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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國 家 中 興 會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호
일제침략과 남북분단속의 애국과 우정 비화
-손원태와 김일성의 휴먼드라마를 중심으로-
1. 손원태 병리학 박사의 아버지 손정도 목사의 일생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고 손정도 목사가 평소 강조한 설교 말씀의 일부이다. 그러면 먼저 고 손정도(孫貞道, 1872년~ 1931년) 목사의 생애부터 간단히 살펴본다. 그는 감리교 목사였고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으로 활동하였다. 큰 아들은 훗날 대한민국 해군 창군 주역이자 해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손원일 제독이다. 윤치호 일가와는 사돈으로 윤치호의 이복 동생 윤치창이 그의 맏사위였다.
1872년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손형준(孫亨俊)과 오신도(吳信道)의 장남으로 유교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손정도의 아버지 손형준은 전통적인 유림인사였으며 강서 지방에서는 명성이 높은 부농이기도 했다.
유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88년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관리 지망생이었다. 1895년 23세에 중매로 고향 이웃 아저씨인 박용(朴鏞)의 첫째 딸 박신일(朴信一)과 결혼하였다. 박신일에게서 장녀 진실(眞實), 차녀 성실(誠實), 장남 원일(元一), 차남 원태(元泰), 삼녀 인실(仁實)이 태어났다.
1902년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이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이었다. 그 날 상투 틀고 갓을 쓴 손정도는 조 아무개 목사로부터 신학문, 서구문화, 기독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기독교로의 개종을 결심한 그는 조 목사에게 부탁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 강서군으로 귀향하였다. 유교가정에서 태어난 손정도는 집안 대대로 모셔온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숴 버렸다.
사당을 철거한 이 일로 그는 친족들에 의해 패륜으로 낙인찍히고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어머니 오신도가 새벽에 그를 깨워 잠옷 바람으로 빼돌려 야간도주를 하게 되었다. 손정도는 고향에서 도주하던 날 밤 하늘에서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아내 박신일을 대동하고 조 목사를 찾아갔고, 조목사를 통해 평양주재 개신교선교사인 문요한(John Z. Moore:1874-1936)을 소개받아 면담하였다.
문요한과의 상담 후 문요한은 그를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채용하고, 동료 선교사들에게 추천하여 숭실중학교에 추천,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손정도는 숭실중학교 5회로 입학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동기로 조만식, 선우혁 등을 만났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 중학교 선배인 김형직(김일성의 생부)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1908년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관리 지망생의 길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숭실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09년 진남포 신흥리교회의 전도사로 부임, 사역을 하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감리교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09년미국 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내외국선교회”를 창립하는데 가담고 중국선교를 시작하려 할 때 선교사를 지원했다. 1910년 만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1910년정동교회에서 개최된 연회에 참석, 청나라에 파견될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어 연수차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베이징 체류 중 조성환(曺成煥)을 만났는데 그는 안창호, 전덕기, 김구, 이동녕, 양기탁, 이승만 등이 조직한 신민회의 핵심 인원이었다. 조성환을 통해 안창호를 소개 받았고 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와는 깊이 친해져서 호형호제 하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안창호와 가까워지면서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 입수한 국내의 소식을 안창호에게 전하고, 국내에 있는 인사들에게는 안창호, 조성환 등과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수행하고 있는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는 소식통 역할을 하였다. 중국 체류 중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였다.
1911년 연회참석 차 귀국하여, 그해 4월 "기독교인의 자신력(自信力)"이라는 글을 '그리스도인 회보'에 투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기독교인들은 남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력으로 행복을 향유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도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각 성도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발달해야 한다'라면서 기독교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자력,자주를 역설했다.
1911년 손정도는 한국에서 집사직을 받았다. 그리고 북경으로 가서 중국인과 조선족들을 위한 선교를 시작했다. 1912년3월 귀국,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국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선교활동을 보고하자 다시 “청국 봉천 북방 할빈 남방” 선교사로 재파송되었다. 1912년 다시 만주하얼빈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 선교하여 200명의 신자를 얻고 자력으로 모금과 강연, 설교,노동 등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이층예배당을 헌당하고, 한국인들을 위한 공동묘지까지 마련하였다. 그러나 해외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로 그는 조선총독부의 눈에 들게 되었다.
