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에 대해 이야기하다.
새벽 일어나 시계를 보니 4시 10분이었다. 잠깐만 누웠다가 일어난다는 것이 일이 잘못되었다. 깨어보니 6시 8분, 차량이 출발할 시간에 전화가 7개나 찍혀있었다. 전화를 진동으로 해 놓고 잠들어 듣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전화를 하니 차는 이미 출발하고 있단다. 깨끗이 포기했다. 솔직히 이런 일은 처음이다.
오전내내 뒹굴다가 배낭을 챙겨 속죄의 길을 나섰다. 소래습지생태공원을 거쳐 서창·운연동의 운연천을 따라 대공원 후문쪽으로 가서 소래산을 올랐다가 다시 대공원을 가로질러 만수3지구와 장수천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대략 18-9km 정도 될 것이다. 이 길을 무던히도 다녔다. 십수년전부터 생태공원이 지금같지 않을 때부터 갈대 숲을 헤치며 길도 없는 곳도 꽤나 쏘다녔었다.
오랜만에 햇볕이 비췄다. 근 20여일만인 듯하다. 비 온 뒤끝이라 푹푹쪘다. 그래도 얼마나 반가운 햇살인가?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장마에는 비가 지겹고 8월의 땡볕이 계속되면 비가 그립다. 바람이 계속되면 바람이 지겹다. 그저 적당해야 한다. ‘적당함’만큼 애매한 단어도 없다. 기준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적당하지 못해 낭패보기 일쑤다. 오늘 나는 잠이 적당하지 못해 망신을 샀다. ‘과유불급’이라는 단어도 있다. 넘치면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라는 뜻인데 이 또한 적당하지 못하면 화가 미친다라는 뜻이렸다. 어제밤 술이 과해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소래습지생태공원에 오랜만에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산책을 하는 사람, 갯벌에서 게를 잡는 사람, 아장아장 걷는 애기, 손잡고 나온 중년부부 등 참으로 다양하고 정말 한가하고 여유로운 오후다.
소래습지생태공원은 원래 수도권생태공원이었다. 뭐든지 과대포장하기 좋아하는 행정공무원의 무지의 작명이었을 것이다. 소래와 시흥 염전은 원래는 하나였으나 현재는 신천천을 경계로 인천과 시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인천지역이 대략 150만평, 시흥지역이 500만평정도 되었다. 주안, 소래, 남동지역은 일제시대부터 염전으로 개발되어 생산된 소금을 소래포구 협궤 열차나 배로 인천항 옮겨 일본으로 보내졌다. 1970년대는 전국 최대의 천일염 생산지였다.
그후 천일염 생산이 쇠퇴하면서 거의 폐허로 남았다. 천일염을 생산하던 염전터는 갈대로 가득찼고, 소금을 보관하던 소금창고 몇 개만이 방치된 채 덩그러이 서 있었다.
그후 90년대 후반 인천지역의 염전터와 갯골 등 공유수면 40만평을 남동구에서 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였으나 개발, 관리, 유지비용 부담때문에 인천시에 관리권을 넘겼다. 인천시는 이곳을 굴삭기 등을 동원하여 완전히 파헤쳐 현재의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우거졌던 갈대밭이 초토화 되고 나문재, 칠면초, 퉁퉁마디 등 염생식물들은 절난났다. 네덜란드식 풍차 몇 개가 덩그러이 서있고 탐방로가 개설되었고 조망대도 설치하였다. 자연의 치유력은 참으로 위대하다. 처음에는 폐허같던 공원이 다시 갈대가 무성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많던 염생식물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24만여평만이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 소금만들던 방법을 재현해 염전밭과 수차 등을 설치해 놓았다.
원래 있던 둑과 새로 개설한 길 옆에 해당화와 한쪽에는 해송을 심었는데 해당화는 거의 지고 해송은 벌써 어른 장딴지 만큼 굵어졌다. 해당화 옆에는 억새를 심었는데 보기 좋게 자랐다. 가을엔 볼만하겠다. ‘아아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로 시작하는 옛가요가 있는데 으악새가 억새이다. 억새는 억세다에서 온 말이다. 잘 못 만지면 손이 썩썩 비어진다. 그렇게 줄기가 억세고 날카롭다. 그런데 이 억새는 소가 가장 좋아하는 풀이다. 산비탈에 억세가 많았는데 지게를 지고 꼴로 억새를 베다보면 손을 베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동쪽 길에는 이팝나무를 심었다. 이팝나무는 이밥처럼 하얀 꽃을 핀다고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조팝나무는 꽃 안쪽에 좁쌀같은 것이 있어 지어졌다. 이 두 나무는 꽃피는 시기는 다르지만 꽃은 향기도 깊고 순백의 하얀 꽃이다.
