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본 영화입니다.
이 공간을 혼자서 도배하는 듯해서 수위(?)를 조절하고 있는데, 영화지만 소설처럼, 소설과 같지만 영화의 형식을 빈, 이라고 표현했듯이 괜찮은 영화라서 리뷰를 여기에 옮겨 봅니다.
러시안 소설 (The Russian novel, 2012)
퇴고를 할 때마다 얼마나 문장이 엉성한지를 깨닫곤 한다. 또 언젠가 필사를 하면서 참으로 잘 쓴 글이 어떠한지를 실감한 적이 있다. 한 문장을 다듬으면서 절망하기도 하고,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고뇌를 거듭하면서 새삼스레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나 소설을 읽으면 최소한 어떤 작품이 좋은지를 가늠할 눈을 지니게 된 점이다. 물론 영화의 서사에 끌리듯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문체나 구성에서 비롯된 이유가 클 테지만.
한 때나마 문학을 꿈꿨기에 신연식의 각본과 연출로 탄생한 <러시안 소설>은 무척 흥미로운 소재의 작품으로 다가온다. 시를 쓰고 소설을 끄적거린 적이 있어선지 문학에 대한 헌사라고 느껴질 만큼 이 영화는 대사 하나하나, 선문답 같은 내레이션조차 예사롭지 않게 읽혀진다. 초반부 상황 묘사는 사진을 영사기에 비추듯 단속적인 영상에 등장인물의 내레이션과 함께 그 내용이 자막으로 등장한다. 영상과 내레이션을 통하지 않고 굳이 자막까지 곁들인 것은 소설을 읽듯 영화를 보라는 암묵적 지시만 같다. 곧, 영화지만 소설처럼, 소설과 같지만 영화의 형식을 빈 것이라는 듯.
스물 일곱 살 신효는 소설가를 꿈꾸고 있다. 습작을 한 후 이를 평가 받기를 원하지만 번번히 성환(경성환)에게 타박을 받는다.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등단한 경미(이경미)에게 무한한 부러움을 갖고, 성환이 지닌 해박한 문학이론에 스스로 결핍을 느끼기도 한다. 하물며 중학생인 유미(이유미)의 말 한 마디에 탄복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문학의 끈을 놓지 못한다. 밤새 타자기를 치면서, 스스로 허섭쓰레기 같은 글이라며 버리고 또 다시 쓴다. 마치 중독에라도 걸린 듯 소설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문학의 주변부를 서성거린다. 무엇이 신효를 문학에 매달리게 하는 걸까. 신효(강신효)가 쓴 글인 듯한 낚시꾼 얘기가 두세 차례 나온다. 놓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낚은 것을 계속해서 놔준다는 이상한 낚시꾼. 문학이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거나 밤을 새워 몰입해야 하는 집요한 대상일까. 등단을 해도 주류가 아니면 소외를 받기 일쑤인 한국의 문단에서 경미는 그나마 출간이라도 했지만 실상은 더 극단적이다. 등단을 했지만 상업성을 따지는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고 단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못하는 작가가 수두룩하다. 어렵사리 제작자를 찾거나 돈을 끌어모아 작품을 만들지만 극장에 개봉조차 못한 채 사장되는 독립영화도 무수히 많다. 등단을 꿈꾸든, 출간이나 개봉을 바라든, 그 모든 집착은 어리석은 낚시꾼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차라리 놓친 놈을 잡겠다는 게 아니라 강태공처럼 세월을 낚는다는 근사한 이유이기라도 했으면 덜 애처로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문득 신효와 동일시 한 채 주변부를 서성이는 낚시꾼 한 명(?)을 다시금 발견하고야 만다.
자막이 오르고 27 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난다. 크레딧을 보자 신효의 꿈이 너무도 허무하게 스러지는 줄 알았다. 정확히 살아온 만큼의 공백을 거쳐서 다시 맞이하게 된 삶. 이제 후반전에 접어 들었다. 신연식은 어떤 작전으로 후반전에서 관객의 허점을 파고들 생각일까.
27년 전 스물 일곱 살 때는 그토록 열등감을 갖게 한 채 호수를 떠나지 못하게 한 대상들이 그저 낚시꾼에 의해 방생이 되는 물고기만 같다. 자신만만하던 경미도 문단을 떠난 후 이민을 가버렸고, 당찬 로우틴 유미도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 있다. 신효가 선망하던 음악카페의 여인도 세월의 더께를 걷지 못한 채 같은 자리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타자기가 노트북으로 바뀌었지만, 상업적으로 치우친 문학과 예술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으로 변해버렸다. 중년의 신효는 다시 세월의 공백을 메우려 하지만 그 결과는 뻔하다. 결국 스스로 어리석은 낚시꾼임을 자인하게 된다.
신연식은 문학과 영화의 경계를 허물면서 이들을 예술 안에서 한데 아우른다. 중년의 신효에게서 27 년 전 신효가 품었던 열정과 순수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라는 현실을 쓰라리게 일깨운다. 스물 일곱 살 신효에게서 나를 보았듯, 쉰 넷이 된 신효도 결코 낯설지 않음을, 이 영화는 넌지시 가르쳐준다. R/T: 140
첫댓글 이 영화 보고 싶었는데 상영관을 못찾아 아쉽게 놓친 영화입니다. 어떻게든 찾아봐야겠어요!
그리고 한말씀 드리자면 어느 카페든 ...... 그 카페가 좀 되려면 누군가든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배라니요, 얼토당토 않은 말씀이고요......
그렇다면 저 같은 애송이 갓 면한 식구의 사진도배는 어쩌라구요.ㅜㅜ
전 이것 또한 이곳을 지켜나가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혹시 저도 사진도배인가요? ^^
카페는 어쨌든 여기를 잘 지키고 있다는 새글이 올라오고 또 보고있다는 덧글과 답글이 오가야 존속되는거 아닌가요?
감히 한 말씀 올려봅니다. ~^^~
어디든 소통이 중요하죠. 간간이 '새 글'이 올라오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