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서막, 영국의 종획운동 (인클로저,enclosur)
enclosure 는 담을 치다라는 뜻이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제 3세계 국가들만 착취한 것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역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16세기부터 영국 농촌에 불어닥쳤던 종획운동(인클로저)도 지금으로 말하자면 농업을 산업화시키자는 소위 최첨단 농촌개량사업에서 시작되었다.
소규모 농토에 작물을 키우는 것보다는 대규모 초지에 양을 대량 사육하는 것이 지역경제뿐 아니라 국가 경제에도 훨씬 더 이익이었다.
다시 말해 인클로저는 토지에서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추진된 현대적 의미의 토지 용도변경 사업인 셈이다.
그것은,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도둑질한 막대한 금을, 프랑스가 산업을 일으켜 전달 받기 위해 프로렌스 지방에서 양모 산업을 하면서부터다. 영국은 프랑스에 양털을 수출하기 위해 엔클로우저를 하게 된 것이다.
공유지 였던 농노들이 최소한의 생존 수단이었던 농토를 사유화한 것이다.
그런데 영국 역사에서 ‘빈곤’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도 바로 영국 의회가 이런 인클로저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했던 18세기부터였다.
특히 산업혁명 시기의 인클로저는 횟수뿐 아니라 규모에서도 전례가 없었다. 그 결과 그동안 영국 농촌을 지탱해 왔던 자작농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농부들은 임금농업노동자가 되거나 노동력이 부족한 산업도시의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등장이었다. 어디에 살든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이들의 삶은 ‘개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 비정규직이었고,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았다. 당시 영국은 무역과 산업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전대미문의 국부로 흥청거리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빈곤층이 빠르게 늘어났던 것이다.
맬서스 같은 진보주의자들은 무역이 흥성하는데도 빈곤이 증대하는 이유로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증가 법칙 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벤담 같은 공리주의자들도 증가하던 빈민들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원형감시체계(파놉티콘)가 달린 노역소를 구상했을 뿐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 등장한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었지만 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추진한 토지의 상품화가 엄청난 풍요와 함께 극도의 빈곤을 초래했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인클로저와 성공적인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가 된 영국은 눈부신 번영과 동시에 최초의 현대화된 빈곤을 경험했다.
빈곤층의 분노와 규모에 놀란 나머지 의회는 각 교구를 중심으로 최저생계비를 현금으로 보조하는 유럽 복지법의 원조였던 스피넘랜드 법과 넘쳐나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집단노역소를 운영했지만 대부분의 농부와 노동자들은 구빈원에 들어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것은 이 제도가 인간의 자존심과 영혼을 무시한 자본주의 방식의 기계적인 구걸이자 자선이었기 때문이다.
곧 영국이 최초로 경험한 경제적 번영은 새로운 방식으로 빈곤을 만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풍요였으며, 그 결과 영국 민중들에게는 오직 먹고살기 위해서만 일하는 지옥 같은 헐벗은 삶이 시작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일부 학자들은 영국의 종획운동을 자본주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을 자본주의의 시작이라 본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각 국들의 산업화는 국내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했지만, 그 보다 더 커다란 해악이 식민지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수탈만의 문제 보다도 훨씬 엄청난 일이었다.
1만2천 년 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살아왔던 인디언은 약 7천 년 전부터 지역별 특성을 반영한 생활방식을 정립했다.
인디언에게는 약 170가지가 넘는 언어가 다양한 문화와 함께 존재했다. “작고 평등하며 자율적인 공동체에서 더욱 복잡한 경제구조의 집중화된 정치집단으로 변모했다.
유럽인들이 이 대륙에 왔을 때는 현재의 조지아와 플로리다주의 크리크 연방, 남북 캐롤라이나의 체로키 민족과 초크토 민족 연방, 세인트로렌스강 유역의 호데노소니 연방, 그 이웃인 휴런 연방, 뉴잉글랜드의 페나쿠크 연방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미국의 식민지 시절과 독립 당시 백인들과 가장 활발한 접촉을 하며, 영국과 프랑스 전쟁, 미국 독립전쟁에서도 한 변수였던 호데노소니 연방의 사회체제와 그 민주주의는 인디언들이 꾸려왔던 고도의 민주주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미국 독립 이전 영국 영토와 프랑스 영토 사이에 있던 호데노소니 연방은 콜럼버스 도착 전후 200년간 리오그란데강 이북 최대의 정치조직이었다.
이 연방을 이루는 세네카, 카유가, 오논다가, 오네이다, 모호크라는 다섯 민족은 1142년 연방을 수립했다.
이들 민족의 폭력적 분쟁이 끊이지 않자 데가나위다라는 전설적 인물은 다섯 민족 지도자를 모아서
평화, 동포애, 단결, 권력의 균형, 모든 사람의 자연권, 자원의 공유 그리고 지도자의 탄핵과 해임 절차 등을 상세히 규정한 117개 조항의 ‘가이라네레코와’(위대한 평화의 법)를 제정 한다.
