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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야, 어머니가 한 방울 눈물 속에 바다를 키우는 뜻을 아느냐. 바늘귀에 실을 꿰시는
한반도의 슬픔을. 바늘구멍으로
내다보면 땀 냄새로 열리는 세상.
어머니 눈동자를 찬찬히 올려다보라.
그곳에도 바다가 있어 바다를 키우는 뜻이 있어
어둠과 빛이 있어 바다 속
그 뜻의 언저리에 다가갔을 때 밀려갔다
밀려오는 일상의 모습이며 어머니가 짜고 있는 하늘을.
제주 사람이 아니고는 진짜 제주 바다를 알 수 없다.
- 「제주바다 I」 부분
제주 출신으로 제주도에 관한 글을 쓰는 문충성의 시다. 화자가 기억하고 있는 제주 사람들의 애환을 잘 모르는 어린 누이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형식으로 쓴 시다. 시인은 제주 바다에서 한반도의 슬픔을 끌어낸다.
최근 제주도의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노란 유채꽃밭과 감귤밭의 정경, 조랑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가적 풍경의 한라산과 각 오름들,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넘실거리고 이국적 풍취가 물씬 풍기는 석다(石多), 풍다(風多), 여다(女多)의 제주도는 한반도 남서해안에 위치해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평화롭고 낭만적일 수 없다.
예로부터 제주도 산에는 맹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몽골시대 이래 말의 산지로 유명하다. 서울의 두 배나 되는 한라산록의 넓고 싱싱한 초원에 십수 만에 달하는 말이 방목되고 있는 모습은 제주도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목가적인 풍경이다. 몽골이 제주도를 병참기지화하여 남송과 일본을 침략하기 위한 군마조달을 꾀했던 것도 목장으로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제주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시기는 원나라가 그곳을 지배했을 때였다고 한다. 섬은 토지가 척박하여 식량이 늘 부족했다. 서귀포 지역에 있는 극히 일부의 논을 제외하고는 모두 밭이다. 수확물로 조, 보리, 메밀, 수수, 콩 등의 잡곡류와 고구마가 있다. 이러한 질곡의 삶은 제주 민요에 잘 나타나 있다. “밤늦도록 갈아 심은 메밀과 밭벼를 산 너머 심고 물 너머도 심었네. 슬프구나 좁쌀 같은 내 팔자”
육지에서 며느리를 데려오기는 하나 딸자식을 섬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도민들은 누구나 다 일가이며 친척이다. 일찍이 봉건세력이 발달되지 못한 이곳에선 소위 착취층이 없다. 누구나 다 지주이며 누구나 다 일꾼이다. 그들의 생활이 극히 균등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평화의 도원경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직전 15만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제주도가 해방 후 1년 동안 30만에 가까운 인구로 팽창했다. 일본으로 건너갔던 많은 제주도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인구의 팽창은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얼마나 가혹한 수탈이 행해졌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식민지 민족의 인구유출률은 점령자의 수탈계수라 할 수 있는데, 제주도의 경우는 50%의 인구유출률을 기록했다(『잠들지 않는 남도』, 94).
