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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혜] 13.소매치기
한동안 사문도의 마음을 울리던 모용화운의 울음과 어깨의 떨림이 점차 잦아든다. 사
문도에게 기댄 채로, 그렇게 잠이 든 것이다.
잠든 모용화운을 살짝 안아들고 그녀의 선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문도의 발걸음은 무
겁기만 하다.
'화운의 선실이 저기였던가...?'
모용화운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던 사문도가 한 선실 앞에 딱 멈춰
서더니, 조심스레 문을 연다.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문도가 침
대(寢臺)를 찾고는, 모용화운을 조심스레 눕혀 주고 이불을 덮어준다.
"휴우..."
북해의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독특한 체향(體香)에 한바탕 곤욕을 치른 사문도가 한숨
을 내쉰다.
'잘 자시오, 화운.'
조용히 잠든 모용화운의 얼굴을 주시하던 사문도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선실
로 향한다. 그렇게 선실로 향하며, 한 가지 생각을 해 본다.
'화운이 한 말은, 정녕 취중에 한 말일까...?'
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만일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라면, 사문도는 상처받을 대로 받은
사람에게 다시 상처를 입혀주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사문도는 정말 싫었다.
'이번 일은, 조용히 넘겨 버릴 것이다. 설사 화운이 기억한다손 치더라도... 난, 오로
지 한화경(漢華景)... 너만을 기억할 거니까...'
이렇게 모질게 마음먹어 보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사문도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
다는 걸 알게 된다.
비록 자신이 한화경을 사랑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가슴앓이를 해야 할 모용화운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기 때문이었
다.
다음 날 아침이다. 몰라 군선(軍船)을 빠져나와 사문도가 당도한 곳은, 다름 아닌 모
친의 산소(山所) 앞이다.
"11년만이네요, 어머님..."
지금은 아침이지만, 사문도는 실제로 새벽에 여기 와 벌초(伐草)도 하고 묘비도 깨끗
이 씻는 등 상당히 분주하게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조용히 산소 앞에 꿇어앉아 입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저... 그저 자주 못 와 죄송하단 말만 받아주세요..."
사문도가 품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그마한 명패(名牌)를 꺼내든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
는 명패 위로, 떨리는 사문도의 눈길이 지나간다.
"어머님... 저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요...?"
두 눈을 질끈 감고, 독백을 읊고 있는 사문도의 얼굴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괜찮겠죠...? 어머님을 사랑했던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사문도의 눈에서 떨어지는 두 줄기의 눈물이 명패 위로 뚝뚝
떨어진다.
"목소리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이렇게 안 울 수도 있을 텐데... 목소리만이라도...
"
그것이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이다. 잘 생긴 외모나 무공 실력 따위는 어떻든 좋았다.
미치도록 그리운 부모(父母)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흐느끼고 있었을까? 누군가가 바람처럼 사문도의 등뒤로 모습을 드러낸
다.
"... 주군(主君)..."
사문도와 반대로 백의를 걸치고 있는 소년, 강천비가 입을 연다.
"... 이런 모습을 보여 줘서, 미안하구나..."
얼굴에 번져있는 눈물자국을 지우고, 애써 웃음 짓는 사문도를 바라보는 강천비의 마
음은 찢어질 듯 아프기만 하다.
"... 누구 산소길래 주군께서..."
"내 어머님..."
"... 그랬군요."
강천비가 조용히 사문도의 뒤에 부복(俯伏)한다.
"대영반(大領班) 나리께서 찾으십니다. 가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 간만에 여기 와서 그런지, 쉽사리 움직이기가 싫구나..."
의미 없는 사문도의 허탈한 미소에, 강천비가 할 말을 잃는다.
"조금만 더 있다, 같이 돌아가자..."
"예."
다른 사람도 아닌 사문도의 부탁이기에, 강천비는 승낙한다.
"주군, 힘내십시오. 양친의 생사(生死)조차 모르는 저도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 것과, 돌아가신 것은... 천지차이(天地差異)다, 천비."
"주군의 양친(兩親)께서 어떤 분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필경 주군의 이런 모습은
안 보고 싶으실 겁니다.
먼저 떠나신 것도 서러우실 텐데, 주군께서 그 분들을 못 잊으시는 바람에 이렇게 오
열하고 계신다면 지하에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논리 정연한 강천비의 조언에, 약간의 눈물을 머금고 있던 사문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린다.
'어머님께서, 내 이런 모습을 보시고 슬퍼하실 거란 사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사문도는, 누군가의 사랑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모친 주채연(朱綵姸)의 역할
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다는 데서 느껴지는 고독과 슬픔에, 사문도가 오열한 것이다.
"내 곁에... 화경(華景), 너만 있다면 이렇게 알지 않을 수 있을 지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사문도가 쓸쓸한 눈으로 혼잣말을 내뱉는다.
"예? 그 분, 대체 누구시길래...?"
"... 알고 싶은가 보구나."
그제야 사문도의 얼굴에서 쓸쓸한 기색이 지워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천비에게서
, 이제야 잔잔한 눈웃음이 일어난다.
"물론입니다."
"휴... 아직은 조용히 있어야겠다. 천비 네겐 미안하지만..."
명패를 품에 갈무리하고, 사문도가 몸을 일으킨다.
"가자, 천비. 위로해 준 거 고맙구나."
강천비의 어깨를 한 번 툭 쳐주고, 사문도는 곧바로 군선을 향해 몸을 날린다. 강천비
도 얼른 뒤따라가며 한 가지 생각을 해 본다.
'주군께서도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 계셨구나. 과연 어떤 분일까...? 주군 같은 분의
마음을 녹여버린, 그 화경(華景)이란 분은...'
오시(午時) 정각이다. 한 대의 군선이 강줄기를 타고 북상하고 있다. 도합 105인이 탄
이 군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중원에 세워져 있는 명의 수도 북경(北京)이다.
