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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은사 스님 생신이셔가지고 잠깐 다녀왔었는데 옛날 우리 20년 30년 전에 하시던 본문하고 지금하고 레파토리가 너무 똑같으신 것에 아주 감동을 했어요. 그때는 제가 되게 좀 짜 뭐랄까요. 아니 또 또 시작하셨다. 이런 느낌 도저히 말씀하시는 거다. 이런 말씀을 했다면 아 전초 연세 되시도록 그렇게 정정하게 계속 참 저렇게 해주시는 게 감사하게 됐고 그 고립 이렇게 변하면 안 되죠. 경전에 있는 경전에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이렇게 쭉 읽으시는데 경쟁 나오면 이렇게 무슨 보살 무슨 보살 무슨 보살 무슨 부처 무슨 부처 무슨 나오잖아요? 우리는 이제 무슨 보살 등등 이러고 이제 넘어갈 텐데 그분 그 불보살님들의 경우를 한 분 한 분 띄움 띄움 없이 하는 분 한 번 읽으시는데 그 참 뭔지 모르게 감동이 있대요. 참 불보장님의 명모를 읽어주시는 것이 어떤 좀 축은의 좀 같기도 하고 또 염불 이렇게 공덕을 참 편찬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느낌도 좀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맨날 듣던 뇌파토리 중에 하나가 오늘 딱 들렸던 것들이 있어서 그 이제 법수에 대해서 불교는 숫자 가지고 불교 교리를 설명을 종종 하거나 하거든요. 근데 1 2 3 4 56. 이렇게 쭉 법수에 따른 이야기를 하시는데 오늘 4라는 법수의 사신이라는 말씀을 하셔요. 네 가지 믿을 것이 있다. 우리가 인생에 믿을 만한 거는 이제 설명은 제가 붙이는 거예요. 이 세상에 믿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거기 때문에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것은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었어. 내가 거기 붙잡으려고 하면 언제 사라질지 몰라요? 그래서
그렇게 인연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에는 의지할 게 없어요. 의지할 의지처가 되지를 못해요. 근데 네 가지 의지할 만한 의지처 네 가지 믿을 분석이 있단 말이죠. 거긴 우리가 알고 있는 불법성 삼부예요.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여기 앞에 계신 불성 불쌍으로서의 부처님 또 요거는 진짜 부처님은 아니죠. 왜냐하면 불쌍으로서의 부처님은 생겨난 거고 언젠가 사라질 거 아니에요? 우리 몸도 생겨나고 사라지듯이 불쌍도 생겨났다가. 언젠가 사라질 거잖아요. 생명법이죠. 그러니까 이제 모양의 부처죠. 우리 중생들은 진짜 부처님을 어 버젓이 못 보고 사니까 버섯이 이렇게 드러나 있음에도 못 보고 사니까 이 진짜 부처님은 아무리 설명을 해봐야 못 알아들으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 중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부처님을 만든 게 불쌍인 거예요. 우리는 이런 부처님만 보거든요. 아 불쌍해. 상호가 여법하시다. 이렇게 보인단 말이에요. 근데 진짜 부처님은 보이지를 않거든요. 진짜 부처님은 법신부라고 해서 허공법신이라고도 하죠. 법신 부처님은 보이는 부처님이 아니에요. 보였다 하면 그분은 부처님을 본 게 아니에요. 그 경전 오록 같은 것에도 보면 어. 무슨 부처님께서 나를 나에게 오셔가지고 막 나에게 뭔가를 막 내려주는 것 같은 그런 그런 모습을 꿈에서 보든 수행 중에 보든 그런 걸 보더라도 그거는 사된 것이니 따라가면 안 된다. 이런 식의 표현이 있거든요. 모양의 부처님이니까요. 그 진짜 부처님을 말하는 거예요? 이거는 믿을 만해요. 왜? 이 진짜 부처님은 불생불멸이거든요. 태어난 적이 없어서 돌아가실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가 부처님을 법신 보신 화신으로 부르잖아요. 근데 화신의 부처님 인도에서 태어났다가 한 80세 동안을 살다가 가심 부처님 그분 화신분이라 그러잖아요. 그럼 그 부처님도 몸은 왔다 가셨죠? 어떡하셨잖아요? 그럼 진짜 부처님은 아닌 거죠. 위험한 말인가? 그 서노르게 이런 말이 있어요. 화신과 보신은 진짜 부처가 아니라 법신이 진짜 부처다. 이런 식의 말이 있단 말이에요. 화신과 보신은 생겼다. 사라지는 부처님이잖아요. 극락경토를 건립하신 아미타 부처님 어떤 극락정토를 만들어 만드신 분이시고 아미타 부처님도 48대 원이라는 원력을 세워서 권력을 실천한 결과 부처가 되신 분이잖아요. 언젠가 부처가 된 분이잖아요. 법장 기부했다가 부처가 된 분이란 말이에요. 국제적 부처님 아니죠. 지금 부처님은 언제 되었다가 언제 그만두고 그런 분이 아니거든요. 늘 언제나 흔들같이 안이 계신 곳이 없으시고 안이 계신 때가 없으신 분이 부처님이란 말이에요. 시공간을 어느 시공간을 점유하는 분은 부처님이 아니죠. 그래서 법신과 화신은 보신과 하시는 진짜 부처님이 아니다. 법신이 진짜 부처님이라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모양의 부처님 모습에 부처님 크게 부처님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 이거 믿을 만하죠. 이 부처님은 이 부처님은 태어난 적이 없으니까 돌아가실 일도 없고 있거나 없거나를 넘어서 계신단 말이에요. 이 세간 상을 넘어서 있단 말이에요. 모양을 넘어서 계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부처님 한 분은 믿을 만해요. 배신당하지 않아요. 여러분 이 세상에 그 어떤 거라도 도와가지고 집착해서 가져봐야 그 소유물이 나를 배신하죠. 내가 먼저 죽든지 그 소유물이 나를 떠나가든지 배신할 거 아니에요. 아무리 믿을 만한 남편 아내 자식 부모님 뭐 할 것 없이 모든 믿을 만한 사람들 또 나가요. 내가 먼저 떠나가든 그들이 먼저 떠나가든 그 믿을 게 못된단 말이에요. 진짜 믿을 수가 없어요. 언제 떠나갈지 알 수가 없어요.