해방 이후 순박한 제주도민들은 다시금 가슴팍에 시퍼렇게 멍울져 결코 지워지지 않을 원한을 갖게 된다. 제주도 인구의 3분의 1이란 엄청난 숫자의 도민들이 빨갱이로 내몰려 참혹한 ‘인간사냥’의 와중에 무고하게 희생되었던 것이다. 한 마을 사람들이 전원 몰살당하기도 하고, 한 가족이 전부 죽기도 해서 어느 마을에서는 공동의 제사를 올린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베트남의 미라이 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같은 대량학살 사건이 바로 제주도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4‧3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2만여 명이 참여했던 1947년 3‧1독립기념일 행사였다. 오후 2시 45분께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소란이 일어난 무렵에는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시점이었다.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과 언론의 심층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당시 관덕정 광장에는 ‘S’자 형태의 행진으로 위세를 부리던 시위군중이 지나간 다음이어서 건물 옆쪽에 듬성듬성 100-200명의 관람군중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한 기마경관이 관덕정 옆에 자리 잡았던 제1구경찰서로 가기 위해 커브를 도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6세가량의 어린이가 말굽에 채이면서 시작됐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던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관람군중들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부 군중들은 “저 놈 잡아라!”고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다. 당황한 기마경관은 군중들에 쫓기며 동료들이 있던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당시 관덕정 앞에는 육지에서 내려온 응원경찰이 무장을 한 채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기마경관을 쫓아 군중들이 몰려오자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일제히 발포한 것이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망자 6명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이었다. 이 우발적인 사건의 기록은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도 무장투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3‧1절 시위사건 1주일 후 돌과 곤봉을 든 1천여 명의 군중은 시위관련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감옥으로 몰려들자 당황한 경찰이 발포하여 다시 5명이 죽었다. 이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서 모든 제주도민은 총파업에 들어가 전 행정이 마비되었다. 파업항의자들은 경찰의 처벌과 친일분자 척결, 사상자 보상 및 구속자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군정당국은 이 요구 중 그 어떤 것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와 경찰을 증파했고 더욱이 엄청난 숫자의 서북청년단을 내려 보냈다. 서북청년단은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북한의 토지개혁 시 토지를 몰수당하고 월남한 극단적 반공우익 테러단체로서 조병옥의 요청으로 제주도에 파견된 살인청부집단이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정부군의 증강, 새로운 경찰, 우익청년단들의 부양으로 인해 침체에 빠져있던 제주도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에 대한 제주도 민중들의 저항으로 양자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되어 갔다. 나아가서 미국의 전형적인 대 제3세계 통치전략, 즉 직접적 군사개입에 의한 대량살육작전이 필요한 시기까지는 철저히 “동족끼리 싸우게 하라”는 전략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도는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앙정부로부터 유리되어 독립적 성격이 강했다. 이는 4‧3사건이 남로당의 남한지역 단독선거 반대운동에서 나왔지만 제주도 당지부의 지도자에 의한 독자적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3월 말에 일본 학군단 출신인 김달삼이 남로당 제주도 지부 군사위원회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정치위원회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3‧1절 발포사건, 경찰 및 서북청년단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남로당 제주도당의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관철하기 위해서 무장봉기를 결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정상을 위한 주요 오름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삼아 무장한 제주도민들은 대부분 북쪽 해안에 집중해 있는 24개의 경찰지서 중 절반 이상을 습격했다. 그들 숫자는 500명 정도의 규모였으며, 절반은 총으로 무장했고 나머지는 칼, 낫, 죽창, 곡괭이, 삽 등으로 무장했다. 무장군이 하산하자 약 3천여 명의 주민들이 이에 가세했다. 첫 공격에서 무장군은 큰 전과를 올렸다. 정부군 측에서 30명이 죽었는데 무장군은 단 4명이 죽었다. 무장군은 ‘단선군정’을 기치로 반미, 반경찰, 반서청을 표명했다. 섬의 상황이 악화되어감에 따라 미군정청 장관 윌리엄 딘 장군이 여론을 확인하고 직접 알아보기 위해 제주도로 날아갔다.
봉기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과정에서 4월 28일 제주 주둔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추진되었다. 이 협상은 제주 4‧3사건의 성격을 결정지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후에 김익렬 연대장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평화협상은 김익렬 연대장 혼자의 결정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딘 장군은 이미 4월 18일에 “대규모의 공격에 임하기 전에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서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 데 모든 노력을 다 하라”고 맨스필드에게 명령해 놓은 상태였다.
당시 김익렬 연대장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사건의 발단은 민심을 뒤흔든 무자비한 탄압이었으며, 경찰대의 무차별한 살육 때문에 진압은 더욱 힘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4.3의 원인과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나는 제주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 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했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 씨 이하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 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표명렬, <‘4·3 초토화 작전’ ……> 재인용).
