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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
Gresham's Law
Bad money drives out good.
가치 나쁜 돈은 가치 높은 돈을 몰아낸다.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그레샴(Thomas Gresham, 1519-1579)이 발견했다고 알려진 경제 이론. 일반적으로는 위 문장을 줄여 쓴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하다. 이 문구는 그레샴이 1558년 즉위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졌으며, 기록에 의하면 그가 한 말은 "좋은 돈과 나쁜 돈은 같이 돌 수 없다(good and bad coin cannot circulate together)."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이 이론은 약 300년 뒤에 이를 발굴한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헨리 더닝 매클라우드(Henry Dunning Macleod, 1821-1902)에 의해 '그레샴의 법칙'으로 명명되었다.
서로 대등한 액면가치를 갖는 재화 A와 B가 있다고 하자. A는 순수 금화이고 B는 합금으로 된 저질 주화라고 한다면, B의 소재 가치는 A보다 재질 가치가 훨씬 낮고, 당연히 B의 생산 원가도 A보다도 훨씬 싸다. 그러면 사람들은 남에게 지불할 때는 B를 이용하고 실질적인 가치가 높은 A는 자기가 보관하려고 할 것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장에서 양화인 A는 사라져 가고 악화인 B만 통용된다.
즉, 화폐로서의 가치는 똑같지만 재물로서의 가치가 다른 두 재화가 있다면 사람들은 재물로서의 가치가 더 높은 재화(양화)를 저축하고 재물로서의 가치는 낮지만 화폐로서의 가치, 즉 액면가는 같은 재화(악화)를 주로 사용하면서 시중에서 유통되는 악화(화폐로의 가치>재물로의 가치)의 양이 늘어나고 양화(재물로의 가치>화폐로의 가치)는 점차 시중에서 그 모습을 감춘다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금괴 1kg과 바위 1kg으로 똑같이 물물교환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금괴를 주고 과자를 사겠는가, 바위를 주고 과자를 사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을 보관하고 바위만 쓸 것이기에 시장거래는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질 것이고 금괴는 모습을 감출 것이다. 악화(바위)가 양화(금괴)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시중에서 돌아다니는 악화가 많아져 양화의 양이 적어지니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위의 예만 보면 단순히 질이 나쁜 화폐가 악화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예도 함께 참고해보자. 역사상 있던 일을 바탕으로 한 예이다.
두 종류의 화폐가 있다고 하자. 화폐 A는 금화, 화폐 B는 은화이며 무게는 둘다 1g이다. 그리고 조폐국은 화폐 A를 1만원권, 화폐 B를 1천원권으로 지정하여 발행하였다. 즉 A=10B가 공식적인 화폐간의 교환비이다. 그런데 시중에 은 품귀현상이 벌어지게 되었고 금은방에서는 은괴 10g을 1만 2천원에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화되면 사람들은 점점 은화를 돈으로 사용하지 않고, 녹여서 주괴로 만든 다음 팔아먹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화인 은화는 점점 시장에서 사라질(구축될)것이고, 악화인 금화만이 시장에서 거래를 목적으로 유통될 것이다.
이것은 주화의 가치에서 액면가와 그것을 구성하는 금속의 시장가격(실제가치)에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실제 가치가 액면가보다 높은 주화가 있고, 실제 가치가 액면가보다 낮은 주화가 동시에 유통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실제 가치가 높은 주화는 땅에 묻든지 장롱에 쌓아두든지 해서 계속 저축하거나 심하면 이걸 주조해 악화로 만드는 등, 실제 가치가 낮은 주화만 교환을 하는데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에는 실제 가치가 낮은 주화만 유통하게 되며, 가치가 낮은 주화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일은 과학적인 주조 및 위폐방지기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전근대에 굉장히 빈번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금화 끝을 미세하게 갈아내거나 성분을 달리 해서 주조하는 등 화폐 위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났으며, 따라서 근대 이전 은행과 금융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 중 하나는 화폐 및 금속 감별사였다. 또한, 화폐를 위조하는 일은 국가경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므로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반대로 금속으로써의 가치가 높은 화폐(금)가 악화가 되는 케이스도 역사상 존재했고 이것이 브래튼우즈 체제 전까지 유지된 금본위제가 발생한 원인중 하나였다.
이 법칙이 성립하려면 가치의 보존과 유통 기능을 모두 가진 두 종류의 재화 사이에 법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교환비가 있어야 한다. 보존 기능의 유무를 고려하면 당연히 같은 값일때 보존성이 높은 쪽이 비축되고 낮은 쪽이 유통된다. 그리고 강제된 교환비가 없다면 그냥 시장 원리에 따라 비싼 녀석은 비싼 값에, 싼 녀석은 싼 값에 책정되어 잘 돌아다닌다.