1912년하얼빈(哈爾濱)에서 조선총독부총독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에도 그는 성서를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여 순사, 형사를 비롯하여 유배지 근처의 주민, 수십리 밖의 진도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선교활동을 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 1914년 유배가 풀려 석방되었다.
1914년6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동대문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음으로써 감리교 성직자가 되었다. 이후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1년간 목회하는 동안 손정도 목사의 설교와 간증, 믿음의 실천에 감동받은 신도들이 몰려왔고 교회 건물이 꽉 차자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신자를 끌어모았다.
1915년감리교로부터 현순목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로 발령되었으며, 남반 여반을 갈라놓았던 휘장도 제거했다. ‘손정도식 설교’, ‘손정도식 목회’는 여기서도 효력을 발휘하여 1916년 교세는 국내 최대의 교회로 발전되었다.
1919년 초 한국인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만세운동을 벌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오자 그는 33인 민족대표에 서명하기로 했다가 파리평화회의에서 의친왕이강공을 참여시키는 일을 돕기 위해 평양에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했다. 그 후 그에게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조달책 역할과 조직망의 가동을 책임지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손정도는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홀로 베이징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 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출국, 중국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4월 2일 임시정부 준비에 참여하였다.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으로부터 정부수립 요청을 받고 현순, 안창호 등이 임시정부 조직을 추진하였고 손정도는 뒤에서 실무조직에 착수하였다. 임시정부의 살림꾼이었으나 신변의 노출을 우려한 그는 각종위원회에 그 이름없이 참여하거나 가명, 익명으로 참여하였다. 이해 4월 10·11일 양일간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의장 이동녕이 이틀 만에 사퇴하자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이무렵 서울에서 공포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했다. 1919년9월 통합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했고, 통합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의정원 기초위원이 되었다. 1920년 1월 김립(金立)·김철(金徹)·김구(金九)·윤현진(尹顯振)·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1921년3월 3일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조상섭(趙尙燮)·송병조(宋秉祚)·장덕로(張德櫓)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한편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기를 거부하자 서신을 보내 그를 설득하여, 이승만을 상하이로 오게 하였다.
1921년 8월 임정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8월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를 지냈다. 동시에 휴일에도 교회활동과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여 상해 한인교회 상의회(常義會) 위원, 치리 회원, 미션학원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홍진·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에 지린(吉林)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24년 9월 만주 선교사로 파송 받아 북만주 길림성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들과 연락,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될 무렵, 안창호의 설득에 감화되어 흥사단에 입단, 흥사단원이 되어 안창호와 의논하여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액목현 지역에다 황해도의 재산을 처리하며 동생 손경도의 명의로 경박호 일대에 50향의 땅을 사서 농민호조사를 설립했다. 이는 국내에서 쫓겨나거나 생계를 찾아 떠도는 한민족의 경제자립과 독립운동기지의 견실화 내지는 이상촌 건설을 위한 다목적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의 밀정에 의해 체포, 구금 등 고난의 길을 걸었으나 선교사업을 이유로 풀려났고 액목현 교회, 그 주변 대분, 대강자 교회, 더 나아가 하바로브스키 선교까지 두루 다니며 돌보았다. 이 무렵에 김일성과 만나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1927년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과로와 격무, 체력저하, 스트레스, 고문후유증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1년 1월 해석은 한 동포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병원에 입원했다가 제대로 가료도 받지 못하고 별세했다. 별세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2. 손원태 박사와 김일성 주석과의 특별한 인간관계
고 김일성 주석이 만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낼 때의 형제처럼 지낸 재미 원로의사(병리학 박사) 손원태가 2004 년 9월 28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시 자택에서 숙환으로 향년 90세에 별세했다. 북한에서는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즉각 미국의 손 박사 유가족에게 조전과 화환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당일 북한 중앙방송과 양방송이 전했다. 미국에서도 오마하시 호프 프레스피테리안 교회에서 손 박사 장례 예배를 가질 예정이라고 그 당시 `손정도 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 전 총리)가 발표하였었다. 손 목사는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냈고, 대한적십자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가까웠던 손정도 목사는 임시정부에 실망하고 지린성 룽징으로 가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김 주석은 이 교회에 어머니를 따라 다녔으며 손 목사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손 목사의 자녀들과 김 주석이 친형제처럼 지낸 특별한 인연은 한국에서는 금서로 못 박혀 있지만,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 「손정도 목사」편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김일성 회고록에서 김주석은 지린성에서 일제에 의해 투옥됐다가 "감옥을 나와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손정도 목사의 집이었다. 일곱달 동안 꾸준히 옥바라지를 해 온 손정도 일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면서 "아버지처럼 따랐던" 손씨 일가와 친교를 회상했다.