불행히도 평화협상회담 타결 사흘 후인 5월 1일 제주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일단의 청년들이 들어와 12채의 민가를 불태우는 ‘오라리 사건’이 발생하면서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이는 평화협상을 파기하기 위해 경찰의 후원 아래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자행한 방화였다. 미군정은 김익렬 연대장의 위와 같은 보고를 묵살하고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경찰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제9연대에 초토화 토벌명령을 내린다. 참으로 해괴한 사실은 방화사건이 무장대의 소행이었다면 그 누구도 이를 사전에 알 수 없을 텐데 오라리 방화 현장이 미군에 의해 지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입체적으로 이미 촬영되어 있어서 이 필름은 ‘제주도의 메이데이’로 명명돼 4·3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폭동으로 조작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맨 오른쪽이 김익렬, 뒤쪽 검정 제복이 조병옥이다.
당시 김익렬 연대장은 초토화 작전을 막기 위해 경무부장 조병옥과 육탄전도 불사했다. 방화사건이 일어난 나흘 후인 5월 5일 제주중학교의 미 군정청 회의실에서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씨(목사출신)이 참석한 가운데 화평할 것인지, 유혈사태를 감수할 것인지에 대해서 극비 회의가 열렸다. 경찰감찰청장은 상황보고를 통해 대병력을 투입하여 철저하게 토벌할 수밖에 없다고 건의했다.
이어서 송 장군은 제주도 실정을 연대장 김익렬에게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김익렬은 이 사건을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해 공산주의자·불평분자·밀무역자 등 각종 성분의 무리가 일으킨 도민폭동으로 보고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 간의 마찰이며, 폭동자 수가 수만으로 증가된 것은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 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그는 “적의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제주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하여야 된다. 일방으로 회유와 선무를 하며 응하지 않는 자는 토벌하는 것이다. 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며 이것이 폭도증가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나의 지휘 하에 달라.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도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조병옥은 김익렬이 물적 증거로 제출한 사진첩을 두루 살피다가 갑자기 단상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는 처음에 영어로 한 말을 자신이 통역하는 식으로 설명하다가 열을 띠자 영어로만 설명했다. 조병옥은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하고 김익렬을 가리키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라고 외쳤다. 그러자 김익렬은 “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조병옥은 계속해서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라고 소리쳤다.
사실 김익렬의 부친은 그가 다섯 살 때 이미 작고했다. 조병옥이 김익렬의 부친을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딘 장군을 포함한 맨스필드 대령까지도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이 찍힐 판이었다. 격분한 김익렬은 단상의 조병옥에게 달려들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김익렬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나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나는 유도 3단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의외에도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 조 박사는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 씨가 말리러 올라왔으나 나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 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표명렬, <‘4·3 초토화 작전’ ……> 재인용).
다른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은 채 말로만 그들 두 사람의 육탄전을 만류할 뿐이었다. 이어서 김익렬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보자.
나는 미친 듯이 덤볐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딘 장군은 싸움은 말리지 않고 떠들고만 있는 안재홍 씨와 송호성 장군이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통역관 김씨를 옆으로 불러 물었다. 그런데 이 자의 통역이 또 궤변이다. 그 경황 중에도 내가 단상에서 듣자니 이 자는 딘 장군에게 안재홍 씨와 송 장군이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터무니없는 통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서 두 손으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붙잡은 채 단하로 끌어 내리면서 김 통역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입을 걷어찬다는 것이 빗나가서 그만 그 자의 음부 급소를 걷어찼다. 김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루 위에 나뒹군다. 놀란 딘 장군은 급히 회의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가더니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수 명의 MP가 달려들더니 그 중 2명의 MP가 양쪽에서 나의 두 팔을 붙잡아 조 박사에게서 떼어놓고는 나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두 팔을 잡고 꼼짝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장내의 소란은 끝났다.
