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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7,10-14; 8,10ㄷ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8,10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 10,4-10
형제 여러분,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 은총을 입은 우리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마리아의 깨달음 역시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보소서. 주님 뜻을 이루러 제가 왔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 은총을 입은 우리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일이요, 먼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놀라운 일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기쁘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인성과 신성의 교환 대축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사야의 예언, 곧 동정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 하느님, 메시아 하느님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진다는 얘기이고 구조입니다.
그러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오늘 히브리서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고,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어도 우리 인간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이루실 수 없는데, 예수님도 마리아도 그 뜻에 동의하셨고 우리도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전례의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독서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천사의 알림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고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의 동의 없이는 하느님도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머리를 갸우뚱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럴 뜻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뜻을 존중하시어 당신 뜻을 꺾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뜻을 스스로 꺾고 당신 뜻을 스스로 따르도록, 당신도 당신의 뜻을 능력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우리의 사랑의 응답을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응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아무리 오시려고 해도 오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마리아께서 주님 뜻에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리아에게 수태되신 것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마리아를 수태하신 것입니다.
두 분의 응답은 능동적인 수동태이고 위대한 수동태입니다.
사랑의 응답이었기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이 있었기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성탄도 그렇고 마리아의 수태도 신성과 인성의 교환이고, 그래서 오늘 전례의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동정 마리아의 모태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구세주의 신비를 찬양하고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신성을 잉태함으로써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 신성의 참여에 초대받는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까지 하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에는 순명이 따른다>
성경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순종 없는 믿음은 그림의 떡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고 하셨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이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에게 은총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은총을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면서 단테의 표현대로 '처녀인 어머니로서의 고통', 그리고 '아들의 딸', 즉 하느님의 딸로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경청의 달인이요, 행동하는 어머니이셨습니다.
우리도 일상 나에서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행하는 성모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갈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은 어떤 연령대일까?>
오늘은 성모 영보 대축일입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나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을 신성시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신부님의 어머니도 신자들이 공경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낳으신 분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어떤 인물을 낳은 어머니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공경하게 될까요?
자녀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유치원 교사가 해 준 이야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학급에 친구들 신발까지 정리해주며, 선생님 마음 아프니까 떠들지 말자고 친구들을 다독이는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담해 본 결과 그 아이 어머니는 아기가 태중에 있을 때 신구약 성경을 두 번 통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날 때부터 부모님을 생각하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믿을 수 없었던 하나의 장면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본 것인데, 한 어머니가 아이들 몇 명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는 모습입니다.
아이가 대여섯 명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누나가 막내 아기를 안고 있었고 엄마는 거의 만삭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울지도 않고 어린아이들이 엄마처럼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 태중에 아기가 있을 때부터 저렇게 성체조배를 하니 아이들에게도 그 영향이 가는구나!’였습니다.
저도 만약 결혼했다면, 아기 엄마에게 억지로라도 ‘하.사.시.’를 읽게 하고 매일 ‘성체조배’를 태교로 시켰을 것 같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산만한 아기들이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것이 부모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는 부모의 모든 것을 받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셨을까요?
하느님은 요셉 성인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마리아와 혼인하고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거나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으십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주저했다면, 헤로데에게 아기를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자연의 법칙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인간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어가는 과정을 ‘모범’으로 보여주셔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하느님이셨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 성인이 성모 마리아를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끔찍한 일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루카 2,40)
처음부터 튼튼했거나 지혜가 충만한 것이 아니라 강해지고 충만해진 것입니다.
여기서 튼튼해진다거나, 충만해진다는 동사는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형은 지금도 반복해서 진행중인 상태라 완성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완성된 상태로 잉태되거나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과정’을 겪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고 특별히 성모 마리아의 역할은 더 절대적입니다.
만약 성모 마리아가 죄에 조금이라도 물들었다면, 예수님도 죄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는 자녀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에서 죄에 물들지 않아야만 하는 성모님의 모델은 ‘파라오의 딸’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당시 파라오라는 사탄과 같은 존재에 의해 모두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의 딸이지만, 파라오의 영향을 받지 않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파라오의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일강에 떠내려온 모세를 키웁니다.
그 공주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은 파라오의 영향 아래 있었기에 모세를 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도 그러한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런 면에서 당신 자신도 죄에 물들면 안 되는 분이셨고,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미리 마련하셨듯이 성모님도 미리 마련되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1베드 1,20)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육체를 지니셔야 했다면,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그 육체를 주셔야 하는 성모 마리아도 미리 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마련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첫 피조물인 ‘지혜’를 성모 마리아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받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때 성령은 누구에게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아기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어떻게 오실까요?
