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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 3,1-8ㄱㄷ.13-15
그 무렵
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0,1-6.10-12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2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3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4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6 이 일들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10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11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1-9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란 ‘믿는 일’, 곧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고을을 들러 가르치실 때의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4.)
여기서 '회개'가 강조됩니다.
사실 ‘회개’란 먼저 '죄'를 지었음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갈릴래야 사람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고, 왜 그것을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대체 ‘회개’란 무엇을 말하며, ‘죄’란 무엇을 말할까요?
오늘 제1독서는 이를 밝혀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제1독서의 맥락 안에서 ‘죄의 본질’과 ‘회개의 본질’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먼저, ‘죄’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 무엇이 죄인가?
성경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의 죄’이고, 또 하나는 ‘망각의 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무지의 죄’를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사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성조들과의 약속을 맺으신 하느님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후손들과는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고 그들은 하느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으로 도피해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호렙 산에서 나타나신 하느님께서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한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탈출 3,4)
얼마나 놀랬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살 떨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모세인 줄을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피하여 도망해 온 이곳에서, 일종의 수배자 신세인 자신을 아는 이가 있다니!
더구나,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하시니, 참으로 황당하고 기절초풍할 일이 아닌가?
이 귀양지가 무슨 거룩한 곳이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탈출 3,6)
그러니 그분은 아직 성조들의 하느님이실 뿐, 그 후손들과는 직접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가려고 내려왔다고 하십니다. (탈출 3,7-8)
그리고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탈출 3,14-15)
여기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우선 세 가지를 밝혀줍니다.
첫째는 하느님은 없는 허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재 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이방인들의 신처럼 이름의 한계 안에 갇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셋째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하느님으로 ‘늘 계시는 분’임과 동시에 ‘장차 보게 될 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파라오에게 행한 열 재앙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고, 또한 홍해를 건네는 탈출을 통해 당신께서 구원자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시고 체험시켜주십니다.
나아가, 손을 잡아 붙들어 주시고 계약을 맺으시고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그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무지의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이미 체험하고 알게 된 그분을 끊임없이 망각하고 배신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이들 중에서는 칼렙과 여호수아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고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 역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졌으며, 마침내는 이방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떠나갔으며, ‘망각의 죄’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제1독서의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 신비는 다름 아닌, ‘주 하느님께서 저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저희와 함께 계시며, 저희에게 호의와 자비를 보이시며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신비를 간직하게 된 모세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맡겼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라는 바위에서 영적 양식과 음료를 마시고 그리스도인이 된 ‘코린토인들’에게, 조상들이 모세와 함께 바다를 건너는 세례를 입고 구원자이신 주 하느님을 알게 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또 다시 광야에서 하느님을 망각하고 죄를 지어 죽어 널브러졌던 사실을 본보기로 주었음을 환기시키며, 종말에 다다르기까지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4.)
이는 우리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죄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곧 그것은 하느님께서 ‘구원자 주님’이심을 모르는 ‘무지의 죄’와 그것을 알고도 무시하고 배척했고 거부한 ‘망각한 죄’임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래아에서 맨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실 때, 동시에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회개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회개’란 ‘믿는 일’입니다.
곧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 일인가?
그것은 우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신 주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 이 선포가 ‘복음’(기쁜 소식)이 되는가?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이나 세상이 다스리는 나라, 곧 죄와 속박으로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에덴에서 벌어진 축복(원복)의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와 압제로부터의 ‘해방의 기쁜 소식’임과 동시에 그 ‘축복의 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서 '가까이 왔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손아귀 안에 있다. 손에 들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손에 들려 예수님과 함께 왔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혁명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와 메시아가 가져올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선구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고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선언은 그 나라를 들고 온 예수님 당신 자신이 ‘메시아’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 당신을 구원자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이 ‘복음(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곧 ‘예수님이 구원자 주 하느님이요, 동시에 당신 손에 들려 함께 가져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기쁜 소식(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윤리적인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거나 망각하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복음'이 이루어졌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복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무지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 반성, 또는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 다스림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8절)는 ‘시급히 회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한 자에 합당한 행동과 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과수원 주인이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내라고 하자, 과수원 재배인은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희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자비를 입고 있다는 표시요, 또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우리의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고 돌보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망각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사랑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그 사랑을 베풀며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심보를 바꾸는 것>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행복하게 지내신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혹시라도 행복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행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습니다.
