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쉰여섯 번째
천국에 가고 싶은가요?
사람들은 천국이나 극락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리 가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지금 당장 보내주겠다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겁니다. ‘조금 있다가’ 그럴 겁니다. 그러면서 그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되는 곳을 찾습니다. 플라톤이 이상적 국가 모델을 제시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라는 말의 뜻이 어디에도 없다는 말인 것처럼 완벽하고 평화로운 사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노자老子는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은 그 지위를 오래 지속하고 죽어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영원토록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극락極樂을 꿈꾸었습니다. 극락 역시 유토피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 어디에도 없지만, 공덕을 쌓고 죽으면 갈 수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눈물도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곳,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 천국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꿈꾸는 천국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자기 욕망에 따라 천국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극락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나 그곳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곳이 아닙니다. 초월적인 세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내 욕망을 채워줄 곳을 찾아다닙니다. 미셸 푸코가 창조한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가 있습니다. 다른(heftero)과 장소(topos)의 합성어입니다.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적이지 않은 곳이지만,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낚시터가 그런 곳일 테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술집이 그런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헤테로토피아는 환경이 변하고 나이가 들면 변할 수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