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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8일 토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히브 11,1-2.8-19
복 음 : 마르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젊었을 때는 행동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큽니다.
그러나 50대를 넘어서면서는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2배 이상 많다고 합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켈로그 경영 대학원 양 왕 연구팀은
신참 과학자들이 국립 보건원에 제출한 연구 보조금 신청서를 조사했습니다.
연구팀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기준선에 걸친 신청서 1,000장을 검토했습니다.
15년 동안 지원자의 절반이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깝게 떨어진 이들은 작은 차이로 보조금을 받지 못함에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앞서 미세한 차이로 보조금을 받지 못한 과학자들이
보조금을 받은 과학자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냈다는 것입니다.
주목받는 논문도 보조금을 받지 못한 과학자들이 21%나 더 높았습니다.
후회가 실패를 돌아보게 했던 것입니다.
이 후회의 핵심은 ‘성찰’이며, 후회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단서가 숨어있었습니다.
행동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실패의 행동이 되더라도 더 나은 성장의 가능성은
행동하는 것 자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후회가 되더라도 우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한 뒤에 포기하고 좌절에 빠진다면, 성장의 가능성도 그 순간에 바로 닫히게 됩니다.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주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또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기에
분명히 행동하는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십니다.
피곤하셨는지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십니다.
그런데 거센 돌풍이 일어서 배 안에까지 물이 가득 차게 되지요.
뱃사람이 많았던 제자단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워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위험한 상황임을 깨닫고 있어서 ‘죽음’까지도 떠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워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냥 걱정만 하면서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걱정하고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깨워 함께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의 은총과 훈련
-두려움에 대한 답은 믿음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굳건한 믿음으로 간구하오니
당신의 빛으로서 채워주시어
우리가 맞이하는 그 모든 날을
흠 없는 참삶으로 이끄옵소서.”
어제 새벽 성무일도시 마음에 새롭게 와닿은 찬미가 한 연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하나를 청한다면 믿음뿐이겠습니다.
믿음의 은총입니다. 은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 역시 다른 수행처럼 부단한 훈련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 전례기도
역시 참 좋은 믿음의 훈련입니다. 개인 신앙은 약하고 부족합니다.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교회 공동체 믿음에 뿌리내릴 때 건강하고 안전한 신앙 입니다.
저희 요셉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 성심 상이
찾아오는 모든 이를 언제나 환대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성심 상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 판에 새겨져 있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두려움에 대한 답은 믿음뿐입니다.
제 행복기도 중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하겠습니다.
반드시 “참회합니다” 다음 “믿습니다”를 넣어 다음과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참회 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아주 예전 왜관 수도원에서 저녁기도 전, 어둠이 짙어질 때
노수사님들 모습이 참 초라하고 한 生이 덧없어 보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순간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그대로 믿음이 걸어 다니는 모습들처럼 보였습니다.
한 生을 믿음으로 살아온 분들입니다.
노년에 남는 것은 하느님 믿음과 밥뿐인데 믿음은 없고 밥의 욕망만 남아있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을 잊지 못합니다.
믿음 없는 탐욕만 남은 삶, 그대로 노추, 노욕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삶에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로 깊어가는 “믿음의 여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그동안 자주 인용했던 두 말마디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에 우선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이 셋의 우선순위가 절대로 바뀌어선 안 된다.
하느님 믿음이 있을 때 마음의 평화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영육의 건강이요
돈에 대한 탐욕도 절제할 수 있다.”
어찌 노년뿐이겠습니까? 존엄한 인간 품위의 기반이 되는 믿음입니다.
“물보다 진한 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돈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관계는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 믿음만이 돈의 유혹을 넘어 건실한 인간관계를 맺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 모습이 그대로 믿음 약한 우리들 모습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배가 돌풍으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 좋은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자 제자들은 울부짖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대로 박해와 온갖 어려움으로 곤경에 처한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역시 인생 항해 여정 중 얼마나 많은 공동체나 개인들이
조난과 파선의 위협을 겪고 있는지요?
당시 제자들의 모습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 그대로 믿음의 시련입니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에, 내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신 살아계신 주님을 잊은 탓입니다.