이 부처님만 진짜 부처님은 오염 없는 크기 없는 그러나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안 계신 곳 없으신 부처님이시죠? 이러면서 발언문을 외잖아요. 그럼 어느 때 어느 곳 지금 여기도 계신다는 소리 아니에요? 지금 부처님 안 계시면 지금 제가 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이렇게 숨쉬고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오로지 부처님뿐이란 말이에요. 부처님뿐이다. 그 부처님만 뱉을 수 있어요. 이 세상의 온통 다른 건 다 배시네요. 그 부처님만 빼신 안해요? 진짜 부처님은 가짜 부처님은 배시네요. 이렇게 거룩한 상호가 멋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이 거룩한 상어도 깨질 수도 있고 이 부처님을 조성하신 부모님 부처님 조성하는 그 공간이 불이 났어요. 부처님 죄송한 이후에 불이 나 가지고 부처님이 나타버렸어요. 그런데 저 구석에 있던 부처님 한 분이 요만큼이 이렇게 요만큼만 싹 타가지고 요만큼이 불이 타다가 여기 동이 녹아가지고 요만큼이 사라지고 똑떨어지고 여기를 이렇게 동에 탁 묻어 있더라고요. 와 그 글 보는 순간 이거를 어떤 천재가 이거를 일부러 이렇게 조각을 했나? 이런 생각을 했을 정도로 놀라웠는데 그거를 가지고 그 부처님을 모시고 이렇게 인사동에서 이렇게 뭐죠? 전시회 같은 그 할 때 그 부처님을 그대로 모셔가지고 그렇게 드리라는 것을 봤어요. 어떻게 놀랍더라고요? 그 부처님 이렇게 모셔오셨을 정도로 되게 좋았어요. 이렇게 불쌍한 녹을 수 있어요. 불나면 사라져요. 근데 우리 진짜 무척 우리도 우리도 죽으면 이 몸뚱아리는 사라지잖아요? 내 성격도 사라지잖아요? 내 감정 느낌 생각 요렇게 생각하는 요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사라지죠. 여러분이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을 그 사람이 먼저 죽으면 만날 수가 없어요. 죽었다 깨어나도 그로 똑같이 그룹 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남편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보살님이었는데. 남편하고 사이가 너무 좋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좋아지는 부부가 있잖아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좋아지고 점점 사랑하고 서로 아껴주고 너무너무 사랑하던 남편이 갑자기 먼저 떠났단 말이죠. 생각지 못한 인연으로 근데 음 그 말을 듣는데 참 진짜 애절절하더라고요. 스님 저한테 아무리 남편은 다시 오지 않는다. 불성은 언제나 지금 여기 있으니까 내가 내 불성을 깨달으면 남편을 만난다. 소용없어요. 스님 그런 얘기 하지도 마세요. 저는 그 불성 남편의 진짜 모습 진면목 남편의 본래 면목 그 따위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저는 남편의 그 얼굴 그 말투 그 다정함.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방법이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더라고요. 이분이 얼마나 만나고 싶을까가 와닿는데 방법이 없어요. 이렇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애절해하는 어떤 존재도 믿을 수가 없어요.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알 수가 없어요. 전부 다 사라져요.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그 진짜 믿을 만한 건 요 부처밖에 없단 말이에요. 또 부처님의 법 법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8만 대장경이 부처님 법이 아니에요. 8만 대장경도 부처님 법을 펴낸 거죠. 근데 법은 법이 아니라 이름이 법일 뿐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라 이름이 불법일 뿐이다 라는 말처럼 팔만대장경이 왜 법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느냐 하면 팔만대장경이 어떻게 정형화된 진리가 있어서 팔만대장경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어떤 괴로움을 가진 사람 그 괴로움에 묶여서 그 괴로움에 묶인 것은 곧 그 사람이 자기가 만든 한 생각에 묶인 거거든요. 괴름의 원인은 분들 망상이니까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거예요. 그래가지고 괴롭습니다 하고 부처님께 찾아오면 부처님은 그 사람이 지금 묶여 있는 지점이 어딘지를 보여주고 너가 지금 이렇게 집착해서 괴롭잖아. 그래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법을 설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듣는 사람 입장에선 나는 이 법만 듣고 결혼해서 소멸했으니까 법문이다. 이렇게 들은 거예요 그럼 그 법문이 이 괴롭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법문이었잖아요. 그럼 다른 결혼이 있는 사람한테는 그 법문이 해당 안 되겠죠. 오히려 반대의 괴로움일 수도 있잖아요. 우린 결혼은 제각각이니까 그래서 법무는 법문이라는 정해진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부처가 되고 보면 내가 누군지를 한번 확인하고 보면 저절로 자기 위해서 법문이 나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게 왜 괴로운지를 모르다가 내가 법의 안무기 생기고 나면 이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구나. 자기 분별 망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구나 하는 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너무 단순하고 너무 간단해요. 그 생각만 내려놓으면 돼요. 너무 쉽게 한마디 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 얘기를 해줘도 보통은 문제 해결이 안 되죠. 자기가 그 쥐고 있던 붙잡고 있던 세월이 너무 길기 때문에 너무 오래여서 그 분배심을 훅 내려놓지 못해요. 알아도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아 이거는 부처님 진실을 진리를 나에게 설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부처님 범문이니까 이건 내가 믿어야 되지 않을까? 나는 이런 법문 듣고 싶지 않아도 나는 이 괴로움을 없애는데 왜 자꾸 내 분배심을 없애라 그래? 욕심을 버리라고 해석하지. 나는 이 욕심을 계속 갖고 싶은데 하지만 믿음이 있으면 법문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그러면 내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문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법문을 해도 그 법문의 나에게 와서 괴로움을 효과적으로 제고시켜 주지를 못해요. 그럼 그건 바른 법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법문을 든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법문을 들을 때는 믿음을 가지고 들어야 돼요. 그래서 이게 종교인 거예요. 사실은 이게 종교라고 말하기가 좀 거시게 할 수도 있는 게 음 우리 불교는 그냥 리더라하는 얘기가 아니거든요. 사실은 직접 와서 확인하고 직접 체험해보고 그리고 믿을 만한 미디어를 이렇게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믿음이 있을 때 훨씬 빨리 갈 수 있는 측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처음에 법문을 들으면 세상에서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배워왔던 상식 있잖아요. 상식 상식껏 거꾸로 가는 얘기를 자꾸 한단 말이에요. 이 세상에서는 당연히 뭔가 성취하려면 노력해야만 노력의 결과 성취할 수 있잖아요. 근데 이 공부는 노력하면 성취를 못해요. 유위법이 아니어서 모위법이어서 유위조작을 가져온 다 다을 수가 없어요 하는 거 가지고는 안 되는 공부예요. 그래서 하는데 그렇다고 안 해도 안 되는 공부예요 하는 거에 집착하면 칠친 거고요. 안 하는 거에 집착해도 치우친 거예요. 그래서 중도의 길이라 그래요. 하되 함의 없이 한다. 화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하라에도 머물지 않고 하지 말라에도 머무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요. 그게 중도의 길이에요. 왜냐 이렇게 해라 하면 거기 집착하고 저렇게 해라면 거기 집착하잖아요. 그 불교는 길 없는 길이라 그래요. 그래서 수많은 스님들께서 법문을 하시잖아요. 근데 이 법문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 오늘은 이 법문했다가. 내일 본인 스스로 했던 법문을 또 거둬들이기도 해요. 왜 방편은 항상 폈다가 걷어들여야 되는 거거든요. 방편이 집착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도 법문을 들을 때 우리가 이런 표현을 쓴단 말이에요. 법문 들을 받아 적지 마시고 밑줄 긋지 마시고 이게 뭔가 와닿는다고 해서 그거를 막 받아 적어서 그걸 실천해야지 하고 막 용을 쓰지 마셔라. 이렇게 말해요. 그건 세간 공부를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조작의 공부 근데 이 공부는 그렇게 하면은 안 되는 공부에 진실을 말하면 애쓰고 노력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면 도리어 방해가 돼요. 