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쉴라흐
신앙의 투쟁(The Struggle of Faith)
야아콥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베토벤이었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저는 음악에 대해 극히 아마추어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지만, 모차르트에 대해 제가 받은 인상은 그에게서 음악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어딘가 자연스럽고 활기가 넘칩니다. "창백한 생각에 휩쓸려 병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빠른 속도로 글을 썼고, 세상의 걱정을 가볍게 다루었습니다.
베토벤은 달랐습니다. 아이디어가 최종 형태로 구체화되기까지 수년이 걸렸고, 수많은 초안과 수정, 그리고 삭제를 반복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세상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창의성은 투쟁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작품의 완성도와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투쟁을 통해 마침내 위풍당당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숭고한 후기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 사중주에 담긴 영적이고 신비로우며 거의 초월적인 면모는, 자신의 천사와 악마와의 씨름 끝에 마침내 평화를 찾은 그의 작품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제게 야아콥, 곧 이스라엘, 곧 유대 믿음의 조상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야아콥은 특출한 종교적 영웅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는 적어도 성경 본문의 표면상으로는 아브라함의 용기나 친절, 이쯔학의 신실함과 절제, 모쉐의 활력과 열정, 다윗의 정치력과 시, 이사야의 서정성과 희망을 지닌 인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형 에싸브, 장인 라반, 아내 레아와 라헬, 그리고 자녀들과의 갈등으로 둘러싸인 사람이었습니다. 형제간의 경쟁은 결국 온 가족을 이집트로 유배 보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의 삶은 긴장의 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래가 있었습니다. 에싸브의 장자권을 사고, 그의 축복을 가로채고, 결국 교활한 장인 라반을 속인 방식 입니다. 모든 경우에서 그는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 그의 상황은 악화됩니다.
리브카의 부탁을 받고 에싸브로 변장하여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집을 떠나게 한 일화는, 이번 주 파라샤에서 볼 수 있듯이, 에싸브를 다시 만날 생각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습니다. 이쯔학에게 행했던 것과 거의 같은 속임수를 라반에게서 당했습니다. 라반에게서 탈출한 것조차 하나님께서 야아콥을 해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으셨다면 비극으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토라에 묘사된 그의 삶은 한 가지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탈출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야아콥은 누구이고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해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답이 있습니다. 미드라쉬의 야아콥이 있습니다. 그는 태중에서부터 회당을 갈망했고, (Bereishit Rabbah 63:6.) 젊은 시절 베트 미드라쉬(bet midrash)를 공부했으며, 아브라함과 닮았고(Midrash Lekach Tov, Bereishit 47:18.), 팔이 대리석 기둥 같았습니다. (Bereishit Rabbah 63:13.)
그의 동기는 항상 순수했습니다. 그는 에싸브가 우상에게 제사(맏아들의 특권)를 드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에싸브의 장자권을 샀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이쯔학이 노년에 눈이 멀게 된 바로 그 이유는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싸브는 정반대로 폭력적이고 변덕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여 자신이 매우 경건하다고 생각하게 했지만, 밭에서 "지쳐" 돌아온 날 살인을 포함한 일련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Baba Batra 16b.)
이것은 극단적인 묘사이지만,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야아콥은 '이시 탐(ish tam , איש תם)'으로 불리며, 이는 단순함, 정직함,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 리브카가 받은 신탁의 의미는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였습니다. 게다가, 마하라츠 하제스(Maharatz Chajes)가 그의 저서 '아가다 문학 서론'에서 말했듯이 그녀는 야아콥이 승리할 운명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미드라쉬는 명백한 도덕적, 교육적 이유로 성경 속 인물들을 도덕적 흑백으로 묘사합니다. 모호함, 복잡성, 그리고 회색 지대에 대한 일련의 연구만 제공한다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야아콥은 본문의 평범한 의미 그대로 읽힙니다. 분명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토라는 왜 세 번째 족장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을까요? 토라는 세부 묘사에 있어 매우 신중합니다. 하지만 야아콥을 더 매력적인 색으로 칠하는 것은 어떨까요?
토라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온전한 초월성과 위엄 안에서 진정으로 대할 수 있다면, 인간을 모든 오류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다른 모든 종교 문헌에서는 영웅들이 더 이상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상화됩니다. 그들은 신성하거나 반신성하며, 완벽하고 무오합니다. 타나크 전체에서 그런 인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노아(의롭고 완벽함)조차도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욥(흠 없고 정직함)조차도 결국 자신의 운명을 저주합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류의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야아콥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요점일 것입니다. 야아콥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베토벤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에게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족장 중 유일하게 그는 선택받기를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쯔학은 태어나기 전에 선택되었습니다. 모쉐,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는 모두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하지만 야아콥은 달랐습니다. 장자권을 사고 축복을 받은 것은 바로 야아콥이었고, 아브라함의 운명을 미래로 이어가기로 선택한 것도 야아콥이었습니다.
집을 떠나 도망치던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수년이 지난 뒤, 밤중에 홀로 에싸브를 만날 생각에 두려움에 떨던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 혹은 천사가 그와 씨름하셨습니다. 하나님이나 천사는 그에게만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주셨는데, 이는 옛 이름의 변형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더욱 놀라운 것은, "네 이름은 다시는 야곱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라"라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토라가 계속해서 그를 야아콥이라 부른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종종 그러하듯이, 그의 투쟁이 평생에 걸친 것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내가 알게 된 야아콥을 위한 사운드트랙을 고르라면, 그것은 베토벤의 해머클라비어 소나타(Hammerklavier Sonata)나 그로세 푸가(Grosse Fugue)가 될 것입니다. 그 음악은 모든 형식과 구조를 뚫고 터져 나올 듯한 압도적인 긴장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서사적인 투쟁을 통해 베토벤은 결국 자신만의 평온함에 도달했고, 야아콥은 운명과 벌인 오랜 씨름을 통해, 그는 아브라함도 이쯔학도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했습니다: 그의 모든 자식들이 신앙 안에서 머물렀습니다. "고통에 비례하여 상급이 있다"라고 현자들은 말했다. ( Mishnah, Avot 5:23.) 그것이 바로 야아콥 입니다.
모차르트에게 음악이 쉽게 다가오듯, 영성을 쉽게 느끼는 성인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인들에게만 다가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아브라함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이쯔학을, 그리고 힘겨워하는 자에게는 야아콥, 바로 이스라엘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번 주의 삶을 바꿀 만한 생각를 추천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음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스라엘이 된 야아콥, 곧 유대 모두의 믿음의 아버지와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By Rabbi Lord Jonathan S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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