그대로 믿음 부족의 반영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나는 허약한 믿음의 실상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의 말씀의 위력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자 예수님은 재차 이들의 믿음 약함을 책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대로 우리의 믿음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다음 물음이 오늘 화두처럼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중심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이름 ‘나다’라는 이름의 임마누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나다(I AM)”, 영문으로 하면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인지요!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약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여정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육신은 노쇠해가도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날로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11장이 참 좋은 믿음의 본보기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이어 믿음으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종합한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의 인간입니다.
궁극으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늘 향할수록 더욱 깊이 현실에 뿌리내리는 나무를 닮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강한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간 품위의 기초가 믿음이요, 반석 같은 믿음 위에 건축되는 인생집입니다.
오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서방의 4대교부,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교황 대 그레고리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성인 학자입니다.
가톨릭 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조도 흥미롭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읽어보면
‘불꽃의 아우구스티노’와 ‘얼음의 토마스’가 느껴질 것이다.”
참 좋은 대조와 더불어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는 성인 학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천사 박사라 칭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세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어떻게 그 많은 저술이 가능했는지 불가사의입니다.
성 토마스의 인품에 대한 설명과 그의 깨달음 및 어록도 감동적입니다.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통찰력이 날카로우며 무엇이든 쉽게 틀림없이 기억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삶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여,
신적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다.”
그가 신학대전 완성을 조금 남겨 두고 절필한 사유도 인상적입니다.
그가 1273년 12월 성 니콜라오 축일 미사를 끝마친 후 절필하였는데,
조수가 그 이유를 묻자 다음같이 대답했다 합니다.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을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하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해”
성인의 깊은 겸손도 이런 하느님 체험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성 토마스의 시성 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의 격에 어울릴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에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일축했다고 합니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얼마나 통쾌하고 멋진 답변인지요! 이어지는 어록도 인상적입니다.
“성 토마스가 집대성한 철학적, 신학적 종합은 교회와 온 인류의 건실하고 항구한 자산이다.”
“인간 안의 이성은 세상 안의 하느님과 같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구원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믿을 것을 아는 것, 추구할 것을 아는 것, 해야 할 것을 아는 것이다.”
침대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 임종어도
그가 얼마나 분투의 노고로 가득한 삶이었는지 깨닫게 합니다.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하느님이 교회에 주신 참 좋은 선물, 참으로 믿음의 성인이요
대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어
믿음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루카12,42). 아멘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언제나 인간의 욕망과 맞서며, 인간의 것은 나약함에 복종하고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여 일으켜 세우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작은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항해하고 있다.
거룩한 교회라는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거센 파도가 치는 이 세상을 건너가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죄인들의 참회와 회개를 바라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함께 희생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니 그분은 “죽은 것”같이 보인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제자들이 믿기는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분은 지치셨지만(요한 4,6 참조), 고생하며 근심하는 사람들의 안식이시다. (마태 11,28 참조)
그분은 잠에 무겁게 짓눌리셨지만(참조: 마태 8,24; 마르 4,38; 루카 8,23)
바다 위를 걸으실 만큼 가벼우셨고, 바람에 명령하셨으며,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건져주셨다.
(참조: 마태 8,26; 14,25-32; 마르 4,39; 6,48-51; 루카 8,24; 요한 6,19-21).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예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명령하신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은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 존재이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마르 4,38)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함께 배 안에 있을 때,
돌풍이 일어 물이 배 안까지 거의 가득 들어차는 위급한 상황이 닥칩니다.
제자들 중에 물일에 익숙한 뱃사람들도 끼어 있었지만, 다들 혼비백산한 것 같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제자들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돌풍과 파도 이상으로 내면과 영혼까지 출렁이며 뒤 집어질 때,
예수님의 내면은 고요와 평화 그 자체십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인간 육신의 모든 조건을 지니셨기에
천재지변이 아무 위협도 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러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마르 4,39)
제자들의 간청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 한 말씀으로 방금, 전까지 사납게 날뛰던 바람이 바로 복종하지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문제는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뒤흔든 두려움과 혼돈이 거센 바람과 들이치는 물 등
외부적 상황 때문이라고 여겼겠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사실 불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삶도 완벽히 무탈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크고 작은 진동과 돌풍 속에서
적당히 흔들리며 힘껏 중심을 잡고 나아가는 중이지요.