손 박사는 1991년 북한 해외동포영접부의 초청으로 부인 이유신씨와 함께 처음으로 방북해 김 주석으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 주석의 생전 약속에 따라 1994년 8월 11일 상중에도 불구하고 손 박사를 평양으로 불러 고위 당ㆍ정 간부들을 대거 참석시킨 가운데 80회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줬으며, 손 박사의 기거를 위해 호화판 시설(철봉초대소)을 지어주기도 했다. 당시 손 박사는 "상중이라 안된다"면서 극구 만류를 했으나 김 국방위원장은 "아버지의 뜻"이라며 생일잔치를 강행토록 해 손 씨 일가에 대한 김일성 부자의 배려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했었다. 손 박사는 영문으로 `김일성 주석과 조선의 투쟁'(Kim Il Sung and Korea's Struggle)을 저술했으며, 그의 김일성 주석과의 인간관계는 형수인 홍은혜 권사가 보관한 a-4용지 140매 분량의 회고록에 상술되어 있다. 손원일 제독과 손원태 박사 내외분은 이미 오래 전에 자고하였지만, 손제독의 부인은 현재 96세로서 아직 건강하며, 지난 10월 12일엔 해군회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무궁화와 사꾸라”란 일제시 마산여고 동창생인 일본 친구와의 각별한 우정을 되 색이는 내용의 단행본을 내놓고서 직접 그 친구의 저음하여 불러 준 찬송가(하늘가는 밝은 길)를 피아노로 연주함으로서 갈채를 받아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북한에서는 손정도 목사를 김일성의 은인이자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존경하고 있다. 1926년무렵 만주에서 김일성 주석을 손정도 목사가 친아들처럼 돌보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김일성 수령의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 김일성도 "손정도 목사님은 비록 나와 사상은 달랐지만, 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2003년 10월 손정도 목사 기념 남북학술토론회를 남한의 신학자들과 같이 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정원 원장으로 활동한 손정도 목사의 업적을 기념한 바도 있다.
그와 김일성과의 만남은 김일성의 회고록 7권이 1992년에 출판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회고록 제2권 제1장은 ‘손정도 목사’란 제목 아래 그 관계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해석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부친과 사별 후 김일성이 길림으로 왔을 때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처럼 지냈는데, 큰 아들 손월은 김일성보다 두 살 위였고, 특히 둘째 아들인 손원태와 김일성보다 2살 아래였으나 중학시절엔 친형제처럼 다정하였다.
김일성(본명 김성주)이 길림에서 청소년 조직인 조선인유길학우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끌면서 혁명 세력화하자 중국공안당국이 그를 체포하여 7달 동안 감옥살이를 시킨 사실과도 연계된다. 이때 해석(손정도 목사의 호)은 김일성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뇌물까지 주어 그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일본군경의 위협이 다가올 것이니 피하라고 권고하여 파신함으로서 재판에 회부되었으면 10년형을 살게 될 것을 면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해석을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고 평가하였다. 손원태는 김일성의 집권 시인 1991년 5월 초청을 받아 네브라스키 주 오마하에서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났고, 북조선의 청와대로 불리는 철봉리 특각을 선물로 받아 여생을 평양에서 보내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김일성의 약속대로 손원태의 80회 생일은 대상(김일성 사망) 중에서도 평양에서 치러졌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에 예술영화 <조선의 별> 1,2부에서 손정도 목사를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손정도 목사에 대해 존경을 보이기도 하였다.
