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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골 3장 12 ~17절.
제목: 거룩한 예복(3)
- 새 사람⓵ 긍휼의 옷을 입고 -
서론>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서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 곧 땅에 있는 지체의 목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하였고,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주에 걸쳐서 우리가 죽여야 할, 벗어버려야 할 땅에 있는 지체, 곧 육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인해 짓는 죄의 목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먼저 바울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새 사람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처럼 벗어버려야 할, 죽여야 할 땅의 지체 곧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사람이면서 위에 있는 왕이신 그분을 본받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3장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가복음 23장 35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호칭은 그리스도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 지어다 하고.” 아멘.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십니다. 마가복음 1장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아멘.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에베소서 5장 1절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녀처럼 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새 사람이란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로 옷 입음을 말씀하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자가 입는 옷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성도들 또한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아멘.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인데, 이 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서, 이 옷이 새 사람을 의미하며,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옛 사람이 곧 땅에 있는 지체를 따라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새 사람 곧 위에 있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누가요? 그리스도인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시 골로새서 3장 1절과 2절 말씀을 찾아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아멘.
따라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곧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엣 사람 곧 땅의 있는 지체는 죽이고, 벗어 버리라 했다면, 새 사람 곧 위의 있는 것은 입으라 했다면, 구체적으로 성도가 입어야 할 새 사람의 목록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관계가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목록 역시 바울은 옛 사람의 목록과 함께 다섯 개씩 묶어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긍휼입니다. 여기 긍휼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나 오이크티무르”인데, 이 어휘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24:14절,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하였고,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실 때 그 사람들로 불쌍히 여기다 에 이 어휘가 사용되었습니다.
왕상 8장 50절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1장 8절에 보시면, 이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에 비유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아멘. 이것은 단지 우리 몸의 쿵쾅 쿵쾅 뛰는 심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슬플랑크논”이 사용돼서, 이것은 잠언 26장 22절의, 뱃속 깊은 데, 그리고 사도행전 1장 18절의 창자가 터져 흘러나오는 아픈 마음을 가지는 긍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 곧 그리스도로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긍휼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실 때, 그를 향해 고소할 조건을 찾고, 거짓 증언하고, 심하게 매질을 하며 침 뱉고 조롱하는 자를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향해 정죄와 비난해도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어떤 마음을 가졌을 것 같습니까? 창자가 터져서 흘러나오는 아픔, 그런 마음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3장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새 사람의 옷을 입었다고 하지만 긍휼이 없는 자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리스도의 심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기가 돕지는 못한다면, 대신 다른 사람이 돕는다면 감사해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사람은 게을러서 그렇다고, 만약 도움을 주게 되면 또 도움을 요청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돕지 않는게 좋을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다, 없다?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는 사람의 심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벳속 깊은 데 창자가 터져 나와 흘러나오는 아픈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이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무니만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안다는 것입니까? 그 심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고 있지 않은 자가 무니만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런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왜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입니까? 이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비유 마지막 결론 절에서 예수님은 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하셨고, 13절에 “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그에게 재물을 맡겨 준 것입니다. 만약 재물에 대해서 청지기 의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두 사람의 차이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날까요? 먼저 청지기 의식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벌어서 모은 재물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기가 쓰고 싶은 데 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재물을 어떻게 쓰건 말건 그 누구도 이렇게 저렇게 말할 권리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따라서 거지 나사로에게 자기 재물을 나눠주고 그 일부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부자에게 재물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준 것은, 하나님께서 재물을 맡겨준 것이라고 여기는 청지기 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재물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자기가 쓰고 싶은 데로 허랑방탕하게 쓰지 않고 날마다 연락하며 흥청망청 써대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재물을 주신 주인의 뜻에 맞게 재물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가 먹을 것이 없고 궁핍함 가운데 있는데, 거지에게 자기의 재물을 나눠주거나 재물의 일부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에게 재물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신명기 15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41:1절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아멘. 또 잠언 17장 5절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아멘.
그렇다고 한다면, 부자는 이러한 율법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몰랐을 까요? 시편과 잠언에 기록된 말씀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눅 16장 19절과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나를 긍휼이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괴로워하나이다.” 아멘.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말씀인즉, 이 부자는 유대인이요 율법과 시편과 잠언에 기록된 말씀을 아는 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긍휼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무엇이 없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없으면, 다시 말씀드리면 뱃속에 창자가 터져 흘러나오는 아픔으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부자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2장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아멘. 2장 17절에 보시면, 그런 말로만 믿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어야 능력을 나타내고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시체와 같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시면, 그런 믿음은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고 남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았지만, 그와 온전히 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살아서 쿵쾅 쿵쾅 뛰지 못하고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무니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입니다. 세례는 받기는 받았지만, 온전히 그리스도와 합하지 못한 자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과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거룩하고 사랑받은 자이신 그리스도처럼, 너희도 사랑받는 자와 같이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긍휼로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인을 향한 뱃속 깊은 데, 창자가 터져서 흘러나오는 아픔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용서하셨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13절에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와 자매 안에서 생활하다보면, 서로에게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말실수이든지 아니면 행동을 잘못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인격적으로, 성품 적으로 부족해서 상대방에게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면 그것을 받아 주라는 것입니다. 그 용서의 근거는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즉 죄인을 향해 뱃속 깊은 데 창자가 터져 흘러나오는 아픔으로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심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를 없었던 일로 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온전하게 허리에 띠를 두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33절 34에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라고 하시면서,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지 않은 종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용서받은 죄인이 주님을 따라 우리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서 용서한 자가 들어가지만, 지옥은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았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서 용서하지 못한 자가 들어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