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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골에서는 오신 분은 안계십니다.
다만 자주 드나들고 정이가는 왕산골에
저에게 이런 일이 최근 발생했다는 인사로 올립니다.
***
흑기사
5월이 지났습니다.
어머님이 5월분 달력을 찢어 내고 계십니다.
5월은 저에게는 참 충격적인 한 달이었습니다.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6월분 달력
가슴 끝자락부터 울리게 하는 메모가 보입니다.
어머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모르는 척 하며 살폈습니다.
다행히 무심한 것 같습니다.
6월 3일자 메모 란에 적힌 “할멈生日”이라는 문구, 아버님의 필적입니다.
면면이 돌아보면 아버님은 다른 모든 아버님들과 마찬가지로
혈기방장했던 젊은 날 이후로
어머님께는 완벽에 가까운 흑기사였습니다.
덕분에 어머님은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가 되어 버리셨지만...
천하의 신선장
제 아버님의 사진입니다. 이제는 영정이라고 해야 하네요?
장례식장에서 사용했던 영정은 작년에 찍은 것이고
위의 사진은 아버님 연세 60대 후반에 제가 찍어 드린 영정입니다.
아버님은 넷째인 저를 포함해 5남1녀를 두시고 친,외손주 4남7녀를 두었습니다.
사망신고서에 아버님의 직업을 농업이라고 적었습니다만
젊은 날에는 파도와 씨름하시던 선원이었습니다.
인터넷 모 카페에 작년에 올렸던 글이 생각나 다시 퍼왔습니다.
(그냥 안 읽고 넘어가셔도 무리가 없습니다
인사글을 쓰는데 원본에 인터넷 상말이 등장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로 17:1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실제로 저같은 경우에도 5:1로 쌈박질 해 본 적도 있고
60:1로 쌈박질 해 본 적....은 아니고 그냥 혼자서 휘저었고....
근데 제가 그렇게 쌈박질 해 댄 것이 어릴 적 해병대원일 때 였습니다.
그렇게 쌈박질 해 댔어도 헌병대는 딱 한 번 붙들려 갔으니...
그런데 그 쌈박질이 유전입니다.
제 아버님이 당시 목포항에서 내노라하는 쌈꾼이었습니다.
아니...쌈꾼이 아니라 한량이었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데리고 있는 선원들 술 사주기 좋아하고
여자 좋아........했는 지는 모르겠고
당시 놀다 보면 술이 한 잔 들어가게 되고
아버님이 술 한 잔 들어간 상태에서
아버님의 기분을 건디리는 인간이 있으면
그 인간은 물론 그 인간 주변에 있는 자들은 모조리 전멸이었습니다.
최하가 20:1 이었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목포항에 괜시리 왔다갔다하는 인간들 무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목포항 인근의 다방, 술집에서
"신 선장 떴다~"라고 하면
모두들 술마시다가
레지 희롱하다가
슬슬슬 핫바지에 방귀 새듯이 피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뭍에 상륙 한 후에 지갑 두둑히 들어 있는 돈을
부하 선원들과 부두의 술집, 다방에 모두 퍼서 내지르는 동안
집에서는 사과 궤짝으로 만든 선반도 없어서
어머님 젊을 적 소원이 "사과 궤짝이라도 좋으니 선반이 하나 있었으면~"
이라는 것을 제가 듣고 봐서 압니다.
그러던 아버님이 이제 팔순 중반입니다.
천하장사 신 선장도 이제는 허리가 구부러져 가지고
시멘트 블록 한 장을 못듭니다.
('천하의 신 선장'이라는 이야기는 마흔 다섯 묵은 울 막내 지지배의 주제가입니다. -_-;;)
어릴 적 전국유람 시켜드리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어서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두 분께 이야기 했더니
힘이 없어서 못간다고 하시드니
엊그제 동네 경로당에서 단체로 가는 대둔산 유람을 다녀왔답니다.
즐거운 기억은 새롭게 떠올려 주는 이가 곁에 있으면 즐거움이 배가됩니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말고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아버님~ 대둔산 경개 좋습디까?"