"대영반 나리, 바람이 강합니다!"
"돛을 적절히 조절하고, 다시 보고하라!"
이세혁이 소리치자, 그 금의위(錦衣衛) 무사가 주변 동료들에게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
치더니 돛을 움직인다.
'휴... 사 대인(大人)은 대체 무슨 속셈이지? 나더러 지휘를 맡아 달라더니, 선미(船
尾)에 앉아서 뭘 한다고...'
사문도는 멍하니 선미에 앉아 사라져 가는 항주를 바라보고 있다.
11년 만에 찾은 고향, 항주(杭州). 그곳에서 사문도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황실에
서도 제 1로 꼽히는 인물들을 만난 것과, 그들과 동행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모용화
운의 무공 수위를 알 수 있게 된 것과 강천비의 수위가 한층 더 상승됐다는 것 등등..
.
'다음엔 아저씨들과 함께 오겠습니다, 어머님. 그때까지 부디 편히 쉬십시오...'
사라져 가는 항주에서 눈을 돌리려던 찰나, 백룡(白龍)이 푸드득 날아와 사문도의 어
깨에 앉는다.
"백룡이구나... 점심은 먹었느냐?"
"구우∼ 구구구구..."
낮게 우는 백룡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사문도는 백룡이 이미 점심을 먹고 자신에게 놀
러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울적한 날 달래주는 건 너 뿐이구나, 백룡..."
얕게 가라앉아 있던 사문도의 두 눈이 활기를 띤다. 곧이어 오른손을 내밀자, 백룡이
뒤뚱거리며 그 오른손으로 건너간다.
검지를 발로 꼭 움켜쥐고 살짝 앉아, 고개를 날개 사이로 쏙 집어넣으며 쪼아대는 백
룡의 행동 하나하나는 사문도를 웃음 짓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얼마나 웃었을까?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사문도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 뒤로 돌아
본다. 모용화운과 주은비가 다가오고 있다.
"이거, 공주님께서 납시셨군요."
정중히 포권(抱券)하고 있는 사문도의 오른손에 매달린 백룡을, 주은비가 보고 신기해
한다.
"사 소협, 그 비둘기 사 소협 건가요?"
"물론입니다. 이름은 백룡이라 하지요."
"와... 너무 귀여워요!"
사문도에게 달려가 손가락에 대롱대롱 매달린 백룡을 쓰다듬어 주는 주은비를 보고 있
는 모용화운의 입가에 보조개가 떠오른다.
"좋으시다면, 이 녀석을 잠시 맡아 주시겠습니까?"
사문도의 제의를 주은비가 거절할 리 만무하다.
"저야 좋죠! 막 물거나, 쪼거나 하진 않죠?"
"후후, 걱정 마십시오. 이래 봐도, 이 녀석은 얌전한 편이니까요."
사문도가 백룡의 몸을 한 번 쓰다듬어 주더니, 백룡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자, 백룡. 미안하지만 공주님께 잠시 가 있거라."
"구우..."
섭섭하다는 듯 백룡이 고개를 떨구지만, 사문도의 말을 곧이 알아듣는다. 날개를 한
번 퍼덕이더니, 주은비의 어깨로 날아가 사뿐히 앉는다.
"잘 해 주십시오, 공주님. 오래 오래 살아야 할 녀석이니 말입니다."
"걱정 마세요!"
백룡을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사라지는 주은비를 바라보며, 사문도가 혼잣말을 중얼거
린다.
"세상에, 일국(一國)의 공주님께서 어쩌면 저리도 서민적이실 수 있단 말인가..."
곁에 있던 모용화운이 이를 듣고 수긍하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런 사람이 공주라니, 정말 제 생각과 너무 달라요."
"그러니까 좋은 분이오. 착하시고, 상냥하시고..."
"... 그래요."
비록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사문도는 지금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참, 주군. 어제 제가 술 마시고 뒷이야기 말인데요..."
올 것이 온 걸까? 항주(杭州) 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문도의 두 눈이 가늘게 흔들린다.
"저, 어제... 주정을 부리거나 하진 않았나요?"
예상과는 다른 질문에, 사문도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려 모용화운을 바라본다. 다행
히도, 어제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사문도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 안 해도 되겠구려. 그런 일은 전혀 없었소."
"휴... 다행이군요."
모용화운이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행이란 듯 한숨을 내쉰다.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어쨌든 다행이야.'
안심하면서도 겉으론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기에, 이번 일은 그냥 가볍게 넘어가게 된
다.
'태호(太湖)를 거치면 곧이어 대운하(大運河)로 접어든다. 그 사이 여진 놈들이 습격
해올지가 의문인데...'
역풍(逆風) 탓일까? 모용화운의 체향(體香)이 사문도의 코를 간지럽히고 있다.
'달라... 내가 미칠 정도로 그리워하고 있는 향과는, 너무도 달라...'
은은한 난초(蘭蕉) 향을 지니고 있던 한화경과는 달리, 지금 사문도를 괴롭히고 있는
모용화운의 향은 진한 매화(梅花) 향이다.
"언제고 여진의 급습이 있을 터이니, 준비 단단히 해 두시구려."
"... 예."
여진과는 철천지원수(徹天之怨 )가 되어버린 모용화운이기에, '여진'이란 단어가 나
오자마자 얼굴이 굳어진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돌아서는 모용화운의 뒤로, 사문도의 걸걸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천비(天飛)에게도 전해 주시오. 결코 방심할 상대가 아니란 걸. 그리고 낫는 대로 수
련에 전념해 달라고..."
"알겠습니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모용화운의 괴로운 심정을 사문도는 아는 걸까. 한동안 괴로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던 사문도는, 별안간 얼굴을 고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큭큭... 고독랑이란 애송이가, 표연공주와 손을 잡았다고?"
"예, 주공."