근데 처음부터 애쓰고 노력하면 방해가 된다는 얘기를 하면 저의 아무도 안 남아 놔요. 이따 도망을 쳐요. 왜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잖아요. 왜 우리가 상식이라고 배우던 게 분별심이었단 말이에요. 분별이 이해가를 못하는 얘기란 말이에요. 불교 공부는 전부 다 이 몸이 내가 아니다.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요? 이 말을 너는 없다? 내가 이렇게 법문들을 왔는데 나는 없다. 이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해가 안 되는 얘기만 한다니까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다.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요? 이게 받아들여집니까? 안 받아들여져요. 그래서 어차피 법문을 들으면 믿어지지가 않는 얘기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법문을 했는데 일반 중생들 입장에서 그 욕하지 않으면 그건 바른 본문이 아니다 그랬어요. 즉 일반 정생들 입장에서는 욕하면 그게 바른 본문이고요. 욕을 안 하고 맞네 맞네 하고 막 맞다. 맞다 하고 이해하고 알아듣고 이러면 조금 안 좋은 보문이라고 그랬어요. 그거는 방편에 치우친 어머니니까 방편의 법문은 이해할 수 있거든요. 알아듣기 쉽거든요. 근데 그 알아듣기 쉬운 법문만 해서는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도 그렇다고 해서 알아듣기 어려운 법문만 해야 되느냐 아님 알아듣기 쉬운 법문만 해야 되느냐? 그게 다 아니에요. 그 부처님처럼 근기에 따라서 동생들의 근기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어떤 법문을 해줘야 될지를 응병 요약으로 병에 따라 약을 주는 방편을 쓴 거죠. 그래서 분별 망상밖에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그냥 분별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시작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그걸 다시 뺏어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이 법문은 법문을 듣다 보면 들리는 법문이 있고 안 들리는 법문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소화가 되는 게 있고 소화 안 되는 게 있어요. 그럼 소화되는 건 어? 내가 마음이 열리고 뭔가 이 부처님 본문에 이 무분별지에 조금씩 가까이 가고 있나 보구나 하고 그냥 소화되는 대로 소화하면 돼요. 그건 자연스럽게 소화된 거니까 저절로 근데 소 안 되는 게 있을 때 소화를 억지로 시키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조작하면 안 돼요. 주로는 소화 안 되는 게 있을 때 머리를 굴려서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거든요. 그러면 이제 공부는 끝난 거예요. 아니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그래서 이게 되는 부분이 있을 때는 그냥 마음이 열려 있으니까 이게 저절로 이렇게 가슴으로 소화가 되는구나. 이러고 됐어요. 그러면 좋아할 것도 없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오면 머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거기서 확 막혀 있으면 돼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끈과 즉 법문을 듣다가 오늘 법문 중에 한 80 프로는 알아듣겠는데? 20 프로 모르겠어요. 그러면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법문을 듣냐 하면 그 20 프로 모르는 법문 있잖아요. 그거는 이 뇌의 작용이 우리 뇌가 자동으로 그런데요. 내가 안 그러고 싶어도 뇌는 뭔 정보를 듣는데? 내가 도저히 소화가 안 되는 정보잖아요. 내 마음 안에 그 지식이 있는 얘기를 법문에서 하고 있거나 내 안에도 있는 얘기를 책에서 하면 너무 동감이 공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책의 밑줄을 긋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책 읽다가 밑줄을 긋는 거는 그 책을 읽는 게 아니고 그 책하고 내 생각하고 같은 생각에 줄쳐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생각을 강화하는 거죠. 그 책을 진짜 읽은 게 아니죠. 내 생각을 강화한 거예요. 근데 법무는 그렇게 듣는 게 아니에요. 법문의 책도 그렇게 읽는 게 아니에요. 80 프로 알아듣는 거 있으면 그건 그냥 내려놓으면 돼요. 그냥 그리고 그날 이해 안 되는 내용이 꼭 한 두 가지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에 첫 막혀 있어야 돼요. 그게 어떤 게 어떤 구절이든 괜찮아요? 거기에 탁 막혀 있어야 돼요. 막혀있다는 건 뭐냐 하면 몰라야 돼요. 모른다. 오늘 했던 법문 중에 오늘 법문들 중에 난 이 내용이 도저히 죽었다 깨나도 소화가 안 된다. 내게 되지 않는다. 소화가 되지 않는다. 억지로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애초에 포기했고 척 안 되는 게 있는데 그걸 정말 나도 알고 싶다 깨닫고 싶다. 근데 난 모르겠다. 그럼 어떨까요? 심정이 머리를 이해하지 말라고 했고 노력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걸 잘 깨닫는 가슴으로 소화시키는 방법이 따로 없어요. 방법이 없어요. 길 없는 길이에요. 방법도 없어요. 해도 안 돼요. 노력해도 안 돼요. 머리 굴려도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확 막히는 거죠. 그 의문에 모르는 의문의 확 막혀서 사로잡히는 거죠. 그런데 믿음이 있을 때 믿음의 힘이 여기서 중요한 거예요. 믿음이 있을 때 저 본문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소화가 안 돼. 그런데 부처님 법문이고 불법 승 삼 불의 가르침이니까 내가 모르는 거겠지. 내가 아직 계단을 만한 시절 인연이 안 됐으니까 못 깨달은 거겠지. 그래 내가 머리로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머릿속에 꽉 막혀 가지고 이거에 대해서 간절함 하나 이걸 내가 언젠가 소화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간절함으로 해결하겠다 하는 말씀을 하는 거예요. 발심 그 발심이라 해요. 마음을 낸다. 이 문제 해결하겠다는 마음을 낸다. 그걸 다르게 말하면 화두가 들렸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사람마다 화두가 다 다르죠. 이렇게 범문됐다가 저절로 하루가 탁 걸리는 거예요. 이거 옛날 우리 저 전통 불교에서 얘기하면 너 화두 탔어? 난 화두 탔어. 이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큰 스님한테 가서 화도 타야 되는 줄 안단 말이에요. 뭐 그럴 수 있죠. 이제 그것도 그렇게 하는 공부에서는 또 그렇게 될 수 있죠. 그런데 우리들이 여러분들이 어디 컨셉에 화도 주는 컨셉 만나기도 쉽지 않아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만났어요. 만나가지고 선생님 저 화도 하나 주세요. 하드 쳤어요. 뜻 앞에 잔나무라는 하둘 받았어요. 이제 집으로 갔어요. 집으로 가는데 그 화두가 들려요? 뜻 앞에서 나무가 궁금해요. 뜻나무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궁금해야 되는 건지를 알아요? 자기가 시절 인연이 아직 안 되면 어떤 그 문구를 만나도 하도 문구를 만나도 그게 나에게 화도 돈발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옛날 초기 선불교 육조 회능 스님 또 초조 닮아 스님에서부터 육조 현행 스님까지 또 그 해능 스님의 직계 제자들이나 한 100년 전후의 그 선의 황금기라는 시대 그 시대의 초기 선사. 스님들 욕조 마조 황벽 임제 조주하는 이런 걸출했던 선사 스님들은 화두를 주고받고 이러지 않았어요. 그냥 매일같이 법문을 하셨어요. 아침 저녁으로 매일 방문을 하셨어요. 마치 부처님처럼 한때는 그 동네 사는 마을 신도님들이 아버지 법문 듣고 또 한때는 스님들이 법문 듣고 줄기차게 끊임없이 법문을 사라졌어요. 그리고 남은 시간은 일하는 거였어요. 그때는 선불교의 초기라 선불교 법문을 이해하는 신도님들이 잘 안 계시니까 대중화가 잘 안되고 그러니까 신도님들이 선불교 사원에 가서 보질 않아하는 거죠. 그리고 또 이 선불교는 어디에 의지하지 않았습니까? 국가에 의지하지도 않았고 국가의 호국불교 이래가지고 국가의 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신도님들한테만 의지하지도 않았고 그냥 발심을 하고 공부하는 게 중요하니까 저 산 분지 같은 지형에 가기도 힘든 곳에 앉아서 올 사람만 알아하고는 출가한 스님들 데려다 놓고 법문을 시켰단 말이에요. 그러니 자급자족 아니면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루 종일 일하는 거였어요. 그냥 그게 수영이었어요. 일하는 게 수영이었어요.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법문을 듣다 보면 안 들리는 게 있는 거예요. 죽었다 깨어나도 내 머리로는 이해 안 되는 게 있어요. 근데 이제 요즘 같이 똑똑한 사람들에게 치명적 단점은 뭐냐면 그 안 들리는 법문이 있을 때 요즘 사람들은 배운 게 많아 가지고 앎에 아르마리의 자원이 많아가지고 기이 이해를 해버리고 말아요 공하다 이런단 말이에요. 