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역사가 미국 역사 보다 길다/미대사관 이전 강행, 반대 여론 확산 [디지털 말] 2002/07/12 김재중 기자
조선 왕조의 혼이 깃들어 있는 옛 덕수궁터에 건립을 추진하던 미 대사관과 직원용 아파트 중 아파트 건립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대사관 건립은 강행될 움직임이다
지난 5일 건설교통부는 "입법예고될 주택건설촉진법에 외교시설에 대한 특례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미대사관 이전을 반대하는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건교부의 발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내고 있다. 지난 해 캐나다 대사관 이전에 반대했던 것처럼 외국 소유의 공적 건축물등이 우리 문화주권에 훼손을 가하는 그 어떤 행위에도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
한국청년연합회 유정 간사는 건교부 발표에 대해 "입법예고가 된다해도 번복될 수 있는 문제며 미 대사관 신축까지 고려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흐릴수 있는 발표"라고 꼬집었다. 어찌됐든 입법안에 특례 조항이 신설되지 않을 경우, 미대사관이 옛 덕수궁터에 짓기로 한 8층, 54가구 규모의 아파트 건립 계획은 사실상 수정이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이다.
그러나 15층 규모로 지어질 미대사관의 옛 덕수궁터 이전은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 가고 있다. 미대사관이 미국 정부 소유의 땅에 한국의 관련법규를 준수하는 선에서 일을 추진해 간다면 별달리 막을 방도가 없는 것. 미 대사관측의 공식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난 8일 iTV 대담에 나선 토마스 허바드 주한 미대사는 대사관 신축에 대해 한국여론이 좋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세계 어느 나라든지 수도엔 외국대사관이 밀집해 있다"며 "(신축대사관은) 한국의 법률적 요건을 충족 시키며 주위 환경에 어울리도록 배려해 양국 모두 자부심을 느낄 것"이라고 답했다. 대사관 이전 결정은 변함없다는 어투다.
신축 미대사관 설계자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한술 더 떴다. 그레이브스는 지난 4일 초청강연회 형식을 빌은 사실상 '미대사관 신축 설명회' 자리에서 "미국공관이 지어진 뒤 15년뒤에 덕수궁이 지어졌다"며 "한국민들이 반미감정 때문에 대사관 신축을 반대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것으로 알려졌다.
11일, 미대사관 아파트 건립 반대 시민 결의대회
항의서한 주한 미 대사에게 전달
상황이 이쯤되자 지난 5월부터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 반대 시민모임(시민모임)'을 결성해 활동해온 30여개 단체 소속 회원들은 본격적인 저지 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신임 이명박 서울시장과 허바드 주한 미대사 앞으로 면담 요청서를 보내 자신들의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한편, 서명운동 주민청원 1인시위등을 통해 여론에 직접 호소할 계획.
11일 오전,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인 '시민모임' 관계자 20여명은 미대사관의 옛 덕수궁터 이전을 반대하는 시민결의대회 열고 미대사관에 자신들의 의사를 담은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 날 집회에 참가한 윤경로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만일 미국이 대한민국을 주권 문화국가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민족적 정서가 서려있는 궁궐터에 대사관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아직도 미국측이 강행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것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시민모임은 결의문을 통해 미대사관측에는 "이전계획과 관련법 개정요구 철회, 덕수궁터 반환 뒤 관계당국과 협의 할 것"을 종용했으며 서울시와 관계당국에는 "덕수궁터 매입, 대체부지 마련, 정동 일대 문화지구 지정, 근대문화유산 보호할 대책 수립"을 요구했다.
한편 시민모임은 지난 5월부터 홈페이지(www.palace119.org)를 개설하고 사이버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해온 결과 오프라인 5천여명을 포함해 대략 2만 7천여명의 '미대사관 이전 반대 서명'을 확보한 상태다.
다음은 '시민모임'이 토머스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에세 보낸 항의서한 전문이다.
존경하는 토마스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님!
호혜 평등한 한미관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시는 귀하께 경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귀 대사관측이 국내법 개정까지 요구하면서 옛 덕수궁터에 일제하 조선총독부 건물의 1.8배에 이르는 15층 규모의 미대사관과 8층 규모의 직원 숙소용 아파트 등의 신축을 추진하는 것에 반대하여, 이를 철회시키기 위해 [덕수궁 터 미대사관·아파트 신축 반대 시민모임]을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건설교통부는 국민들의 빗발치는 반대여론에 굴복하여 관련법 개정을 하지 않기로 자신의 입장을 바꿨고, 새로 당선된 이명박 서울시장도 옛 덕수궁 터에 대사관 직원 아파트 건립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귀 대사관측은 우리 국민의 거센 반대여론과 한국 당국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사관과 아파트 신축 계획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에번스 리비어 부대사는 제 3의 부지로 이전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미 대사관측의 아파트 신축부지는 "1883년 고종 황제가 미국의 외교시설 터로 허용한 곳"이라는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한 바 있고(중앙일보, 5월 23일자), 대사관과 아파트 설계자인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귀 대사관이 후원한 7월 4일, 초청강연회에서 "덕수궁 터에 있는 미국 공관이 지어진 지 15년 후에 덕수궁이 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라는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 대사관측은 그레이브스와 한국측 관련 인사들과의 비공식적 면담을 추진한 데 이어, 허바드 대사 자신도 언론 인터뷰를 통하여 이 계획 추진의사를 명확히 하였습니다.(중앙일보, 7월 9일자)
존경하는 대사님!
정동일대는 1397년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찰, 경운궁 등 조선 왕실의 거점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 귀 대사관측이 건물을 신축하려는 옛 덕수궁 터는 90년 전만 하더라도 역대 선왕들의 영정을 모셨던 선원전 등 각종 전각들이 즐비했던 곳입니다. 또한 현재의 대사관저에는 지금도 조선왕조 시대의 상석(床石), 문인석(文人石), 기와조각, 도자기 파편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옛 덕수궁 터를 비롯한 정동일대는 우리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정동일대가 그 면모를 훼손당하게 된 것은 국권이 상실되기 시작한 구한말 이후입니다. 정동일대는 귀 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진출로 잠식되기 시작하였으며, 일제침략으로 결정적으로 분할,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해방과 미군정, 전쟁과 역대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이 곳의 문화적 가치는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와 문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것을 지키고 가꿔 나가기 위해 시민들이 발벗고 나서고 있는 지금, 또다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파괴가 반복되는 것을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으니, 앞으로도 문화유산 파괴를 감수하라는 요구는 우리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동일대가 분할, 파괴, 매각되어 외국공관이 들어서고, 덕수궁 한 복판을 가로질러서 길이 뚫린 것, 옛 덕수궁 터의 일부가 귀 대사관측에 매각되고, 현대식 고층 건물이 덕수궁 주위에 들어선 것은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우리 민족의 수난,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지원해 왔던 역대 독재정권의 문화적 몰상식을 드러내 줄지언정, 미국이 대규모 대사관과 아파트를 짓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귀 대사관측이 옛 덕수궁 터에 추진하고 있는 미대사관과 아파트 신축 계획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국내법에 맞게, 소규모로 지으면 괜찮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옛 덕수궁 터에 들어서는 어떤 건축물도 반대하는 것이며, 따라서 귀 대사관측의 덕수궁 터 미대사관·아파트 신축 계획의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이런 요구를 무시하고 귀 대사관측이 이 사업을 강행한다면 그것은 문화적 야만행위로서 우리 국민의 중대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며, 문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우리는 귀 대사관측이 이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 호혜 평등한 한미관계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귀 대사관측의 현명한 판단이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