기구한 운명의 작란이라, 손정도 목사의 아버지와 큰 아들(원일)은 서울 현충원에 묻혀 있고, 둘째 아들(원태)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이 기막힌 사연의 줄거리가 다큐멘터리로 CBS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CBS TV가 제작한 ‘창사 55주년 특집다큐’ <세 개의 무덤, 역사가 나눈 三父子의 길>이 담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손정도 목사(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원장 역임)와 큰 아들 손원일 제독(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이자 해군 초대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내 '해군의 아버지'로 불림), 그리고 둘째 아들 손원태 박사(재미 의사)였었다. 이들 제작진이 주목한 손정도 목사는 상해임시정부의 입법부 역할을 맡았던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내고, 1920년대 만주 길림으로 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활동을 지원하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동시에 한인동포들의 삶의 터전이 될 ‘이상촌’ 건설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상촌 건설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속에서 보내던 중 병세가 악화돼 60세의 나이에 가족도 없는 외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손정도 목사의 큰 아들인 손원일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의 꿈을 다지며 독일 유학길을 떠났다. 훗날 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초대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여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둘째 아들 손원태는 제4성림중학교에 다닐 때 육문중학교서 공부하던 김성주를 형처럼 따랐고 김성주는 손원태 집을 자기 집처럼 더나들었다. 결국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노년에 돌연 평양의 김 주석 초청을 받아 옛 추억을 되새기며 미국과 한국을 왕래하면서 삶을 마쳤다. 조선의 청와대라 할만컴 초호화판 저택까지 마련하여 손원태 부부의 노후를 편히 보내도록 최선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손정도의 묘와 평양의 애국열사로 안장된 그의 아들 손원태의 묘. “신앙인으로서 나라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했고, 그 과정에서 우연하게 북한의 최고지도자의 ‘생명의 은인’이 된 손정도 목사는 우리에게 남과 북의 분단과 갈등을 풀어가는 '사랑의 치유자'가 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이 이 다큐멘터리의 주제다. 손정도 목사의 나라사랑과 하나님사랑은 둘로 갈라진 남과 북을 하나로 되게 하는 씨앗이 될 거라는 기대감이다.
최근 김정은이 핵과 경제의 병진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연변핵시설을 재가동하면서 개성공단을 또한 가동시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하다가 욕심이 과하여 금강산관광을 병행하지 않으면 이산가족 상봉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저의로 추석을 계기로 한 많은 이산자족 상봉의 꿈을 짓밟고 있는 현실을 되새겨 보건데, 김정은이 자기 할애비가 어릴 때 기독교신자로서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까지 했던 자였으며, 또한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했던, 그 역사적 사실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남북갈등과 불화도 관용과 사랑으로 풀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해본다. 실제로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을 하라’는 유훈을 남겼고, 그가 사망한 지 70여년이 지난 2003년에 평양에서 남과 북의 학자들이 그의 이름 아래 모여 손정도 목사의 애국 업적을 기렸던 바, 손정도 목사의 우국충정을 상기하서 김정은이 회개하고 대오각성하기를 촉구한다. 이와 관련하여 손정도 목사의 다음과 같은 설교가 우리의 가슴을 뭉쿨하게 한다.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지방색을 가르는 파당싸움을 말아야 한다. 좁은 나라 한 핏줄의 겨레가 무슨 남도니 북도니, 호남이니, 영남이니 하며 네 갈래 열 갈래로 갈라져 싸우는가? 이는 나라를 잃고도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이다"
1991년 5월 재미교포의사 손원태 박사는 김일성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십대를 형 아우로 지냈던 두 사람은 남북 분단으로 헤어졌다가 60년만에 백발이 되어 상봉하였다. 두 사람은 반세기가 넘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안부조차 전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들은 친형제같이 지냈던 중국 길림 시절을 떠올리며 어느덧 80이 되어버린 인생무상의 공허함을 달랬다고 한다.
지난날 모태신앙이었던 유관순은 이화학당시절 손정도 목사가 담임하던 정동교회를 2년간 다니면서,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유관순이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는 손정도 목사가 뿌린 말씀의 씨앗이 자란 열매이다. 삼일절만 되면 우리들의 가슴에 떠오르는 유관순 열사의 간절한 나라 사랑의 기도가 그녀의 기념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은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손정도 목사의 노력으로 김일성은 중국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1931년 중국 길림에서 49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손정도 목사를 이렇게 회상한다.
"생전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 속에 에워싸여 애국의 혼으로 그들을 열심히 교화시키던 목사일진대 고인과의 작별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국부가 죽어도 마음대로 울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손목사의 죽음을 일본 제국주의의 모살로 여기고 있다.
