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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 때부터 시작된 전혜린의 번역 작품들은 정확하고 분명한 문장력과 유려한 문체의 흐름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전혜린 - 뿌리 없는 지식인의 좌절
1965년 1월 17일, 한국일보는 전혜린의 죽음을 이렇게 보도했다.
'신춘의 여성계에 적지 않은 화제와 파문을 일게 한 소식이 있다.
우리나라의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 독일문학가인 전혜린(31) 씨의 죽음과 그 앞뒤의 이야기'
지난 12일 간소하나 장중한 장례식이 시내 남학동 25번지 전혜린 씨 친정집에서 베풀어졌다. 얼마 전부터 부군 김철수 씨와의 불화설이 떠돌던 이 여류 문학가는 외딸 정화(7) 양을 데리고 친정집에 와 있었던 것이다.
부음이 전해지자 항간에 구구한 억측이 돌았다.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사고사다.
과도한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다.
자살일지 모른다
등등.
`커피 15잔을 마셔야'비로소 평상인과 같아질 만큼 심장이 약화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숨 거두기 전날 폭음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역시 가정 생활이라든지, 현실에 적응시킬 수 없었던 학문을 감당하지 못해 비관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친구의 한 사람은 이렇게 술회하며 고인의 지식을 아쉬워 한다.
서독 뮌헨 대학 출신으로 `안네 프랑크의 일기', `어떤 미소', `압록강은 흐른다' 등의 역서를 지닌 전혜린 씨는 점성술, 운명학을 다루어 곧잘 점도 치던 이색적인 여성. 딸 정화 양의 장래를 기록한 쪽지가 사후 그의 유품에서 나와 유족을 눈물겹게 하고 있다.
그의 사후 출간된 유고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문학소녀치고 한 번쯤은 `미치도록' 빠져들어 `자기 분신을 발견하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전혜린. 그리고 3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예민한 청소년들을 사로잡고 있는 전혜린. 도대체 무엇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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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그때 당신이 돌아온다해도 나는 이미 살아있지 않으리라.
당신의 여인이여, 무서워할 것은 없노라.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 지라도 나의 혼은 당신과 함께 있노라.
다시 사랑하면서 촛불은 거세게 희망과도 같이 타오르고 있으리라.
당신을 보기위해 나의 눈은 멍하니 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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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이 죽기 이틀 전, 서울 명동의 술집 <은성>에서 스스로 읽고 불태워버린 이 시는 전혜린이 남편과의 별거로 인해 스스로의 사랑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데에 대한 극심한 절망이 담겨져 있는 시라고 전해진다.
또한 아직까지도 전혜린의 죽음이 자살이냐, 약물 과다복용이냐의 논란에 쌓여 있지만 이 시를 읽어보면 전혜린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에 더 가깝게 여겨진다. 이 시는 당시 전혜린 자신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지만, 당시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전혜린의 절친한 술벗이기도 했던 여 기자 조영숙씨가 베껴놓아 세상에 전해지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전혜린의 사인은 약물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밝혀졌다. 31세의 나이에 요절한 수필가이자 번역문학가였던 전혜린. 그는 대체 누구였기에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꺼질만 하면 다시 살아나 우리들의 시린 가슴을 적시는지 ......
"슬프도록 아름답고 안타까운 그녀의 평전을 쓰면서 몇 번이고 속으로 울어야 했다" (시인 정공채 '후기' 한토막)
나의 언니 전혜린
동생 전채린의 글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과 결단성을 갖고 언니는 생을 긍정했다.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고집에 가까울 만큼 열심히 살았다.
매 순간마다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강렬한것, 또는 그 어떤 짙은 것을 끄집어 내려했다.
힘으로, 위험으로, 혹은 욕망이라는 방법으로 생의 아주 작은 한조각도 자기에게서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쟁취된 매 순간을 지속 시켜려고 애썼다.
또한 언니의 생은 자기의 모든것을 (지식과 정열과 그리고 사랑을)모든이에게 쏟아부은
일생이며, 꿈과 기쁨과 괴로움이 터질듯이 팽팽하게 찬 일생이었다. 자기의 생을 완전히
자유롭게 살려고 노력했다. 언니의 생은 자유로우려는 정신과 현실 세계와 대결 해 나가는
투쟁 과정 이었다.
한마디로 언니가 살아간 길은 창조적인 땀에 젖은 걸음걸이 였다. 이것이 언니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자유에의 승리인지도 모른다. 언니는 완전히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
언니의 세계는 비전(vision)을 볼줄 아는 꿰뚫는 강한 직관력으로 신비한 자연현상 이나
생명 현상에 통해 있는것 갔았다.
이러한 사고는 늘 우리들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저편의 아득한 경지를 감수하고
있는것 갔았다.그리하여 언니의 충만한 생의 알맹이로는 더 이상 이 세상안에 설수없어
이 세상 밖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많았던것 같다.
이렇게 형성된 세계 였기 때문에 아무도 언니를 이해 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나도 그 몰 이해자 중의 하나이다. 헉슬러가 로렌스의 인물과 사상을 말했던
글의 한 구절 처럼 나도 말할수 있으리라.
"마지막 2년 동안의 언니는 이를테면 한개의 불꽃이었다. 기적과 같은 불꽃이었다.
왜냐 하면 이 불꽃은 기름이 완전히 없어진 등잔에서 천연히 타고 있으니까" 라고
언니는 30년 전 1월 1일 일요일에 낳았고 1965년 1월 10일 같은 일요일 아침에
새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다. 지금 언니는 경기도 안양 조남리에 있는
선산에 잠들어 있다.
불꽃 처럼 살고 갔으나 그가 사랑하던 우리들 속에 뿌려놓은 언어와 고독과
사랑의 씨는 우리속에 자라나서 숲을 이루고 그 숲은 우리와 함께 커 갈 것이다.
-전채린-
* 위글은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의 저서 머릿글 에 올린 동생 전채린 님의 글이다.
첫댓글 '어느 조용한 황혼의 길가 주막에 쓰러져 있는 집시가 있거든 나라고 알아 줘,'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불꽃처럼 살다가 홀연히 가버린 ~~
아, 전혜린!
스물 몇 쯤에 전혜린에 빠져, 그녀의 책과
그녀가 번역한 책들을 마구 읽어대곤 했지요
절대로 평범해 지지 말자, 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그녀가 새삼 그립네요
이십대 초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무슨 말 인지도 잘 모르면서 무조건 좋아했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지금쯤 다시 읽어본다면 그녀의 고독을, 절망을, 죽음을 조금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남과 다르다는 것 불타는 영혼의 소유자는 어쩌면 더 강력한충격을 소화 해야만 하는 고통이 따르는 것인가 봅니다
아까운 인재이기에 더 아파지는,,,,,,,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 그 간극을 좀처럼 메울수 없는 조건, 또는 상황. 여기에서 지식인은 방황하며 고뇌합니다.
전혜린이란 이름 자체만으로도 왠지 인생의 가장자리에서 겉도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저와 비슷하다는 어떤 동질감을 깊게 느꼈던 시절이 기억이나네요.
자세한 부연 설명으로 그녀를 더 알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