"고독랑이라... 어차피 손을 좀 봐 주려고 했던 참에, 다 같이 없애버리면 되겠군."
홍무극(洪武戟), 그가 항주에서 대운하로 향하는 길목인 태호를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
를 흘린다.
'이세혁... 네놈 하나만 제거해 버린다면, 짐작해 보건데 명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
과할 테지. 훗훗...
각오하고 있거라. 여진 최정예 부대인 팔기군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러... 이 내가 북
상할 테니 말이다.'
안 그래도 매서운 눈에서 시퍼런 안광(眼光)이 쏟아지자, 삽시간에 주변 분위기가 차
갑게 죽어버린다.
'그리고 고독랑, 네놈에겐 여진을 얕본 대가와 자영오살(紫影五殺)을 살해한 빚을 받
아 내겠다. 이자까지 쳐서, 네놈 목으로 말이지.'
때는 술시(戌時)로, 이제 막 땅거미가 지고 있다. 그 가운데, 홍무극의 앞에 있는 강
에는, 이미 팔기군 500명이 배를 잡아타고 형형한 눈길로 홍무극의 명령(命令)을 기다
리고 있다.
"이번 일만 제대로 된다면, 난 아버님의 총애를 얻어 후계자로 지목될 수 있을 테지..
. 흑령(黑靈),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홍무극의 바로 뒤에서, 마치 습지에 먹[墨]이 번지듯... 은밀하면서도 조용하게 흑령
이 모습을 드러낸다.
"예, 주공..."
여전히 음성 하나만큼은 무미건조(無味乾燥)하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죽은 눈빛은,
그의 살인적인 차가움을 더욱 돋보여주고 있다.
"썩을 대로 썩은 이 명(明)을 처단하고 말겠다. 그 첫 번째 임무엔, 흑령 네가 지휘자
다."
"예..."
"이세혁만 제거하면 된다. 괜히 공주를 건드려 만력제의 반감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큭큭..."
기분 나쁜 웃음소리에도, 흑령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얼굴의 살기는
더더욱 짙어져만 간다.
흑령은 이세혁을 제거할 때까지 줄기차게 따라붙을 것이다. 설사 자신의 목숨을 날리
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타고난 살수의 추격을, 이세혁이 감당해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未知數)다. 비록
사문도 일행의 호위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사람의 운명(運命)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
기에...
보름 정도 거슬러 올라 왔다. 사문도 일행이 도착한 곳은 강소성(江蘇省) 제 1의 도시
, 남경(南京)이다.
일찍이 강남 지방의 중심지로 자리잡아온 곳이니 만큼, 높은 문화 수준을 자랑하고 있
는 곳이기도 하다.
강동 지방은 기온이 1년 내내 온화하며, 그 중에서도 남경은 차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런 남경의 제 1 선착장(船着場). 사문도의 군선(軍船)이 정착해 있는 가운데, 보초
열 명을 남겨두고 모두들 남경 저잣거리를 활보하러 나갔다.
어딜 가나 인기가 많은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한 흩어져서 돌아다니고는 있다. 사문도
와 이세혁, 모용화운과 주은비가 같이 다니게 됐고, 강천비와 황보성은 각자 따로따로
다.
"번화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군요."
"그럴 거요. 장강(長江) 하류의 대도시니까..."
사문도와 이세혁, 그들이 남경 번화가(繁華街)를 걷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이다.
"간식이라도 하러 가십시다, 대영반 나리."
"간식이라... 것도 괜찮겠구려."
"녹두활어(綠豆活魚)나 포어편탕(鮑漁片湯)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사 대인께서 결정하시구려. 노부는 어느 것이라도 먹을 지신이 있으니 말이외다. 헛
헛!"
같은 시각, 식당가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강천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떤 걸 먹을
까 고민하고 있다.
'뭘 먹긴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뭘 먹을까? 만두(饅頭)? 아니면 포어편탕(鮑漁片湯)?'
사문도가 군웅대회(群雄大會) 상금으로 떼 준 전표 다섯 장을 쥐고 행복한 고민에 빠
져 있는 강천비가, 콧노래를 흥얼거려 가며 비교적 부드러운 발걸음을 옮긴다.
"체, 자금도 받쳐 주는데... 다 먹어 볼..."
그때, 느닷없이 강천비에게 누군가가 부딪쳐, 강천비와 바닥에 널브러진다.
"괘, 괜찮으세요?"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강천비가 이맛살을 찌푸리려다가 만다. 이성(異性)의 목소리였
기 때문이다.
"아, 괜찮은 것 같소만..."
"죄송합니다. 한눈을 파는 바람에..."
강천비가 몸을 털고 일어서서 부딪친 사람을 바라본다. 홍의(紅衣)를 걸친, 뜻밖에도
제법 귀엽게 생긴 소녀다. 그것도, 자신과 또래인 듯한...
"아니, 소생의 잘못이오. 소생 역시 한눈을 팔았으니..."
고의로 부딪친 것도 아니고, 먼저 사과를 해 왔으니 부득이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은
가.
"정말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를 하는 게 원칙이오나, 소녀가 지금 갈 길이 바빠서..
."
"하하, 상관 마시오. 살펴 가시구려, 소저."
소녀가 싱긋 웃어 보이고 잔걸음을 재촉하더니 사라진다. 한동안 그 소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강천비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제법 귀엽게 생겼던데...'
한동안 망상에 젖어있던 강천비가 미소(微笑)를 짓더니, 한 식당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다.
'무슨 헛생각이냐, 천비야... 한 우물만 파자, 한 우물만!!'
식당(食堂)에서 만두 다섯 접시를 해치운 강천비가 거드름을 피우며 값을 치르러 계산
대로 걸어간다. 그리고 당당히 품속에서 전표 주머니를 꺼내려고 하는 순간, 제 손을
의심하게 된다.