손정도 목사는 대한적십자와 대한교육회를 창설하였는데, 그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정도 목사는 최근까지 한국 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일성은 자신이 죽던 1994년 '손정도 목사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라'는 유훈을 남겼고, 현재까지 그 관심이 지속되고 있다. 2001년 서영훈 전국무총리는 손정도 목사 후손들의 요청으로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2003년 10월 평양에서는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 감리교신학대학과 독립기념관 학자 등 남측 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함께 참여한 손정도 목사의 독립운동과 사상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2007년 4월 한국 국가보훈처는 손정도 목사를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으며, 국회는 그에 대한 기념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평양방문 때 김일성은 그에게 기도를 요청했고, 기도가 끝나자 '아멘'으로 받았다고 한다. 손정도 목사가 청년 김일성에게 나눠준 사랑이 빌리 그래함 목사를 통해, 대한민국에서는 만고역적으로 악 중악으로 지목하고 있는 김일성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청소년 시절 교회주일학교 선생 당시의 영성이 아직 잔존해 있어 빌리그래함의 기도에 응답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사마리아 땅이 되어버린 북한에 다시 소망을 품게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손정도 목사는 우리에게 남과 북의 분단과 갈등을 풀어 가는 '사랑의 치유자'로 다시 자리매김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나라사랑과 하나님사랑은 둘로 갈라진 남과 북을 하나로 되게 하는 씨앗이 될 것이다. 손정도 목사가 보여준 사랑은 큰아들 손원일이 묻힌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2004년에 사망한 작은아들 손원태 박사가 묻힌 평양 애국열사릉(국립묘지)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을 뛰어 넘어 인류애의 서광이 비치기를 소망한다.
김일성의 어렸을 때 절친한 친구였던 손원태 박사는 오마하(네브카 주)에서 개업하고 있던 저명한 의사였는데, 나이 70이 돼서야 비로소 김일성에게 처음으로 이하와 같은 감성적인 인간관계가 가득한 구구절절의 사연을 편지에 쓰서 인편에 보냄에 즉각 김일성으로부터의 회신이 초대장과 함께 당도한 것이 1991년 5월이었다. 이로서 두 사람의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되었다.
김일성 주석님께
중아학교 시절 김일성주석님 그리고 길림소년회 회원들과 헤어진지도 어언간 60여년이 흘러갔습니다. 오랜 세월이지만 저는 김주석님과 회원동무들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1923년 평양태생인 이유신과 결혼하여 지금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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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적으로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을 벌리시던 그 당시 김주석님과 여러 분들을 생가하면 눈물이 흐르고 이 펴지를 쓰면서도 저는 눈물을 금할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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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아니면 1939년에 상해대공보 영자신문 한면에 “김일성과 항일투재”이라는 제목으로 수천명의 독립군사를 거느리고 항일투쟁을 용감하게 벌리고 계신 김주석님을 찬양하는 기사가 크게 실렸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얼마나 감탄하고 감사를 올렸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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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손원태 드림
손원태 박사는 옛 친구가 그리워 그 멀고 험한 길을 떠나 마침내 궁궐 같은 김일성의 집무실에 부인을 포함한 일행 6명과 함께 미국에서 중국 경유 항공편으로 당도했다. 처음에는 김일성이 손원태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손원태의 손을 꽉 잡으며, “어데 가 있다 이제 왔소” 하면서 머뭇거리다가는 “야, 너 원태 아니가."하며 그렇게 반가워 하더라고 한다. 한참 옛날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김일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원태야, 좀 자주 오라. 우리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라고 하였다. 손박사는 이렇게 당시 대화를 회상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것이 김일성이 던진 그의 평생에 가장 의미심장한, 철학적인 한 마디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원태야, 좀 자주 오라. 