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때만 해도 4년제 대학을 지원하기 위해선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치뤄야 했었
다. 묘하게도 시험 전날 잠이 오질 않아서 고생을 했는데 아침에 어머님께서 부적으로
교복 안쪽에 애기 배내옷을 넣어서 꿰매 주길래 생각없이 입고 시험장엘 들어 갔는데
철제 나무난로가 바로 옆에서 활활거리는 맨 앞자리였다.
여러 번을 졸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발표 보는 날 겁이 나서 직접 가질 못하고 똥지름이라
는 공부 잘하는 친구보고 행여 내 이름이 없거든 내 쪽으로 나타나질 말라고 했다.
어디로든 갈 심사였다. 키가 몹시 커서 똥장군을 울러 매는 막대인 똥지름이 별명인 이
친구가 멀리서 반가이 손을 흔들며 달려 왔다.
본 고사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서 보게 되는데 이 날도 시험 전날에 어김없이 잠이
오질 않더니 새벽 쯤에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경주 출신이어서 별명이 미륵이라는
친구를 만나서 악수를 청하니 미륵이가 갑자기 뒤로 45도 정도 눕는데 황금빛 부처님의
형상을 나타 낸다. 정확히 묘사하면 두 분의 부처님이 x자로 그 위 중심선에 한 분의 부처
님이 자리를 하셨는데 중심에 계신 부처님의 미소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시험장에서 졸지는 않았지만 구구단도 외울 수가 없었고 아마 문제가 나왔으면 우리 아버님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질금거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집으로 돌아 와서 채점
을 해 보니 완조니 빵점이었다.
그날 꾼 꿈의 해몽은, 약 십년 전에 속리산 법주사엘 들렀다가 절 마당에서 기와 시주를 권
선하길래 꽤 많은 금액을 시주를 하면서 기와에다 들은 풍월로 부처님 말씀을 몇자 올리니
이를 지켜 보시던 화주 보살께서 이미 절마당을 건너 올 적부터 불자임을 알아 봤노라며 이
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들 하나만 바라 보고 평생을 사셨는데 묘하게도 그 아들이 전
공도 나와 같았고 시험 전날 꾸었다는 꿈이 내 꿈과 너무나 유사해서 한번 더 물어 보니 상
식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하신다. 두 분 부처님이 엑스자로 누우시면 말 그대로 엑스가 아니
냐 이거다.
해태눈이 오랫만에 번득이는 순간이었다. 사람은 잘 생기고 볼 일이다.
화주 보살님께서 그냥은 보낼 수가 없다시면서 공양칸으로 인도를 하신다. 공부하시는 스님
들 틈에서 퉁 퉁 불은 수제비를 한 양푼이나 먹어 치었다.
너무나 황당한 경우를 당하여도 달리 상담을 할 그 누가 없는지라 집구석에서 하릴없이 시
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전화를 한다.
둘 다 기분도 꿀꿀하니 자기 할아버님때 부터 다니는 절이 있는데 그 곳에 가서 며칠 쉬다
가 오자고 한다.
대구에서 서쪽으로 성당못을 지나 달성이나 현풍 방향으로 털털거리는 완행버스를 탄 기억
뿐이다.
늘 그렇듯 겨울 산사는 적막스런 분위기였다. 용연사라고 친구가 소개를 하면서 앞장을 서
는데 쌀을 씻는 큰 나무통이 툇마루에 올려져 있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반에서 공부로는 언제나 맨 밑바닥을 치는 갑자는 모 사관학교에 특차로 합격을 하는 기행
을 하더니 급기야 나중에 치룬 예비고사에서 고배를 든다. 후일 갑자 동생한테서 들은 얘기
론 예비고사 치기 전날 술로 떡이 된 갑자가 새벽녘에 월장을 하여 들어 오더란 것이다.
예비고사 낙방이면 사관학교도 당연히 그 입학자격이 취소된다.
용연사 구경을 마치고 나서 산 정상 쪽에 있는 암자로 올라야 하는데 갑자 말이 급경사의
계곡길은 빠르고 산능선을 끼고 구불 구불 올라 가는 양지쪽 길은 시간이 더 걸린다 한다.
숲이 많이 우거지고 경사가 급해서 시야가 넓지 않은 길을 한 삼십분쯤 오르는데 갑자기 앞
쪽이 컴컴해 진다. 나무를 한 지게 그득 진 절 부목인데 반벙어리다.