그랬더니 아~~주 좋았답니다. 차를 대여섯시간 타는 것 빼고는
모두가 좋았답니다.
그러시더니 한마디를 내 뱉는데.....
"근디 말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싶었는디 한 번 타는디 7,000원이라드라?
비싸서 안타부렀다~"
아....조또....갑자기 머리 속이 비어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긍게 제가 전국일주 가자는 것도 제가 부담할 비용이 아까워서 안 간 것이고
거기에서 더해 젊은 날 인연없는 부두의 인생들에게
기마이내며(일본 말일 겁니다. 기분이라는..) 날리던 돈을
꼼꼼히 챙겼으면 지금 얼마나 좋았을까나 싶은 생각에...
갑자기 지나간 시간과 아버님이 한없이 야속해 졌습니다.
(다음카페 “맥주만들기”에서 퍼옴)
경과, 모르는 것이 약이었던..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이자 대한해병대의 창설일인 날,
저는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 한 통으로
직장에 외출계를 써 놓고 함평 성심병원으로 제한속도 무시하고 달려갔습니다.
성심병원의 진단에 따르면 아버님은 췌장 및 담낭에 결석이 있어서
시급하게 광주 XX대 병원으로 후송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엠블런스를 뒤따르며 “아...금전초!!”를 주문처럼 외우며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이들과 저의 건강을 위해 약초공부를 간간히 하고 있었는데
결석제거에는 금전초, 참가시나무, 산딸기 뿌리, 명감나무 뿌리가 좋다고 들었기 때문이지요.
아니 이 때 그냥 아버님을 모시고 집으로 와서
금전초로 처방하는 것이 나을 뻔 했다는 생각입니다.
팔순 넘어선 분들에게는 아무리 간단한 치료라도 위험하다는 것을 늦게야 알았습니다.
췌장의 결석을 파쇄하고 담낭의 결석은 치료가 어렵다고 해서 그대로 둔 채
5월 13일 퇴원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퇴원 후에도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라는 통증을 겪으셨습니다.
주변에 물어보니 결석치료하면 얘를 낳은 고통보다 더한 통증이 있다고 하고
인근 병원에 들러 검진을 해도 별 이상이 없다 하기에
수술 후의 통과의례로 알았었지요.
그러다 증세가 호전되어 외출하셔서 동네 노인 분들과 삼봉도 하시고 해서
이제는 좋아지나 싶었습니다만
5월 25일 너무 아프다고 하셔서 광주 XX대 병원으로 재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병명은 복막염,
5월 26일 18시 48분에 결국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반중조홍가
5월 26일 새벽 5시에 어머님을 광주 XX대병원에 모셔다 드리러 올라가고
다시 오전에 재수술여부를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상의하자고 해서 올라갔습니다.
아버님 상태는 배에 부패로 인해서 염증이 심하게 진행 중이며
염증크기는 10cm정도로 가스가 발생하고 있어서
수술하지 않으면 오늘, 내일 중으로 결정적인 상황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듯 위중한 상태인 줄은 꿈에도 몰랐었습니다.
제 눈앞에서 움직이시고 삶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시는 분이
오늘, 내일이라니요....
5남1녀 중에서 재수술에 기대해 보자고 네 형제가 의사표시했고
막둥이(우리 집에서 남자 끝 아우는 막둥이, 여자 끝 아우는 막내라고 표현합니다)와
막내만이 재수술을 반대했습니다.
가시는 분을 편하게 가시게 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더욱이나 팔순을 넘긴 분에게 칼을 들이 대는 것은
아무리 작은 수술이라도 대단히 위험하여 고통만을 가중시킬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숨을 쉬시며 고통을 호소하는 아버님을
재수술 없이 방치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막둥이와 막내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됩니다.
재수술을 결정하고 목포로 내려왔다가
다시 아버님의 임종이 가깝다는 말을 듣고 광주로 향했습니다.
아버님 곁에는 심전도계와 심장충격기가 놓여있었습니다.
