은 몰살 되었다.
이극은 중이를 진나라 공으로서 맞아들이려고 사자를 보냈지만, 중이는 살해당하는 것을 무서워하여 오지 않았다.
그 다음에 요청된 이오는 받아 들여 귀국하여, 진나라 공이 되어 혜공이 된다.
혜공은, 아직도 인기가 높고, 스스로의 정도를 위협할 수 있는 중이를 후에의 화근이라고 보았다.
이극등 중이파라고 해당하는 인물을 숙청하여, 더욱 자객을 보냈다.
그러나 자객이 보내진 것을 알리는 사람이 있고, 중이가 알게 된다.
이것을 들은 중이는 "진에 가까운 소국에 몸을 의지한 채로는 위험하기 때문에, 동방의 대국인 제나라로 가자. 명재상
이라고 칭할 수 있었던 관중도 죽었다고 하는가들, 반드시 인재를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방랑 시절 - 출발에 임하여 중이는 아내(적족)에게, "나를 25년 기다려보고 그 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시오."라고
하였고, 아내는 웃으며 "25년정도 기다리면 나의 무덤에 심은 측백 나무도 커지고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일행은 우선 위나라(衛)를 목표로 했다. 위나라 공은 일행을 환영하지 않았고, 일행은 오록(五鹿)이라고 하는 땅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현지의 농민에게 음식을 구걸하였다. 농민은 그릇에 흙을 담아 냈다. 중이는 격노했지만, 조쇠는 "흙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이 땅을 얻는 것입니다. 참으십시오."라고 하여 중이는 그대로 했다.
그러한 일이 있으면서도 여행을 계속하여 일행은 동쪽의 제나라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환공은 초라한 망명 공자에 지나지 않는 중이에게 20승의 마차를 주고, 또 딸을 중이에게 시집 보내고 많은 환대를 했다.
제나라에 있은지 5년이 지나, 그 사이에 환공이 죽었고, 그 후계를 둘러싸고 격렬한 내란이 일어났다.
그 중에 중이는 이미 제나라 아내를 얻어서, 제나라를 떠나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호언, 조쇠등은 중이를 모시고 제나라를 떠나는 것을 계획한다.
이 계획을 중이의 아내(제나라)의 시녀가 몰래 엿들어 아내에게 고하지만, 아내는 누설을 무서워하여서 시녀를 죽이고,
중이에게 빨리 제나라를 떠나도록 재촉했다.
그러나 중이는 듣지 않았다. 거기서 아내는 호언 일행들과 도모하여, 중이가 취하자 수레에 실어 억지로 제나라를 도망쳐
나갔다.
술이 깬 중이는 격노해 호언을 죽이려고 했다. 호언은 "저를 죽여 공자의 대업이 완성된다면 바라던 바입니다."라고 대답
했다.
중이가 "일이 완성되지 않았으면 자네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을거야"라고 하면서, 호언은 "일이 완성되지 않으면 제
고기는 썩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제나라를 나온 일행은 조나라(曹)에 들어갔지만 또 다시 무례한 취급을 받아 곧바로 출국해 송나라에 들어갔다.
송나라는 당시 초나라와 전쟁에 졌던 바로 직후에서 만났지만, 양공(襄公)은 중이에 대해 국군 예를 가지고 맞이하여
환공과 같이 80 마리의 말을 주어 환대 했다.
그러나 현재의 송나라는 조력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일행은 초나라를 의지하기로 했다.
그 도중 , 정나라에 들렀지만, 여기에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초의 성왕(成王)은, 망명 공자 중이를 제후와 같은 격식에서 대접했지만, 희롱하는 마음에 "만약 당신이 나라에 돌아가,
진의 군주가 될면 나에게 무엇을 답례해 줄 수 있소?"라고 물었다.
중이는 "만약 왕과 싸우는 일이 일어나면, 군을 3사(군이 3일에 행군 하는 거리) 물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을 들은 성왕의 부하 자옥(子玉)은 망명 공자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초나라 왕을 향해 건방지다라고 분노하여 중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성왕은 "하늘이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어째서 제지당할까"라고 자옥를 멈추었다.