갑자가 어줍잖은 수화를 나누었는데 오늘 부목께서 외출일이라서 시내에 나가서 머리도 깎
고 온다면서 몹시도 기분이 좋다는 내용을 전해 준다.
산 정상 바로 아래 암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명적암이라 들었는데 후일 전국 유명 암자를
소개하는 어떤 책에서 읽으니 조선시대 꽤 유명한 유생들이 공부를 많이 했다는 곳이다.
남성 거시기 모양의 특이한 모습의 정상 바로 아래 양지 바른 곳에 요사채는 기와집으로 제
법 그 연륜을 자랑하는 듯 한데 마당 건너 있는 법당은 슬레이트로 어렵게 만들어 논 전혀
볼품이 없는 건물이었다.
구십이 가까운 노보살님 한 분이 계신데 삭발을 하여서 머리엔 면수건을 둘르고 계셨는데
체구가 몹시 도 작은 분이셨다. 방에 들어서 인사를 끝내니 어느 길로 올라 왔냐는 것이다.
다음부턴 계곡길로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본인도 고사리 뜯으러 갔다가 두번 정도 당했는
데 빵떡 모자를 쓴 총각넘이 자꾸 따라 와서 돌아 보면 사라 지곤 하다가 급기야 넘어진 보
살님을 올라 타곤 사정없이 내려 누르더라는 것이다.
오랜만에 손님이 왔다면서 콩나물 밥에 큰 잎을 부각처럼 튀겨 주셨다. 호롱불이라 몹시도
컴컴한 방에서 먹는 시늉만 했지 결코 삼킬 수는 없었다.
삐딱맞은 성격의 일인자인 갑자가 친절하게도 사전 교육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름에 와 보면 된장 항아리는 말 그대로 구데기 양식장이어서 된장국 먹을 때 잘 건져 먹
어야 한다는 것과 보살님이 혼자 사는지라 설겆이란게 겨울이면 없다는 것이다. 작은 소반
에다 대충 공양을 끝내면 그대로 웃목에다 올려 두었다가 그 그릇에 때가 되면 또 공양을 한
다는 것이다.
난생 처음 밤을 보내야 하는 절집에서의 첫날밤은 아무래도 그 징조가 예사롭진 않았다.
절이란 곳이 이처럼 먹을 꺼리라곤 전혀 없는 곳인 줄을 알고 있는 니 놈이 어째서 이렇게
빈손으로 사람을 재촉하였냐고 다그쳤다. 만부득히 둘이서 하산을 하여 컴컴한 밤길을 걸어
서 동네에 있는 점빵에서 소주 몇병과 필터없는 백양 담배 두어 갑 그리고 사탕 한봉지를
사서 힘겹게 암자로 돌아 왔다. 백양 담배를 죄 뜯더니 큰 분유 깡통에 그대로 부어 버린
다.
꽁초든 장초든 가리지 않고 대충 손을 넣어서 잡히면 담배를 피우시는데 치아가 없는지라
담배를 빨아 들이면 따다닥 하는 담배 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볼이 우물처럼 움푹 파
인다. 내 평생 그렇게 담배를 맛있게 피우시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시험을 치루면서 묘한 경험을 한지라 보살님께 몇마디 여쭈었다. 사람은 죽으면 어째 대닝
교? 사방 팔방으로 풍비박산난다. (지수화풍으로 돌아 간다는 의미인 듯.) 그라만 귀신이란
건 있는겁니까? 하모 있제. 지난 번에도 누가 와서 자꾸 부엌에서 딸가닥 거리면서 설겆이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면서 연신 나가 보는데 그 사람외엔 아무도 없는데 누가 설겆이를
하겠노. 그라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하늘에서 도랑산장신 (도량신장님인 듯.)이 내려 오셔
서 저벅 저벅 소리를 내면서 돌아 다니신다.
밤이 이슥하여 법당 옆에 붙은 자그만 방으로 건너 갈려고 방문을 여니 그믐이라 온 천지가
먹물빛이고 법당 뒤에 있는 몇그루 대나무는 불어 오는 바람에 그 소리 또한 몹시도 을씨년
스러웠다.