"은자(銀子) 다섯 푼 되겠습니다, 손님!"
"아, 예. 그런데..."
없었던 것이다. 전표 다섯 장이 들어있던 주머니가 말이다.
'다, 다른 데 넣은 건가?'
하고 다른 호주머니도 모두 뒤져본다. 하지만 전표는커녕 종이쪽지 한 장도 없다.
"... 없잖아!?"
황당하다는 얼굴로 몇 번이고 뒤져보지만, 없다. 덕택에 눈앞에 있는 점소이(店小二)
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손님, 설마 땡전 한 푼 없이 음식을 드셨던 건 아니실 테죠?"
"하하... 무, 물론 은자를 챙기긴 했는데... 그게 지금..."
대강 둘려대며, 강천비가 차근차근 생각을 해 본다.
'분명 챙겨서 나왔는데 없어졌다는 건, 도둑을 맞았거나 흘렸단 뜻인데...?'
몇 초 지나지 않아, 강천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자그마한 사건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
간다.
'서, 설마!! 그 때 부딪친 소녀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때 이외엔 없다. 덕택에 강천비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든다
.
'비, 빌어먹을... 당했다!!'
"은자 한 푼도 없다고? 그럼 손님이 아니라 도둑이잖아!"
점소이가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지만, 강천비는 짜다리 할 말이 없다.
'마음 같아선, 한 대 박아 버리고 싶지만... 잘한 게 없으니, 참자!'
"어쩔 거야, 임마! 음식값은 물어야지, 안 그래?"
멱살까지 움켜쥔 채 소리를 질러대는 점소이 덕택에, 주막 안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강
천비에게로 쏠린다.
"아, 아니 그게... 원래 있었는데 소매치기를 당한 것..."
"변명하지 말고, 음식값이나 물어내라고!"
무지막지하게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 탓에, 강천비의 얼굴이 벌레 씹은 듯 비참하게
찌그러진다.
'다시 만나기만 해 봐... 내 이 년을 그냥...!!'
하지만 얼마 안 가 강천비에게 구원의 손길이 뻗친다.
"어머... 모용 소저, 저기 강 소협 아닌가요?"
"에? 저, 정말!!"
주은비와 모용화운이 바로 그 식당에서 쉬어가려던 찰나, 곤경에 처해 있는 강천비를
보게 된 것이다.
"모, 모용 누님! 공ㅈ..."
"쉿!"
모용화운이 황급히 입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강천비가 얼른 입을 틀
어막는다.
"저, 이 소협께서 무슨 일을 저지르셨길래 이렇게까지 하고 계신 건가요?"
주은비의 신비한 매력에 매료돼서였을까? 불같이 화를 내던 점소이가 화를 누그러트리
고 차근차근 상황ㅎ설명을 해 준다.
"아, 그게 말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점소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용화운이 의아한 얼굴로 강천비에게
묻는다.
"천비야, 그게 사실이야?"
"누님, 전 억울해요!"
이번엔 강천비가 상황 설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걸 다 듣고, 주은비가 눈웃음을
지으며 점소이에게 전표 한 장을 건네주며 말한다.
"은자 한 푼 없이 음식을 먹은 저 소협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흥분하실 필
요까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아니... 그게 저희 업소에서는 원래 이런 일이 발생할 땐 이렇게 처리해 왔는지
라..."
전표를 싹 챙겨 들고 액수를 훑어보던 점소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화, 황금 열 냥 짜리...?!!!'
황금 열 냥이면 은자가 100냥. 한 마디로, 이 식당이 한 달 벌어들이는 수입과도 맞먹
을 정도의 액수다. 그 정도의 거금이 지금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은가.
"저기, 손님... 실은 지금 이 정도의 전표를 거슬러 드릴 처지가 못 되는지라... 헤헤
."
"그럼 내일까지라도 거슬러 주세요. 그러실 수 있겠죠?"
"... 예."
더 할 말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모용화운을 바라보다, 점소이
가 입을 쩝쩝 다신다.
'큰일이로고... 여색(女色)에 이렇게 약해서야, 뭔 놈의 장사를 한단 말인가!'
한창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점소이의 귀로, 한층 차가워진 모용화운의 소리가 부딪친
다.
"내일까집니다. 내일 이 시간에 챙기러 오겠어요. 만일 마련이 안 됐다, 그러면 거짓
말을 한 대가로 오늘 저 아이에게 받은 건 없던 걸로 하겠어요."
"아니, 소저... 그건 좀 심산..."
"상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신용(信用) 아닌가요? 게다가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이라고 했는데, 어엿한 대장부가 돼서 한 입으로 두 말이라도 하신다면 그건
대장부가 아니죠. 안 그래요?"
모용화운의 정곡을 찌르는 대꾸에, 점소이는 그만 할 말을 잃는다. 그리고 함께 사라
지는 이 셋을, 떫은 감 씹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이고... 단단히 걸렸구만, 이거! 은자 다섯 푼 챙기려다 본전도 못 찾게 됐으니...
!!'
때늦은 후회는 늦은 법. 점소이가 모든 게 옳았지만, 상대가 모용화운이었던지라 정(
正)이 지고 만 것이다. 한 마디로 상대가 나빴던 것이다.
"그 계집, 잡히기만 해 봐라! 머리털을 죄다 뽑아버리고 말 테니 말야! 으윽!!"
군선으로 돌아온 강천비가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듯,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다.
그럴 무렵, 이세혁과 함께 외출했던 사문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
반미치광이 행세를 하고 있는 강천비의 모습에, 사문도가 의아한 얼굴로 주은비에게
묻는다.
"공주님, 천비가 왜 저렇게 발광을 하고 있는지 혹 아시는지요?"
"아, 그게 말예요..."
이렇게 이어진 주은비의 답변이 끝나자, 사문도는 어이가 없다는 듯 강천비에게로 다
가간다.
