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평창 계방산
무빙(霧氷), 수빙(樹氷)으로 불리는 상고대는 물방울과 영하온도와의 합작품이다. 대기 중 수분이 차가운 나무와 부딛쳐 결빙이 되는 이 현상은 고지대와 한지(寒地)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가능하다. 눈꽃이 제대로 만들어 지려면 대략 고도가 1,000m 이상은 되어야한다. 겨울철엔 이쯤에서 구름길이 형성돼 수분 공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계방산 운두령, 태백산 화방재, 함백산 만항재, 대관령이 눈꽃 산행지로 유명해진 데는 이유가 있다. 결빙에 필요한 영하 날씨, 90% 안팎의 습도, 풍속 조건이 잘 갖춰졌기 때문이다. 바람과 구름과 나무가 빚어낸 투명의 결정, 계방산 상고대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남한 5번 째 고봉, 차령산맥 맏형=강원도 평창군과 홍천군에 걸쳐있는 계방산은 1,577m로 한라, 지리, 설악, 덕유산에 이어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오대산에서 갈라져 충남까지 산맥을 뻗친 차령산맥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다.
오대산의 명성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0여 년 전부터 한강기맥(오대산에서 양수리까지 이어지는 155km 산줄기)을 오르내리던 산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눈꽃명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강원도의 오지산답게 삵, 말똥가리, 둑중개 등 멸종위기 동물들과 분비나무, 전나무, 신갈나무 등 희귀식물이 어우러져 보존가치가 높은 산이다. 또 산삼, 당귀, 잔대, 황기 같은 약초가 자생해 사철 심마니들이 산을 드나든다.
최근 환경부와 산림청은 계방산의 생태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보전가치가 높은 2,195㏊ 를 오대산국립공원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함백산은 이제 산림청의 관할에 들어가 체계적인 생태관리를 받게 된다.
산행 출발지 운두령은 높이 1,089m로 평창과 홍천을 잇는 고개. 1년 내내 구름과 안개가 넘나든다고 해서 운두령(雲頭嶺)이다. 최근 눈 산행 코스로 인기를 끌면서 등산객들이 급증하고 있다. 겨울철 주말과 공휴일엔 관광버스가 150~200대 정도가 밀려들어 운두령 일대는 주차장으로 변한다.
등산로 입구 제일 먼저 가파른 침목계단이 일행을 맞는다. 성큼 발을 내딛어 원색의 등산복 물결에 휩쓸린다. 눈길을 찍는 아이젠 소리가 요란하다. 양 옆으로 늘어선 활엽수림엔 하얀 솜털 같은 눈이 내려앉았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베일 듯 불어대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비경 앞에서 고통을 잊는다.

◆바다 속 산호초처럼 넘실대는 상고대 물결=설탕처럼 투명한 눈꽃을 렌즈에 꾹꾹 눌러 담으며 1166봉으로 오른다. 오름 길에 바라 본 동쪽 능선은 박무(薄霧)가 햇살을 가두었다.
초입인데도 오르막길엔 체증 현상까지 빚어진다. 정체를 핑계 삼아 숨을 고르고 다리의 근육도 풀어준다. 1시간 쯤 오르니 이름도 귀에 익은 깔딱 고개. 깔딱 고개는 전국 산마다 한 두 개씩 생기더니 이젠 오르막길을 표현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이미 고개는 1,300고지를 넘어섰다. 사방으로 산 그리메가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북풍에 눈꽃이 하얗게 비산(飛散)하면 1,492봉이 다와 간다는 신호다. 계방산에서 상고대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 이 봉우리다. 고도, 수분, 온도가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코발트색 하늘이 배색(配色)을 맞춰주면 눈꽃들은 순식간에 햐얀 산호초로 변한다. 바다 속 인 듯 설산인 듯 혼동되던 산호초들의 하얀 환영은 이내 북풍이 거둬가 버린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 칼바람 속에서도 눈꽃은 기세를 굽히지 않는다. 다들 지천으로 핀 상고대를 렌즈에 잡느라 바쁘다. 이 나무나 저 가지나 그게 그거지만 새 피사체가 나타날 때마다 등산객들은 반사적으로 렌즈를 들이댄다.
덕분에 체감온도 영하 20도에 그대로 노출되는 맨손만 혹사당한다. 이럴 땐 얇은 면장갑을 하나 준비해가면 동상도 피하고 사진도 불편 없이 찍을 수 있다.
어느 덧 정상. 운두령을 출발한지 세 시간 만이다. 서리를 흠뻑 뒤집어 쓴 정상석이 일행을 맞는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1577봉 정상. 차령산맥의 복판에서 백두대간의 우람찬 산줄기를 펼쳐 놓았다.
홍천군 내면 골짜기 너머로 설악산, 점봉산이 가물거리고 북쪽으로 오대산의 연봉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한강기맥의 흐름을 타고 운두령과 오대산 상원사는 등산로로 연결된다. 도상거리 22km, 수도권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종주코스다.
정상을 가득 메운 인파들 때문에 인증샷 하나 찍기도 수월찮다. 어렵게 순서를 잡아 기념촬영을 하고 다른 팀을 위해 방을 빼준다.
하산 길에서도 산은 해일처럼 넘실거린다. 정상에서 지나쳤던 평창 풍력발전기도 겨우 찾아 눈을 맞춘다. 선자령에서 거친 바람을 가르던 길이 80m 짜리 날개의 기계음이 이곳까지 들리는 듯하다.

◆이승복 생가 앞에서니 눈꽃 비경이 사치=삼거리를 지나 노동리계곡으로 들어선다. 키 큰 주목들이 하얀 성장(盛裝)을 한 채 늘어서 있다. 아름드리 주목에게 추위는 ‘남의 일’인 듯 미동도 없다. 가끔씩 눈가루를 날려 산꾼들의 기분을 맞춰준다. 길옆 눈은 무릎까지 빠지지만 레셀(ressel, 눈길 개척)이 잘 돼있어 아이젠과 스틱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반적으로 눈길 산행은 하산 길이 더 힘들다. 착지(着地)가 불안해 보행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하산 법이 있으니 바로 궁둥이 썰매다. 경사로에서는 작은 비닐 하나만 있어도 멋진 활강을 즐길 수 있다. 눈길이 마련해준 이벤트, 등산객들은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눈 속을 뒹군다.
경사가 완만해지고 임도가 가까워오면 낙엽송군락지가 펼쳐진다. 곧음의 미학이 대나무의 전유물인줄 알았는데 낙엽송의 직선도 나름대로 기품이 있다.
지루한 임도를 한참을 걸어 나온다. 임도와 나란히 한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청량하게 들린다. 눈이 감춰버린 계곡, 물은 소리로 볼 뿐이다.
임도를 끝자락, 눈앞을 막아선 초라한 초가 한 채. 이승복 생가다. 담도 울도 없는 소박한 초가,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살육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때의 비극을 외면한 채 낮은 초가엔 고드름이 달리고, 투명한 빙면(氷面)엔 관광객들의 수다가 어지럽게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