회개란 쉬운 말로 심보를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신자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예, 배신자.
그러면 신부가 제일 싫어하는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원불교 신자. ‘원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교만’한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사랑’하고 ‘포용’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대표적인 배신자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두 번째 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15,72).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의탁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서 주님의 으뜸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티모 2,15-16)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필리 3,14)
바로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과거에 매여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회개는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맡기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올지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오늘이 선물로 주어졌고 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6) 하고 이르시자,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의 변화된 모습을 구체적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동의 변화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오랜만에 출신 본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오래도록 살고 계신 신자분이 반가워하시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랜만에 친정에 오셨는데 떡이라도 해 오셨습니까?”
신부님께서 능청스레 대답하셨습니다.
“네, 그러잖아도 떡을 해 오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없어서 못해왔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핑계를 댑니다.
남편을 탓하고, 자식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시기하는 마음, 탓을 남에게 돌리는 심보를 고쳐야 합니다.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회개입니다.
십자가의 오른쪽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매달린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
왼쪽 강도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남의 잘못된 일을 보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사는 것이 그 모양이더니 결국 그 꼴이구나”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심판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추스르는 근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또한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음을 돌려서 간구하면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당한 불행이나 고통,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이나 그들은 ‘죄가 많아서’,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여기서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코 우리의 멸망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방탕했던 아들의 비유(루카 15,21)을 보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삼아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방탕하였던 아들은 겸손되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위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애먹이던 그가 품팔이꾼, 종의 모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내 좋은 일에는 둘러리로 전락시키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참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우리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감이 곧 회개요, 그리고 그 회심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님의 사랑을 드립니다.
성 아프라테스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로 가지게 되는 열매: 사람들과 섞이는 게 힘들다면?>
‘회개’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종종 단순하게 죄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개는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세상과의 관계를 깊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에 대해 말씀하시며 포도밭에 심어진 무화과나무 한 그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열매가 있어야 다른 포도나무들과 섞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거름’을 한 해 더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름으로 우리 안에 사람들과 섞이게 만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체코 단편영화 ‘다리’(Most)의 줄거리입니다.
영화의 무대는 체코의 한적한 강가 주변입니다.
주인공인 아버지는 강 위로 지나는 기차가 안전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는 교량 관리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아내와 헤어져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고,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어 장치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언제 다리를 들어올려야 하고 언제 내려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둘은 함께 점심도 먹고, 때로는 관리실 밖으로 나가 강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시각, 기차 안에는 여러 승객이 타고 있는데, 그중에는 마약에 중독된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직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지만, 삶에 지쳐 보이고 눈빛이 불안정합니다.
인생에 낙이 없는 듯,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없습니다.
그녀가 탄 기차는 빨간 불 신호를 무시하고 배가 통과하게 하려고 들어올린 다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런 상태라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을 보고 있고, 이에 아들은 수동으로 다리를 내리려 다리로 올라갑니다.
그 순간, 관리실 창밖을 내다보던 아버지는 아들이 다리 하부 기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아들이 실수로 발을 헛디뎌 기어 장치 틈새에 끼인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만약 지금 레버를 내려 다리를 닫는다면 기차는 구출될 것이지만, 아들은 기어에 깔려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올린 채 둔다면, 기차는 강으로 추락해 승객 전원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치열한 번뇌 속에서 아버지는 레버를 잡고 손을 떨며 주저합니다.
하지만 결국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레버를 힘껏 내리며 다리를 닫습니다.