"어이, 천비! 미친 짓은 그만하고, 나 좀 따라오너라."
냉혹하면서도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사문도의 목소리에, 강천비가 대경하며 사문도
앞에 부복한다.
"강천비가 주군을 뵙습니다!"
"예(禮)는 그만 차리고, 따라 오너라."
"아... 예."
처음보다는 다소 힘이 빠진 듯한 강천비의 목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문도는 천천
히 자신의 선실로 걸어간다.
'으휴... 공주님께서 다 이야기하셨을 테니, 또 한 소리 듣겠네, 이거. 자그마치 은자
5백냥 짜린데, 그게...'
자신의 앞에 마치 그 소녀가 있기라도 한 듯, 욕을 해 대던 강천비가 어느덧 사문도와
한참 떨어졌다는 걸 느끼고 꽁지가 빠질세라 사문도에게 달려간다.
사문도의 선실에 처음으로 발을 디뎌본 강천비가 이리저리 둘러본다. 자신의 선실과도
별 차이가 없다. 책 몇 권과 백룡의 모이가 책보 위에 흩어져 있다는 걸 제외하면 말
이다.
"잠깐 앉아 보거라."
침대에 걸타앉은 사문도가 강천비게에 의자를 가리키며 중얼거린다. 강천비가 의자에
앉자, 사문도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소매치기 당했다면서? 그것도, 내가 상금으로 내 준 전표 다섯 장을 다 말이다."
"... 예."
어물거리는 걸 싫어하는 사문도임을 잘 알고 있기에 바로 대답한다.
"네 이목을 속일 정도로 대단한 작자가, 이 남경 시내에 있을 줄은..."
"저, 그게 좀 황당하게 당하고 만 지라..."
"황당하게... 당했다고?"
그 다음부터는 강천비의 기막힌(?) 사연을 사문도가 빠짐없이 새겨듣는다. 그 소매치
기의 연령과 옷차림, 그리고 꽤나 귀엽게 생겼다는 것까지 말이다.
"제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냥 가볍게 부딪친 줄로만 알았는데, 주막에서 먹고
계산하려고 보니 전표를 넣어 뒀던 주머니는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니..."
"잃어버린 전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거야 당연히 찾아야..."
"어떤 수로?"
찾아야겠다고 생각만 했지, 방법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지라 강천비는 꿀 먹은 벙어
리라도 된 듯 말이 없다.
"어이구, 두야! 한낱 소매치기에게 당했으면서, 내 얼굴 볼 용기나 생기더냐?"
강천비는 무림인이다. 범인(凡人)과는 다른 감각을 지녔으면서도 범인들같이 전혀 알
아채지 못했으니, 사문도가 열을 낼만도 하다.
별안간 가슴을 탁탁 치던 사문도의 우수(右手)가 번쩍이더니, 그대로 강천비의 이마를
가격(加擊)한다.
"악!"
미처 피할 틈도 없었던지라, 강천비는 이마를 싸쥐고 선실을 뒹굴뒹굴 굴러다닌다.
"그럴 줄 알았다. 네가 뻔하지, 뭐. 당했으면 갚아 줘야지, 임마! 분해하고만 있으면,
하늘에서 그 소매치기가 뚝 떨어진다더냐? 되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정신이 넌 부족
하단 말이다, 임마!"
사문도가 말을 뚝 그치기가 무섭게, 강천비가 복수열로 타오르는 두 눈을 들어 사문도
를 주시하며 소리친다.
"도와주십쇼, 주군! 복수하고 싶습니다!!"
강천비의 타오르는 복수열을 끄기 싫었던 탓일까? 한동안 묵묵히 강천비의 시선을 받
아치던 사문도가 한숨을 훅 내쉬고는 강천비에게 왼손을 내민다.
"휴... 잡고 일어서라."
밤송이 만한 혹을 달게 된 강천비가 찔끔찔금 나오는 눈물을 닦아대다가 사문도의 왼
손을 잡고 일어선다.
오른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던 사문도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에, 강천비는 귀를
귀울인다.
"잘 들어라. 내 너의 그 태도가 맘에 들어서 도와 주도록 하겠다. 허나 넌 따라 나갈
필요는 없다. 모든 걸 나 혼자 처리할 테니까. 알았어?"
"도와주신다는 것만 해도 저는 각골난망(刻骨難忘)입니다, 주군!"
선실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강천비의 목소리 탓일까? 사문도가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틀어막는다.
"고막 터질라, 이 녀석아! 얼른 사라져!!"
"예?! 보, 복수는 언제..."
"내일이다. 내 입에서 두 말 나오게 하지말고, 사라져!"
눈을 부릅뜨고 찢어 죽일 듯한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문도의 눈빛에도, 강
천비는 실실 웃더니 할 말을 하고 뛰쳐나간다.
"헤헷, 주군 손은 정말 곱군요. 모용 누님보다 고우면 곱지, 절대 뒤쳐지지 않을 정도
로 말입니다!!!"
그 말만하고 부리나케 달려나가는 강천비의 행동에, 사문도는 화를 낼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고 해서 그저 황당한 표정으로 서있다.
'영악한 놈, 언제부터 저렇게 능청스러워졌지? 반년 전만 하더라도 안 저랬는데...'
헛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사문도는 무심결에 자기 손을 바라본다. 정말이지, 여인의
손보다도 희고 곱다.
"쯧... 정말, 천비가 한소리 할 만 해. 양친께서 다 손이 고우셨기에 그런 걸까?"
모친 주채연은 여인인지라 그랬다손 치더라도, 부친 사무종의 손은 어렸을 적 자신이
생각하더라도 무척이나 부드러웠었다.
지금은 느낄 수 없는 부드러움이기에... 점차 잊혀져 가는 부드러움이기에, 때대로 사
문도는 양친의 손길이 그립기도 하다.
"되고 말겠어... 아버님 같은 사람이."