우리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오래 살겠느냐." 그 두 사람이 다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된다. 그런데 김일성이 손 박사에게 그 때 선물로 준 시계가 하나 있었다. 그의 싸인이 적혀있는 롤렉스 금시계였는데, 손 박사가 그걸 가지고 오마하의 한 시계포에 가서 값을 물었더니 그 때 돈 5만 달러라고 하더란다. 그 시계가 지금은 누구 손에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두 사람은 다 시간이 필요 없는 저 세상으로 갔으나 그 시계는 여전히 어디에선가 뛰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계보다 시간이 소중한 것임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사실이다. 롤렉스 금시계를 차고도 통일의 그 날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일까. 오히려 스위스 밀리터리의 50달러짜리를 차고, 통일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한국인으로서는 백 배, 천 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손원태 박사는 말한 바 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해군, 해병과 군종목사 제도는 바로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태 박사의 친형인 손원일 제독(1909∼1980년)가 1948년 초대 해군참모총 당시 해군, 해병대와 대한민국 군종(군목)제도를 창설했음은 손정도 목사와 그 아들 손원일 제독의 대를 이은 나라사랑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손 목사는 나라를 빼앗긴 뒤 "바다에 미래가 있다. 비록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에 영향을 받아 손 제독은 중국 중앙대에서 해양학을 전공하고 일찍부터 외국을 항해하는 배를 탓으며 아버지의 독립 운동을 돕다 만주와 조국땅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과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 되자 바다를 지키는 해군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손 제독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빚어진 6.25전쟁 당일 해군 창설자들이 봉급에서 거출하고 장교부인들이 삯바느질까지 해서 모은 돈으로 최초 전투함으로 미국에서 사온 고물선을 수리해 백두산호로 명명 진수시켜던바, 이 배가 해전에서 큰 정공을 새웠던 것이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인 오진우가 지휘한 인민군 특수부대 1개 중대를 실은 공작선이 부산 상륙을 위해 남하 중 울산 앞바다에서 백두산호(당시 함장 최용남, 후일 해병대 소장 예편)에 의해 격침당함으로서 한국전 최초의 해상전과를 기록한 것은 물론이고 적의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한 제2전선형성 전략을 차단 봉쇄한 장본인 바로 손원일 제독이었다. 그 는 인천 상륙작전에 해병대를 이끌고 몸소 진두지휘했으며, 전후 복구기에는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국군의 날, 현충일 제정, 국립현충원 및 국방연구원(현 국방대학교) 창설 등 군현대화에 진력했다. 자랑스러운 이 같은 나라사랑 정신은 오늘날 용맹을 떨치는 멋진 해군, 해경, 해병 뿐 아니라 육군, 공군을 포함한 모든 대한민국 안보역군의 조국수호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3. 손원태 박사가 쓴 김일성에 대한 회상기의 맺는 말 소개
<이하는 손원태 박사가 생전에 남긴 회상기 초안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를 그대로 옮긴다. 손원태 박사의 김일성을 보는 시각은 우정과 감성의 이상주의적 차원의 발로인 바, 국제정치학적 접근의 현실주의 시각과는 상당한 편차가 있을 수 있다. 특히 그는 평양을 수시로 왕복하는 사이에 김일성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커져, 김일성 주석의 한생은 강대한 제국주의와 미제와의 대결이었다고 미국과 북한관계를 평가하기도했다. “10대의 나이에 손에 무장을 들고 일본제국주의에 선전포고를 한 주석은 20성상의 오랜 세월 풍찬노숙하며 피바다 불바다를 혜쳐 조국땅이 강국에 의해 두동강이 나고 미국과의 첨예한 대결양상이 반세기가 지났다”고 쓴 그의 글은 편중과 구성의 오류를 상당히 범하고 있다고 본다 >.
그러면 이하에서 손원태 박사가 쓴 회상록의 하일 라이트를 그대로 소개한다.
“한 생을 평범한 의사로 살아온 나 개인으로서는 세상에- 회상기를 남길만한 위인이 못된다고 해야 겠다. 한데도 나는 어려 사람으로부터 자서전을 쓰라는 권고를 받았다. 내가 처음 그런 권고를 접하ᅟᅵᆫ 것은 상해에서 대학공부를 하던 청년시절이었다. 어느 날 나는 기숙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망향의 설음에 눈물지으며 먼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한 방에 탁씨 성을 가진 중국 친구가 내 어깨를 붙안으며 뭘 생각하는가 하고 물었다. 감상에 젖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7살 때 도망치듯 조국을 떠나오던 일이며 독립운동자이며 목회자인 아버지의 의혹 많은 병사이후 부평초 같은 떠돌이 생활에 대해 토설했다.
중국친구는 망국민의 설움을 이해하면서 그 얘기 그대로 자서전적인 글을 써보라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나의 한 생은 우리 민족사의 가장 처절한 시기를 밟아오면서 인고의 세월의 목겨자, 체험자, 참여자로 되었다.