우리 가족 중 지혜제일인 막내가 머리보다 가슴만 앞선 오빠들을 제쳐두고
이미 의사들에게 아버님이 운명하시면 심장충격기 사용을 금하여 달라고 하였답니다.
어머님과 막내는
차츰 식어가는 아버님의 몸을 주무르며 피가 일초라도 더 돌도록 하였습니다만
아버님의 손톱, 발톱부터 파랗게 변색되어 가고
고통으로 좌우로 돌아눕기를 반복하던 아버님이 어느 순간
반듯하게 누우시는데.....
심전도계의 파형이 일자를 긋습니다.
아버님의 표정이 고통에서 평온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오후 6시 48분,
머리가 하얗게 비면서 가슴이 막막한 가운데 박인로의 시조 한 구절만이 뱅뱅 돕니다.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그를 섧워하노라”
이제는 맛난 것, 예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들고 가도 흐믓하게 받아 줄
아버님이 세상에는 없는 겁니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참으로 절실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습니다.
반중조홍가가 헤아릴 수 없이 반복되어 머리를 맴도는 것이
그 깨달음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요.
어머님의 들썩이는 작은 어깨가 안쓰러워 가만히 안아 드렸더니
참았던 곡과 눈물을 다 쏟아 내십니다.
우세요. 어머님...참으면 한이 되고 병이 됩니다.
의사는 일상사처럼 무표정하게 “(운명시각을)50분으로 할께요~”하면서
아버님의 몸에 붙은 심전도계 장치를 제거하였습니다.
장례식장으로
정말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무엇부터 해야 할 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목포에서 올라 올 때 사무실 출근복장인 그대로였습니다.
사위인 김 서방의 제의로
주차장이 넓고 광주 시내에 위치한 나라장례식장으로 모시기로 하고
장례식장에 도착한 후
장례식장 사무실에서 지인 10여분과 직장 경비상황실에 알렸습니다.
장례식장이 이름난 곳이 아니라서 내심 불안하고 불만이었는데
실제 보니 차량주차 2,000대 이상 가능하고 접객 룸도 넓거니와
상주들을 위한 별도 침실과 샤워실이 준비되는 등
전문 장례식장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고인을 위한 시설이외에 상주들을 위한 시설도 참 잘되어 있었습니다.
상주들이 이용하도록 준비된 휴게실입니다.
시설이 이렇듯 좋았음에도 막내는 32인치의 전형적인 중년 아줌마 허리둘레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난 후 27인치로 줄어 들어 버렸습니다.
큰 일을 당했을 때에 알릴 사람을 미리 정해 놓는 것도 지혜인 듯 싶습니다.
저는 상대의 이동 거리와 경제적 형편 등으로
제 부고가 부담이 될 듯한 분을 피하는 것을 기준으로 했는데
옳은 결정이었는 지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이 또한 인사인데 전할 분께 전하지 않아서 결례를 범한 듯 찝찝합니다.
작은 형이 상조회사에 가입한 사실이 있어
상조회사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상조회사에서 파견나온 두 사람이 장례절차의 하나에서 열까지 세세히 챙겨주는데
장례의 절차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습니다.
다만 상조회사에서 파견나온 조리도우미 3분이 1회용 용기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장례식장에서 그런 흠을 드러내고 표현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편히 쉬세요.
문득 문득 아버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울컥하며 눈물과 곡이 나왔지만
쓰촨성과 월남전, 6.25와 쓰나미, 10년을 넘게 식물인간으로 사시는 주변 분들을
생각하며 우리 가족들은
너무 침통하고 애통한 분위기로 조문객들을 부담스럽게 하지 말고
전문놀이패를 불러 망자의 길을 축하해주는
전라도 전통 장사 분위기로 가자고 했습니다.
어머님이 한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 못써~ 초상집에서 웃고 댕기믄 어디가서 대접 못받어~”
아무래도 어머님은 아버님의 영전에서 웃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한 가 봅니다.
겨우 장례식장에 제단을 차린 후에 작아진 어머님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애통하다 한들 어머님만 하겠습니까?