사문도의 독백을, 선실은 조용히 들어만 준다.
다음날, 사문도는 정오(亭午)가 되자마자 점심을 챙겨먹고 강천비가 그저께 소매치기
를 당했다는 곳을 배회하고 있는 중이다.
'열흘 정도는 해 볼 생각이다. 못 찾는다면 온 남경(南京) 시내를 뒤져서라도 찾아 볼
테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 씩은 사문도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지나간다. 하지만 사문도
는 그에 괘념치 않고 계속해서 그 주변을 배회한다.
제일 간단하면서도 효과가 있는 방법이기에, 이 일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방법말고 별 방도가 있겠는가. 상대의 얼굴을 알고 있다면 다른 방법
이라도 써볼 텐데 말이다.
'하늘이 내 편이라면 오늘에라도 그 소매치기는 나게 모습을 당당히 드러낸 것이다.'
하늘이 자기편이라 믿고 있는 사문도이기에, 이런 광오(狂傲)한 도전을 해본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역시나 그런 사문도를 버리지 않았다.
"어마맛!"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소녀가 비틀거리며 사문도에게 부딪친다. 그 순간 소녀의 손이
자신의 안주머니에 손을 댔다는 걸 사문도는 놓치지 않았다.
'후후, 뿌린 대로 거두리라!!'
덩달아 넘어진 사문도가 짐짓 놀란 척하며 얼른 일어나 묻는다.
"소저, 괜찮소?"
"아, 예... 괘, 괜찮아요..."
잠시나마 멋드러진 사문도의 용모에 홀렸었는지, 소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한다.
그리고 얼른 일어서서 짧게 묻는다.
"그쪽 공자님이야말로 괜찮으신지요?"
"걱정하실 필요 없소. 한눈을 팔아 부딪치게 됐으니, 소생이 부족한 탓이오. 소저께서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오."
정중히 사과하는 사문도의 태도에, 짧은 순간이나 소녀의 눈에 갈등의 빛이 스쳐 지나
간다.
"아녜요. 제 탓도 있는걸요. 죄송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약속이 있는지라..."
배시시 웃는 소녀의 모습은, 사문도에게 의구심을 가져다 준다.
'이런 천진무구(天眞無垢)한 미소를 지닌 소녀가 소매치기라니, 천비가 속았을 만 하
겠군.'
잔걸음을 재촉하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문도가 소리를 내지른다.
"잠깐 기다리시오, 소저. 혹 두고 가신 물건은 없소?"
"!!"
소녀가 사문도를 돌아보는 얼굴엔, 일말의 불안감이 엿보인다. 내색하지 않고 있으나,
사문도의 눈엔 분명 그렇게 보이고 있다.
"이 황색 주머니, 소저 것 아니오?"
사문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주머니는, 자신이 어제 강천비에게서 훔쳐낸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소녀기에, 사문도에게 달려간다.
"정말 고맙습니다, 공자님. 큰돈이 들어 있는 주머닌데, 하마터면 여기서 잃어버릴 뻔
했군요."
하지만 소녀가 사문도에게서 주머니를 넘겨받는 순간, 사문도의 입 끝에 비릿한 조소(
嘲笑)가 핀다.
"뻔뻔스럽구려. 이제 그만 정체를 드러내는 건 어떻겠소, 소매치기 소저?"
사문도의 차가워진 목소리에, 소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사문도를 본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지상 최고의 미서생 같던 사문도의 용모가, 지금은 절간의 사대천왕(四大
天王)만큼이나 두렵게만 느껴진다.
'도망쳐야 해, 최대한 빨리...!!'
하지만 마음만 그렇게 소리치고 있을 뿐, 얼음장같은 사문도의 눈길에 몸이 굳어버린
듯하다.
"한 시진도 채 기다리지 않았건만 소저께서 알아서 날 찾아주실 줄은 몰랐구려."
사문도의 왼손이, 소녀의 혈도(血途)를 번개같이 찍어버린다. 갑작스레 혈도를 짚힌
소녀가 풀썩 쓰러지려는 찰나, 사문도의 오른손이 그보다 빨리 소녀의 허리를 감싸안
는다.
"같이 가야 할 곳이 있소이다, 소저. 멍청한 내 수하가 소저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
오."
사문도가 축 늘어진 소녀를 어깨에 짊어지고, 군선이 있는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긴
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사문도의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만 가고 있
을 뿐이다.
사문도의 도착을 제일 반긴 이는 피해자인 강천비다. 사문도의 어깨에 축 늘어진 소녀
를 보고, 타오르는 복수열을 누릴 길이 없었는지 환호성마저 지르고 있다.
군선에 늘어져 있는 사다리를 타지 않고 사뿐하게 군선 위로 뛰어올라온 사문도를 보
고, 금의위 무사들이 한마디씩 한다.
"저 높이를 사뿐하게 넘어 올 정도의 실력이라니, 정말 대단해."
"그러게 말야. 우린 힘을 다 써도 겨우 넘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정도인데."
금의위 무사들이 수근거리자, 선실 안에 있던 모용화운과 주은비가 덩달아 모습을 드
러낸다.
"어머, 사 소협! 소매치기 잡으러 가신다더니, 벌써 오신 거예요?"
백룡과 하께 있었는지, 주은비의 어깨에 백룡이 앉아 있다. 사문도는 덤덤히 웃으며
대꾸한다.
"벌써 잡았습니다. 하늘이 도왔던 거지요."
"정말 대단하세요. 단박에 강 소협 주머니를 턴 사람이란 걸 알아챘다니..."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고 있는 사문도가 선미로 발길을 재촉한다.
"주군, 정말 얘가 천비의 주머니를 턴 애란 말인가요?"
"그럴 거요. 천비 주머니가 이 소저의 품에서 나왔으니 말이오."