무하다.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야? 공하다 공은 스스로 깨쳐봐야 하는 거였고 무한은 스스로 진짜 내가 없네. 이게 가슴으로 감탄사로 터져 나와야 된단 말이야. 그냥 저절로 그런데 어 가만히 있어봐. 이게 요렇고 저렇고 저러니까 무화과 맞네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양자물리학에서 보니까 아 뭐 무슨 세포가 쪼개고 쪼개니까 세포가 되고 뭐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쪼개긴 무슨 뭐 쿼크가 되고 그거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없네 공인해. 우와 대박 오늘날 불교 알았어.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야. 그렇게 반야신경공부하고 나면은 이제 뭔 얘기를 하냐면 반야신경을 두고두고 스님들마다. 네 반야신경 강의 금강건강이 맨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법문 들으러 오세요. 그러면은 뭐라 하냐면 아이고 스님 제가 20년 전에 반에 성경 뗐죠 10년 전에 금강님 뗐죠 불교 대학은 요즘에 전국에가 보세요. 불교대학이 없어요. 이미 다 때가 때산 때가지고 이제 불교대학 갈 필요가 없어요. 불교대학을 머리로 떼는 건 줄 알아서 그래요. 머리로 이해한 거죠. 그건 서원의 방식으로 불교대학을 다니고 경전 공부한 게 아니에요. 막히는 게 귀한 줄 알고 공부를 했어야 되거든요. 근데 이해하면서 공부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초기 선의 방식은 계속해서 법문을 해요. 여러분 그 육조 단경도 그렇고 황벽으로 뭐 임제어로 마주오록 이런 걸 읽어 보면요. 물론 이제 이 선문답에서 확 막히는 부분이 일부 있고 그거 말고 그 선으로 읽어 보면 너무나 자상해요. 너무나 친절하고 그렇게 대뜸 갖다 때리고 뭐 소리 빡치르고 그냥 뜻앞에 잔나무야. 들어 이러고 말고 이러지 않아요. 너무나 친절해요. 이분이 손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친절해요. 이렇게까지 풀어준다고 싶을 정도로 친절하게 나오는 선오룩이 많아요. 황벽 오록 이런 거 정말 놀랍거든요. 또 문체조차 세련됐어요. 놀랍게 세련됐어요. 세르즈 서구에서 주 혼자가 그냥 문득 문득 어찌어찌하다 깨달은 사람들이 모임을 어디가 할 데가 없잖아요. 그러다가 이 선언이나 경전을 보고 아주 충격을 받으면서 자신의 공부를 더 확실하게 해나가곤 했다. 그래요. 이 선 어룩들을 보면 뭐랄까 완전히 아름다움에 매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자상하게 매일같이 법문들을 주셨단 말이에요. 그럼 법문을 듣다가 스스로 뭔가 쾅 막히는 부분이 있어요. 모르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직지해 주는 부분에서 주목을 해요. 그럼 거기서 쾅 막히고 모른단 말이에요.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르지만 이건 진리가 확실해. 내가 머리로는 절대 이걸 해결할 수 없어. 그런데 승부 불법승 삼부에 대한 믿음이라 그러잖아요. 세 번째 믿음이 승부에 대한 믿음이거든요. 스님에 대한 믿음. 부처님 법을 공부하시고 부처님을 믿고 그 밑에서 공부하신 스님들이라면 고짓을 선하실 이유가 없지 않아 아니냐. 그럼 이 법을 설하시겠지. 그렇다면 나는 내가 스님보다 더 잘났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런 생각하면 공부를 못하는 거예요. 내가 이 공부에서만은 나는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이 믿음 하나 가지고 그냥 밀어쳐보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답도 없고 해결될지도 모르고 나는 죽어도 해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죽어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나? 내가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나? 딴 사람 다 돼도 나는 안 될 거야. 이런 확신에 찬 믿음이 막 들 정도로 어 공부에 믿음이 안 생겨요. 그럴 때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믿어보자. 내가 난 안 될 거야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리고 나는 안 될 거야 라는 자기 생각이잖아요. 나는 안 될 거야. 그 진실한말이 자기 생각이잖아요. 본별심이잖아요.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난 안 되는 쪽일 거야. 분별심이잖아요. 되고 안 되고 둘로 나누는 거잖아요. 그 분별조착하는 거예요. 어 무심수거라는 말이 있어요. 마음이 따라갈 수 갈 것자 마음이 마음에서 올라오는 온갖 생각들을 따라가지 마라. 무심수고 마음이 따라가는 걸 하지 마라. 마음에서 온갖 생각이 올라올 때 그걸 따라가지 말하는 소리예요. 이 공부하려면 내가 해도 되겠어. 난 안 될 거야 지금 방법도 모르는데 노력해도 안되네? 노력을 어떻게 드는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무기력감 있잖아요. 이 공부에 대한 뭔가 무기력감이라고 안 뭐 하지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방법도 없어서 온통 쾅 막혔는데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선발이 다 잘린다는 표현을 써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리가 뭐 할 때는 몸으로 하고 손으로 하고 발로 하잖아요. 근데 할 수 있는 도구가 다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컴 막혀서 일도 진도가 안 나간단 말이에요. 근데 그럴 때 뭐 힘으로 가요. 믿음의 힘으로 가요. 발심의 햄으로 가고 신심과 발심이 그래서 중요해요. 그럼 그래. 모르겠다. 그냥 믿고 해보자. 가보자. 그냥 저 스님만 믿고 가보자. 부처님 법문만 믿고 가보자 부처님만 믿고 가보자. 이렇게 불법성 삼부에 대한 믿음이 생긴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불법성 삼부에 대한 믿음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저희 인사스님이 이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하나가 더 있다 이러시더라고요. 뭔 다 아는 거지만 교리석으로는 뭐 모르겠어요. 저는 좀 생소한 얘기였어요. 내가 좀 있다는 게 그래서 화가 났더라고요. 하나가 더 있다. 그 똑같은 얘기긴 해요. 근데 불법 승 3 부와 자성을 믿어야 된다. 자기 성품을 믿어야 된다. 불법승 선복 어디 있어요? 내 바깥에 있을까요? 불법승
삼부는 안밖에 없어요. 부처님은 내 안에 있는 부
내 안에 있는 부처가 아니에요. 자꾸. 바깥으로 쫓아가니까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바깥으로 내 쫓아가는 사람한테는 야 약간 잠깐 너 안에 있는데 못 자고 밖
가노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죠 그런다고 해서 그걸
밖에 있는 걸 딱 멈추고 이제 안으로 들어가 찾으면 그 사람은 안밖이라는데 속고 있는
거예요. 불성의 안이나 바깥에 어디 한 군데 있겠어요? 내외 명철 안밖에 없어요. 그냥 허리 꿰뚫어서 밝아지는 거지.
안팎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부처였네. 이걸 깨닫는 게 아니라
가 사라지는 온통 부처밖에 없구나. 온 우주 만상 삼라만.
삼라만상 모든 것이 다 마음밖에 없구나. 삼계가 USIM이구나. 3개 오직
마음이거나 이렇게 새끼 무슨 우주 하늘나라까지 전부 다 이 마음뿐이구나 요걸 깨닫는 거거든요. 이게 자석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자기 성품도 붙여줘 여러분 자기 성품 자성 자기 진정한 나 자성이 없으면요 여러분
손을 이렇게 이렇게 할 수 있죠. 손을 들었다 갔다 할 수 있죠. 지금 숨 쉬고 있죠 숨쉬고 있죠 그 숨쉬게.
하는 그 힘이 뭘까요? 누가 숨을 쉬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제 얘기를 듣고 있었죠. 제 숨 쉬고 있지는 않았잖아요. 근데 숨은 쉬운 줄 알아서 쉬고 있어요? 뭐가 깨어가지고 이렇게 숨쉬기 해요.
밥 먹은 거 왜 저절로 소화가 되고 있고 저절로 걷
있고 저절로 운전하고 있고 제가 운전을 하는 이 힘이라
그랬더니만 어떤 분들은 본인 머리로 이해해 가지고 이게 돌
고 돌다 몇 사람 돌았나 봐요. 그러니까 야 운전을 하는 이 힘이야. 이런 얘기를 하다가 누가 저한테 와서
님 그 운전하다가 하는 힘은 저는 그 원전 학원에 가서 배우기
기 전에는 몰랐다가 배우고 나서 알았고 누구는 운전을 잘하고 누구는 운전을 못하는데 그분
배우 익힌 거잖아요. 당연하죠. 누가. 그거 얘기를 한 거예요?
이거거든요. 근데 선을 얘기를 한 게 아니에요. 이걸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선사님들 말하는 거죠. 손가락을 들어 올린단 말이에요. 손가락 들어 올리는 거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운전사 사고 갈 때도 운전하는 그 능력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이 손 드는 이 능력을
손가락 얘기하는 거 아니거든요. 온 세상 이렇게 펼쳐지고 있는 이 드러나
고 있는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이 이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이랄까요 추동력이랄까요?