그러다 때때로 우리 존재와 그간 이뤄놓은 삶의 터전을 집어삼킬 듯 범람하며,
우리를 위협하는 고통을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같지만, 믿음이 발휘되는 건 그런 순간입니다.
믿음은 평온하고 안정적이며 아쉬울 것없는 삶에서가 아니라
추락과 침몰, 해체와 죽음의 돌풍 앞에서 증명되는 진실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반복해 강조합니다.
"믿음으로써"(히브 11,8.9.11.17)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써" 길을 떠났고,
"믿음으로써" 영원한 도성을 기다리는 이방인으로 남았으며,
"믿음으로써"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사라도 "믿음으로써" 이사악을 잉태하였지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믿음은 결과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손에 쥐어지거나 쥐어지지 않거나
관계없이 존재 깊숙이 자리하는 확신입니다.
믿는 바대로 그 결과는 이미 완성이 됩니다. 믿음 자체가 보증이고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은
오늘 범람과 침몰의 위기 앞에 허둥대는 제자들의 상황처럼,
그리 만만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주일미사 때 습관적으로 읊는 신앙 고백문이 진짜 삶으로 옮겨질 때는
거센 현실의 파도 앞에서 나름의 포기와 결단과 선택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순교의 증거까지 요구하지 않는다 해도,
믿음을 증거 해야 하는 순간은 삶의 아주 작은 디테일에 속속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달갑지 않고 반갑지 않은 천재지변, 질병과 사고, 사람과 관계의 파도 앞에서
예수님처럼 고요히 침잠할 수있는 힘이 곧 믿음입니다.
돌풍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바람을 꾸짖어 멈추는 힘은 우리 영역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믿음은 가능합니다.
믿는다면, 외부의 돌풍이 아무리 나를 뒤흔들어도 고요히 주님 안에 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각박한 세상, 녹록치 않은 삶을 지고 가면서,
믿음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복잡하고 버거운 세상일을 잠시 내려놓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주무시는 예수님 곁에서 평안히 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지순례를 마치고 뉴욕에서 아침으로 ‘곰탕’을 먹었습니다.
며칠 한국음식을 먹지 못해서인지 곰탕의 구수한 육수와 김치
그리고 깍두기가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민족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유전학적인 분류가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DNA는 인류의 시작과 지금까지의 여정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도 DNA 검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인 분류도 타당한 방법이 됩니다.
저는 한반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으면 동질감을 느낍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분류 방법입니다.
교포 2세들 중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어색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음식도 민족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외국에서 살지만, 입맛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4년간 살면서 음식 때문에 불편한 적이 없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한국음식’을 한국음식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도 한국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먹방’이 인기 있는 것도 ‘미각’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사제’이기 때문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무덤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서는 예수님 탄생을 표시하는 곳에서
경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숙소에서도 사제이기 때문에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는 방법도 몇 가지 있습니다.
교구에서 발급해준 ‘사제신분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사제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아도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모든 사제들이 함께 입는 ‘사제복’입니다.
사제복에는 ‘로만칼라’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작고 하얀 로만칼라는 제가 사제임을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공항에 내려서 이민국 심사를 받을 때도 사제복을 입고 있으면
심사원이 ‘신부님!’이라며 인사하곤 합니다.
예전에는 사제복이 거북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제복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을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제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어색할 때도 있었습니다.
32년 사제로 지내보니 사제복이 제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미각이 쉽게 변하지 않듯이,
사제는 사제복을 입을 때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수학과 과학에는 ‘공리’가 있습니다.
공리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증명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리라는 터전 위에 수학과 과학이라는 탑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종교인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증명과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총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배움과 탐구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관념과 사유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천이며 행동의 여정입니다.
사제라는 직분이 믿음에 도움을 주겠지만, 실천과 행동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에는
‘믿음’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족, 부족, 민족은 ‘믿음’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신용’이라는 뿌리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두려움과 고요함의 교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는 지금까지 마르코복음 4장에 기록된 4편의 비유설교를 들었다.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였다.
