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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 5,1-15ㄷ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2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3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4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주군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아뢰었다.
5 그러자 아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낼 터이니, 가 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
7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8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12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 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30)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
(즈카 2,14))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유유히 걷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착각>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루카 4,27)
오늘 사순 3주 월요일은 주인공이 나아만과 하느님 둘입니다.
곧 치유 받는 나아만과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엘리사 예언자가 있습니다.
먼저 나아만을 주인공으로 오늘 우리 신앙을 반성하면 좋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우리와 비슷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다 차츰 진정한 신앙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치유해주시는 거라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설사 하느님이 치유해주시는 거라고 믿을지라도 인간 정성이 지극해야지만 치유해주신다고 믿습니다.
곧 나아만 자기의 정성과 엘리사의 정성 말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치유 받으려고 엘리사에게 올 때 뇌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고 군사들도 많이 대동하고 왔습니다.
하찮은 사람은 무시하더라도 자기처럼 대단한 사람은 치유해주고, 자기처럼 지극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꼭 치유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러는 만큼 엘리사도 지극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런 나아만에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고 가라며 시큰둥한 모습만 보입니다.
자기가 치유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치유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엘시사가 나와 직접 치유해주지 않으면서 요르단강물에 치유 받으라는 줄 또 착각하고 자기네 강물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이에 나아만의 부하들이 한번 믿어보라고 설득하여 씻었더니 병이 낫고, 그때 그는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지난주 수녀원 연피정 중에 한 수녀님이 당신의 주치의는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당신 주치의가 있지만 하느님이 주치의시라는 믿음을 고백한 것인데, 우리도 병원과 의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고쳐 주시는 거라고 믿어야겠지요.
다음은 복음의 주님을 주인공으로 보겠습니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유대인이 아니라 나아만만 고쳐 주셨음을 얘기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착각하지 말라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느님 자녀라고 착각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잘못을 자주 범합니다.
물론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기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자기만 하느님 자녀이고 하느님이 나만 사랑하신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착각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고 가르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똑같이 고쳐 주신다고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비위 상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비위 상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착각을 바로잡아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하라는 말처럼 주님께서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의 착각과 사랑 독점 욕심 때문에 비위 상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도 나아만이나 유대인들처럼 믿음의 착각이 있음을 알고, 교정도 받고 성장도 하라는 도전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첫발이 중요하다>
현대를 지식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 없었고,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갈 길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 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박병해 신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가르침 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를 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길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 속에 강력히 각인된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런 자부심을 지닌다는 것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택받지 못한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이민족들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 동물 중에서도 개로 취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순혈주의, 율법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평소 입고 다니던 복장부터 남달랐습니다.
화려하고 요란스러웠으며 치렁치렁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옷 여기저기 성구갑이라고 성경 말씀을 넣은 작은 상자를 달고 다녔는데, 그것을 마치 큰 자랑거리, 훈장처럼 여겼습니다.
성구갑은 내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에 정통한 사람인지 알아? 라고 외치는 표시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갑작스레 공식 석상에 섰던 한 장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었습니다.
그냥 편안한 복장으로 출연해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그가 입고 나온 군복 전면이 가관이었습니다.
그간 받은 훈장이란 훈장은 다 달고 나왔습니다.
그 무게가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꼴불견이었습니다.
그 옛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꼭 그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자부심 가득한 유다인들을 절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위선, 그들의 이중 플레이 앞에 참지 않으십니다.
거침없이 당신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가감 없이 쏟아놓으십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루카 4,27)
이 말씀 끝에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은 순식간에 들고 일어났습니다.
동물도 아닌데, 예수님을 슬슬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합세해서 그분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일종의 살인미수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살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실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용기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비참하고 야만적인 시국 앞에서, 거대한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창궐하는 이 순간, 또 다른 예언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고,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처절한 기 싸움이 하루빨리 종식되는, 그래서 화해와 일치, 기쁨과 평화의 날이 빨리 다가오길 큰 목소리로 간구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한 시민이고, 한 가족입니다>
1)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일’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은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만 받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인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면, 유대교로 개종해야 하고, 이스라엘로 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시자, 유대인들은 “너희는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들만 구원받는다.” 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 유대교의 법입니다(마르 14,64).