일치삼라만상 모든 게 여기서 나왔단 말이에요 다 똑같은 하나란 말이에요. 하나에서 나왔단 말이에요. 자기 아까 확인해 보세요. 마음에서
않은 게 있나? 여러분? 인생 삼라만 산 게 전부 다 마음 위에서 벌어진 어떤 이야기 아니에요? 여러분? 10대 때 내가 공부를 잘했어 공부를. 못했어라는 인생이 있었죠. 친구랑. 친했던 친구도 있고 안 친했던
있었죠. 근데 그거 지금 여기서 마음으로 떠올리지 않으면 그 생각이 있어요. 10. 년 전 20년 전 30년 전이 그때 거기 얘기가 아니죠 시간과. 공간적으로 딴 데 있는 얘기가 아니죠 나의. 과거 얘기가 아니
나의 과거를 어디서 떠올려요? 지금 여기에서? 떠올리고 있죠. 그 과거가 비참했어 괴로웠어라고 생각하기도 할 수 있죠. 근데 이렇게. 어른이 되고 나서 내가 너무 성장을 했고 너무 내가 너무 마음
들어졌어요? 너무. 행복해졌어요. 그러니까. 내가 살아온 인생 전체가 너무 마음에 들고 마음이 열리고 너무 행복해요. 그러면. 어쩌면 10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나를 이해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까 내가 어릴 때 내가 그 공부도 못했고 친구들한테 욕도 먹었는데 그것조차 아름다워 이럴 수도 있잖아요. 그럼 보세요 어떨 때는 마음에서 10대 때의 어떤 일이 행복했어? 이러고 어떨 때는 아 그때 난 불행했어. 이러잖아요. 그럼 분별심이 나는 그때 행복했어. 이랬다가 어느 날 분결심은 나는 그때 불행했어. 이러죠. 그러면 그때는 불행한 거야. 행복한 거예요? 지금 내가 어떻게 달라지냐에 따라서 이십 년 전 30년 전이 달라지지 어디서 달라져요. 지금 눈앞에서 달라지죠. 그리고 보세요 20대 30대는 그때 그 힘든 일이 있었어. 그때 참 힘들었는데 하고 생각하는 것도 여유 나죠. 아 그때 생각해 보니까 그때는 좋았어. 좋았어 해도 그 좋았어도 지금 여기서는 할 생각이죠. 분별이죠. 그런데 좋았어 하는 마음 싫었어 하는 마음이 마음 아니에요? 이 하나의 마음 위에서 때로는 좋았어를 쓰고 이 마음 가지고 좋았어라고 분별도 하고 싫었어라고 분별도 하잖아요. 내가 어느 날은 내가 마음에 들어하고 분별도 하죠? 어느 날은 내가 참 마음에 안 들어하고 분별하죠. 이렇게 분별심은 계속 달라지죠. 바뀌죠? 그런데 분별할 줄 아는 좋을 때 좋은 줄 알고 싫을 때 싫은 줄 알고 있을 때 있는 줄 알고 없을 때 없는 줄 알고 10대 때는 참 괴로웠어 아니면 행복했어 힘들다 좋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하고 이 비추고 있는 이 살아있는 그 경험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어요 이 마음이 아니면 여러분이 10대 때를 떠올릴 때 여기서 십 대 때 내가 요만할 때 어떤 친구랑 둘이서 있었던 어떤 이미지가 여기서 그려지잖아요. 어서 그려져요. 그 그려지는 그 그림이 마치 거울 위에 비춰진 모양 모양 같지 않아요? 마치 꿈 같지 않아요. 꿈처럼 여기서 눈 뜨고 있는데 버젓이 10대 때 이미지가 상으로 떠올라요. 뭐가 그걸 떠올리게 했어요? 마음이 아니면 어떻게 그걸 떠올릴 수 있어요? 이 마음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비추어져요 그게 그 길이 드러날 수 있어요. 비춰주는 내용을 보고 좋다 나쁘다 하는 건 분배심이잖아요. 지금까지 평생 그 내 인생 좋았니 나빴니 하고 분배심 따라다녔는데 이제 이 선에서는 여태까지 분배심 쫓아다니면서 인생이 좋았니 나빴니? 삶이 좋으니 나쁘니 하든 그거는 분별 망상이니까 그건 좀 잊고 그 모든 게 어디서 어디서 드러나고 있느냐 무슨 마음이 그걸 다 드러내고 있느냐 좋았다가 이 마음있고 싫었다가 이 마음 아닙니까 여기서 이 거울 같은 마음 위에서 좋았다가 드러나고 싫었다가 드러나고 모든 상이 그렇게 드러나지 않아요. 이란이라 그 전쟁 나는 모양이 이렇게 그려지고 우리나라 무슨 배가 한 대 불탔다. 우리나라 배가 이렇게 불타는 것 같은 상상이 여기서 지금 이렇게 그려지잖아요. 여섯 생각이 떠오르잖아요. 그럼 그게 저쪽에 있는 배가 불타는 거예요? 자기 마음이 불타는 거예요 자기 마음의 일이잖아요. 왜 그거 그런 일이 있어도 그 관심 없는 사람 많잖아요. 그럼 그게 있는 일로 만드는 건 누구예요? 그게 실제와는 존재하는 일로 만드는 건 누구예요? 자기 분별심이죠. 어떤 사람은 그 일을 좋게 분별해서 좋은 쪽으로 재착하고 싶고 어떤 사람은 그걸 싫어해서 싫은 쪽으로 밀어내고 싶어요. 그런데 밀지 밀어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취사 간택을 버리면 그냥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는 일에만 있지 않을까요?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비추는 이 살아있는 이 비출주 아는 이 들을 줄 아는 요거 하나는 늘 여유하잖아요. 여유 부동 하단 말이에요. 여러분의 행복해도 행복하면 어디서 이렇게 쌓아 올라져요? 행복해 이럴 때 오늘은 너무 행복하네. 할 때 내가 행복한 줄 아는 마음이 있죠. 어느 내가 행복한데 행복함을 이렇게 비춰서 아는 마음이 있어요. 근데 그 행복이 싹 가고 오후에 누구 친구가 나한테 욕을 했어요. 갑자기 내 오늘 괴로워졌어요. 그 갑자기 나 괴로워졌네 하고 이걸 이렇게 비추는 마음이 있지 않아요. 그 마음은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거든요. 그러니까 이 년 따라 모든 걸 다 비춰요. 좋은 것도 비추고 나쁜 것도 비춰요. 근데 비춰지는 모양을 따라가서 좋다 싫다 분별하는 것이 분별 망상의 중생들에 죽을 때까지 그거 하는 거예요. 내가 잘났니 못났니 늙었니 젊었니? 부잔이 가난하니 행복하니 불행하니 하면서 그러니까 끌려다니는 거죠 그게 죽을 때까지 경계에 끌려다니는 거예요 그 대상에 끌려다니는 거예요 그렇게 떠오르는 모양은 전부 다 대상이죠. 분별상이죠 상 경계죠 경계 근데 그 모든 상을 드러내고 있는 마음 하나만 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건 볼 수가 없어요. 마티스도 가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분명히 마음이 이렇게 살아 있단 말이야. 마음이 살아있어요 이렇게 마음이 살아 있어요. 하루 눈 딱 뜨자마자 눈 떠서 보이는 모든 걸 볼 때마다 좋은 걸 보든 나쁜 걸 보든 보는 놈이 살아 있어요. 좋은 소리 듣고 나쁜 소리 듣고 칭찬 듣고 비난 듣고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어떤 소리가 들리든 그 소리가 알아차려질 때 그 알아차리면 살아 있잖아요. 야온에서 살아 있고 마삼 근에서 살아 있고 거룩한 법만에서 살아 있고 욕설에서 살아 있어요. 모양 따라가지 않으면 삶의 모든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잭잭잭잭 소리가 듣듯 모든 소리가 전부 다 이 법을 드러내고 있어요. 법을 확인시켜 주고 있어요. 직지 인심 아닌 게 없어요. 삶의 일구 쓸적 전부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청 느끼고 생각할 때 모든 순간에 이게 먼저 있어요 여기에서 그 모든 분별이 그려지는 거예요. 그림처럼 그래서 마음은 허엄경에서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허가와도 같아서 삶의 모든 이야기를 그려낸다. 왜냐하면 여러분 자산없다. 못 살았다 하는 게 실제 자산것도 없고 못 사는 것도 없는데 자기가 그림 그린 거거든요. 나는 잘 살았어라고 이야기를 펼쳐낸 거거든요. 나는 못 살았어라고 이야기를 펼쳐낸 거거든요. 학교 다닐 때 어느 대학을 갔어요? 근데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을 갔는데 놀라운 일이 있어요. 그 그 대학을 갔잖아요. 그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은 모르겠는데 상위권에서 더 높은 데 갈 수 있었는데 떨어져가지고 여기를 간 친구들 같으면 이 대학 다닌다는 게 너무 싫고 서글프고 그 위에 더 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누가 어디 대학 갔냐면 대학 얘기를 쓱 안 해요. 