모두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딘 장군은 “콰이엇, 콰이엇(조용히 하라)”하면서 진정하라고 명령하였다. 2-3분간의 침묵이 있은 후 딘 장군은 조병옥 씨에게 단상에 올라가 설명을 계속하라고 하였다. 조 박사는 이번에도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욕설로 맞섰다. 딘 장군은 다시 “콰이엇”을 연발한다. 안재홍씨도 “연대장! 조용히 하시오”하고 말렸다. 송호성 장군도 고함 고함을 지르며 “이놈! 이놈!” 호령했는데 그 대상이 연대장인지 조병옥 씨인지 분명치 않았다. 나는 그것이 조병옥 씨를 향한 욕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안재홍 씨가 탁자를 두드리며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하면서 방성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울음을 한참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장내는 순식간에 숙연해지고 안재홍 씨의 통곡소리만 들렸다. 조병옥 씨도 연설을 중지하고 나도 욕설을 멈췄다. 딘 장군은 안재홍 씨와 조병옥 씨의 안색을 번갈아 보면서 어떤 영문인지를 살핀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서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해산이오”하고 고함을 지르듯 선언하고는 문을 열고 총총히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한참 있다가 조병옥 씨가 그 뒤를 쫓아나갔다. 회의장에는 안재홍 씨와 송호성 장군 그리고 나 3인만 남게 되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재홍 씨는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비극이오”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표명렬, <‘4·3 초토화 작전’ ……> 재인용).
회의는 어떤 결론도 없이 유회되고 다음날 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인 박진경 중령이 곧바로 후임 연대장으로 부임해 왔다. 박진경은 연대장으로서 명령권을 가지고, 김익렬은 연대장의 고문으로서 작전지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정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 사정으로서는 이해됨직한 일이기도 했다. 행정장교 출신인 박진경은 작전지휘 경험이 전혀 없었다. 명령권을 부여받은 그는 제주도의 지리 지형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부대파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 인사는 표면적으로 문책경질이었지만 딘 장군이 박진경 신임 연대장에게 제주도 전역을 초토화하라는 차원에서 내려진 것이었다. 딘 장군은 김익렬이 인도적으로 초토화 작전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점을 굽히지 않았기에 자기 명령을 충실히 실행해줄 연대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대 지휘 경험이 없는 박진경은 김익렬과 토벌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토벌작전에 대해 서로의 의견이 너무 달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진경은 전임에게 제주도를 떠나달라고 했고, 그 길로 김익렬은 총사령부로 되돌아갔다. 박진경이 선택한 전략은 하나하나 골라서 사살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집단학살하는 가공할 토끼몰이식 ‘투망살육작전’이었다.
박진경이 투망살육작전을 선택했던 것은 외양상 모든 제주도민이 같은 사투리에 갈옷(감물을 들인 작업복)을 주로 입고 있는데다 낮에는 농민, 밤에는 전사로 달라질 수 있으므로 폭도와 무고한 주민을 구별할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토벌대의 시급한 문제는 폭도와 양민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무장대원일 가능성이 높은 집단의 수색을 시작했으며, 1948년 5월에 파견된 제11연대는 폭도혐의자를 ‘젊은 놈’에서부터 찾기 시작했다(제11연대 군인 증언, 1995, 142). 이런 이유에서 남자는 무작정 매질을 당했으며, 경찰 또한 폭도와 양민을 제대로 구별해낼 수가 없었다. 토벌대는 초기부터 적의 범위를 불명확한 기준에서 만들고 있었다.