2)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지만, 유대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들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아들은 것은 제대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라는 말씀으로 그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3)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인류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시메온 예언자의 찬미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29-32)
따라서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마태 28,19),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애쓰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에페 2,14.16-19)
이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한 가족입니다.
5)
26절의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는 말씀은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맞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또 27절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는 말씀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엘리사 예언자에게 가서 치유의 은총을 간청했다는 뜻입니다.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특별히 더 편애하시는 분도 아니고, 누구를 차별대우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라고 권고합니다.(야고 4,8)
이 말은 하느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다가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고, 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항상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힘 - 천형天刑은 천복天福으로>
역시 믿음의 선택, 믿음의 훈련, 믿음의 습관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정성을 다한 공동전례기도 수행을 통해 믿음을 훈련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정주와 순명서원 역시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 역시 보고 배웁니다.
주님께서 감동, 감탄하신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어제와 그제 양일간 다양한 연령층의 네 부부가 면담성사를 봤고 따로 물었습니다.
“남편의 삶을 100점 만점에 몇점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내의 삶을 100점 만점에 몇점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지하게 그러나 미소지으며, 똑같은 질문을 남편과 아내되는 분에게도 했습니다.
네 분의 자매가 남편 점수를 90점을 줬고, 네 분 형제는 아내에게 90점, 95점, 99점, 100점을 줬고, 즉시 함께 불러 점수를 공개하니 얼마나 기뻐하는지 신뢰와 사랑이 가득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보면서 믿음과 사랑을 배웠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성장 역시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성장임을 깨달으니 서로 감사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는 ‘말씀의 성모영보 수녀회’ 창립자인 선종완 사제의 <선종완, 깊은 숲, 영란처럼 향기롭게>란 평전을 틈틈이 보면서 믿음을 배웠습니다.
제자였던 박찬용 신부의 선종완 스승 사제에 대한 회고담을 인용합니다.
“박학한 지식도 지혜도 모두 성화시키신 은사님, 시험답안지에 쓰라는 답을 못쓰고 엉터리 설교 답안을 써내면, ‘허허, 요즈음 신학생들은 교수한테 정답 대신 설교를 한단 말이야’하시면서도 좋은 점수를 주신 까닭에 사제가 지식으로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살기를 더 원하신 까닭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름에 선풍기 하나 없이 대야에 냉수를 떠놓고 발을 담그고 성서연구를 계속하시던 그분의 모습이, 또 언제나 변함없이 무릎을 꿇고 연구나 강의전 기도를 바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제자들 역시 학식과 더불어 보고 배운 스승의 믿음과 사랑이었음을 봅니다.
우리는 공동체 형제들로부터도 믿음과 사랑을 보고 배우지만 오늘 말씀에서도 복음의 예수님, 2열왕기 독서중 엘리사, 나아만으로부터 믿음을 배웁니다.
반면 편견과 질투에 눈이 먼 예수님 고향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믿음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질투 역시 믿음 부재를 반영합니다.
믿음이 부족할 때 숱한 오해와 착각이 따릅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하는 믿음의 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에 눈이 먼 고향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좌절감을 엿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어 믿음의 모범으로서 이방인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를, 또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예로 들면서 독자들의 믿음에 신선한 자극을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난 고향인들은 예수님을 고을밖으로 내몰고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유히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니 우리는 여기서도 예수님의 믿음을 보고 배웁니다.
두려움을 몰아내어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믿음의 힘, 믿음의 빛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 역시 겸손하고 지혜로운 믿음임을 봅니다.