여기 다니는 게 부끄러운 거예요. 나는 더 높은데 갈 수 있었는데 못 갔다라는 생각 때문에 부끄러워하기도 하더라니까요. 근데 나는 훨씬 밑에 갔어야 되는데 이 제약을 왔다. 그 사람 평생 언제쯤 대학 얘기 안 나오나 하고 내가 때가 내가 자랑하고 싶은데 이럴 수 있어요. 부모님들도 그렇고 그럴 수 있잖아요. 똑같은 학교를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상황인데 자기의 헤아린 판단 분별이 다른 거죠. 똑같이 10억이 있고 백억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가난해서 부끄럽다 되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 내가 이렇게까지 돈을 많이 벌 수 있냐고 하고 그럴 수 있잖아요. 다 분별이에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잘 살았다 하면 분별망상 쫓아간 거예요. 나는 못 살았어 해도 분별망상 쫓아간 거예요. 정견하면 어떨까요? 있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면 이 세상의 잘 산 사람 아무도 없어요. 못 산 사람도 아무도 없어요. 근데 뭐만 있어요 다 이렇게 비추어지는 있는 그대로 실상만 있단 말이에요. 뭐가 실상이에요. 제법이 실상이에요. 뭐가 제법이에요? 있는 그대로 왜 이 현상에다 대고 해석하지 않으면 판단 분별 따라가지 않으면 그러는 모든 게 실성이죠. 고양이가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으면 고양이 듣는 그대로 고양이로서 완장하잖아요. 푸른 풀대로 완전 저하고 소나무 선화무대로 안전하고. 근데 민들리 꽃이 나는 강렬한 장미가 되고 싶어 하거나 나는 저 소나무처럼 우뚝 서고 싶어 하면 하면서 저게 되는 게 평생 소원이라고 하고 집착하면서 살았다면 평생 괴롭겠죠. 윈들레는 지 업이 민들랜데 민들레 업으로 사자가 될 수 있어요. 소나무가 될 수 있어요. 불가능한 걸 하려고 하니까 괴롭죠. 우리가 그러고 있다니까요 민들레기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나로 살면 나는 나예요. 맨들레가 민들레듯이 나는 나예요. 사는 산이고 물은 물이에요라는 나예요. 얘는 얘예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산이 왜 물이 되려고 하고 물이 왜 산이 되려고 해요? 있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배워야 되는 건가요? 더 잘 보거나 못 보는 거 있잖아요. 나는 잘 살았어 못살았어 하고 이거는 학교에서 배우는 거예요. 근데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배우는 거는 배울 필요가 없어요. 다 주어져 있는 거예요. 볼링 자기예요? 지금 여기에서 내가 뭐가 되고 싶지만 않으면 지금 다 돼 있어요. 뭘 갖고 싶지만 않으면 가족은 다 가지고 있어요. 해야 된다는 생각이 집착하지 않으면 할 게 없어요. 일을 다 해마쳤어요.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아요. 왜 나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다 일을 다 해 마쳤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좀 있으면 배가 고파요. 그럼 밥 먹어야 돼요? 그럼 밥 먹는 일을 해야 돼요? 근데 하드에 함유 없이 하는 거예요. 저절로 하게 돼 있어요. 화장실 가는 거 나는 언제 어떻게 계획을 세워서 화장실 갈 거야? 안 해도 그냥 알아서 알아서 가게 돼 있어요. 그냥 계획 안 세워도 음 저절로 이렇게 사실은 지금 지금 완벽하게 저절로 삶이 펼쳐지고 있어요. 내가 삶을 산다는 생각 때문에 그 아상 때문에 자꾸 남들하고 비교하면서 남들보다 내가 더 못산다. 난 부끄럽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 걸 진짜라고 믿었던 거예요. 그 망상을 믿고 살았던 거예요. 그가 그렇죠 그 지금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보는 건 하는 게 아니에요. 돈별만 따라가지 않으면 생각만 따라가지 않으면 바로 늘 드러나 있는 진실이에요. 드러나 늘 드러내는 진실이에요. 이거 뭐 따로 보려고 애쓰는 게 아니에요. 애쓰지만 알면 그냥 저절로 보이는 거예요. 근데 눈으로 저걸 보듯이 여기서 저거를 확인하듯이 그렇게 대상화시켜서 볼 수 있거나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거 너무나 다 확인할 수 있는 건데 낯설어서 그래요. 여러분 한 분도 안 해본 방식은 낯설잖아요. 여러분이 성인이 돼가지고 어떤 예를 들어 한 번도 안 먹어본 음식이 있을 수 있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제가 강렬한 기억에 나는 게 느좋 태어나서 전라도도 가본 적이 없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전라도를 가던 어느 날 그 전라도의 어느 현지인분이 대학 다닐 때 현지인분이 여기 와서 이거 안 먹으면 넌 전라도 안 온 거라 이러면서. 그래서 거기 밥집을 데리갔는데 어머 완전 삭제했는데 제대로 맛집 홍어래요. 근데 저는 냄새만 맡고서 벌써 일단 일단 뜨고 싶었어요. 잘 뜨고 싶었으나 여기서 이걸 먹지 않으면 너는 하도 그렇게 얘기를 하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맛있게 먹으라고 이 비싼 거니까 많이 먹으라고 내가 입 하나 돌어주겠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먹으라고 그러는 바람에 입에 넣는데 한 두세 번 씹었는데 진짜 아 또 이렇게 얘기하면 또 그분들이 힘드실 테니까 이게 뵙고 싶은 거예요. 너무나도 뵙고 싶은 마음이 큰데 옆에서 계속 이 친구들이 3킬로 3kg 하도 그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걸 삼키고 나서 아 묘한 정말 태어나 처음 느끼는 그 묘한 그 경험 그런 느낌이 있었거든요. 태어나 처음 보니까 너무 낯선 거죠. 난생 처음이니까 그런 경험 도대체 그걸 왜 하는지를 모르겠는데 이걸 왜 먹는지도 모르겠었단 말이에요. 음 또 바쁘게 얘기할 수 없는 게 오징어나 음식 다 그래요. 사실은 처음에는 못 먹겠어요. 우리 절에서 고수도 처음에는 못 먹겠어. 이걸 왜 먹지 굳이 이걸 뭐 왜 먹지? 이렇듯이 그렇게 이 세간의 것도 낯선 거는 어렵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공부 왜 안 되는지 아세요? 여러분이 낯설 정도가요 여러분 상상을 초월하는 낯선 거거든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간접 경험이라도 안 해본 게 없어요. 세상의 것은 세상의 것은 간접경험이라고 아예 본 게 없어요. 여러분 유럽 가고 뭐 미국 가고 뭐 아프리카 가고 인도 가고 뭐 온 세상에가 가지고 그 나라에만 있는 거 새로운 거 해보세요. 얼추 비슷비슷해요. 다 거서 거기예요. 한국에서 경험했던 이거랑 비슷하다 저거랑 비슷하다 다 분별 가능해요. 비교 가능해요. 아 근데 딱 하나 요 마음만은 너무나 낯선 거예요 한 번도 이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안 해본 거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으로 불성을 이런 걸 거야라고 법문을 많이 듣다 보면 이렇게 그림을 그려요. 제가 장담을 해요. 그거 아니에요. 그거 아닐 확률 어 뭐 100%. 그거를 이런 걸 거야라고 해서 그걸 찾아나서는 게 추구심이고 그걸 찾아나서는 상만 만나요. 그 비슷한 걸 만나 놓고 나서 깨달았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걸 뭐라 했냐면 아 산이라 그래. 