급한 마음에 머리가 우리 허리 아래에서 멤 도는 보살님을 중간에 세우고 두 넘이 양편에서
보살님을 끌어 안고 갠신히 마당을 건너 질럿다.
요나 이불 싸이즈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나오는 난장이 나라 물건 같았다. 대충 발만 덮고
벽을 기대고 앉았는데 누가 방문을 벌컥 하면서 열어 제칠것 같아서 안절부절이었다.
이 때쯤이면 어김없이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있다.
둘이서 머리를 짜고 또 짰다. 빌어 먹을 먹고 난 소주병이라도 갖고 왔으면 아쉬운대로 해
결할 판인데 도무지 그 비슷한 물건이 보이질 않는다. 둘이서 억지춘향으로 다정하게 어깨동
무 아니 서로가 애타는 심정으로 끌어 안고 대충 방문을 반 정도 비시시 열어 제치고 사색
이 된 모습으로 질금거리면서 오줌을 누었다.
아침에 일어 나서 암자 아래에 있는 화장실로 가니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45도 경사면 한
쪽에 엄청나게 긴 기둥을 세운 노천 화장실이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그대로 내려다 보
여서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법당으로 돌아 오니 갑자가 부처님께 소원을 빌면서 108배를 드리자고 한다. 그게 머하는
일이냐고 하니 부처님 전에 절을 108번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 지는데 그 공덕이 크니 함 해
보라고 한다.
그깐 넘의 대학은 떨어 지면 내년도 있을 터이고 그도 저도 아니면 고등학교 졸업을 해서
한글은 깨우쳤으니 모 그리 아쉬울 일이 있겠냐면서 난생 처음 108배를 하면서 부처님 부처
님 지발 울 엄니 아푸지 마시고 건강히 살도록 해 달라고 빌고 또 간절히 빌었다.
춘원 이 광수의 산사 일기란 글을 흉내 내어서 글 한편을 썼었는데 쑥스럽기도 하여서 이
내 아궁이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당연히 그날로 하산을 감행하였다.
똥지름은 용연사와 가까운 성당못 인근에서 이비인후과를 개업하고 있고 미륵은 본토인 경
주에서 선대의 유지를 떠 받아 짭짤한 사업을 하고 있으며 재수를 하여 고양에 있는 항공대
학을 들어 간 갑자는 지꿈 모 항공사에서 기장을 하고 있다. 후편은 내가 경주로 사업차 내
려 가면서 미륵과 연락이 닿고 당시 포항에 있는 모 부대에서 해병 대위로 근무를 하던 갑
자와의 재회 편이다.
동안거를 마친 이후론 꿀꾸리한 내용의 글 보단 오직 부처님을 향한 고차원적인 글만 올리
고져 작심을 한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덜삐 합장드립니다.
카페 게시글
불자님 글방
용연사 명적암에서의 하룻 밤. (전편)
돌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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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0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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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 용연사가 여기 강릉 가까운 사기막이라는 동네 뒷산에도 있는데.....그 옛날 자장율사께서 창건하신 고색창연하고 아늑한 가람이랍니다.......오빠랑 감따다가 넘어져서 무르팍이 피나고 찢어져서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서 3바늘꿰맨 추억이 서린 곳이지요........^^*
대구에도 용연사가 있습니다. 자비관법을 하시는 지운스님이 주석하시는 절이지요. 돌삐님 정말 오랜만에 선물들고 오셨네요. 일지스님 없다고 이곳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줄 알았지요.. 동안거 들어가셨나보지요?
돌삐님 반갑습니다. 귀한글 기다리고 있었는데....., 잘 읽고 갑니다.
돌삐님의글을 읽노라면 나도 몰래 얼골이 즐겁네요...엤날 뒷산에 앉아 강냉이 파티 하던 생각도 나고요홓ㅎㅎ..........
똥자루 갑자.ㅎㅎㅎ 정다운 별명입니당...용연사 도량을 저도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돌거사님께서 입시 치르실 시기였으면 지는 쫴맨한 얼라라서 용연사에서 돌거사님 만났던 일은 없었을끼고....훈칠하고 환하신 잘 생긴 모습...암만케도 어디서 뵌분 같았는데??..그라고는 그후 대구 인근 절집 또 어디로 다녔셨읍니껴??.
돌거사님! ~~동안거동안 용맹정진 하시고 기도 성취 하옵소서....()()().
후편 언제 나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