귀국 - 기원전 637년, 진 혜공이 죽어, 진의 인질이 되고 있던 태자 어(圉)가 도망가, 진 회공(懷公)이 되었다.
인질이 자기 마음대로 도망가자, 진 목공(秦穆公)은 전에 진 혜공에게 은혜를 원수로 받은 적도 있어 크게 화내었고,
중이를 진나라 공으로 세우기 위해 초나라로 부터 불렀다.
12월, 진의 중신들로 부터도 청을 받은 중이는, 진나라 군(秦軍) 뒤에 진나라에 들어온다.
진나라 군(晉軍)은 요격에 나오지만, 평판이 나쁜 혜공과 그 아들 회공을 따라가려고 하는 이는 적고, 싸운이는 측근의
군대만으로, 다른 대부분의 진나라군(晉軍)은 중이를 뒤따라 진나라군(秦軍)과 함께 진나라 군(晉軍)을 멸했다.
중이는 진나라 공에 오른다(이하, 문공이라고 한다). 실로 62세의 새로운 군주이다. 문공은 천하 경영에 나선다.
패자 - 기원전 635년 반란이 일어나 도망해 온 주나라 양왕(周襄王)을 보호하여 수도에 일어난 반란을 토벌을 하였다.
기원전 632년 초나라에 공격받은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다. 성왕과 대적했지만 성왕은 운이 나쁘다고
보고 군을 퇴각하였다.
그러나 초나라군 중에서도 자옥만은 물러나지 않고 진나라 군과 결전했다.
싸움이 개시되어 문공은 약속대로 우선 전군을 3사 비킬 수 있었다. 그 후 일단 철퇴하여, 성복의 땅에서 자옥와 대결하여
승리하였다. 이것을 성복 전투이라고 불렸고, 이것에 의해 문공이 패자의 지위를 얻었다.
기원전 628년에 사망하였다. 혼란이 계속 된 진나라를 안정시키고, 패업을 가져온 공적을 얻어, 시호 중 에서는 최상급인
문(文)을 시호를 얻어 문공이 되었다. 재위 기간은 9년이고 짧은 기간에 패자가 되고, 환공과 함께 춘추 오패의 필두가
되었다.
초 장왕(楚 莊王, ? ~ 기원전 591년, 재위 : 기원전 614년 ~ 기원전 591년)은 초나라의 제 23대 왕이며,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다.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려(侶)이다. 초나라의 역대 군주중에서도 최고의 명군으로 여겨져 춘추 오패의 한 명으로 꼽힌다.
성왕(成王) 원(員)의 손자로, 폭군이었던 목왕(穆王) 상신(商臣)의 적자. 공왕(共王) 심(審)의 아버지이다.
생애
울지도 날지도 않는 새 - 아버지 목왕 사망하여 왕위에 오른 직후, 아직 젊은 왕이었기 때문에, 공자(公子)의 한명인
섭(燮)이 모반을 일으켰다.
일단은 수도와 왕실을 완전하게 지배하여 스스로 왕을 자칭했지만 반대 세력의 확대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왕인 장왕을
가두고, 북방으로 도망쳤다.
진(晉)나라와 진(秦)나라, 초나라의 국경 가까이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격을 개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도중의 노(盧)라고 하는 마을에서 섭은 살해당했다. 장왕은 풀려나 수도로 돌아왔다.
이후, 장왕은 전혀 정치를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간언하는 자는 모두 주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가신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간언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3년째에 오거(오자서의 조부)가 "제가 수수께끼를 한
번 내보겠습니다.
3년 동안을 전혀 날지도 울지도 않는 어떤 새가 있습니다. 이 새의 이름은 무엇일까요?"라고 하였고, 장왕은 "그 새는 한번 날아 오르면 하늘까지 이를 것이고, 한번 울면 만인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 후로도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태부 소종(蘇從)의 목숨을 건 간언에 장왕은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였다.
3년간 짐짓 어리석은 체 하면서 산하의 인물됨을 살피고 있었던 장왕은 오거와 소종에게 국정을 맡기고, 새롭게 수백 명을 등용하며 수백 명의 간신을 죽였다. 이 사건에서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문정경중 - 국정을 정비한 장왕은, 용(庸)을 공략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 국가를 압박하고, 영토를 넓히며 패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원전 606년에는 중원을 제패할 야심을 품고 주나라 땅에 주둔하였다.