사문도는 모용화운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고 소녀의 혈도를 풀어준다. 그러자 사문도
의 어깨에서 버둥거리던 소녀가 한순간 중심을 잃고 갑판에 엉덩방아를 찍는다.
"아야! 여긴 어디예요, 대체!"
"배 위요."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지금!!!"
소녀의 안하무인(眼下無人)한 태도에, 주은비와 모용화운이 입을 쩍 벌린 채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사문도는 차가운 목소리로 오히려 되묻는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요?"
갑작스레 식어버린 사문도의 목소리에, 소녀의 몸이 작살을 맞은 물고기처럼 부르르
떨린다.
"내 인내심을 시험치 마시오. 내 입에서 경어가 지워지는 순간, 소저의 그 얼굴을 보
존하고 나가기 힘들 테니 말이오."
경고하고 사문도가 눈길을 돌려 모용화운에게 손짓을 한다. 주은비와 함께 선실로 돌
아가라는 뜻이다.
"... 이만 들어가요, 주 소저. 나머지 일은 주군과 천비에게 맡기고요."
"... 네."
차갑게 굳어버린 사문도의 눈빛을 떠올리기가 두려워서였을까. 모용화운의 권유에 주
은비는 순순히 선실로 사라진다.
"갑시다, 소저. 어제 소저에게 황금 열 냥 짜리 전표 다섯 장을 털린 소년이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오."
사문도의 말을 안 들어 득 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소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
고 일어서서 사문도를 한껏 쏘아본다. 하지만 사문도는 여전히 개념치 않으며 먼저 발
걸음을 옮긴다.
강천비는 사문도의 뒤에 따라오는 소녀를 보고, 잡아먹을 듯 덤벼들었지만 사문도의
만류로 화를 누그러트리고 있어야만 했다.
"대체 이유가 뭐요. 저 녀석의 주머니를 턴 이유 말이오."
"..."
한 식경이 지나도록 소녀는 말이 없다. 제법 긴 시간이었기에, 강천비가 별안간 화를
버럭 낸다.
"말 안 하냐? 회를 떠 버리기 전에, 얘기해 보란 말이다!"
강천비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소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가 한층 더 짙어
진다.
"천비, 참아라. 누가 네게 떠들어도 좋다고 했느냐?"
"하, 하지만 워낙 말이 없어서..."
"난 내 식대로 한다. 넌 참견말고 조용히 있어."
"... 예."
강천비가 못마땅한 눈길로 소녀를 한 번 째려보다 코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린다.
"첫 질문부터 너무 노골적이었나 보구려. 그럼 소저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시겠소?"
처음부터 끝까지 경어(敬語)를 쓰는 사문도의 태도에 강천비가 가슴을 두드린다. 허나
사문도가 말리는데 자신이 어쩔 도리가 있는가.
"흥, 내 이름 석자를 알게 된다고 해서 댁들에게 뭐 득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아니, 그렇게 말했는데도 끝까지 반말만..."
"조용히 하라고 했잖느냐!!"
사문도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깜짝 놀란 강천비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사문도
의 시선이 거둬지길 기다린다.
"소저께서 소생에게 반말을 쓰건, 경어를 쓰건 상관없소. 대답하는 데 한 식경이 걸리
든, 한 달이 걸리든 상관없소."
"그럼 왜 절 잡고 늘어지시는 거죠?"
소녀가 의아한 눈초리로 묻자, 사문도는 신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술을 들썩인다.
"그게 내 방식이기 때문이오."
"..."
자신이 얻고자 하는 걸 얻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뜻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
는 말이기에, 소녀는 떫은감을 씹은 듯한 얼굴이다.
"대답한 생각이 생기시거든, 이 아이를 시켜 언제든지 소생을 부르시오."
사문도가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강천비다. 그 말고 사문도가 '아이'라 칭할 사람은 여
기 없으니 말이다.
"주군, 왜 하필 제가..."
"소매치기 당한 사람이 너지, 내가 아니니까."
"그래도, 막 수련이나 시작해 보려던 참이었는데..."
"잘도. 지키면서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지키려면 자연히 수련에 집중이 안 되잖습니까?"
"그럼 하지 마."
"지키는 걸 말입니까?"
"그거를 뜻할 리가 없잖느냐!"
두 사람이 이렇게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소녀는 갑자기 치솟는
짜증에 벌떡 일어서서 소리친다.
"연은!! 상관연은(上官娟殷)이 제 이름이에요. 됐나요?"
이 한 마디의 말이, 사문도와 강천비에게 준 효과는 실로 거대하다.
"상관연은...?"
강천비는 못 들어본 이름이란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사실, 남경 태생도 아닌 강천
비가 알 리가 없잖은가?
"흥, 내가 뭐랬어요? 말해 봐야 모른다고 했잖아요!"
어떤 일이든 사사건건 악을 써대는 소녀, 상관연은을 바라보는 사문도와 강천비의 시
선은 곱지 않다.
"아, 거참 답답하네. 이름을 알아야 무르던가 말까 할 것 아냐!!"
"어차피 관가로 넘길 거면서, 이름을 알아 뭣하려고요!"
도둑이 큰소리친다고, 현재 상관연은의 꼴이 딱 그 꼴이다. 강천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못하고 있다.
"거기 공자님! 전 이름을 분명히 밝혔어요. 그럼 이젠 공자님 차례 아닌가요?"
관가로 끌고 가도 상관없다는 듯, 상관연은은 당돌하게 묻는다. 약간의 미소마저 머금
고 있는 상관연은의 침착함은 사문도가 혀를 내두르게 할 만 하다.
'정말 당돌한 소녀로군. 배짱이 좋다고 해야 하나, 당당하다고 해야 하나?'
사문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눈을 한 번 깜박이고 말한다.
"소생은 사문도(謝文道)라고 하는 무림인이오. 저쪽은 내 수하로, 강천비(姜天飛)라
하오."