한 인간의 생활이자 민족의 생활이다. 민족의 생활이다. 나의 자서전도 망국수난사를 인식하는 데서 가치있는 서적으로 될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자서전을 쓰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인 그 세월을 회억한다는 것은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북조선을 방문하여 60여년만에 김일성주석과 상봉하고 미국으로 돌아 온 후였다고 본다. 어는 저녁에 아내와 함께 오마하의 지식층들이 자주 모이는 어느 다방에 갔었는데 안면있는 교포들이 나를 둘러싸고 북조선에 다녀온 소감을 물었다. 우리 옆에는 대학생 타입의 청년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북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호기심이 동해서 우리자리에 끼어들었다. “이분이 최근에 북한에 다녀온 손원태 선생님이셔요”하고 옆 친구가 그들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그러자 젊은이들은 눈이 똥그래졌다. 그네들은 남한에서 온 대학생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길림시절에 맺어진 김일성 주석과의 우정에 대하여, 만주에서 그 분의 장구한 무장투쟁에 대하여, 그리고 60여년이란 긴 세월을 뛰어 넘어 80고령에 다시 이어진 우리의 우정에 대하여 대략적인 것만 이야기 해 주었다. 젊은이들은 깜짝 놀래면서 그래요? 거짓이 아니겠지요? 우리는 조금도 모르고 있었는데요 라고 신기로워 하기도 하고 미심쩍어하기도 하였다.
자기 민족사를 반 토막밖에 모르고 자라난 젊은이들이었다. 어느 것이 참 역사이고 어느 것이 거짓 역사인지, 무엇이 애국이고 무엇이 매국인지 가려보지 못하는 세대가 내 땅에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겁게 압박하였다. 나에게 이렇게 절절히 권유하는 이들이 있었다. 손선생님은 꼭 자서전적인 글을 써야 합니다. 손선생님은 역사의 증인이고 김주석의 증인입니다. 손선생님이 돌아가시면 산 역사를 말할 수 있는 이가 더는 계십니다.
천운으로 나의 생애가 김일성 주석과 영연히 연결됨으로서 범상치 않은 역사의 중견자가 되었다. 김주석과 나의 연고는 소년시절의 벗으로서부터 적어도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뛰어넘어 80고령에 다시 이어젔지만, 옛날의 정의는 변함이 없었고 우정은 더 따습고 틀림없이 길림시절의 다정다감한 김성주소년 그대로였다. 세계적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평민으로 남아있는 김성주를 다시보게 된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무척 기쁘고 행복했었다. 내 인생말년에 불원천리 평양에 찾아간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언제인가 월스트리트 저널은 나의 평양 방문에 대해 쓰면서 친구 중 한 사람은 의사가 되고, 한 사람은 독재자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북조선과 김일성 주석을 너무나 모르는 이들이 하는 말이다. 내가 본 그 분은 독재자가 아니라 사랑과 덕으로 정치를 펴는 성인이었고, 한 나라 대 가정의 만가지 시름을 안고 계신 어버이었다. 주석계서 일찍이 소년시절에 어떻게 독립투쟁에 나섰는가를 나는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 그분께서 만주 광야에서 어떻게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려 광복을 안 아오셨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또 광복된 조국의 북반부에 주석께서 세우신 나라를 내 눈으로 보았다. 거기에는 진실한 애국이 있었고, 민족의 참역사가 생동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외롭고 고뇌에 찬 탕자의 긴 여행길에서 돌아와 고향집 아랫목에 주저앉은 듯 평양에 심신을 맡겨버렸다.
아버지 손목사가 남긴 유훈, 나 자신 지구의 한끝에서 다른 끝을 떠 돌면서 모질게 메고 온 자신의 십자가는 애국이었다. 참다운 애국의 실체가 있는 곳에서 나의 심혼이 안식처를 찾은 것은 다난한 내 인새의 응당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인하여 용공이나 연공의 지탄을 받는다 해도 꺼리길 것이 없다.
김일성 주석의 조국광복투쟁사를 떠나서 어찌 우리 민족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거짓 정치는 일시 사람들을 혼란시킬 수 있어도 거짓 역사는 조만간 씻기어 버릴 것이라 나는 믿는다. 나는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어야 할 자기의 사며8ㅇ감을 자각하였다. 정에 살고 의리에 사는 것이 사람의 본의일진대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라 하겠다. 이상 늙은 병리학자의 심증을 본데로 느낀대로 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