주나라로부터 사자가 오자, 장왕은 사자에게 구정(九鼎)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구정은 천자국(天子國)에
대대로 전해지는 9개의 솥을 가리키는데, 왕권에 대한 상징물이다.
그 무게를 묻는 것은, 주나라의 왕위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은연중 암시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주나라의 사자 왕손만(王孫滿)은 장왕의 속내를 간파하고, 솥의 크기와 무게보다는 덕이 중요하며 천명은 아직 주나라에
있다고 대답하였고, 이에 장왕은 철군하였다.
절영지연 - 장왕은 야심한 밤에 신하들을 연회에 불렀다. 많은 사람이 취한 가운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촛불이 꺼져
버렸다.
그 때, 장웅(蔣雄)이라는 사람이 장왕의 총희의 몸을 만졌다.
총희는 곧바로 장웅의 갓끈을 잡아 뜯었고, 장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촛불이 꺼진 틈에, 나에게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갓끈을 당겨 뜯었습니다.
촛불만 켜면, 누군지 금방 알수 있습니다." 장왕은 "여기 온 자들은 지금 당장 갓끈을 잡아 떼어라."고 명해 모두 그대로
했다. 덕분에 장웅은 죄를 추궁받지 않고 넘어갔고, 장웅은 진심으로 장왕에게 감사했다.
그 후 초나라가 진(秦)나라에게 공격당했을 때, 장웅은 선봉에 서서 큰 공로를 세웠다. 장왕이 장웅에게 "과인은 너를
그렇게 아낀 기억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라고 묻자 장웅은 "아닙니다.
왕께서는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저는 절영의 모임 때, 총희의 몸을 만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너그럽고 여자에게 휘돌리지 않는 훌륭한 군주로서의 장왕의 인격을 나타내는 고사이다.
춘추의 패자 - 장왕은 진(陳)나라의 내란을 틈타 그 나라를 일시에 병합하고,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와 함께
속국으로 삼았다. 기원전 597년 정나라의 원군으로 온 진(晉)나라군을 격파했다.
이 때 진나라군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후퇴했는데, 배가 뒤집힐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배에 매달려 있는 병사의 손을
잘라 떨어뜨렸고, 배 안에는 손가락이 수북히 모였다고 한다.
대승한 뒤, 신하들은 경관(京觀)을 만들 것을 상소했지만 장왕은 물리친다.
무(武)라는 글자는 과를 멈추어 쓰기, 난폭함을 막고 전을 세우고 대를 유지해, 공을 정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화합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한 것은 이 무덕에 들어맞지 않으며, 자신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진나라 병사들의 사체로 경관을 만들 수는
없다, 는 이유에서였다.
마지막 싸움 - 진나라를 패퇴시키고 패업을 이룬 장왕은, 그 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송나라를 표적으로 정했다.
장왕이 제(齊)나라에 보낸 사신이 송(宋)나라를 지나가다가 피살당하자, 전광석화 같이 송나라에 쳐들어가 수도 상구
(商丘)를 포위했다.
이전, 노나라도 초나라의 맹하에 들어가는 등, 착실하게 장왕의 패업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화원(華元)을 비롯한 송나라군의 저항에 의해, 기원전 594년 5월이 되어도 상구를 공락하지 못하고 장왕은 결국
퇴각했다. 후에 송나라는 초나라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591년 그는 사망하였다.
가정
아버지 : 초 목왕
형제 : 초 장왕, 공자 영제(公子嬰齊) 자 자중(子重), 공자 측(公子側) 자 자반(子反)
아들 : 초 공왕, 공자 곡신(公子穀臣), 공자 정(公子貞) 자 자낭(子囊), 공자 오(公子午) 자 자경(子庚), 공자 추서
(公子追舒) 자 자남(子南)
합려(闔閭, ? - 기원전 496년, 재위 : 기원전 544년 ~ 496년)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제24대 임금이며, 제6대 왕
으로, 휘는 광(光)이다. 춘추 5패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신하인 손무, 오자서 등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키고 패자를 꿈꾸었으나, 월왕 구천에게 패배하여, 부차에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죽는다.