성모 마리아의 인사를 통해 오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아기’처럼 우리가 하는 것에 따라 은총을 주시며 순종하십니다.
다만 우리 안에 죄가 있다면 그 죄 때문에 쉽게 돌아가실 수도 있는 약한 상태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계실지 궁금해합니다.
저는 분명 성모님께 그러하셨듯이 ‘아기 예수님’으로 계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성모님은 구원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른으로 우리 안에 사실 수는 없습니다.
어른은 나에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예수님은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다만 살아계신다면 신적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이것을 깨닫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성모님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냥 사랑이 아니라 ‘총애’(寵愛)!
총애받는다는 것은 적당히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각별히 사랑받는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총애로 인해 삶이 바뀝니다.
총애받게 되면 우울한 색조였던 나날이 순식간에 화사한 색조로 변화됩니다.
총애는 한 존재를 고무시키고 참 사랑에 눈뜨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은혜롭게도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루카 1,30)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총애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녀의 소박함과 순수함, 그녀의 작음과 겸손함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덕행을 바탕으로 한 즉각적인 응답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는 순명의 모델입니다.
그녀는 하느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래를 그분 손에 온전히 내맡깁니다.
천사 가브리엘과 주고받던 대화의 결론은 ‘예!’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는 언제나 순명을 요구하십니다.
성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 조차도 번제물로 바칠 정도로 순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 역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 겸손 가득한 마리아의 순명에 대한 하느님의 상급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거처하시는 새로운 도읍 예루살렘 성전이 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끊임없이 살아계시는 계약의 궤로 재탄생합니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로운 초대,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하느님의 초대였지만, 기꺼이 응답한 마리아로 인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루카 1, 32-33)
가브리엘 천사의 말은 지극히 간단한 선언같지만,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닌 포스가 엄청납니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이나 산더미처럼 높은 파도같이 장엄합니다.
마리아의 적극적인 동의와 협조로 인해 이제부터는 또 다른 형태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왕국이 건설될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어, 그 시간을 끝없이 연장시키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건설될 왕국은 종래의 지상 왕국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영원한 왕국, 불멸의 왕국이며, 그 왕국의 장엄한 광채 앞에 지상의 왕권은 빛을 바랠 것입니다.
새롭게 왕좌에 좌정하실 왕은 만왕의 왕이 되실 것이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지니실 통치권은 한계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위대하고 장엄한 인류 구원 사업의 첫 출발점은 바로 마리아의 ‘Fiat’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탄생 예고는 메시아 강생을 알리는 기쁜 소식입니다>
1)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일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홉 달 뒤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메시아 강생은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첫 인사말이 “기뻐하여라.”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누리고 있는 ‘은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마리아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하고, ‘메시아 강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
마태오복음을 보면, 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마태 1,22-23)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마리아하고만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하고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 하느님께 다가가신 분이고,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 사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라는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마리아를 선택하셨음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하고, 마리아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즉 마리아의 신앙생활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주시는데, 사람들이 받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고 온 삶으로 잘 받는 사람이 그 은총을 제대로 받아서 누릴 수 있습니다.
3)
‘메시아 강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나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부활하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받아 주셔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셔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4)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절망하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에 있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절) 라는 천사의 말은 원래는 동정녀의 성령 잉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과 구원받기를 바라는 희망 속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5)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저런 나쁜 놈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가족이든지, 친구든지, 누구든지 간에...
정말로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죄인이라도,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지 않는 한.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좋은 선물 인생을 삽시다 - 정주, 경청, 순종>
어제 처음 파스카의 선물같은 봄꽃 제비꽃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예전 써놨던 애송시가 생각나 나눕니다.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이하여 마리아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 축시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면
거기가 정주의 꽃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 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고 반갑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
새삼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선물인생이 되면 참 좋겠는데, 본의 아니게 짐이 되는 인생도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현실은 선물인생에서 점차 짐으로 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선물인생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선물인생이 되고자 부단한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물인생으로 살 수 있을까요?
성모님의 삶이 그 모범입니다.
성모님처럼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이 얼마나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눈밝으시고 겸손하신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 성모님을 방문하십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한 인사말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요즘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에 가장 많이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실제 실명을 넣어 써드리고 꼭 읽어보도록 합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고무적인 말씀인지요!
