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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의무 수행 통지를 받았다. 은퇴 전에는 환자 핑계를 대고, 여러 번 면제를 받았던 일이다. 민사 소송 때, 증인으로 한번 불려 가서 의무 수행을 했던 적이 있을 뿐이다. 70세 이상의 시민들은 질환이 있으면 의사 소견서를 받아 제출하면 의무가 면제될 수 있다. 이번에는 생의 마지막 임무 수행이라 여겨 기쁘게 참여하기로 했다.
배심원 의무는 미국 시민으로서 납세, 국방, 법률 준수 등과 함께 지켜야 하는 의무 중 하나이다. 납세, 국방, 법률 준수 의무는 영주권자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배심원 의무는 시민권자에게만 있다.
출정 기일 며칠 전 출두해야 할 법정이 바뀌었다. 알고 보니, 인근 세 지역의 배심원들을 한군데로 모아 동원해야 할 만큼 중대한 중죄 형사재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사재판이기 때문에 원고(原告)는 국민이고, 검사가 국민을 대표하는 경우이었다. 배심원끼리 범죄 내용을 토론하거나 친구나 친지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여러 과정을 거쳐 ‘대체 배심원’ 6명 중 하나로 뽑혔다. 대체 배심원은 정규 배심원 6명과 함께, 모든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행여, 정규 배심원이 응급상황으로 직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대체 배심원’들을 뽑기 때문이다.
이 재판은 두 달 넘게 진행되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배심원들은 서로 대화할 기회가 생겼고 친해졌다. 재판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서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어서 재판 내용만 빼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은 셈이다.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공개석상에서 알린 탓인지 한국과 관련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쉬는 시간에 가까이 접근해 왔다. 그리고 내가 암 전문의라는 사실을 알고선 가족, 친척들의 암 치료에 대한 의견도 물어왔다.
이런 질문들은 흔히 받는 것이어서 내가 정해 놓은 방식대로 대답해 준다.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으레 모국을 떠났을 때와 지금의 한국은 문화적으로 크게 다르다고 강조한다. 최근 방문했던 모국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또 한국어 진흥에도 한몫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글이나 외국 언어를 성장기에 배우면 두뇌 성장에 유익하다는 의학적으로 증명된 내용을 덧붙여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의학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늘 조심한다. 왜냐하면 환자를 진찰하지 않고 의견을 내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주치의가 아닌 의사들은 ‘건강보험 이전과 책임에 관한 법’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아픈 사람이 직접 주치의의 견해를 묻도록 격려해 주라고 권고했다. 또 궁금한 점에 대해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하였다면 의사를 바꾸거나, 다른 의사의 이차적 소견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해 주기도 했다. 배심원들에게 쉬는 시간에 적절한 정보를 제공한 셈이다.
어느 날, 한 배심원 남성이 머리를 빡빡 깎고 법정에 출두하였다. 나에게 암에 관해서 물었던 중년 남성이었다. 나는 농조로 무슨 보속(補贖)이라도 해야 할 일이 생기었냐고 물었다. 보속이란 가톨릭교회나 동방 교회에서 고백성사 후, 지은 죄에 대한 대가로 치러야 하는 속죄 행위이다. 그 남성은 동생이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기 때문에, 함께 하는 마음에서 자신도 삭발했다고 말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 너의 정성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위로하고 응원해 주었다.
요즘은 치료 방식이 발달해 항암 약물 치료나 방사선 치료의 경우, 표적 치료 방법을 활용하기 때문에 탈모가 심하지 않다. 탈모 예방은 과거에 시도 한 적이 많이 있었지만, 효과가 없고 행여 암세포가 두피에 정착하는 것을 방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 잘 쓰지 않는다. 탈모는 대부분 일시적 부작용이다.
환자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환자와 함께 삭발하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함께 한다는 깊은 마음을 표시하는 용감한 행동이다. 이렇게 함께 하는 친구나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나도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또 나를 위해 삭발할 친구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