그를 묻은 언덕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후치우(虎丘)라고 불렀다.
생애
왕위 싸움 - 사기 오태백세가(史記 呉太伯世家)에 의하면, 공자 광의 아버지의 제번(諸樊)은 오의 초대 국왕 수몽(寿夢)의 장자였다.수몽에는 이외에 3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막내 계찰은 현인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아버지 수몽도 거기에 기대하여 계찰을 차기 왕으로 정하고 싶은 마음이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계찰(季札)은 형을 두고 자신이 왕위에 즉위하는 것에 원치 않고,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서 우선 제번이 왕위
를 이어, 그 후를 동생인 여제(余祭)가 잇는 등 형제 계승의 순서에 이었고, 마지막에 계찰에 왕위가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계찰은 여매(余昧)로부터 왕위를 양보하지만, 거부하여 도망해 버려, 왕위는 결국 여매의 아들인 요(僚)가 계승
되게 되었다.
이것에 광은 불만을 품었다. 지금까지 형제의 사이에 차례로 왕위를 돌려 왔으니까 계찰이 왕이 된다면 어쨌든, 계찰이
도망간 다음은 차례대로 장자의 아들인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줄곧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불만을 숨기면서 요를 시중들어 장군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 때, 초나라의 오자서가 망명해 와 광의 야망을 헤아렸고, 암살자 전제(専諸)를 추천했다. 전제는 요에게 다가가 물고기
요리를 올렸다, 물고기 안에 감추고 있던 비수를 꺼내어 오왕 요를 찔러 죽었고, 스스로도 또한 호위에 살해당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즉위 이후 - 공자 광은 즉위하였다. 오자서, 손무 등을 데리고, 초강대국 초나라와 몇 번이나 싸웠다.
기원전 506년에는 당(唐)나라, 채(蔡)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거두고 초나라를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듬해(기원전 505년)에 본국이 월나라에 침략 당하고, 동생 부개가 왕을 칭하고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가까
스로 도망친 초왕을 추격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본국에 돌아와 난을 평정했다.
기원전 496년, 10년 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월나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월나라의 장군 범려의 책략에 막혀 패배하고 다리에 활까지 맞아 상처가 덧나 죽게 된다.
아들 부차에게 구천이 부친을 죽였던 것을 잊지 말라고 유언하고,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
구천(句踐, ? ~ 기원전 464년)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후기의 월나라의 왕이다.
책사 범려의 뒷받침으로 당시 화남에서 강세를 자랑하고 있던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다.
생애
오나라와 월나라는 오랜 기간 숙적이었다.
오왕 합려는 월나라를 없애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범려의 계책으로 오군은 대패하고, 합려는 이 때의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
대신 장자인 부차가 오왕으로 즉위했다.
부차는 부친의 원한을 잊지않기 위해,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보좌에 올라서 다시 월나라를
쳐들어가고 이번에는 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충신 범려의 진언에 따라 빼어난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면서 항복을 청하고, 부차는 오자서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
쓰고, 이것을 수용한다.
구천은 오나라로 가서, 부차의 하인이 되어 열심히 부차를 섬겨 방심을 유도하여 다시 월나라로 돌아온다.
구천은 이 때의 억울함을 잊지 않고 방에 쓴 쓸개를 매달고 매일 그것을 맛보면서 복수를 맹세한다.
이것이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이다.
월나라로 돌아간 구천는 착착 국력을 기르고, 부차가 출타한 틈을 타서, 침략을 단행한다.
오의 황태자 우를 참하자, 부차는 허둥지둥 되돌아 오지만, 힘을 기른 월나라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구천은 월나라의 수도를 현 장쑤 성 연운항으로 옮기고, 제후들을 모아 중원의 패자가 된다.
가족관계
정비: 아어왕후(雅語王后)
제1후비: 수비(綏妃)
제2후비: 주희(柱姬)
동생: 등각공주(登刻公主)
딸: 계완공주(桂婉公主)- 아어 生
딸: 영소공주(英昭公主)- 수비 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