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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미카 예언서의 말씀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자비 투덜이>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렸다.'
(루카15,1-2)
저는 위에서 복음을 인용하며 투덜거렸다는 말에 무얼 투덜거렸는지 그 내용을 빼고 인용했습니다.
뺀 내용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인데, 제가 이 부분을 뺀 이유는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 말씀을 듣는 것과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린 것을 대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경청자와 투덜이의 대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어지는 비유에서도 재현됩니다.
둘째 아들은 경청자이고 맏아들은 투덜이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듯이 작은아들은 죄를 뉘우치고는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맏아들이 한 번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아버지께 한결같은 충성과 사랑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하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하는 데 비해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도 자비하신 것 때문에 삐지고 투덜거립니다.
아버지가 늘 아버지와 함께한 자기한테만 자비하셔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괘씸한 동생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잔치까지 베푸니 화가 단단히 났고, 그 바람에 아버지의 자비를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는 햇빛을 같이 쐬지 않고 나만 쐬려는 고약한 심사인데, 그 바람에 자기도 동생에게 자비롭지 못하고 아버지의 자비도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웃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도 체험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사람이 이웃에게도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에 함께 하자고 아버지가 초대해도 그 잔치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 장면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자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아버지의 집은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그 집을 떠났다가 되돌아오지만 맏아들은 화가 나서 그 집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를 몰랐던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지만, 차이가 있다면 작은아들은 늦게라도 자비를 알게 되고 자비 안으로 돌아간 반면, 맏아들은 동생과 같이 아버지의 자비 안에 있는 것을 거부했기에 끝까지 아버지의 자비를 모르고 자비 밖에 있게 된 점입니다.
끝까지 투덜거리며 아버지의 자비 밖에 있는 맏아들이 가엾습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투덜이 맏아들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을 기억하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숨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입니다.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램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 집의 처지가 밖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아들이 배고픔에 지쳐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을 때는 집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연습한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하시며 먼저 받아주셨을 때일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 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큰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종처럼 살았으니 오랫동안 아비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사람을 살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목을 뻣뻣이 하고 있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비가 필요합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아름다운 성경 구절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이자 중심은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집 떠나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귀향한 타락한 동생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큰아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저 기다리시고 환대하십니다.
용서하시고 큰 잔치를 베푸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묘사된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사랑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사랑, 한도 끝도 없는 엄청난 사랑, 어처구니 없는 바보 같은 사랑,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회개’란 용어의 원래 의미는 히브리어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입니다.
그런데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누가 계십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배은망덕, 배신의 삶, 방황과 타락으로 얼룩진 지난 삶 앞에 눈을 꼭 감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는 더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돌아온 우리를 당신 품에 꼭 끌어 안으시며, ‘잘왔다. 잘왔어!’ 라고 외치시는 분이십니다.
돌아온 우리를 품에 안으신 아버지는 혼잣말로 계속 되내이십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거라. 네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나는 행복하단다. 그렇게 주눅들어 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더 이상 울지도 말고,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보자구나!”
그런 반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원래 무(無)였습니다.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진흙으로 나를 빚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 덕에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그분의 품성과 영혼을 지니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났고, 그분이 보내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 왔으며,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이렇게 두 발로 서 있습니다.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근원이요, 출발점이신 그분께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그분께로 거슬로 올라가는 작업, 바로 회개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 삶의 기초이자, 우리 인생의 시초인 그분께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요한 23세 교황)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교회는 자비를 선포하고 자비를 살 때만이 그 본질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악이 끝나는 것은 하느님 자비 때문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몸의 배고픔’보다 ‘사랑의 배고픔’이 더 큰 고통입니다>
1)
25절의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라는 말은 집에서 ‘즐거운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큰아들은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26절의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라는 말은, 집에서 무슨 잔치를 벌이고 있는지, 왜 잔치를 벌이는지를 큰아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상한 일인데, 표현만 보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온 것만 기뻐서 큰아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잔치를 벌이면서 들에 있는 큰아들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도한 일은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큰아들을 소외시킨 셈이 되고, 그것만으로도 큰아들이 화를 낼만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본래의 의도와 가르침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당연히 큰아들에게 알렸을 것이고, 잔치를 시작할 테니까 하던 일을 중단하고 곧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큰아들은 그 ‘기쁜 소식’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집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도 없었다가 무슨 잔치인지 모르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안 들으려고 해서 못 들었으면서도 “왜 나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느냐?” 라고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는 듣지 않다가 나중에 심판 때에 “나는 못 들었다. 나는 몰랐다.” 라고 변명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미사 참례를 하고 똑같이 강론을 들었는데도, 강론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고, 딴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 강론을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분명히 눈으로는 글자를 읽고 있고, 손가락으로는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무엇을 읽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일에 대해서, “그는 그저 배가 고파서 돌아온 것뿐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비유의 전체 내용을 보면, 단순히 ‘배고픔만이’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이유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7절에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정신’이라는 말은 작은아들이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달았고, 뉘우치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배고픔’은 그가 그렇게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1절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그가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려고, 즉 밥을 얻어먹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면, 그는 ‘몸의 굶주림’보다 ‘사랑의 굶주림’에 더 시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절-16절을 보면, 그는 ‘몸의 배고픔’도 심하게 겪었지만, ‘사랑의 배고픔’을 더 심하게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버리고 떠났던 그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것이 그의 회개입니다.
큰아들은 ‘몸의 배고픔’은 실제로 겪지 않고 있었는데, ‘사랑의 배고픔’은 그 자신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3)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 모습에서 ‘사랑은 곧 기쁨’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큰아들이 화를 내는 모습은 ‘사랑 없음’을 나타냅니다.