사건 초기에 공격대상이 되었던 폭도와 좌익에서부터 중산간마을(해오름) 전체가 새로운 적지로, 그리고 남아있는 주민은 무조건 폭도배로 전환된 것이다. 적지와 적의 범위가 더욱 확대된 이러한 배제정책은 결국 적을 무차별 공격할 수 있는 당위성을 부여해준 것이다. 토벌대원으로서 폭도를 공격하는 것은 명령에 복종하는 일뿐만 아니라, 파괴를 일삼는 악렬분자를 제거하는 것이므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 ‘사상’이라는 것이 피부색처럼 확인할 수 없다는 데 그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1948년 5월 6일 부임한 박진경 중령은 한 달 열흘가량의 토벌작전 공로를 인정받아 대령으로 전격 승진했다. 그러나 그는 6월 17일 진급 축하연에 참석해 술을 마신 뒤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 이튿날 새벽 3시 15분경 M-1 소총 총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는 한 장의 투서에 의해 실마리가 풀렸다고 한다. 투서는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를 잡아보면 암살사건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문상길 중위를 시작으로 암살사건 연루자들이 속속 체포됐다. 직접 총을 쏘아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자는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되어온 손선호 하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피살사건은 육군장 제1호로 기록된 고급 장교의 첫 희생이어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언론에서도 재판과정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재판의 초점은 연대장 암살의 동기와 배후를 밝히는 데 맞춰졌다. 문상길 중위가 무장대 책임자인 김달삼의 사주를 받아 암살계획을 세웠으며, 손선호 하사가 권총으로 박 대령을 암살했다는 내용의 기소였다. 그러나 문상길 중위는 법정에서 ‘김달삼 지령설’을 부인했다. 문상길은 동족상잔을 피해야 한다는 김익렬 전 연대장의 방침에 찬동했기 때문에 김익렬 중령과의 회견을 추진하기 위해 김달삼을 만난 적은 있으나 그의 지령을 받아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문상길은 이어 “심리조서에 서명 날인한 것은 전기고문 끝에 눈을 막은 후 조서에 대한 기록내용 여하를 모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날인한 것으로 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 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피고인들도 한결같이 김익렬 전 연대장과 박진경 연대장의 작전을 비교하면서 무모한 토벌전을 막기 위한 것이 암살의 동기라고 밝혔다. 신상우 하사는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다. 미군인이 직접 위장(位章)을 달아주었다”고 진술했다. 특히 직접 박진경 연대장을 저격한 손선호 하사는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켜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실제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게 한 박 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다. 동포를 구하고 성스러운 우리 국방경비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박 대령을 희생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암살 후 도망갈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의 행동은 온 겨레를 위한 것이니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고 진술했다.
변호인들은 암살범들의 범행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변론했다. 관선변호인 김흥수 소령은 “문 중위 이하 각인은 산사람의 지령을 받은 일도 없고, 또 무슨 사상적 배경도 없고 다만 민족애와 정의감에서 나온 범행이었으니 특별히 고려해 달라”고 변호했다. 이어 김양 민선변호인도 민족상잔에서 쓰러진 동포의 죽음을 본 젊은이들이 자기 생명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뼈아픈 각오로 이러한 범행을 감행한 것이고, 이런 혼란에 빠지게 한 사회의 책임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검찰관 이지형 중령은 “그릇된 민족 지상의 이념에서 군대의 생명인 규율을 문란케 한 중범죄”로 규정하면서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죽음을 앞둔 22살의 손선호 하사는 “이 비극은 세기적인 비극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날아오는 총알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9월 들어 무장군의 공세가 재개되자, 그 공세의 수십 배에 달하는 반격이 가해졌다. 여기에는 미군의 한국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이승만 권력의 지역적 차별, 즉 ‘섬놈’이라는 멸시와 편견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버리라”고 했다.
내무부장관 신성모는 “제주도의 30만 도민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했다.
이승만은 “제주놈들을 모조리 죽이시오”라고 했다.