"사 공자님이셨군요? 그래, 이제 절 어쩌실 건가요? 십중팔구(十中八九)는 관가로 글
고 가실 테지요?"
상관연은의 말이 끝나자 사문도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묘한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그에 순간적으로 상관연은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낀다.
"상관 소저, 관가로 간다 해서 일이 다 해결된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잖소."
"... 그럼 어떡하실 건가요?"
"모셔다 드리겠소. 소저의 장원(莊院)까지 말이오."
사문도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상관연은이 얼굴을 굳히고 묻는다.
"저희 장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하시는 소리예요?"
사문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답한다.
"소저의 성(姓)은 분명 상관(上官)이라고 하셨소. 그런데 지금 소저의 차림을 보자면,
결코 빈민가(貧民街)의 소저들이 입고 다니는 옷은 아니란 말이오. 중류층(中流層)의
옷은 더더욱 아니고."
"...!"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하나요. 중원 3대 거상(巨商)에 드는, 황금수(黃金手)라 불리는
상관협(上官頰)이 혹시 소저의 부친이 아니신가 하고 말이오."
"중원 3대 거상...?"
강천비가 사문도가 한 말을 중얼거려 보고는 슬쩍 상관연은의 얼굴을 바라본다.
"거... 거짓말... 어, 어떻게 그리 쉽게... 짐작을..."
사실이었던 것이다. 덕택에 상관연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런데, 고작 집이 어디에 있는지 쯤이 탄로가 났다고 해도 저렇게 떨 필요가 있는
건가?'
상관연은의 상태에 강천비가 궁금한 표정으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순간 사문도의 말이 이어진다.
"소저의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구려. 그거면 됐소.
소저를 관가로 넘기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오. 내일 정
오 때를 전후로 내 친히 댁까지 모셔..."
"차라리 관가로 데리고 가 주세요."
전혀 뜻밖의 말을 하는 상관연은 탓에, 강천비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방금 전까지
만 해도 여왕(女王)처럼 오만한 눈을 하고 있던 상관연은이, 무릎을 꿇고 사문도에게
빌고 있기 때문이다.
"제발 부탁해요, 사 공자님. 장원으로 돌아갈 바에, 차라리 관가에서 벌받고 새 사람
이 될 테니..."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보지만, 사문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그 얘긴 더 이상 늘어놓지 마시오, 상관 소저. 난 한 입으로 절대 두 말을 하는 사람
이 아니라오."
아예 눈물까지 뚝뚝 떨궈가며 빌어보지만, 사문도는 강천비에게 도망치지 않게 잘 지
키라는 당부만 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원하신다면, 소녀의 몸이라도 드릴 테니 제발 보류해 주세요!!"
피를 토하는 듯한 상관연은의 목소리 탓인지, 상관연은이 한 말의 내용 탓인지는 모르
겠지만 사문도가 발걸음을 멈춘다.
'엥? 주군께서는 분명 계집 따위에 넘어가실 분이 아니신데...?!'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천비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지만, 분명 사문도는 그 자리에
꿈쩍도 않고 멈춰서있다.
'주군께서 설마...?'
상관연은과 사문도를 번갈아 보는 강천비의 눈엔, 그리도 설마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상관 소저, 그 말... 진심이오?"
"!"
"!?"
사문도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자, 강천비가 불신의 눈으로 사문도를
바라본다.
"주, 주군!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강천비가 버럭 소리를 지르지만, 사문도는 들은 척도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울음 반
기쁨 반이 섞인 상관연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네! 장원으로 안 갈 수만 있다면, 제 몸쯤은 얼마든지..."
"... 정말 그렇단 말이오...?"
사문도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강천비가 몸을 떨고 있다.
'그럴 리가... 주군께서는 분명 깨끗하고 공명정대한 일만 하시는 분인데, 이럴 리가.
..'
강천비가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을 때, 별안간 사문도의 시선이 상관연은에게로 꽂
힌다.
"사... 사 공자님...?"
상관연은의 얼굴에서 미소가 썰물 빠지듯이 지워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문도의
두 눈은 단순한 음욕(淫慾)을 띠지 않고, 자신에게 엄한 꾸지람을 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래도 일단 부모님께서 내려준 몸인데, 그렇게 함부로 다뤄도 되는 거요?
상관연은이 뭐라고 둘러대려는 찰나, 사문도의 차가운 음성이 귓가에서 울렁인다.
"명색이 부잣집 외동딸이라 정숙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거야말로 완전 창녀(娼女)
와 다를 게 없는 사람 아닌가?
상관 소저, 내 소저가 무슨 일로 그리 장원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
만 말이오... 자신의 운명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그리 쉽게 결정하는 게 아니오!
만일 내가 한낱 범인(凡人)에 불과했다면, 지금 소저께서 어떤 수모를 겪고 있을지 생
각이나 해 봤소?
내 비록 일개 무림인데 지나지 않지만, 옳고 그른 일 정도는 분간할 수 있는 몸! 내일
정오까지 소저의 장원으로 가 상관협 대인과 얘기를 하고 갈 터이니, 그리 아시오!!"
사문도가 그 말을 끝으로 갑판에서 휑하니 사라진다. 상관연은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로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다.
비록 소매치기 짓을 했지만, 상대가 남경 제일 부잣집의 외동딸이라니... 강천비는 놀
라울 따름이다.
'대체 뭐가 부족해서 소매치기 따위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장원으로 돌아가기를 창녀
소리를 듣는 것보다 싫어하는 이유는 또 대체 뭐야...?'
소녀가 이렇게 오열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만 있자니, 강천비는 영 찜찜한 표정이다.
'이거, 울고 있으니 해코지할 수고 없고... 아, 정말 재수 옴 붙은 날이로군!'
강천비가 갑판에 주저앉아 구름 몇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제발 시간이 빨
리 가게 해 달라고 수없이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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