굉음과 함께 기어 장치가 돌아가며 다리가 내려오는 순간, 아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창을 통해 아들이 끼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집니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떨구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희생 속에 다리가 정상적으로 내려지고, 기차는 안전하게 지나가 버립니다.
아버지는 관리실 창문을 붙잡고 창백한 얼굴로 기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된 사실도, 열차가 위험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웃고 떠들며 일상으로 향해 갑니다.
누군가는 신문을 보고 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칩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비통한 얼굴과 절규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일어났다는 예감에, 그녀는 순간 두려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기차는 이미 속도를 내어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아버지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집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화면에는 활기찬 도심의 거리나 기차역 풍경이 지나가고, 그동안 세월이 어느 정도 흘렀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큰 상실감에 잠겨 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려 애씁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죄책감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타인을 살리기 위해 치른 희생이라는 사실이 그를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한편,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젊은 여인이 아버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날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이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녀는 말끔한 옷차림에 밝은 얼굴로 서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는 아기가 안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그녀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녀도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이내 따뜻하고 감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미소를 보냅니다.
그녀가 더는 마약을 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평온한 모습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려는 듯한 태도가 아버지 눈에 들어옵니다.
화면 너머로 알게 되듯이, 이 여성은 그날 기차가 강 위를 지날 때, 누군가 자신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을 어렴풋이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불만에 찬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그 누군가의 희생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아들을 잃었으나, 그 희생으로 인해 어떤 이는 삶을 되찾고 관계의 확장으로 나아갔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긴 시간 그를 짓눌렀던 슬픔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자신이 베푼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사람과 섞이지 못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교만은 무엇에 의해 사라집니까?
바로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였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탑은 교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파견된 그리스도의 교만이 무너진 순종으로 우리 안의 교만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거름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우리 교만이 죽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교만이 죽어 눈물로 빠져나옴을 경험했습니다.
이때 세상에서 내가 가장 큰 죄인으로 느껴졌고 비로소 신학생들과 섞이기 시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럼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저에게는 당신께 붙어있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위 이야기에서 마약을 하던 여자는 자기가 하던 잘못에서 돌아섰습니다.
주님의 희생에 자기 피를 섞은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의 희생에 내 피를 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모반이 지워지도록 손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더 슬프게 울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녀는 이렇게 결심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다시는 얼굴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제 모습 때문에 기뻐서 눈물을 흘리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림, 곧 그분의 제물에 나의 피를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일조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해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제가 바치는 빵과 포도주에 우리 피가 섞여야 하는데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느님께 먼저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이 무언가를 나에게 해 주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이 겸손과 감사, 희생의 열매가 없다면 하느님 나라 포도밭에 머무는 사람들과 섞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잘려져 불 속에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고>
예수님 시대 통치자들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픈 지역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변방 중의 변방이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비교가 될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식민 통치나 허수아비 헤로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폭동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었으니, 눈엣가시 같은 지방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갈릴래아 대학살 사건도 그 지방 사람들이 폭동을 음모했다는 정보가 빌라도의 귀에 입수되어 초래된 사건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대학살 사건 때문에 갈릴래아 지방의 분위기는 흉흉했었는데, 하필 그즈음에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는 높은 탑이 무너져 18명이나 되는 사람이 압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 사건이나 실로암 탑 붕괴로 인한 압살 사건에 대해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노 내지는 책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부족함으로 인해 저질러진 인재를 하느님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엄중히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자주 직면하게 되는 불운은 하느님의 책벌이라기보다는 경고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더불어 갑작스레 닥친 날벼락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악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남았다고 안심하지 마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5)
불완전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불행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라는 하느님 메시지로 여겨야겠습니다.
시련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지금 현재 내 삶이 크게 불행하지 않고, 크게 요동치지 않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는 조만간 큰코 다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불행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우리의 죽음도, 인류 전체를 향한 종말도 그렇게 번개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노력입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바라보고, 어쩔 수 없는 죄투성이 인간임을 주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하며, 주님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수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틈만 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은총에 호소함을 통해 은총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루카 13,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1)
불의의 사건과 사고로 사람들이 죽은 일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세 가지 가르침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그 사건과 사고는 ‘하느님의 벌’이 아니다.