그들은 한 민족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폭언들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바로 한국판 ‘쇼아’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가을과 겨울 그리고 이듬해 봄에 걸쳐 민간인을 포함한 하루 평균 1백여 명이 무고하게 희생당했다. 제주도민들은 권력의 억지 죄명으로 모래구덩이, 정방폭포, 성산 쪽 산비탈에 집단적으로 살해되어 묻혔다. 또한 도당 책임자 조몽구의 전 가족을 포함한 75명의 주민이 다시금 이 모래구덩이에 참살된다. 그때 ‘붉은씨’라 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까지 생매장되는 참사가 이어졌다.
어느 부락민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밤이 되어도 4월 3일 이후로는 옷을 벗고 자리를 못하고, 경찰이 와도 안심이 안 되고, 산사람(도민은 누구나 폭도를 산사람이라고 부른다)이 오면 또 언제 산으로 가야할는지……” “산사람이 내려와서 협력을 요구할 때 마을주민들을 ‘산사람’의 말대로 움직인다. 그러고 나면 경찰은 그들을 폭도라고 처벌한다. 경찰이 도민의 안정 때문이라고 기부금을 요구하면 그들은 또한 말없이 제공한다. 그러고 나면 반역자에게 협력했다고 ‘산사람’의 제재를 받는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그들에게는 억지로 죽을 수 없는 목숨을 붙들고, 모두가 다 ‘그리말수다(글쎄올시다)’의 회의 속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잠들지 않는 남도』, 297). 이것은 김용해의 시에서 더 직접적인 체험으로 나타난다.
“그럼 말해라, 빨갱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 아이를 죽이겠다”
그 순간 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섭고 떨리기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아버지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소리쳤습니다.
“오냐! 나를 죽여라. 나는 빨갱이다”
그것은 너무나 처절한 소리였습니다.
통곡 같기도 하고 울음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늘을 가르는 듯한 총소리가 났습니다.
- 김용해, 「어느 아버지의 유언」 부분
산에서 내려온 폭도들에게 쌀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린 아버지는 자신이 빨갱이임을 부인하다가 아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에 빨갱이임을 자인하고 죽는다. 죄를 짓고 죽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없는 죄목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군인들은 가족들을 볼모로 하여 강제로 자백을 받고 그 자백에 따라 무차별하게 사람을 죽인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죽임을 당하고, 그렇게 살아남은 아들은 평생을 울분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비인륜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49년 4월 들어 이 봉기는 일단락된다. ‘쇼아’의 극적인 장면은 문충성의 시 「다랑쉬굴 근처」에 처참하게 그려진다.
무서운 세상
무릉도원 아닌 삶 찾아
1948년
다랑쉬굴로 피난 간 종달리
하도리 주민들 11명
그 중엔 아홉 살짜리 어린이도 있었다
길을 잘못 찾았다
무릉도원 아니었다 다랑쉬굴은
군경합동토벌대가 지른 연기에 숨 막혀
주민들 목숨들 굴속에 묻고
망각 속에 혼을 묻었다
무정세월에 육신을 묻었다
-「다랑쉬굴 근처」 부분
폭동진압이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유혈참사였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지휘관들이 누가 많은 게릴라들을 사살했는가를 과시하려고 서로 경쟁하는 베트남 증후군 역시 수많은 사상자가 생기게 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지리적으로 고립된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은 보안군에게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게 했다. 섬에서 마을 전체가 무자비하게 초토화되던 실정과 유사한 사건이라도 본토에서는 정치적 역효과를 극소화시키기 위해 신중하게 처리하던 실태는 좋은 비교가 된다”(『잠들지 않는 남도』, 72).