아산 법상이라 그래요. 법을 만난 게 아니라 법이라는 모양을 만난 거예요. 대표적인 게 열심히 기도하거나 열심히 수행하면 놀라운 체험 어떤 삼매 체험 무슨 차크라고 왔다 갔다 하는 체험 희한한 체험들을 할 수 있어요. 그거는 뭐 제가 학생들 데리고 옛날에 수련들을 많이 해봤어요. 근데 많이 하다 보니까 이게 제가 막 요령이 생겼다? 이 친구들한테 수련대. 뭔가 맛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자꾸 생겨가지고 자꾸 제가 약간 삿댄 쪽으로 애들이 데리고 가더라고요. 사탄 쪽은 아니지만 자꾸 체험하는 쪽으로 뭔가 기도 여러분 젊은 청년들 들다 놓고 몇 방 며칠 수련대를 하면서 기도나 수행을 막 계속 시키잖아요. 그러면 희한한 체험들이 다 일어나요. 별 희한한 체험들이 다 일어나요? 체험이라는 거는 되게 쉬워요. 체험 일어나게 하는 거는 사실은 조건을 딱 갖춰주고 그냥 몰아붙이면 밀어붙이면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어떤 기존에 내가 느껴보지 못한 어떤 체험을 하면 어떤 체험이 새로 생겼잖아요. 그럼 어떤 게 생긴 거잖아요? 그러면 없던게 생긴 건 인연법이잖아요. 인연법으로 생겨난 거잖아요. 그러니까 언젠가 사라져요. 생겨난 모든 건 사라지거든요. 그러니까 진짜 체험이 아니에요 진짜 법이 아니에요. 법에 대한 상을 체험한 거예요. 내가 그림 그려놓은 이런 게 법일 거야라는 어떤 체험을 하고 나서는 내가 체험했나 봐 사실은 실제 견성을 한 사람도 바른 스승이 없으면 자신이 견상 채용을 하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세요?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 벌어져요. 본인은 분명 자기 성품을 체험했거든요. 그런데 이 자기 성품 체험하는 순간에 체험의 여운 있잖아요. 감정으로서 쏙 내려가는 체험이라든지 뭔가 감염 처음이라든지 체험적 감정 느낌 쪽으로 오는 그 여운이 있어요. 그게 너무 강렬해 가지고 그걸 붙잡아서 곡을 체험으로 삼아 버려요. 그리고 진짜 확인한 거는 이걸리 없거든요. 생각으로는 이걸리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이건 희미하게 사라진 채 내버려두고 자기는 그 체험을 붙잡고서 또 10년을 다시 그 체험하려고 갈고 닿는 사람이 옛날 같으면 엄청 많았어요. 지금 같으면 그래도 그거 아니야라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좀 바로잡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서 이 이게 진짜 체험인지는 스스로 알 수 있어요. 어떻게 스스로 할 수 있냐면 없던 게 생겨난 거잖아요? 그럼 베풀 아니에요. 어제까지 없었는데 오늘 새로 생겨서 이러면서 너무 신나고 너무 기뻐가지고와 드디어 내가 이걸 드디어 확인했거나 나한테 없었는데 어제까지 없어 오늘 새로 생겼어. 아니에요 100% 아니에요. 이거 제대로 채무를 하고 나면 허탈하거나 어이없거나. 물론 이제 쑥 내려가는 환희심의 체험도 있을 수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너무 추구해 왔고 너무 간절히 바래왔는데 이걸 확인하고 나니까 힘이 푹 빠지는 거예요. 그리고 더 이상 이제는 내가 더 이상 막 괴로워할 필요가 없잖아요 할 것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좀 가벼운 느낌이 들죠 당연히 그런데 그 느낌이 들기 전에 아니면 그 느낌이 든 이후에 어떤 느낌이 드냐면와 이게 진짜 어이가 없다. 말이 돼? 자꾸 다시는 묻고 싶어요. 이게 이게 정말 이거라고요?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거 있으면 내가 왜 이 짓을 했죠?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 몇십 년을 고생을 했죠. 근데 참석을 왜 한 거죠? 그러면서 때론 이런 스님들도 있어요. 나 옛날에 10년 동안 이 수행 시키고 저 수행 시키고 일과 시키고 저거 시킨 아니 그놈을 그냥 내 붙잡아 가지고 따지고 싶다고 하거나 이런 막 화도 나고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이거라면 이건 언제나 했던 건데. 이건 내가 한 번도 없은 적이 없는데. 그럼 어이가 없어요. 그리고 이상해가지고 옆에 없앴사람을 쳐다봐요. 남들을 봐요 이 사람이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이거 어떻게 부를 수 있지? 그래서 옆에서한테 한번 물어봐요 이거 그냥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죠. 이렇게 물어봐요 너무 말이 안 돼요 너무 당연한 거를 그래서 진짜 제가 진짜 속았단 소리가 단단들었다니까요. 왜 속았다는 소리가 들냐 하면 불교 하면요. 우리는 불교를 뭐로 불교로 하라 그랬냐 하면 사찰에 가면 의리한 전각과 그 안에 엄청난 막 오색창연한 그 단청과 막 엄청난 막 그 뭐 불쌍과 장엄 장엄물이 너무 많아요. 불교 안 해. 장엄한 것들이 엄청 많잖아요. 그걸 보니까 불교에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게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교가 어마어마한 게 많아. 이렇게 생각했다니까요. 제가 어리석었던 거죠. 분명히 불교에서는 그건 이런 건 다 방편이라고 얘기를 다 했단 말이에요. 근데 그런 걸 보고서는 실제 그게 뭐가 있는지 알았어요. 저는 제 혼자 속은 거죠. 제 생각에 속은 거죠. 제 분별심에 속은 거죠. 그리고 나서 속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불교가 날 속인 게 아니라 내가 나한테 속은 거였어요.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제가 옛날에는 바른 스승이었고 다른 법이 없었는데 요즘엔 도인들이 많아졌어.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나중에 보니까 언제나 노인들은 많이 계셨어요. 그리고 언제나 불교 서점에만 가도 옛날에도 20년 30년 전에도 이 바른 법을 펴는 책이 있었어요.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제가 그때 이집트 때 그 책을 수없이 읽었어요. 그리고 이 책 좋은 책이야라고 말까지 했어요. 근데 머리 수준에서 이해해가지고 좋은 책이라고만 생각했던 거예요. 그 집 면목을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피상적으로만 봤던 거죠. 그래서 이렇게 바른 법에 대한 불법성 삼부와 자기 성품 자기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돼요. 언제나 사성은 언제나 한결같고 언제나 내가 이 자성을 쓰고 있다는데 지금 이렇게 손 하나 들 때 밥할 때 빨래할 때 설거지할 때 길을 걸을 때 숨을 쉴 때 모든 순간에 그래서 털 끝만큼이라도 움직임만 있다 하면 막 전부 다 법 아닌 게 없다. 이러고 임훈 뭐 자제 이런 말이 있어요. 이문 임 맡긴 임자 맡겨라 운은 뭐냐면 삶을 어떻게 운영할 건지 어떻게 운행시킬 건지 내 삶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 건지 움직인다는 거 움직이는 모든 것들 삶에서 움직였다 하면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전부 다 맡겨버려 예술이거든요. 지금까지 우리가 삶의 모든 운행 모든 움직임을 어떻게 했어요? 내가 주관했잖아요. 내가 이거 먹을 거야. 내가 저거 먹을 거야 내가 성공할 거야. 내가 실패하면 안 돼. 내가 이렇게 해야 돼 내가 저렇게 해야 돼하고 나를 내세워서 내 인생을 살았잖아요. 그게 어디서 구매해요? 내가 본래 없는데 내가 있는 줄 알고 이 몸뚱이를 나인 줄 착각하는 걔가 아상이거든요. 가짜 나란 말이에요. 