그런 일은 인간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입니다.
어떤 사고나 재난을 ‘천벌’이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끔 예외적으로 인간 세상에 직접 개입하실 때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무차별하게 천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2)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3)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갑자기 닥치는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심판의 날과 시간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르 13,32-33)
2)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마르 11,12-14)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하신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위선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3)
그런데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있어서, 열매를 맺는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저주를 하는 것은 나무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 자체를 하나의 가르침으로 생각하면, 하느님의 부르심이 내리는 ‘때’는 인간이 정하는 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곧바로 이승을 떠나야 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또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조금만 연기해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4)
8절의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라는 말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설명에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베드 3,8-9)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2베드 3,13-15ㄱ)
‘모든 사람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날과 시간이 곧 닥칠 듯, 닥칠 듯, 하면서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알려 주시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어떻든 회개를 미루다가는 그날 후회만 하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만남, 광야, 회개>
요즘 다시 묻게되는 질문입니다.
정확히 33년 전 1992년 1월 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 미사 때 한 강론 제목,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입니다.
많은 이들이 길을, 진리를, 희망을, 빛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너무나들 과격하고 극단적 분열에 대립의 골이 너무 깊습니다.
국내외 세계적 현상입니다만, 강대국 사이에 있는 우리 한국은 더 합니다.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에 이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를 자주 되뇌이곤 합니다.
좌우의 극단적 대립이 해방 80년을 맞이하는데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역사입니다.
이런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반복되는 힘들고 어둔 상황 중에도 가톨릭교회의 사순시기가 큰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이 참 희망이자 참 길이요 참 빛임을 확인하고 더욱 기도와 회개의 삶에 박차를 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깨어 화해와 평화, 일치를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풍전등화, 절체절명의 나라 상황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의 모세가 깨우쳐 주는 가르침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희망이자 빛이신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만납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새 힘을 받고 살고자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만남 중에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에서 모세는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소명을 받으며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받습니다.
모세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시자 깨어 있던 모세는 “예 여기 있습니다.” 화답합니다.
그대로 미사중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실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네가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발을 벗어라.”
어디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땅이고, 이런 신발을 벗은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이어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받고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양떼를 치던 모세에게 삶의 목표와 방향이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구원해 내는 역사에로의 투신이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저하는 모세에게 조상들의 하느님이자 “나는 있는 나다”하고 대답하며 자신을 계시하신 주님은 한마디로 모세의 말문을 막으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이와 일치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 늘 마음에 담고 사순시기 지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길이자 희망이자 빛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의 인도따라 살아갈 때 방황하지 않습니다.
둘째, 광야 인생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배우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 광야 인생 여정입니다.
혼자가 아닌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는 광야 여정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 말씀이 광야 여정중인 우리에게는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모두 구름과 바다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고,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바로 우리 광야 여정의 예형을 보여주는 이집트 탈출 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영적으로 부단히 반복되는 우리의 인생 광야 여정입니다.
새 모세 예수님의 인도하에 세례와 이 거룩한 성찬례의 은총으로 주님과 함께 광야 여정을 무사히 통과하는 우리들입니다.
광야 인생 여정 통과에 성찬례 미사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광야 여정중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일은 둘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중 어떤 이들이 투덜거렸던 것처럼 여러분도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의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섰다하면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새삼 광야 인생 여정 중 투덜거리는 불평이 아닌 감사하는 일이, 자만이 아닌 조심스런 깨어 있는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감사와 겸손은 광야 인생 여정 통과에 결정적인 덕목입니다.