사건 후기에 이르면 권위화, 비인간화, 일상화 과정이 극에 달하면서 토벌군은 인간에 대한 고문과 학살행위가 합법적인 체제하에 권위 있는 명령에 따른 업무수행으로 느끼게 된다. 예컨대 “자식에게 어머니가 죽는 광경을 강제로 보게 하거나”(주민 증언, 4‧3취재반, 1998, 194 재인용) “아무데나 민가에 대고 박격포를 뻥뻥 쏘았고”(경찰 증언, 4‧3취재반, 1997, 247 재인용) “5백여 명의 학살시체가 불에 타는 냄새 때문에 며칠 동안은 길을 다닐 수 없을 만큼”(1960년 국회 ‘4‧3조사보고서’, 4‧3취재반, 1995, 306-307 재인용)이었다. 더욱 소름끼치는 사례로 체포된 수십 명의 탈옥자들이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경찰들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고 그 시체들을 시 유지들 집 앞에 실어다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인육(人肉)배달사건”이다(『잠들지 않는 남도』, 70). 한편 무장대 역시 우익가족을 적으로 지목해 적의 범위를 상대적으로 확실히 규정해 나갔는데, 이는 다분히 그들의 생존전략에 의거했음을 알 수 있다. 무장대는 배후정권이 불투명하고 조직체계가 약했던 반면, 토벌대는 계엄령이라는 최고권위, 강력한 조직체계, 일방적인 언론보도 등 범위확대 및 학살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당시 참상에 대해서 서울신문은 “6백리 제주도 부락 주변에서는 청년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무차별 학살을 피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다. 어부를 기다리는 주점도 없고 경찰만이 제 세상인 듯 왔다갔다하고 있다”라고 보도했으며, <사상계>에서는 “4‧3사건 당시 토산부락과 같은 곳에서는 14-50세까지의 남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토벌대의 기관총에 의해 무차별로 사살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제주 4‧3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민중항쟁인가? 좌익의 준동인가? 민간인 집단학살인가? 또는 빨갱이 폭도에 대한 진압‧토벌인가? 지금까지 나는 4‧3사건을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적인 민간인 학살로 이해했다. 이는 전형적인 국가범죄라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4‧3사건의 희생자로 신고된 14,028명 중 10세 이하의 어린이‧유아가 814명(5.8%), 61세 이상 노인이 860명(6.1%), 여성이 2,985명(21.3%)으로서 노약자가 전체의 33.2%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심층적 원인을 분석한 위스트리치에 따르면 국가라는 대량학살 기구는 “고도로 조직된 관료화된 사회가 아니었더라면, 곧 살해업무에 대한 책임성을 의도적으로 분산시키고 그것을 타성에 젖게 만드는 체계적이고 완벽주의적이며 동시에 철저히 ‘근대적인’ 사회가 아니었더라면 작동할 수 없었다”(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4‧3사건에 대처하는 국가기구 역시 살해업무에 대한 책임을 의도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해서 가해자를 토벌대와 무장대로 엄격히 구분한다. 토벌대는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국가의 무력기구로서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장대는 경찰, 우익 등을 공격한 남로당의 산하집단이다. 여기서 배제정책을 수립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한 배후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리고 제주도 남로당이라 할 수 있다.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는 대략 84%이며,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0%정도였다. 기타 불명, 아사, 병사에 의한 희생자가 6%정도 있었다.
대량학살 사건의 경우에서 배제정책이란 ‘우리’ 편에게만 도덕적 의무를 지키고 ‘우리’ 편이 아닌 ‘그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특정한 도덕적 의무를 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코드에서는 잔혹한 학살일지라도 범죄로 처벌받을 이유가 없게 된다. 오히려 배제된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로 간주된다. 눈에 띄는 배제방법으로 토벌대는 양민증, 석방증, 통행증 등을 발급하여 우리 편 여부를 문서로 증명했는데, 이는 나치군이 독일인과 유대인을 구별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가슴에 ‘노란 배지’를 달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권기숙, 「대량학살의 사회심리: 제주 4‧3사건의 학살과정」, 175-185 참조).