우리를 참으로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두려움을 몰아내는 믿음입니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예언자 역시, 시리아의 장수 나아만의 방문에도 추호도 위축되거나 주눅된 모습없이 참 의연하고 당당하니 이 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엘리사는 품위를 지킴과 동시에 나아만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심부름꾼을 시켜 처방을 전달합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나아만은 화를 내어 돌아가려 하자 현명한 부하들의 충언에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니 쾌유의 기적입니다.
이에 감격한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앞에 서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믿음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나아만을 낫게 한 것은 요르단강물이 아니라 나아만의 믿음이었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십사 기도할 것이며 평소 믿음의 훈련에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여기서 생각하는 바 나아만의 나병입니다.
천형이라 칭하는 나병이 믿음으로 치유되었으니 천형天刑은 천복天福으로 변했고 그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믿음입니다.
나병이 없었다면 나아만의 믿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을 믿음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는다면 탄력좋은 믿음에 전화위복이 은혜가 뒤따를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중 디테일에 강해야 함도 배웁니다.
나아만의 치유에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보잘 것 없이 작은 소녀가 제공한 정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이를 받아들인 나아만 아내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 책임을 충실히 다함도 믿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의 인물들이 다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 옛 현자들의 지혜도 이와 일치합니다.
“높은 지위에 매달리며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말라.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일도 빛나고 사람도 빛난다.”
<다산>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행했을 뿐, 그밖의 일은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이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동몽훈>
부지런히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지족知足의 삶을 사는 이들을 통해 빛나는 믿음입니다.
눈만 열리면 우리 가까이에서도 이런 믿음의 모범을 보고 배웁니다.
정말 보고 배워야 할 것은 신망애信望愛,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요, 이런 삶의 모범이 될 때, 이보다 이웃에게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이렇게 형제들의 신망애 삶을 보고 배우라고 공동체 생활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편견과 시기심은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생명의 탄생은 38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나타난 생명은 죽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생명이 단성생식, 다시 말하면 자기복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환경이 변화면서 단성생식으로는 적응할 수 없었던 생명은 유성 생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성 생식을 하면서 생명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성 생식을 통해서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성 생식은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진 부모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수많은 다양한 생명 형태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유성 생식에서는 같은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쌍둥이도 서로 다른 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식물종이라도 유성 생식을 통해 다양한 꽃의 색깔과 형태가 나타납니다.
이는 단순한 생명체의 다양성을 넘어,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더 강력한 생태계를 만들고, 각 생명체가 자신만의 독특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생명의 다양성은 우연의 산물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는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조화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와 고향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말, 라합, 룻, 바세바와 같은 이방인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배경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제외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가 구원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에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권위와 힘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나무를 손질하던 목수의 아들”로 여겼고, 그로 인해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제한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편견은 그들이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편견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강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편견을 버리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갔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지 않았고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편견과 시기심은 우리가 서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기회를 통해 서로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모두가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이방인 여인들의 이야기는 환영과 포용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구원의 계획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매년 2~3차례 이상의 피정을 신학생 때부터 했으니, 이제까지 참 많은 피정에 참여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피정이 이를테면 고상한 피정이었습니다.
신학생 대상의 피정, 신부 대상의 피정은 수준이 높았습니다.
피정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나 있는 분들이었고, 그 내용도 어른에게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부끄럽게도 이 피정 지도자들의 강의에 크게 와닿은 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나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 아닐까? 하느님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등등….
피정 갈 때마다 늘 이런 고민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커다란 울림을 얻었던 피정도 많았습니다.
가장 큰 도움이 된 피정은 한 달 동안 이루어진 이냐시오 영신수련이었고, 도 다른 피정은 찬양 속에서 이루어진 특히 자기 체험 안에서 주님을 느끼게 해주는 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피정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의 위신, 자존심, 체면, 권위, 품위 따위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때 피정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피정 지도자가 온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낮추지 않으면 피정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주님께서 강조하신 겸손 속에서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잔뜩 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고 불쾌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의 반응이 인상적입니다.
보통 누군가가 화를 내면, 그 화를 삭이기 위해 그 사람 편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과연 주님께서 함께 하실까요?
그냥 우리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실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 가득한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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