일제시대 때 정신대 징집을 피해 아버님과 결혼하셨고
이제는 아버님을 잃고 텔레비전과 대화를 하시는 어머님,
볼 때마다 짠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조문객을 받는 동안에 어머님이 방명록에 쓰신 메모입니다.
김양字섭字는 어머님의 이름입니다.
자식들과 손자들이 많이 있는 동안에도 이 메모를 쓰시는 동안에
어머님이 느꼈을 고독과 절망이 느껴집니다.
염습은 뒤늦게 하게 되었습니다.
편안하게 잠든 얼굴의 아버님 표정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의 고통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억해 보니 우리 가족이 가장 섧게 울었던 때가 염습 때였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의 머리를 쥐어박더군요.
혼잣말이라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 영감탱아 누가 먼저 가라고 했어? 나도 데꼬가~” 이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아버님 사랑해요. 이젠 편히 쉬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아버님의 이마에 입을 맞췄습니다.
(조금 도식적이지요? 하지만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입술로 전해 오는 차가움...
이별보다 더 깊은 망각의 체온이라고 느꼈습니다.
사실은 시신안치냉장고의 온도임에도
이제는 아버님을 잊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 느껴진 것 같았습니다.
염습도 상조회사에서 파견나온 전문장례지도사가 행하였습니다.
이들은 파견나온 시점부터 발인 때까지 해박한 장례지식으로
상주인 저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노제를 올릴 때 상차림까지 일일이 성의를 다해 주었습니다.
아버님은 참으로 꼼꼼하신 분이었습니다.
70대에 미리 당신의 유택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지만 무궁화표지의 석판을 떼어내고 관을 밀어 넣으면 된다고
생전에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막상 닥쳐서 석판을 떼어보니 너무 좁더군요.
그래서 가묘의 윗부분부터 다시 파헤쳐야 했습니다.
오른쪽은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모실 유택입니다. 물론 가묘이지요.
예감과 징후
사실 아버님의 운명은 의료사고로 믿는 가족이 많고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복막염에 따른 패혈증쇼크로 돌아가시지 않아도
다른 병으로라도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것이
미신과 예감을 믿는 저의 생각입니다.
작년 하순부터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미신을 믿는 입장이라 오래 묵혀야 할 술을 담으면
그 술이 익을 때까지라도 살아계실 것이라는 믿음에
작년 11월경 닭 암수 한 쌍과 마늘 한 말을 재료로 마늘 천일주를 담았습니다.
왼편은 마늘천일주 재료를 담은 항아리이고
오른편은 “2008년 11월 16일 당겄다”라고 아버님이 쓰신 표지 글입니다.
2011년 11월경에 개봉할 마늘천일주는 이제 아버님 영전에 바쳐야 합니다.
갑자기 아버님이 막내와 비행기로 제주도를 여행했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전혀 뜻밖의 말씀에 사실 가슴이 섬뜩했었습니다.
사위와 딸과 함께 5월경에 제주를 가시기로 했는데..영영 가셨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이발을 하시러 갔었구요.
첫 퇴원 때에는 어머님과 집을 들어서려는 데 대문에 달려있던 문패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어? 문패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네?”라고 말씀하시자
뒤에 서계시던 아버님이 “내가 아무래도 죽을 모양이네..”라고 하시더랍니다.
아버님은 입이 무거워서 할아버님 유산분배의 부당함(집안 일입니다)에
자식들이 바로 잡으려고 할 때도 아들들에게 엄중하게 재산싸움에 나서지 말라고 할 정도였는데
최근에 생전 처음으로 집안 사람 중 어느 분의 서운함에 대해 한 말씀 하시더랍니다.
어머님은 이 양반이 평소같지 않게 왜 이러시나? 했다고 하더군요.
위로와 감사
아버님관련 글을 올렸던 모 카페의 답글이 생각납니다.
