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전란사를 보니 24일부터 왜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해서
24일에 가토 기요마사, 구로나다 나가마사가 떠나고
25일에는 모리 요시나리 등
26일에는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떠났다고 나와 있씁니다.
예 출처는 다시 말하지만 임진전란사입니다. 그런데 이 임진전란사에 '어느 사료'를 토대로 이런 후퇴 기록이 나와있는지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 임진전란사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부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실상 떠나지 않은 것이 되는군요. 고니시군을 기다렸다가 11월 19일 노량해전이 끝나고 고니시군이 도착하자 이제 5일간 수습기간을 거쳐서 후퇴했다는 것이 되는데....
이게 말이 될까요?
사실 어느 사료에서 이런 기록이 나와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이미 일본군은 대다수가 노량해전 직전 떠난 지 오래였고 사천왜성에서 개기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부산에 아직도 남아있는 몇몇 다이묘들을 긁어모아서 고니시를 구원하러 갔다고 알고 있거든요.
노량해전의 주력은 시마즈군이었는데 사실 그렇다면 의문이 드는 만일 임진전란사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왜 다른 다이묘들(구로다, 모리 등)은 시마즈군과 함께 고니시를 구원하러 가지 않고 고니시 구출 임무를 오직 시마즈군에게만 맡겨놓은 것일까요?
애초에 저 임진전란사의 후퇴기록은 사실인가요? 사실이라고 믿지 않기에는 날짜별로 후퇴한 장수들까지 다 적어놓아서 안 믿을 수도 없지만....
그리고 11월 19일 노량해전이 끝나고 고니시군이 도착했을 때를 11월 20일 정도로 잡아도 왜 다른 다이묘들은 무려 4일동안 부산에서 밍기적거리면서 후퇴 안하고 있었던 걸까요? 이순신이 운좋게 죽었지 만약 살았다면 당장 자기네들 때려잡으러 부산 코앞에 나타날 것이란 걸 알지 않았을까요?
번동아제님도 이순신이 만약 살아있었다면 왜군들이 그냥 후퇴하는 걸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 하셨는데 왜장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요?(뭐 애초에 후퇴 안했으면 부산에 집결한 왜군만 해도 7만이 넘을 건데 한판 해볼만하다고 여겼는지도?)
그 외에 당시 왜군이 부산에 몽땅 모여있었는지 아니면 고니시 오기를 기다리며 각자 거제도나 부산 근처에 있는 왜성에 아직 죽치고 앉아있었는지 그런 걸 알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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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혹시 말씀하신 것을 참조할 수 있는 근거사료같은 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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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