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이라고 했다.
나는 9월에 피는 이 붉은 꽃을 상사화로 알았다. 장돌림 지인들과 함께 추석이 막 지난 9월 중순 성지곡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을 찾았다. 치톤 피드가 많아 건강에 좋다는 편백나무 숲의 장관을 맞이하기 전에 길가에 피어 있는 붉은 꽃을 보았다. 보통은 군락을 이루어 핀다고 하는데 길가에 핀 꽃무릇은 단 두 송이였다. 꽃무릇은 꽃이 지고난 뒤 잎이 올라오고 상사화는 그 반대라고 했다. 꽃의 모양도 조금은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상사화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했다. 꽃무릇의 꽃말은 ‘슬픈 추억’이라 했다. 꽃무릇과 상사화는 사촌쯤 되는 꽃이라고도 했다. 상사화는 늦은 봄쯤에 꽃이 피고 꽃무릇은 가을의 초입에 꽃을 피운다고 했다. 꽃은 잎을 그리워하며 피고 잎은 꽃과 함께 하고 싶어서 피지만 잎과 꽃은 만날 수가 없어서 서로 그리워하는 꽃. 상사화가 되었다 한다.
옛날 한 승려가 탁발하러 속세로 나왔다가 어여쁜 여인에게 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출가한 몸이라 감정을 제어하며 절로 돌아갔고, 어느 날 여인이 절로 찾아와 인연을 맺자고 스님에게 간청을 하였다. 하지만 스님은 자신의 신분 때문에 거절했고 이에 거절당한 여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 여인이 쓰러진 사찰 마당에 이듬해에 상사화가 피어났다고 한다. 꽃말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꽃. 이렇게 설화가 생겨났단다.
꽃무릇 전설. 아주 먼 옛날 젊은 스님이 시주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 큰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비를 피하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여인의 고운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 숨이 멎을 정도였습니다. 스님은 연모의 정을 느꼈지만 신분상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산사로 돌아온 스님은 그 여인을 잊으려고 참선 수련을 정진하였으나 끝내 그 여인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서 꽃이 피어나니 사람들은 그 꽃을 석산, 꽃무릇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주 수요일 지인 한 분과 김해 활천 꽃무룻 숲길을 다녀왔다. 9월 하순이라 꽃무룻을 보기에는 좀 늦은 듯했다. 이미 꽃잎이 져버린 것도 있었으나 그래도 축제의 뒤끝은 감상할 수 있었다. ‘꽃무릇의 전설’은 바로 이곳의 입간판에 새겨진 내용이었다.
상사화와 꽃무릇의 설화나 전설의 내용이 많이 달랐지만 맺지 못한 연인이 인연을 그리워하다가 애틋하게 생을 마감한 것은 일맥상통한 것이다.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또는 슬픈 추억‘의 꽃말을 가진 듯했다.
중학생이었을 때다. 3학년이었을 때 2학년이었던 그 아이를 보았다.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예뻤다. 그 때부터 그 아이의 주위를 맴돌았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부끄러움이 얼굴만 화끈거리고 붉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 아이는 부산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부모님을 따라서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골 촌놈에게 부산 도시의 물을 먹은 아이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해가 바뀌어 나는 부산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고, 그 이듬해 그 아이는 밀양에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을 했다. 이렇게 그 아이와 헤어지게 되었다. 아니, 그 전에도 주위만 맴돌았지 말도 한 번 해보지 못했기에 헤어졌다는 말은 적절하지도 않았다. 떨어져 있었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그 아이가 늘 자리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얼굴을 대하고 잠깐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안면만은 턴 셈이었다. 그리고는 군입대를 했다. 군복무를 하면서 몇 번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휴가를 나왔다. 그녀가 진시장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찾아갔다. 온 시장을 몇 바퀴를 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없었다. 그 아이가 그녀로 바뀌었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진시장과 벽 하나를 사이하고 있는 남문시장을 찾았다. 진시장 보다 규모가 작았다. 쉽게 한 바퀴를 돌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를 찾았다. 그날 저녁 광안리 해변을 걸었다. 솜사탕을 하나씩 들고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했다. 생전 첫 데이트였다. 별 말도 없었다. 가슴만 쿵닥거렸을 뿐이다.
전역을 했다. 복학을 하고 들은 그녀에 대한 첫 소식은 그녀가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녀와 같은 밀양 소재의 학교 3년 선배와. 별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매우 아쉬웠다. 전역을 하고 나면 좀 더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고 소위 사랑이라는 것도 해 볼 생각이었는데, 용기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 그녀에 대한 소식을 가끔 듣기도 했다. 아들을 둘 두었다고 했다. 잘 살고 있다고 했다.
나의 친구인, 그녀의 사촌 오빠가 며느리를 보는 날이었다. 예식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였고 나는 고향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리였다. 복잡한 식장 로비에서, 하객들의 시끄러운 웅성거림 속에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후배라며” 웃으며 말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옛날의 일이었다. 긴 얘기는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 식장 안으로 남편을 따라 들어갔다. 고향 친구가 물었다. 누구냐고. 혼주의 사촌 여동생이라는 대답을 하며 허전한 마음을 숨겼다.
그녀도 내게 관심이 있었음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왜 그렇게 일찍 결혼을 했느냐고. 이십 대의 초반에 서둘러 결혼했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그녀가 그렇게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의 홀로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미 지난 일이었다. 몇 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맘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많은 부분이었다.
부고가 날아왔다. 초등학교 동기회 총무가 보낸 카톡이 깨톡하고 울었다. 그녀의 사촌 오빠가 죽었단다. 카톡에 가입이 된 모든 동기들에게 날아간 부고였겠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문상을 가기로 했다. 마을을 하나 사이를 둔 거리였지만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부산에 살면서 고향에 들를 때마다 나의 엄마 아버지를 찾아뵙던 친구였다. 부모님이 계시던 고향에 가면 그 친구가 조그만 선물을 하나 들고 왔다 갔다는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코로나 시국으로 문상도 제한을 받던 때였지만 몇 명의 친구들이 문상을 했다. 식사를 하고 소주도 한 잔하고 그러나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도 소줏잔을 기울이면서도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도 주위를 살피는데 집중했다. 그녀를 찾았다. 사촌 오빠의 장례에 당연히 빈소를 지킬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모습은 내가 장례식장에 머무르는 동안 보이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보다도 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식장을 떠났다. 이젠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 더 이상 친구를 만날 수도 그녀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내년 늦은 봄에는 상사화가 군락을 이루어 피는 곳을 찾아 가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