동쪽 끝에 신천리에서 나오는 신천천이 흐르는데 시흥쪽으로 가는 시멘트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갯골의 밀물과 썰물과 풍화로 다릿발이 쓰러지고 사람들이 다니기에도 위태로웠다. 그 다리를 몇 년전에 철거하고 나무나리를 근사하게 놓았다. 이 다리를 건너 시흥쪽 갯벌쪽으로 갈 수 있다.
공원 옆쪽 갯벌에는 갈대와 부들로 무성하다. 새소리는 요란하다. 갈대속에서 지저귀는 새가 어떤 새인지 알 길이 없다. 공원 북쪽 끝에 방산-하중간 42번 우회도로가 우뚝 솟아 염전터를 반분해 놓았다. 이 도로가 영동고속도로를 고가로 넘어 도림동에 와서 붙는다. 곧 개통할려고 하는 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이 도로 안쪽은 주택토지공사에서 개발하고 있는 서창2지구이다. 63만평에 달하는 서창지구는 처음 지정될 때와 달리 이 정부에서 소위 보금자리 주택지구로 지정되었다. 두 단지가 먼저 공사가 시작되어 벌써 전체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오를 때 이곳을 주택지구지정을 추진했었다. 염전터에 갈대밭이 무성했던 곳이 주택단지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데 잘한 일이였는지 모르겠다.
공원이 끝나고 비로 인해 질척해진 길을 지나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타지 못하고 끌며 이 길을 지나야 한다. 걷는 사람도 풀에 쓸리고 진창에 신발을 적혀야한다.
이시간쯤 대관령으로 간 분들도 영을 넘어 비온뒤 질척한 길을 가고나 있지 않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대관령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강릉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의 진산이다. 여진지역인 장백산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동해 가를 차지한 곳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서 옆으로 뻗은 길이 99굽이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치(府治)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개의 군이 단대령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고 하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하다.”
대관령길 대관령(大關嶺)이라 처음 부른 것은 16세기경인데, 12세기 고려 시인 김극기는 '대관(大關)'이라 불렀다. 이처럼 큰 고개를 뜻하는 '대(大)자를 붙이고 험한 요새 관문이라는 뜻을 담았다. '크다'의미를 사용한 것은 고개의 상징성이며, 관(關)이라 함은 중요한 경계적 요새(要塞)로서 영의 동서를 가르는 출입구를 말한 것이다.
일찍이 고려초기 강릉장군 김순식이 태조 왕건을 돕기 위해 출병을 하였다. 그는 대관령에 이르러 제단을 만들고 승전의 기도를 올렸다고 고려사에 기록할 정도로 대관령은 다른 지역으로 들어가는 초입이자 신성한 영역으로 전한다.
풍수가들은 대관령을 '자물쇠 형국'이라 하는데 이것은 관문으로서 대관령을 넘나드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강릉지역에는 "평생 대관령을 한번 넘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전한다.
대관령의 높이는 832m로 백두대간 중에 가장 높다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영동으로 넘어가는 중요도로로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게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첫댓글 담부터는 꼭 모닝콜 설정을 하세요... 요일과 시간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요. 제가 모닝콜만 믿고 있다가 여러분께 폐를 끼친 적이 있거든요.
난 아침에 도저이 갈수 없어 아예 여행을.. 불한당 멤버쉽을 포기했습니다.
장마중에 눈부신 햇살을 기다리고 상상하고 생각했는데... 오랫만에 햇빛을 받으니 그리운 마음은 저리 가고 그늘만 찾게 되네요.... 대관령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알고 느끼고 갑니다. 감사해요^^
그래도 동네 한바퀴 정말 넓게 걸으셨네요.......
그 길 참 좋은데
다음달에 그길 걸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