‘화’는 사랑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실 때나, 위선자들을 꾸짖으실 때 화를 내시는 것 같은 모습을 접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화’가 아니라 ‘안타까움’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화’와 ‘증오심’만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그들 마음 안에 사랑이 없었다는 것도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에서, 자기들만의 신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랑은 볼 수 없고, ‘화’와 ‘증오심’만 가득한 모습을 볼 때가 많은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 '하닮'의 여정>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시편 136,1)
새벽 성무일도 독서기도 시 시편 136장 26절까지 매 구절마다 반복된 후렴이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였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을 찬미함으로 시작된 하루입니다.
오늘은 그 유명한 복음 중의 복음, 순복음이라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자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환히 보여주는 복음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우리 삶은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자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자비하신 주님을 노래합니다.
미카 예언자도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 해 주시리라.”
자비하신 주님을 고백한 후,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사, 또 저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달라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는 미카 예언자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평생 배워가며 자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평생숙제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공부는 덕을 쌓아가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 곁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
<다산>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고, 명성을 얻고, 장수를 누린다.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천명을 받는다.”
<중용>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에게 더해가는 참 좋고 큰 덕이 바로 애덕愛德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는 누구인지 거울처럼 비춰주는 복음입니다.
마치 하느님 자비의 거울같은 복음입니다.
부단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자기 몫을 챙겨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아들을 회개로 이끈 것은 바로 자비로웠던 아버지의 추억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기 중심의 삶이 참 자유가 아닌 방종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극한의 곤궁한 처지에 있던 작은아들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철저한 회개를 통해 제정신을 찾은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합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부단한 회개를 통해 자비하신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하는 홈컴잉(home-coming)의 시간입니다.
오매불망 날마다 길목에 서서 작은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한, 제 집무실에 걸려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이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바로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작은아들의 회개의 고백을 듣는둥 마는둥 아버지는 당신 종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이 마음이, 이 사랑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이리하여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으니 바로 회개한 우리들을 위한 미사잔치를 닮았습니다.
거지같은 삶에서 회개를 통해 자녀로서의 고귀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아들같은 우리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작은아들이요 우리들이라면, 평생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충실히 섬겨온 큰아들은 당대의 의롭다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물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아우의 귀향을 반기기는커녕 격한 반응을 보이는 큰아들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여지없이 폭로되는 큰아들의 내면의 본색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자녀답게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종처럼 살았던 큰아들입니다.
아우를 저 아들이라 부르며 적대적인 그 언행이 참으로 목불인견, 무자비합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마음은 멀리 떠나 있었음을 봅니다.
제대로 ‘자녀답게’가 아닌 그냥 ‘종처럼’ 생각없이 아버지를 섬겼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범 신자의 정체일 수 있습니다.
큰아들을 달래는, 회개를 바라시며 호소하시는 아버지의 반응입니다.
두 아들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두 아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배웁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바로 큰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또 하나의 아들,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큰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과연 나는 큰아들, 작은아들, 예수님 중 누구를 닮았는지요?
우리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거룩한 미사잔치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좋은 도움이 됩니다.
“하늘의 하느님을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시편 136,2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것>
엘파소에서 76세의 자매님이 ‘나물, 대추, 호도, 고춧가루, 버섯’을 가지고 왔습니다.
12시간 운전해서 왔습니다.
농산물을 팔아서 본당에 봉헌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왕복 24시간 운전해야 하는 고된 일정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성전 건립할 때 물건을 많이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76세 어르신이 기분 좋게 엘파소로 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자고 했습니다.
다행히 물건이 잘 팔렸고,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
가족 간에도, 친구끼리도, 직장에서도 참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시는지요?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는 말은 단순한 생활 속 조언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나 치며 힘겹게 살다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도 나보다 잘 사는데, 내가 차라리 품꾼이라도 되어야겠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끌어안고 환영합니다.
잔치를 벌이고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이 장면만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맏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를 속상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몫의 재산을 다 써버리고 돌아온 동생이 오히려 더 큰 환대를 받습니다.
형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것 같습니다.
"나는 평생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저렇게 쉽게 용서받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탕자의 입장에서 형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탕자는 형이 억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 얼마나 기쁜 일인데!"
입장을 바꿔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탕자의 비유뿐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은 오랫동안 억압받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들도 과거에 억압받았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방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도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나는 힘든 시절을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약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이 가르침은 단순히 오래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폭력과 가난을 피해 어렵게 국경을 넘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탕자처럼 무언가를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는 없을까요?
이스라엘은 2000년 동안 박해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경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입장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한때 박해받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것'은 단순한 조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공감과 배려. 이 모든 것이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탕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맏아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공감이 삶 속에서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마음부터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어떻게 마음먹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가 노인의 사망 시기를 연구한 결과, 생일 되기 전에 사망률이 뚝 떨어졌다가 생일이 지나면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왜 생일 전후에 노인의 사망률에 현저한 변화가 나타날까요?
생일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영향을 준 것입니다.
즉,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의학계의 거물 한 명이 위독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훈장을 받기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정식으로 수여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병상에서 훈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갑자기 건강을 회복해서 몇 년을 더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우리는 그 마음을 소홀히 여깁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그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지금을 힘차게 살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다며 온갖 불평불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 역시 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적 행동 변화가 아닌,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쳐서 하느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 속에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이 타락한 생활 끝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바꾸는 것, 회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아들의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따뜻하게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큰 잔치까지 벌이게 되지요.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바꿔서 당신께로 나아오는 것을 기쁘게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들이십니다.
큰아들의 모습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위한 잔치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종처럼 일만 하였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득한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마음을 바꾸지 못해서 즐기고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곁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바꿔 얼른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 곁에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마음을 바꿔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마음부터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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