레비나스 타자성의 철학을 따르는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핑켈크로트는 이러한 폭력의 기원이 “가족, 마을, 민족, 종교, 문화적 단위 등의 인간 공동체가 거의 매일같이 이방인에 대해서 느끼는 적의”(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라고 분석했다. 배제정책은 “겉으로는 보편법칙을 자처하면서 사실은 자기네 문명의 독점을 요구하고, 문화의 대등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인간의 다양성에 반대하는 특수성의 …… 폭력인 것이다”(같은 책). 다시 말해 배제정책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특수주의와 거짓 보편주의가 결합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라는 특정지역이나 섬사람들을 배타시키려 했던 토벌군의 배제정책은 근본적으로 타자성(otherness)과 다름(difference)을 혼동한 데서 기인한다.
레비나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타자의 타자성을 이루는 것은 그가 지닌 특별한 자질이나 개별적인 습관이 아니라 그 얼굴이 벌거벗음인 반면에, 다름이란 특수한 계층의 기본주체를 이루는 것이다. 타자의 타자성은 의무를 강요하고 달아나는 반면에, 다름은 나에게 책임을 묻고 이질성 안에 자기 자신은 포함시키려 들지 않는다. 타자가 아닌 차이에 근거해서 토벌군은 ‘우리’ 편과 ‘그들’ 편을 엄격히 구분했던 것이다. 이것이 곧 미군정과 경찰의 전율할 빨갱이 색출전략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전 제주도를 무법천지의 ‘붉은 섬’(Red Island)로 만들었다. 제주도는 이미 인간이 인간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조차 거부되어야 하는 ‘저주의 섬’으로 변모해갔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군들이 유대인을 “병균”으로 명명했던 것처럼 토벌대는 제주도민을 “붉은씨”라 불렀다.
세월이 흘렀지만 4‧3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 4‧3 당시 성인이었던 이들은 이미 작고했고, 예닐곱 살이었던 아이는 자라서 어느덧 노년의 나이가 되었다.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4‧3이라는 참혹한 기억이다. 사람은 죽고 세월은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은 가슴 한 구석에 응어리로 남아 살아남은 자들을 괴롭힌다. 시인 김수열은 시 「조천 할망」에서 당시 역사의 질곡을 자신의 팔자소관으로 돌렸다.
시체마저도 건너오지 못한 아들놈 위해
귀빠진 날로 대신하는 까마귀 모르는 제삿날
냉수 한 사발 떠올려 파제를 보고
진내 나는 이불 뒤집어쓰고 피울음 삭이면서도
모든 것을 전생 궂은 팔자소관으로 돌렸다
- 김수열, 「조천 할망」 부분
살아남은 날들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조천 할망이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을 견디며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는 것뿐일 것이다.
4․3의 어느 날
죄 없는 아버지가 총살당한 산
형님마저 잡혀가서 소식 없는 산
마을 사람들이 끌려가서 주검되던 산
그 산을 보듬어 안고 어머님은 소중하게 키우며 삽니다.
풀 하나, 바람 하나 놓치지 않고
사랑하며 삽니다.
- 김용해, 「한라산」 부분
이 모든 아픔들을 끌어안은 ‘어머니’는 자신 안에 모든 아픔과 증오들을 묻음으로써 죽은 넋을 위로한다.
참고문헌
권기숙, 「대량학살의 사회심리: 제주 4‧3사건의 학살과정」, 『한국사회학』36(5), 2002: 171-200.
김수열 『어디에 선들 어떠랴』, 파피루스, 1997.
김용해, 『아버지의 유언』, 학예원, 1998.
김익렬, 실록유고 「4‧3의 진실」, 표명렬, <‘4·3 초토화 작전’ 맞선 김익렬 장군 동상 세우자>, 오마이뉴스, 2008.
노민영 엮음, 『잠들지 않는 남도』, 온누리, 1988.
문충성, 『제주바다』, 문학과지성사, 1978.
문충성, 『허물어버린 집』, 문학과지성사, 2011.
위스트리치, 로버트,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송충기 역, 을유문화사, 2006.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핑켈크로트, 알렝, 『사랑의 지혜』, 권유현 역, 동문선 현대신서 14,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