근데 그걸 내 진짜 난 줄 알고 걔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고 집착하니까 못했을 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얘가 내가 아는 줄 바로 보기만 하면 할 게 없어요. 할 게 없으니까 맡기는데 내가 맡기는 게 아니에요. 이건 맡긴다는 말도 말이 안 돼요. 맡긴다 이러면 어떤 말이 어떤 느낌이 드냐면 내가 삶을 삶에 맡긴다. 내 인생을 부처님께 모든 걸 맡긴다. 이런 느낌이잖아요. 맡긴다는 말은 맡기는 내가 있고 맡기는 것이 있을 것 같잖아요. 그러니까 맡긴다는 말도 사실 적절치 않아요. 근데 뭐 어쩔 수 없으니까 맡긴다는 표현을 쓰는 거예요. 내가 사라지고 삶이 통째로 본래 내맡겨져 있음이 분명해요. 여러분이 생각 따라가지 않고 얘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냥 구경만 해보세요. 내가 얘가 얘가 내가 내 주인인 줄 알고 얘한테 자꾸 명령내려가지고 너 이렇게 살아. 저렇게 살아. 이건 먹지 마 저거 먹어. 이렇게 해야 되 저렇게 해야 돼. 이렇게 자꾸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내 뜻대로 내 인생을 운행시키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맡겨져가지고 저절로 온행되고 있는지를 한번 수동적으로 관찰을 해보세요. 삶의 구경꾼이 되어 가지고 그냥 구경해 보세요. 삶을 얘는 어떻게 사는지를 얘가. 갑자기 어느 날 배가 고플 거예요? 그럼 얘가 지가 알아서 먹을 걸 찾을 거예요? 그 귀신같이 찾고 그리고 제가 알아서 먹어요. 머리도 아무리 제이 천하의 제이여도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도 밥 먹을 때 따른 밥부터 먹고 그다음 뭐 먹고 그다음 못 먹고 순서 조절 좋지 않잖아요. 가만 구경하면 얘가 여러분 내가 밥 먹는다고 생각했잖아요. 얘가 여러분은 TV 보고 있는데 나중에 정신 차려보니까 밥 안 먹고 있지 않아요. 얘가 기가 막히게 지가 알아서 밥을 먹고 나서 똑똑한 게 들어가면 다시 촉촉한 걸 먹고 그 다음에 느끼한 걸 먹으면 또 매운 것도 먹고 물도 먹고 내가 하지 않아요. 그치 알아서 전자동으로 그냥 저절로 하지 않나요? 그 삶의 운행은 내가 시키는 게 아니에요. 본래 내맡겨져 있어요. 진리에 내맡겨져 있어요. 완벽하게 삶은 100% 운행되고 있어요. 저절로 우리가 전부 다 법신부처님이에요. 부처님에게 내맡겨져 있어요. 아니 허공 법신 전체가 자기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각자 다 내가 왔잖아요. 여기에 내가 온 게 아니라니까요. 하나가 하나의 부처님이 한 마음이 여러분 전체를 지금 운행시키고 있다니까요. 주인공은 하나예요. 그게 나예요. 근데 그 내가 나의 주인공이 남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아요. 석광의 부처님의 주인공과 내 주인공이 다르잖아요. 내 손에 이렇게 들게 하는 놈과 석감의 부처님 움직이게 했던 그 한 놈이 같은 한 놈이란 말이에요. 같은 한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 언니 뭐가 두려워요? 세상에 얘를 나라고 느낄 때만 두렵죠. 얘가 늙으면 안 되고 병들면 안 되고 죽으면 안 되고 얘가 좀 더 부자됐으면 좋겠고 할 일이 많잖아요. 얘한테는 여러분 얘의 노예가 돼 가지고 평생을 살짝 정을 하면요 해도 해도 할 게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얘는 특징이 끝도 없이 바라거든요. 여러분 지금 예를 들어 내가 평생 십억만 벌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꿈꾸는 사람 있을 수 있잖아요? 여러분 십억 벌어 보세요 얘가 오케이 하나. 희한하게 10억을 벌고 나면 주변의 친구들이 다 20억 30억 번 친구들이라니까요. 얘는 계속 바래요. 응 그 이에 따라 가려고 하면 진짜 가랑이가 찢어져요. 죽을 때까지 따라가도 못 따라가요. 음 이렇게 네 가지 믿음을 가지고서 어떤 행을 해야 되느냐? 삶에 이 스님께서 의사 선생님께서 오행이라는 설명을 원해주시는 거예요. 오행 다섯 가지 삶에서 행해야 할 것이 있다. 근데 사실은 이것도 방편으로 행해야 할 것 이렇게 말하는데 이게 저절로 그렇게 행해지고 있어요. 사실은 자기 분별만 따라가지 않으면 얘는 저절로 오행을 하고 있거든요. 근데 분별을 따라가면 이 다섯 가지 행이 안 돼요. 다섯 가지 행과 거꾸로 된 행동만 하고 살아요. 근데 본래 이렇게 구경꾼인데서 가만히 지켜보면 얘는 저절로 다섯 가지 행위를 하고 있는 애예요. 그리고 어 이 다섯 가지 행을 할 때 실천 수행을 할 때 조금 너무 과도하게 실천하려고 애쓰면 그건 유의 조작으로 넘어가 버려요. 그래서 그냥 가볍게 가볍게 뭐 실천하는 마음을 그냥 가끔씩 가볍게 써 주는 건 나쁘지 않아요. 너무 힘들지 않는 선에서 죽도록 노력해야 하지 말고 그래서 스님 제가 스님 시킨 대로 정말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정말 춥도록 수행하겠습니다. 국회 만들고 슬렁슬렁하세요.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몸으로는 죽도록 할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마음만 간절하면 되지. 마음 간절한 건 열심히 할 수가 없거든요. 이거는 마음 간절한 걸 어떻게 결심할 거예요? 열심히 하는 순간 벌써 그 간절함이 사라져요. 진짜 중도의 마음이 사라져요. 왜? 열심히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내는 순간 마음이 위의조작에 떨어지잖아요. 왜 열심히 한 게 있고 열심히 안 한 게 있잖아요. 둘로 나뉘잖아요. 그럼 나는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잖아요. 열심히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를 둘로 나눈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조작은 이 공부에 소통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방편으로 얘기하면 이걸 가볍게 실천해 봐도 나쁘진 않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첫 번째가 도시 보시 우리가 살면서 평생 해야 될 게 다섯 가지라는 거예요. 첫 번째 보시라 해야 된단 말이에요. 이 순서대로 순서대로 그 우리 공부를 무릎 있게 해줘요. 기가 막혀요. 이게 왜 그러냐면요 보시를 한다는 건 뭐냐면요. 남들을 돕는다는 거거든요. 누군가를 돕는다는 겁니다. 일체중생을 뭔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와준다는 얘기예요. 베푼다는 얘기거든요. 어떤 방법으로든지 누구를 베풀고 나면 남은 있잖아요. 기적이 벌어져요. 진짜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요. 어떤 방법으로든지 베풀고 나면은 어떤 기적이 벌어지냐면 이 세상이 왜 이러지 왜 자꾸 날 돕지 여기 가면 거기 있는 사람들이 나를 돕고 저기 가면 그 있는 사람이 나를 돕고 이게 필요하면 이게 이상하게 막 주어지고 저게 필요하면 저게 주어지고 그 희한일이 벌어져요. 이걸 이런 걸 보고 이제 선생님들은 갑이다. 이렇게 표현을 쓰는 거예요. 근데 그 갑이라기보다는 저 당연한 거예요. 보시를 하면 삶이 그냥 저절로 숱한해져요. 어디를 가든 희한하게 세상이 나를 보고 사람들의 나를 도우니까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삶이 순조로워져요. 그러니까 나한테 실비 가는 사람이 없어지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지고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때때로 공격하는 사람이 있어도 주변에서 알아서 막아줘요. 또 보기 많은 사람은 그러니까 어떻겠어요? 삶의 문제가 안 생겨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