셋째, 회개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광야 인생 여정 중 살아갈수록 남는 것은 기도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사순시기야말로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일상화, 생활화,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회개의 일상화를 위해 수도원의 일과표도 공동전례기도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잘 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며 잘 살아보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빌라도에 의해 변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들과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 거푸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회개하라 주어진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잘 살고 못 살고는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예외없이 하느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회개하라고, 기도하라고, 사랑하라고, 겸손하라고, 찬미하라고, 감사하라고 연장되는, 하루하루 날마다 선물로 주어지는 날들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바로 이런 진리를 보여줍니다.
흡사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포도밭 재배인은 예수님, 무화과나무는 우리 같습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자는 주인인 하느님께 애원하는 포도밭재배인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시오.”
언제 주님이 불러갈지 모르는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삽니다.
예수님과 긴밀한 협력하에, 부단한 기도와 회개를 통해, 겸손의 열매, 사랑의 열매, 감사의 열매, 찬미의 열매를, 즉 구원의 열매를 맺으며 한 번 잘 살아보라고, 유예되는 인생입니다.
사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내 삶의 무화과나무가 잘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잘 가꾸고 돌보는 일보다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광야여정중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참 좋은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잘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 ‘공진화’라는 주제를 읽었습니다.
공진화란 생태계에서 여러 생명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생태계에서는 벌과 꽃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함께 발전합니다.
기업도 생태계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기업은 서로 협력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서로 발전하는 모델을 만들고 있습니다.
삼성은 텔레비전의 디스플레이를 엘지의 제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애플과 앱 개발자들이 협력하며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세상의 공진화와 신앙의 공진화가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의 공진화는 ‘적자생존’, 즉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만, 신앙의 공진화는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었고, 광야를 지나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다져 나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삶이 힘들 때면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떠올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결국 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였고, 모세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구리 뱀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신앙이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공진화는 단순한 적응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끌었다면, 예수님은 사랑과 은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고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에게 회개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특히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살던 아들이 결국 깨닫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쁨으로 그를 맞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도 사랑하시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했던 죄인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공진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는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신앙을 키워 갔듯이, 우리 신앙도 회개를 통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신앙의 공진화를 이뤄 나갈 것인가?
우리 자신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이 약해지고, 세상에 휩쓸려 하느님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시대에 적응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변화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단순히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실천할 때, 그것이 곧 신앙의 공진화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공진화는 적자생존을 따르지만, 신앙의 공진화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곧 ‘회개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회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미뤄서는 안 되고, 지금 당장 들어서야 합니다>
2023년 1월 16일 자로 발령받은 저는 갑곶성지를 떠나 지금의 성김대건성당으로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외출을 나갔다가 성당에 들어오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성당으로 들어오는 도로를 못 찾아서 헤맬 때가 많았고, 걸어서 물건을 사러 근처 가게에 갔다가 성당 방향이 아닌 정반대로 간 적도 있었습니다.
건물이나 길이 다 비슷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길눈이 어둡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길치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길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길이 헷갈리지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이 다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현재 위치를 잘 몰라도 주위의 풍경, 개략적인 지형도를 알고 있기에 손쉽게 성당을 찾아가게 됩니다.
주님께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그 길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길을 알기 위해서는 주변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위를 보고 많이 알아가야 주님께 가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와 묵상을 게을리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랑하며 살아가야 주님께 가는 길을 훤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알지 못한다고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불평불만만을 반복하면서, 주님께 가는 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가는 길은 낯설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그 길을 가려는 우리의 사랑 담긴 노력으로 훤하게 알 수 있게 되면서, 그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시던 시대에는 인간의 죽음을 삶의 결과로 보고 있었습니다(지금도 비슷합니다).
만약 불행하게 죽으면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이고, 편안하게 죽으면 선행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 것을, 또 실로암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을 죄의 결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죄의 결과로 죽은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과 책임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지금 이 순간 회개가 필요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죽음을 통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회개하면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그 길에 들어서게 되고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기다림이 영원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미뤄서는 안 되고, 지금 당장 들어서야 합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해서 영원한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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