이 말씀에 몹시 놀란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합니다.
마리아 성모님께서 얼마나 깊은 내적 관상의 삶을 살고 있는지 하느님께서도 반하신 마리아입니다.
이어지는 천사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느님의 심중을 그대로 반영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격찬입니다.
우리는 정말 고귀한 품위의 참사람 하나 바로 마리아를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 주신 참 좋은 선물, 참 좋은 분, 마리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마리아 성모님처럼 살 수 있을지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정주의 삶입니다.
나자렛 고을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사셨던 마리아 성모님, 그대로 우리 정주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를 닮았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정주의 삶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며 늘 새롭게 시작하는 정주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이 늘 새로운 정주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나자렛 시골 마을에서 마리아 성모님은 분명 이렇게 사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정주의 삶에 충실하면 언젠가 그 때가 옵니다.
겸손하시고 눈밝으신 주님은 때가 되자 당신 천사를 통해 마리아를 방문하시어 격찬의 인사말을 쏟아 놓으십니다.
마리아 성모님뿐 아니라 한결같은 정주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둘째, 경청의 삶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입니다.
침묵의 사랑, 침묵의 지혜입니다.
정주의 삶과 함께 가는 침묵의 삶입니다.
말없는 침묵이 아니라 주위에 활짝 열려 있는 깨어 있는 사랑의 침묵은 관상적 삶의 기초가 됩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맨먼저 나오는 말씀도 “들어라, 아들아!”이며 구약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것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귀를 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집중하여 듣는 경청입니다.
새삼 경청도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천사와의 문답을 통해 마리아가 얼마나 주님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경청의 사람인지 단박 드러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도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말씀입니다만 마리아의 응답은 참 신중합니다.
얼마나 깊은 경청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묻자 천사는 거침없이 하느님의 속내를 다 털어놓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마리아를 신뢰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셋째, 순종의 삶입니다.
믿음의 정주, 믿음의 경청, 믿음의 순종입니다.
정주의 훈련, 경청의 훈련, 순종의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즉각적인 순종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온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된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일방적으로. 강제적으로 구원역사를 펼치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응답을,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에 하느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성모님을 한결같이 끝까지 아드님과 함께 하시면서 순종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시종여일 충실하셨습니다.
모전자전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을 그대로 닮은 제2독서 히브리서에서 아드님 예수님의 거듭된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의 공통적 삶의 의미는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 이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니에서 감동적 기도와 마지막 임종어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고 요한복음의 십자가상에서 고백의 임종어입니다.
“다 이루었다!”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의 응답이 있었기에 비로소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다음 말씀이 실현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어 또 하나의 임마누엘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이 우리 모두 정주의 삶, 경청의 삶, 순종의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의 마음>
저는 세례명이 ‘가브리엘’입니다.
제가 정하지 않았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태어난 생일에 맞추어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9월에 태어난 큰 형은 미카엘, 12월에 태어난 작은 형은 사도 요한, 10월에 태어난 동생은 프란체스카로 정했습니다.
저는 5월에 태어났으니 마티아로 정했을 법 한데 가브리엘로 정하였습니다.
부모님께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저는 ‘가브리엘’ 세례명이 좋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나자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으니, 저는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의 수호천사인 가브리엘 천사가 늘 함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위대한 마리아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바다의 별, 우리의 어머니, 천상의 모후, 정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의 바다’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시메온으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가야 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았고,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 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위대한 마리아’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고통 중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는 겸손을 알게 하고, 겸손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답>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테이블 끝에 있는 소금 통을 건네줄 수 있니?”라고 말하자, 아들은 곧바로 “그럼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그냥 자기 식사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왜 소금 통을 주지 않니?”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소금 통을 건네줄 수 있는지 물어서 저는 줄 수 있다고 대답했죠.
소금 통을 달라고는 하지 않으셨잖아요.”
‘소금 통을 건네줄 수 있니?’라는 질문이 그냥 질문 자체로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서는 소금을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말 그대로만 받아들여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안에는 “사랑하라”는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실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입으로는 계속해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행동은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면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듣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지요.
그때 얼마나 놀라고 두려우셨을까요?
우선 하느님의 천사를 직접 보는 사람은 곧바로 죽는다는 당시의 생각도 떠올려졌을 테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기를 갖게 된다는 것도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게 됨을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모두 죽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로 큰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4)의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곧바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자기를 힘들게 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굳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더는 입으로만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또 남의 사랑만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커지면서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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