에델바이스 미운 아부지래두 옆에 계셨음 좋겠네여 (다음카페 “전통주 만들기”에서 퍼옴)
그러나 저만 이런 애사를 당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맞이했고 맞이할 아픔이지만
멀리 진해에서 서산에서 서울에서 안성에서 구리에서 달려와 주시고
전화로 위로를 해주신 분들 덕에
장사를 무사히 치르고 큰 애통함을 무난히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장례비는 대략 1,500만원 정도가 들었지만
도와주신 후의만으로도 무난히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보통 2,000만원이 장례비용 평균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집의 지혜제일 막내에게 부의금문제는 처리하라고 일임해서
들어온 부의금은 일체 막내가 관리하고
경비지출과 어머님께 상당액의 돈을 드린 후에
남는 돈은 각자 명의로 접수된 금액에 비례해서 나누었습니다.
부의금 봉투는 형제들 각자가 찾아서 후일 은혜를 갚는데 기록을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막내로부터 받은 돈이 300만원으로
저에게 보내주신 따뜻한 마음에 어긋나지 않도록
그중 일부는 복지단체에 기부를 하고
나머지는 남으신 어머님의 즐겁고 건강한 삶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화환도 많이 보내주셔서 발인날 꽃집에서 화환을 실어가려고
트럭 8대가 나라장례식장 앞에서 줄지어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꽃보다는 구조물이 재활용되는데 장례식장으로부터 개당 6,000원에 구입해 간다고 합니다.)
한 가운데에 세워진 것이 우리나라 장관급 되시는 분께서 보내주신 화환인데
(오렌지 꽃이 위 아래로 꽂힌 화환)
이때가 화환 30개가 채 못되게 들어온 시점이라서
보기 좋은 곳에 세워 두었지만 계속 화환이 들어오고
조문객 접대로 정신이 없는 사이에 밀려서
장관급 격에 맞지 않게 화환관리가 잠깐 안된 적이 있었습니다.
장관급 되시는 분도 개인회사 대표되시는 분도 한 분 한 분 조문의 성의를
크고 무겁게 여기어 두고 두고 잊지 않고 끝내는 소홀함이 없이 보답하겠습니다.
일일이 찾아가 뵙고 따뜻한 배려에 큰 감사를 표하여야 하오나
경황 중에 글월로 인사를 대신하오니 애경사 시 잊지 말고 꼭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고마운 마음을 전달할 말이 이 말밖에 없음을 안타까이 생각합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2009년 6월 3일
고자(孤子) 신 재 현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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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일기형식으로 쓴 감사 인사 이네요~~ 이글을 쓰면서도 옛일을 회상하면 마음이 많이 아팠을것 같 아요~~ 살아 생전에 가묘도 해 놓으시고,,,천일 마늘주도 있고 문패가 떨어지면 돌아가시는것을 미리 아셨나봐요...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가슴아픕니다~~ㅠㅠㅠ
편히 쉬실 것으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샤인님의 애절하고도 아픈마음 알것같애요. 살아생전 더잘할걸~~~부질없는 후회는 살아가면서 더많이 하는것 같네요.
잘한다고는 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까...아쉬운 부분이 참 많아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아쉬움만 남기는 것이 사람인 것 같습니다..잘하나 못하나..
맞는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옜날엔 거의 부모님이 그러셨지요 저두 이제 60이 더가까워지네요 지나간세월이 참으루 뭐라 말할수가 없슴니다 편히 잠드소서~~
자식들에게 뭐든지 해달라고 하십시오. 그래야 자식들이 나중에 덜 후회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통 속에 잠드셨지만 평온한 얼굴로 가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빕니다 나무아미타불 극락세게 가셔서 편히 쉬세요
감사합니다.
샤인님께 이런 아품이 있었군요.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힘내세요샤인님
힘쓰믄.....똥나오는디요.....-_-;;;
우울한 소식에 마음이 아프군요.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누구나 당하고 당할 일이지요. 감사합니다.
그런일이 있으셨군요....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남은 가족들이 좋은 쪽으로 많이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하고 위로 받는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서 금생에 못누린 즐거움을 다 누리셨으면 해요