학부 수준의 경제학 개론에서 나오는 화폐의 정의와 기능, 통화량, 이중 화폐 체계, 화폐간 법적 교환비 이 네 가지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이해 할 수 있다. 단어의 정의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고, 이러한 정의의 기반이 되는게 상기 네가지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서 이 네가지를 모르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오용사례가 괜히 나온게 아니다.
정리하자면 그레샴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면 두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
1. 가치의 보존과 유통 기능을 모두 가진 두 종류 혹은 그 이상의 재화와
2. 두 재화간에 법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교환비가 있을 것.
특히 두번째 조건인 일정한 교환비의 존재가 만족되지 않으면, 그레샴의 법칙과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Thiers' Law(티어리의 법칙)은 더 좋은 화폐가 더 나쁜 화폐를 몰아낸다고 한다. 이 예로는 달러가 구 소련 붕괴 직후 기존 화폐를 대체한 건, 짐바브웨의 하이퍼인플레이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해서 나오는 예가 화폐의 질(예를 들면 동일한 화폐가 구겨져서 품질이 안좋다던가 발행년도가 옛날이라던가)에 따라 양화와 악화를 나누는 것이다. 신용화폐는 법적 교환비가 동일하고 내재가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양화와 악화를 구분할 수 없다.
이 법칙은 우리나라에서 유독 정반대의 뜻으로 인용되는 일이 잦으며, 심지어 경제학 이외의 분야에까지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전문적인 경제학 용어가 하필이면 일반 사람들이 쓰는 단어와 발음이 같아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구축'이라는 용어에 대한 것인데, '구축(驅逐)한다'라는 말은 영어의 'Drives out'으로 '내쫓다', '몰아내다'라는 뜻이다. 한자로 몰 구(驅), 쫓을 축(逐)인데 주로 경제학에서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구축(構築)'은 의미가 정 반대이다.[1] 즉, 한자어 혼동에서 비롯된 착각인 것이다. 또한 한자 학술용어라 일본어의 잔재라며 순화를 시도하는 세력도 있는데, 구축(驅逐)은 조선시대에도 잘만 사용하던 단어이다. 반대로 요새 흔하게 '쌓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구축(構築)이야말로 일본식 한자어다. 다만 현대에 와서 '구축(驅逐)하다'는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실질적으로 사어가 되었고, 구축함(驅逐艦) 정도에서나 간신히 용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인 것도 사실이다. 진격의 거인 때도 번역체 얘기가 나온 것이 그 때문.
그레샴의 법칙을 잘못 인용하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오해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축(驅逐 쫓아내다)을 구축(構築 만들다)으로 이해한다.
2. 악화(惡貨, 실물가치가 액면가보다 낮은 화폐)를 악화(惡化, 일의 형세가 안 좋게 흘러감)로 이해한다.
3. '양화'는, 언뜻 들었을 때 악화의 반대말 같으니까[2] 대충 '일의 형세가 좋게 흘러감'이라고 이해한다.
위 1번으로 오해하면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악화가 오히려 양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해석한다. 2번과 3번 오해까지 할 경우 '나쁜 일이 벌어진 덕에 오히려 좋은 일이 일어난다'라는 해석이 되어, 뜻도 정반대로 경제학 이외의 분야에까지 인용하게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악화(惡貨)라는 건 화폐경제의 기초를 배워야 이해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개념어이고 비유적 표현이 아닌데, 이것이 악화(惡化)와 발음이 동일하기 때문에 마치 '일이 뭔가 안 좋게 흘러가는 상황'이면 어디나 갖다 붙여도 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왔던 것이다.
이런 오해가 만연한 이유를 굳이 이해해 보자면, 현대 한국어에서 구축(驅逐)이 일반인에게 친숙한 단어가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기껏해야 구축함에서나 들어 볼 수 있는데, 그마저도 대부분 구축함의 구축이 이런 뜻이란 걸 모른다. 일본에서는 자주 쓰는 단어이다.
재물 貨를 그림 畫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좀 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쓰면 '나쁜 화폐가 좋은 화폐를 몰아낸다.' 정도로 바꿀 수 있다.
실제로 중·고등학교 숙제나 대학 과제 혹은 저학년 대상으로 하는 발표 및 토론 강의 등에서 이러한 실수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어리니깐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과제를 채점하는 교수 입장에서는 그냥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유식한 척 인용하는 것 마냥 보일 수도 있다.
'악화'라는 용어를 비유적 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라면, '악화'는 엄연히 경제학 용어이고 경제학 용어에서 비유적인 단어는 드물다.[3] 즉 확실히 정의된 단어로 설명되어 있다. 아래는 단어의 정의.
구축: 시장에서 몰아낸다(시장에서 양화의 거래를 줄여버린다)
* 아래 동영상은 본문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