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쉰한 번째
팝콘브레인 사회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입니다. 시란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본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모양입니다. 어느 시인은 고요한 하늘이 궁금해 난초가 꽃을 피웠다고 읊었습니다. 나의 평범한 눈으로는 고요한 하늘을 궁금해하는 그런 난蘭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본디 시는 고대의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하늘에 고하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거룩하고 순수한 말이겠지요. 온몸으로 하는 언어가 시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절에서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시詩라는 한자어를 말씀 언言과 절 사寺로 표현했나 봅니다. 우리네 삶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들, 보지 못하는 것들을 일깨워주는 말이 시詩라는 뜻일 겁니다. 나태주의 시처럼 간략한 한 마디에도 우리가 감동하는 이유일 겁니다. 언어는 그 사회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어느 시인은 “흐린 눈으로 진실과 아름다움을 투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타락은 곧 언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다.”라며 우리 사회의 혼탁함을 언어의 타락에서 찾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말들이 타락했으니 그 사람도 타락한 것이지요. OECD의 국제 성인 문해 조사 결과 대한민국의 실질적 문맹률이 75%에 달한답니다. 생각하지 않는 뇌, 팝콘브레인 사회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시가 나올 수 없지요. 시가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이유입니다. 시어詩語가 선禪이고 우리네 삶의 방부제인 셈이니 말입니다. 천지신명에게 고하듯, 나를 구부리고 낮추어 작은 풀꽃을 바라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이 오가는 사회,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