그들의 이 헌법에 따라 폭력 행사의 정당성 독점은 씨족에서 연방에게 옮겨졌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 호데노소니에서는 공적 권위에 대해 필요 이상의 거대한 힘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쿼이 연방으로도 불리는 호데노소니 연방은 뉴잉글랜드에서 미시시피강 유역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다. 여러 민족이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는 연방정치 형태는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유럽인의 호기심 대상이었다”.
연방의 기본 구조는 연방 밑에 민족, 씨족으로 구성됐다. 연방은 전쟁과 평화 및 조약 체결과 같은 대외 문제만 관장하고, 각 민족의 민족장도 그 민족과 타민족 사이의 문제에만 관여했다. 이른바 내치는 씨족의 전권 사항이었다. 호데노소니는 모계사회로 어머니와 그 자녀들로 가족을 구성했다.
몇몇 가족은 오티아너라는 큰 집단에 속했고, 오티아너가 모여 씨족을 형성했다. 이런 모계제에서 씨족 어머니(이들을 오티아니라고도 불렀다)를 우두머리로 하는 결속력 강한 정치집단을 형성했다. 여성의 투표로 결정되는 씨족 어머니는 남성 사절을 대표로 임명하고, 그 남성이 씨족을 대표해 민족회의에 참가했다. 12씨족이 한 마을을 이루고, 마을이 모여 민족을 형성했다. 마을회의, 민족회의, 연방회의가 각 단위 통치기구다. 이는 미국 독립 전의 마을회의(town meeting)와 주의회와 연방의회의 모태가 됐다.
여성은 지도자인 남성을 지명하거나 파면하고, 전쟁에 대한 동의를 했다. 민족장은 씨족 어머니들이 임명했다. 민족장의 자격, 권리와 의무는 엄격하게 정해졌다. 민족장은 권력이 없는 우두머리였다. 이런 민족장은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민족장은 평화의 유지자·중재자, 집단의 조정자로, 이는 전시와 평시의 권력 분화로 나타났다. 평시 민족장과 전시 민족장이 따로 있었다. 민족장에게는 물질적 보상이 없었고, 오히려 구성원들에게 물질적 요구를 들어주는 관대함이 있어야 했다. 말을 잘해야 했다.
국가가 형성된 사회에서 말하는 것은 권력이 지닌 권리인 데 반해, 국가 없는 사회에서는 말하기가 권력의 의무다.
그는 매일 교훈적인 말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훈계해야 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이른바 ‘인디언 추장들의 교훈적 말’은 그들의 의무였다.
연방은 각 민족 대표 8~15명씩, 모두 50명으로 구성된 연방회의를 두었다. 만장일치제여서, 각 민족의 대표 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방회의에는 대표들뿐만 아니라 일반 남성, 씨족 어머니, 여성, 아이 등 성별·연령 불문으로 참가할 수 있다.
서로 존중하고, 공정한 결과를 위한 복잡한 회의 절차도 상론할 가치가 충분하나, 발표자를 존중하고,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것을 엄단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의원이나 내각 구성원이 말할 때 야유와 칭찬을 보내는 유럽 의회와 달리 미국 의회가 발표자의 발표 때 경청하는 제도는 여기서 연유한다.
회의가 결렬될 위협을 받으면 민족장들은 그 문제를 민중의 결정에 위임해야 했다. 이는 미국의 몇 주가 채택한 주민발의권의 모태가 됐다.
또 민중은 탄핵 심의나 반역 고소의 발의 외에, 특정 문제에 대한 민의를 연방회의에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한탕주의자 콜럼버스의 인디언에 대한 배신은 평화주의자 인디언 사회의 아나키 민주주의 공동체를 말살하였다.
뿐만아니라 인디언 사회를 닮은 제 3세계 국가들의 아나키 사회는 세계 곳곳에 살아있었다. 중국의 오지 부족들, 아프리카 아메리카 부족들 그리고 러시아 농촌 공동체 미르, 유럽인들보다 훨씬 앞선 문명국가들이었던 잉카와 아즈택 문명들,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이런 사회들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던 중세 봉권국가 로마제국 보다 훨씬 더 앞서있고 평등한 사회였다.
아니, 중세 봉건국가 안의 시골영주의 장원에서 조차 농노들 스스로 결정하고 경작하던 공유지가 있었던 것이다.
아나키 사회의 구성원들은 富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식민지를 건설하고 현대 산업농과 기업농, 다국적 기업의 모태가 되었던 플렌테이션 농업을 하기 위한 노동자를 식민지 사람들에게 구하기 위해서는 돈을 아무리 주어보았자 헛수고였다. 그래서 제국주의가 선택한 것이 그들의 공동체 방식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현대 자본주의의 화두가 된 부와 빈곤의 개념은 빈곤을 타파하자고 부르짖는 것은, 전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이런 무개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유럽의 제죽주의 국가들은 침략과 도둑질로 완성되는 자본주의를 위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