예수님의 도래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는 땅에 심겨진 씨앗처럼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 완성을 향하여 자라나고 있다.
마치 작은 씨앗과도 같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예수님과 함께 이 따에 세우시는 나라이며,
그분 스스로가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하느님의 통치가 아들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나며,
거꾸로 이 표징들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통치를 현존시키신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통치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마르코는 비유 설교에 이어 네 가지 기적 사화(4,35-5, 43)를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풍랑을 가라앉힌 기적, 게라사의 악령 들린 사람의 치유한 기적,
하혈병 여인을 고치신 기적,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적이다.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기적 사화를 크게 치유⋅구마 기적(이적) 사화와
자연 기적(이적) 사화의 두 가지로 나눈다.
치유⋅구마 기적 사화는 사람을 병이나 신체의 불편함이나
악령으로부터 구제하는 기적을 보도하는 것이다.
자연 기적 사화는 죽은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이나 자연물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神的 능력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자연 기적 사화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는 蘇生의 기적, 빵, 물고기,
포도주의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 풍랑을 잠재운 기적 등이 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든 이러한 기적들이
예수님의 神性을 증명하려는 수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적을 통하여 신성에로의 신앙을 강요하실 의도가 없으셨고,
오히려 함구령을 내려 자신의 신성과 메시아성을 되도록 감추려고 하셨다.
이는 무지하고 단순한 당대의 사람들에게나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탐구의 기본으로 삼는 현대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믿음이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라는 사건 속에서
인간과 자연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수긍이다.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통치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비유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 타고 계시던 배를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을 배에 앉아 가르치셨던 곳은
가파르나움 근처로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이다.
잠시 갈릴래아 호수에 관하여 살펴보자.
갈릴래아 호수는 그 모양이 고구마 같기도 하고, 구약성서에서는 하프와 비슷한 모양이다 하여
‘긴네렛 호수’(민수 34,11; 신명 3,17; 여호 12,3)라고 불렀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갈릴래아 호수, 겐네사렛 호수(1마카 11,67; 마태 14,34; 마르 6,53; 루카 5,1)로
요한복음에서는 티베리아 호수(요한 6,1; 6,23; 21,1)로 불린다.
갈릴래아 호수의 호면은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낮은 –212m, 깊이는 50m,
가장 긴 폭은 남북으로 22km, 동서로 14km, 둘레는 52km, 호수 면적은 약 170㎢에 달한다.
사람들은 이 호수를 바다라고도 한다.
예수께서 호수의 건너편으로 가신다고 함은 호수 북쪽에서 남쪽이 아니라
동편, 골란 지방을 말한다.(이에 대하여는 다음 복음에서 다루겠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배가 호수 동편으로 항해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배를 파산 직전으로 몰아붙인 세찬 바람과 풍랑은 북쪽 헤르몬 산(2,814km)에서 형성된
골란고원에서 불어오는 돌풍으로 갈릴래아 호수에 종종 있는 일이다.
12제자 중에 4명(시몬,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前職이 뱃사람들이라 이에 능통했을 일이지만,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으리라.
돌풍이 몰아치고, 풍랑이 일어 배에 물이 차서 사람의 목숨이 寸刻을 다투는데,
예수님은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신다.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지만, 난리와 태평, 두려움과 고요함,
불신과 신뢰의 극적인 교차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마치 마귀가 들린 사람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듯,
바람과 바다를 향하여 호통을 치셨고, 이에 그들은 잠잠하고 고요해졌다.
예수님의 권위에 바람도 바다도 복종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것은 기적보다 제자들에게 ‘아직도 없는 믿음’(40절)이다.
같은 배를 탔다면 우리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막 태동한 그리스도 교회가 바다 위의 배와 같이
돌풍과 풍랑에 시달리는 모습을 마르코 복음사가가 미리 내다 본 것일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배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승선하여 계시다는 것이며,
바람도 바다도 모든 자연도 하느님 통치의 손길 안에 있으며,
이들도 하느님 현존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